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 알 수 없는 피부병에 걸려서 고생했다. 의료 시설이 매우 부족한 작은 시골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민간요법을 받았다. 그래도 낫지 않자, 어머니는 동네에서 아주 나이 많은 할머니를 모셔왔다. 호호백발에 얼굴은 마른 대추같이 쭈글쭈글했다. 집안의 전등은 모두 껐다. 나는 속옷만 입은 채 마루에 쪼그리고 앉고, 어머니는 내 머리에 커다란 바가지를 씌웠다. 플라스틱으로 된 바가지가 아니라, 실제 박으로 만든 바가지였다. 할머니는 식칼을 옆으로 뉘어서 바가지 위를 쓱쓱 문질렀다. 그러더니 한 손 가득 콩을 집어서는 뭔가 주문을 외면서 바가지에 수차례 던졌다. 바가지에 부딪치는 콩소리가 얼마나 컸으며,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콩소리는 또 얼마나 요란했던가. 며칠 후, 피부병이 나았다. 어머니는 그 할머니의 ‘방법’이 효험을 본 거라고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할머니의 갖가지 방법은 우리 동네 여러 사람들에게 적용되어 왔다.
위 이야기는 내 삶을 통틀어 가장 ‘주술’이 묻어나는 일인데, <알파벳과 여신>을 읽으면서 떠올랐다. 그 할머니는 무녀도 아니었고 여신도 아니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그를 믿었다. 그에게 의지했다. 마치 종교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나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사람들은 이렇게 주술의 힘을 믿고 따랐을 것이라는 상상을 한다. <알파벳과 여신>은 미국의 신경외과의사이자 발명가, 작가인 레나드 쉴레인(1937~2009)의 저서다. 이 책의 부제는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다. 선사시대로부터 역사시대 초기까지 주술의 힘은 권력이었다. 그 권력을 빼앗고 싶은 남자들이 주술을 가진 여성들을 박해한다. 여신을 몰아낸다. 나아가서 여성 전체를 하찮게 여기는 남자 집단이 출현한다. 지배욕 강한 일부 남자들이 여자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가부장제와 여성혐오를 일으킨다. 이 과정의 중심에 ‘문자’가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남자들이 문자를 이용해 권력을 거머쥐게 되다니, 문자로 어떻게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일까. 이 책은 그 궁금증에 대한 저자의 연구 결과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무엇일까. 인간의 삶에 가장 영향력이 큰 발명품은 ‘문자’다. 5천 년의 역사를 가진 이 문자가 가져온 긍정성 말고 부정성에 대한 연구가 <알파벳과 여신>이다. 대체로, 여성이 남성보다 언어중추가 잘 발달되어 있다고 여긴다. 저자는 이 통념을 깬다. 남자의 좌뇌에서 언어, 문자가 더 발달했고, 여자의 우뇌에서 이미지가 더 발달했다고 본다. 따라서 남성적인 특성을 가진 문자가 여성적 가치를 폄훼한다. 문자를 읽고 쓰는 과정 자체가 우뇌적 가치를 희생시킨다고 말한다.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신경외과의사이기도 한 저자는 의학, 문화인류학, 종교학 등의 다양한 학문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같이 주장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책은 ‘문자의 역사, 종교의 역사, 여성의 수난사’라고 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원시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남자는 사냥(집단사냥)을 위해 목표물에 집중하는 뇌로 진화한다. 여자는 양육과 채집을 하는 쪽으로 신경계가 재설계되고, 주변을 넓게 인지하는 능력이 탁월한 쪽으로 진화한다. 남자는 좌뇌로, 여자는 우뇌로 발달하게 된다. 여자는 자신의 아이와 함께 생존하기 위해서 남자에게 순결과 충성을 약속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가부장제를 예고한다. 원시시대를 지나 농경과 가축사육이 성행하고 사냥의 중요성이 추락하면서 여자와 여성적 신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구석기 문화유적이 있는 곳에서는 여신조각상 파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고고학이 발달하면서 이 여자조각상들은 다산을 숭배하는 소수의 유물로 치부되고 만다. 새롭게 정착생활을 시작한 인류가 여신을 숭배했다는 주장을 망상으로 깎아내렸다.
세계 4대 성인(聖人)을 꼽으라면, 붓다,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남자다. 넷 모두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들이 남자라고 하여 여자를 폄하하지 않았다. 인간존중, 만인의 평등, 사랑을 역설했다. 성인의 ‘말씀’은 성인의 사후에 제자들이나 사제들이 만들어낸 책에 문자로 기록된다. 성인과 동시대를 살지도 않은 사람들이 성인의 말씀을 이용해 자신들의 주장을 썼다면 과연 누구에게 유리하게 썼겠는가.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문맹이던 시절에 일부 탐욕적인 남자들이 관습을 버리게 하고 문자로 기록된 경전이나 문서 등으로 세상을 지배하려 들었다면 이를 이겨낼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여성의 지위가 급격히 하락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자들은 문자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많은 여자들이 문맹으로 산 세월이 너무 길다. 여자들은 집에서 가정을 꾸려가는 살림살이를 배우곤 하였다. 지위하락에 머문 정도가 아니라, 여성을 신체적으로 학대하기도 하였다. 신체적 학대는 정신적 학대로 이어진다.
문자 권력을 가진 남성이 여성을 학대한 자세한 예를 찾아보자. 저자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에서 ‘전족’ 풍습이 시작된 시기는 인쇄술과 유교가 사회구조를 지배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법전이 편찬되고 문맹에서 벗어난 남자들이 늘어나면서 여자들의 얼굴에 ‘베일’을 씌운다. 베일은 다른 사람과의 대면을 불가능하게 한다. 소통을 방해한다. 우뇌의 활성화를 막는다. 여성에 대한 이런 가학은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쓰개치마와 장옷이 그것이다. 이슬람의 몇몇 교파에서 실시하는 어린 여자아이의 ‘할례의식’은 여자들을 더욱 순종적으로 만들기 위함이라 한다. 이슬람의 할례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여성학대는 ‘마귀사냥’이다. 15세기말부터 17세기 초까지 무수히 많은 여자들이 ‘마귀’로 몰려 고문, 신체절단, 화형을 당했다. 마귀사냥을 한 이유가 뭘까. 1484년 교황은 마법이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일부 의사들은 대중의 신뢰를 받던 치유사들을 몰아내고 싶어 이에 동조했다. “고대로부터 오랜 세월 공들여 쌓아 온 여자들의 지혜-의술을 비롯한 다양한 지식-는 ‘마녀’와 함께 불길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623쪽)
이와 같이 <알파벳과 여신>은 문자(남자)가 여신(여자)을 몰아내고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경위를 밝혀낸다. 세월이 흘러, 산업혁명으로 사진술이 발명된다. 이것은 문화의 흐름을 문자에서 이미지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우뇌의 가치를 높여주게 되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19세기에 들어서 사람들은 서서히 이미지를 통해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저자는 일간지에 등장하는 정치풍자만화를 예로 들어, 장황한 사설보다 만화가 핵심을 더 잘 짚어주었다고 평가한다. 이어 20세기 초반에 텔레비전이 발명된다. 여기서 저자는 텔레비전이 사람들의 우뇌가 활용할 양을 늘려주었다고 말한다. 우뇌가 활성화되고 좌뇌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감으로써 여성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현대가 이미지의 시대가 되면서 여성의 가치가 향상되었다는 말이다.
과연 그런가. 사람의 지식이나 정서를 문자만큼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저자가 말하는 이미지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알파벳이 여신을 몰아내고 가부장제와 여성혐오를 불러왔다는 저자의 주장이 이미지로 표현되지 않고 이 책으로 출간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이미지보다는 문자임이 확실하다. 현대에 들어 여자들이 평등을 외치고, 남자와 함께 경쟁하고,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아가고 있다. 여자들이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여자들이 ‘문자 교육’을 받은 덕택이다. 어떻게 이미지 시대가 되어서 여성들이 평등의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저자가 예로 든 이미지 중에서 만화나 텔레비전을 생각해 봐도, 만화나 텔레비전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어렵다. 만화의 그림이나 텔레비전의 영상이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이 인간의 창의성을 저해한다는 연구결과는 차고 넘친다. 따라서 줄글로 된 책이 인간의 사고력과 상상력, 그리고 창의성을 증진시켜 주는 데에 적합하다. 읽으면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면 쓸 수 있다. 쓰는 일은 창조다. 문자 권력은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