십여 년 전, '땅콩 회항 사건'으로 그간에 그냥저냥 자행되었던 갑질이 공론화되었다.
사람 관계에서 무엇인가의 기득권,
권력, 금력을 가진 자가 甲.
갑질이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甲이 상대방에게 오만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며 제멋대로 구는 짓.
갑질이 지나쳐 '울트라 갑질'이란 용어도 나온 세상.
직장의 상관, 학교의 교수, 서비스 계약관계 심지어 학교 선배, 가족의 연장자도 갑의 위치.
甲질을 하는 선배를 만난 불행한 乙은 죽음까지 선택하기도 한다.
아파트 현관 입구에 경비원실이 있다.
경비원이 창문을 내다보며 출입하는 사람들을 체크한다.
예전, 한 나이 드신 경비원은 그 안에서 무언가 쓰시거나 그리시고 계셨다.
무얼 부탁하려면 괜히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
그냥 계실 때에도 너무 근엄하게 계셔서 나의 출입을 감시하시는 느낌.
IMF와 외환위기 후 동네에 많은 식당들이 생기고 없어졌다.
어느 한 식당.
신문을 보고 계시던 남자 주인. 우리가 주문한 음식을 차려주시곤 데스크에서 다시 신문을 집어 들으셨다.
반찬을 더 부탁드리려다가 괜히 주인장을 방해하는 것 같아 그냥 있었다.
그 식당에 다시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갑질을 당하는 약자인 을을 동정한다.
그러나 '을질'이라는 말도 있어 당하는 갑을 사람들을 동정하기도 한다.
진상 부리는 甲질도 문제지만 손님 권리에 무신경한 乙질도 좀 그렇다.
결국은 자업자득으로 그 가게가 문을 닫든지 퇴출당하게 된다.
아파트의 경비원들은 가끔씩 바뀐다.
보통은 그냥 명절 때 가벼운 선물드리는 관계로 끝난다.
그런데 어느 경비원.
내가 무거운 물건을 낑낑대며 차에서 나르고 있으면 어느 틈에 쏜살같이 나타나셔서 도와주신다.
분리수거날 쓰레기를 한 아름 들고 가는 걸 보시면 냉큼 빼앗으셔서 대신 분리수거해 주신다.
지나칠 때마다 이런저런 말도 건네시니 대답하다 보니 얼떨결에 '친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어쩌다 그분은 스스로 '동네 반장'이 되신 듯.
어느 날, 따님 결혼식 청첩장을 건네셨다.
좀 생경하긴 하지만 결혼식장에 갔더니 여기저기 동네분들이 보였다.
그 결혼식장에 나타난 우리들을 또 얼마나 반가워하시던지.
얼떨결에 하객이 되었고 축의금이 기분 좋게 나갔다. 아니 받아 내셨다.
결국 문제는 성격이라니까.
좋은 말로 서번트쉽.
'서번트 리더십'
리더는 통상, 무력이나 금력 심지어 폭력으로 타인을 리드한다.
그러나 섬김으로 사람을 리드하는 것이 'servant leadlship'.
능력의 가진 자 甲이 스스로 낮은 자리에 내려가 乙인 사람들을 올려주고 높여주고 받쳐주면서 갑의 리더십을 가지는 것.
갑이 있고 을이 있는데
능력의 갑이면서 스스로 을이 된 자들도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모든 것을 어른에게 기대야 하는 갓난애는 을이다.
그러나 그 아기의 한번 웃는 방긋 웃음에 쌓인 피로와 애씀이 사르르 사라지는 엄마.
내 목숨도 아깝지 않은 乙의 위치를 자청한다.
손주의 모든 것이 신기하고 경이롭고 예뻐 죽는 할머니도 乙.
할머니 핸드폰에는 할아버지 사진은 없다. 오직 손주, 손주 사진만.
'손주가 이렇게 예쁠 줄 알았다면 자식 보다 손주 먼저 낳을걸... '.
할머니는 손주 앞에 꼼짝 못 하는 사랑의 포로.
스스로 乙을 선택했다.
사랑하는 연인들.
먼저 사랑을 고백하는 자는 그 순간 생각지도 않은 乙이 되어버린다.
무릎 꿇는 순간 그는 갑이 된 상대의 사랑의 시혜를 구걸하는 을이 된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먼지 같은 나도
창조하시고 나의 생사화복도 주관하시는 주님은 진정 갑.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면 한순간의 호흡도 불가능.
그러나 그분은 나의 작은 신음 소리도 듣고 응답하시고 나의 작은 찬양에도 기뻐하신다.
하늘 높은 곳에서 천한 이 땅에 내려와 나를 위해 피까지 흘리신
스스로 을이 되신 분.
사랑의 노예.
울트라 러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