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올로 코녜티의 <여덟 개의 산>
금강산에 다녀왔다. 내 기억이 맞다면, 2006년 1월이다. 6학년 담임교사로 지내던 겨울방학 중이었다. 동학년 선생님들과 함께였다.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진 지금도 가지 못하는 땅이 있으니, 그게 바로 북한땅이 아니겠나. 특별한 여행 경험을 사진과 기록으로 많이 남겨놓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듯이,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길 줄은 예측하지 못했다. 이렇게 금강산 여행이 막혀버릴 줄은 몰랐다. 2008년 여름, 금강산 해수욕장 근처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남한에서 여행간 한 여성이 피격되었다. 그러면서 금강산 여행은 중지되었다. 그 곳 근처에는 우리가 묵었던 '비치호텔'도 있다. 비슷한 곳을 여행했던 사람으로서 충격이었다.
금강산의 계곡 물은 모두 얼어 있었다. 곳곳의 폭포도 완벽하게 흐름을 멈추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서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전설을 담은 곳도 꽁꽁 얼어 있었다. 정지된 화면처럼. 바람도 없어서 나뭇가지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내린 눈도 녹지 않아 그대로였다. 언제 폭포수가 녹느냐고 북한 안내원에게 물으니, 4월이나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게 생각난다. 금강산의 가을을 상상하며 가을에 꼭 와보자고 했었는데, 언제 금강산을 다시 볼 수 있으려나.
눈 덮인 금강산을 떠올린 것은 영화 <여덟 개의 산> 덕분이다. 영화 속에 펼쳐진 알프스의 설경은 신비 그 자체였다. 사람의 키도 넘을만한 폭설, 빙산을 오르는 사람들. 알프스의 여름은 초목과 빙산 그리고 눈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4천 미터 전후의 고도를 가진 알프스의 산들은 겨울을 기억하기 위하여 여름에도 빙산이 남아 있다고 했다. 피에트로와 브루노는 소년기에 산에서 만나 청년기에 잠시 헤어졌다가 산에서 재회한다. 브루노가 산에서 폭설에 목숨을 잃는다. 산에서 만나 산에서 이별하는 두 사람. 그 두 사람의 우정이 영화와 책을 이어가는 주축이 된다.
영화의 원작 소설은 파올로 코녜티의 장편 소설 <여덟 개의 산>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원작 소설을 구입하고자 했으나 절판되었다. 중고 서적이라도 구매하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어려웠다. 집 근처 공공도서관을 찾아보았으나 소장하고 있는 곳이 없었다. 검색 끝에 드디어 인근 공공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음을 알아냈다. 지하철을 타고 갔다. 회원가입을 하고 도서대출카드를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힘겹게 손에 쥐게 된 책이다. 내가 쓰는 이 글은 영화 리뷰도 될 수 있고, 책 리뷰로 여겨도 될 것 같다. 영화와 소설이 거의 일치해서 구분하지 않으련다. 다만, 영화에서 주인공의 아버지 직업이 대기업의 '엔지니어'라고 했는데, 책에서는 '화학자'로 나오는 점이 눈에 띈다. 번역상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피에트로의 아버지 조반니 과스티는 전쟁고아로 외롭게 지내다가 피에로와 가까워지고 피에로의 아버지는 조반니를 친아들처럼 돌봐준다. 조반니와 피에로가 스키를 타다가 산사태로 피에로가 사망한다. 자기 아들이 죽자, 같이 스키를 탄 조반니를 냉대하게 된다. 이 일이 부당하다고 여긴 피에로의 누나가 조반니를 가엾게 여기다가 가까워지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되고 결혼을 한다. 그들의 결혼식은 하객도 없이 산에서 쓸쓸하게 치러졌다. 그 후 외삼촌의 이름을 빌어와 피에트로가 탄생한다. 조반니가 피에트로의 친구 브루노에게 왜 그리 친절하고 살갑게 대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어렸을 적부터 노동에 시달리는 브루노를 측은하게 여겨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 한 데에는 이런 사연이 숨어 있다.
자신이 오르고자 하는 '산'은 조반니의 인생의 목표였다. 생계를 위한 일을 제외하고 그는 늘 산과 함께 하고자 했고, 산에서 살고 싶어 했다. 아들 피에트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피에트로는 겉돌았다. 아버지와 불화했다. 청년기가 되면서 피에트로는 아버지 곁을 떠나 세계를 여행하면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글을 쓰고 싶었다. 심장마비로 외롭게 죽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다시 알프스를 찾은 피에트로는 브루노와 함께 생전에 조반니가 소원하던 집을 짓는다. 죽기 전에 조반니는 폐허가 된 집을 사 두었다. 그 집을 헐고, 알프스 산자락에 집을 짓는 두 사람. 이제 두 사람의 생활을 엮어줄 집이 완성된다. 2014년 겨울, 지난 반세기 동안 서 알프스에 가장 눈이 많이 내렸다. 3 미터, 6미터, 8미터. 집을 떠나지 않고 지키던 브루노가 실종된다. 헬리콥터를 타고 온 구조대가 지붕이 보일 때까지 눈을 퍼내도 브루노가 보이지 않는다. 눈이 다 녹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렇게 브루노는 세상을 떠난다.
과묵하고 사색적인 조반니는 산을 좋아했다. 산을 좋아하는 남편과 같이 산을 좋아했으나 그의 아내는 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산책정도로만 여겼다. 둘이 맞지 않았다. 큰 다툼은 없었지만 둘은 불화했다. 두 사람은 고독했다. 조반니는 혼자 산행을 즐겼다. 조반니의 아내는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를 즐겼다. 산을 좋아했던 브루노는 산을 좋아해 평생 산에서 살았다. 브루노의 아버지는 브루노의 어미에게 브루노를 맡겨 둔 채 산 아래에서 집 짓는 일을 찾아다녔다. 브루노의 어머니는 산자락에서 브루노를 돌보면서 고독했다. 브루노는 아내 라라와 불화했다. 산을 좋아했던 브루노도 고독했다. 산을 좋아한 사람과 그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 모두 고독했다. 고독했으나 모두 홀로 섰다. 외로움은 인간의 에너지를 밖으로 발산하지만, 고독은 인간의 에너지를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외로움은 인간을 힘들게 하지만, 고독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준다. 외로움이 운명적이라면, 고독은 선택이다.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모두 고독했고 자립했다. 고독 속에서도 자립할 수 있게 한 것은 무얼까. 그건 산이다. 산은 고독하지만 스스로 우뚝 서 있다.
네팔 여행을 하던 중, 피에트로는 히말라야에서 닭 운반 장수 노인을 만난다. 세상의 중심에는 '메루산'이라는 높은 산이 있는데 피에트로가 이탈리아를 떠나 히말라야까지 여행을 온 것은 메루산 주변에 있는 여덟 개의 산을 돌고 있는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노인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덟 개의 산을 돌아본 사람이 많은 것을 깨달을까요? 아니면 메루산 정상에 올라본 사람이 더 그럴까요?"
누가 더 깨달음이 클까를 두고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건 각자의 성향에 딸린 문제다. 브루노는 메루산 정상에 올라본 사람으로서 여타의 산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가 기거하는 삶의 터전이 된 산에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반면에 피에트로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 이다. 그건 브루노와 상반된 성향일 뿐이다.
소설은 인생을 담는 그릇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여 이 소설은 피에트로의 성장소설이요, 피에트로의 자전적 소설이 된다. 실제로 파올로 코녜티는 해발 2천 미터에 작은 집을 짓고, 종이에 펜으로 글을 쓰며 혼자 살고 있다고 한다. 번잡한 도시를 살고 있는 현대인은 자연을 그리워하고 고독을 추구한다. 그러면서도 실상 고독해지면 외롭다고 힘들어한다.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다가 또 관계 맺기에 집착한다. 그러다가 힘들어지면 또 고독을 지향한다. 관계 맺기와 고독의 '균형' 잡힌 태도가 바람직한 이유다. 도시에 살면서도 시골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그 해답은 문학과 예술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