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소설 <액스>
"나는 지금껏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다. 살인을 하거나 누군가의 숨통을 끊어놓은 적이 없다는 얘기다."
소설 <액스>는 이 두 문장으로 시작한다. 문장 속의 '나'는 주인공 '버크'이다. <액스>의 저자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는 소설 전체를 버크의 독백으로 채웠다. 처음부터 죽음, 살인 등의 낱말이 나오는 것이 심상치가 않다. 암울하고 심각하고 무겁고 섬뜩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다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주제는 무거우나 글투는 경쾌하고, 상황은 복잡하나 해결은 간단하다. 그것은 작가의 문체 내지는 필력 덕분이다.
<액스>는 영화 <어쩔 수가 없다>의 원작소설이다. 영화의 원작이 있는 경우, 나는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을 먼저 읽는 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하는 게 재미있다.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내면 변화를 따라가는 게 흥미롭다. 독서를 마치고 영화를 보면서 책 속의 내용이 어떻게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지 비교해 보는 재미가 진진하다. 반대로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을 보면 영화 속 장면 때문에 상상하는데 방해가 된다. 이번에도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을 먼저 읽었다.
처음에는 버크의 끔찍한 범죄가 어떤 이유로 어떻게 저질러지는지 궁금했다. 버크의 동선을 따라가느라 숨 가쁘게 읽고 나니 놓친 부분이 있는 듯하여 재독하였다. 버크는 제지회사 해고 노동자다. 23년을 일해온 회사에서 뜻하지 않은 해고를 당한다. 1995년 10월, 버크가 일하고 있는 제지 회사를 캐나다의 계열사가 고스란히 흡수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해고된다. 재취업의 기회가 줄어든다. 2년이 넘도록 재고용은 요원하다. 가정경제가 무너지고 가족들의 삶이 피폐해진다. 버크는 조급해진다. 자신이 가짜 회사를 짓고 구인 광고를 내고 지원자를 모집한다. 이 아이디어가 신박하다. 수많은 지원자 중에서 자기보다 스펙이나 능력이 나아 보이는 사람을 추린다. 그 사람들만 없애면 자기가 재고용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다.
버크가 한 사람을 사살한다. 단지 자신의 취업 경쟁자라는 이유만으로. 이어서 버크가 살인 계획을 세울 때마다 나는 어서 빨리 중단하기를 바랐다. 해고된 자로서 해고된 타인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를 기대했다. 뉘우치고 약자끼리 연대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 나이브한 독자의 바람이었다. 결국 버크는 자신의 계획대로 여섯 번의 범행으로 일곱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두 번째 범행에서는 계획에 없던 여자 한 명까지 살해하였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버크는 또 면접을 보러 갈 준비를 한다. 이번에는 꼭 될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왜냐하면 재고용될 만한 경쟁자를 모두 제거했으므로.
이렇듯 <액스>는 처절하고 슬픈 분위기이다. 인간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이보다 더 처연한 이야기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때로는 주인공의 일처리 방식에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하기도 했다. 아니 그렇게 취업 경쟁자를 죽이면 자신만이 취업해서 잘 살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단순하고 우매한 지 버크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의 범행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오판을 하는 순간도 있다. 실소를 하게 하는 대목을 옮겨본다. 첫 번째 범행에서 버크는 '목표물'이 포착했다. 그때의 독백은 이렇다.
'나는 개처럼 할딱인다. 다른 증상은 이해할 수 있고, 또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할딱임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넌더리가 날 정도다. 무슨 짐승도 아니고...'
왜 안 그렇겠는가. 처음으로 살해 의도를 가지고 목표물을 노려보는 중이니 얼마나 긴장되고 얼마나 두렵겠는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사자처럼 말이다.
실소하게 하는 장면이 또 있다. 마지막 목표물인 팰런을 처리하러 그의 사무실에 잠복해 있던 버크의 행동도 어이가 없다. 그 상황에서 잠이 오다니.
'하지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간단히 처리된 일도 있었다. 자신감이 붙기 시작하니 일이 수월해졌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이런! 잠이 오네.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두운 사무실을 빙빙 맴돌기 시작한다. 그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여기서 잠들어버리면 큰일이다.'(p. 303)
현실에서 벌어지는 고용불안은 고용주와 피고용인과의 대립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고용주에 대한 피고용인의 근로개선, 임금협상, 해고철회 등. 그러나 <액스>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버크는 고용주에게 덤벼들지 않는다. 그러는 대신에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고 제거하려 한다. 그는 매번 자신의 '프로젝트'를 합리화한다.
'밀레니엄은 생산적인 직장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는 생산적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잘라버리는, 이 말도 안 되는 경영 방식을 부추기고 있다. 단지 2000년이 다가온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실직한 이유도 인류가 미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미쳐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버크 자신도 미친 짓으로 저항하는 것뿐이라는 자기 합리화이다. 그의 합리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나는 킬러가 아니다. 살인자가 아니다. 그랬던 적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무정하고, 냉혹하고, 영혼이 없는 킬러. 그건 내가 아니다. 지금 내가 벌이고 다니는 짓은 사건의 논리에 의해 강요된 것일 뿐이다. 주주들의 논리, 임원들의 논리, 시장의 논리, 노동력의 원리, 밀레니엄의 논리, 그리고 나 자신의 논리. 대안을 알려주면 살인을 멈출 수도 있다. 지금 내가 벌이는 짓은 끔찍하고, 까다롭고, 섬뜩하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p.162)
'어쩔 수가 없다'는 자기 합리화에도 불구하고 버크의 괴로움은 자신을 '괴물'로 여기게 한다. 멈추지 않는 괴물.
버크의 자기 합리화는 계속된다. 자신의 프로젝트를 다 완성하고 다음과 같은 생각에 빠진다.
'미국을 휩쓸고 있는 대량 인원 삭감의 폭풍에 대해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한 모든 CEO들도 같은 아이디어를 내세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내기 이 일을 하는 이유, 내 목적과 목표는 간단하다. 나는 내 가족을 잘 돌보고 싶다. 이 사회의 생산적인 구성원이 되고 싶다. 내가 가진 기술을 유용하게 써먹고 싶다. 납세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일을 해서 번 돈으로 떳떳하게 생활하고 싶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은 쉽지 않았지만 나는 결승점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CEO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미안한 마음을 전혀 가질 필요가 없다.'(pp. 325~326)
살인만 아니라면 버크의 논리에도 일리는 있어 보인다. 읽다 보면 그의 논리에 휘말리게 되기도 한다. 이 소설은 강력한 흡인력이 있다.
이처럼 소설 <액스>는 대량해고를 당한 50대 나이의 한 남자가 어떻게 무너져 내리고 어떤 자기 합리화를 거쳐 어이없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지를 상세히 보여준다. 사회비평 요소가 담겨 있고, 세태 풍자도 가득하다. 물론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가장 큰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건 고도의 서사 장치로 여기면 될 것 같다. 그가 보이는 극단의 광기는 버크의 총체적인 좌절을 의미한다고 본다. 대체로 인간은 자신과 직업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직업을 잃으면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액스>의 옮긴이 말처럼, "세상의 어떤 직업도 살인까지 불사해 가며 지켜야 할 가치는 없다"
우리나라의 고용불안도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용불안은 대학입시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바로 취업이 잘되는 이공계 학과와 메디컬 학과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계 학과에 입학하고서도 메디컬 학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아 자연계 학과에서 인재를 뺏긴다는 인식이 발생한다고 한다. 특히 최상위권 학생이 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에 몰려드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직업 안정성과 고소득이 보장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직업 안정성은 해고될 염려가 거의 없음을 의미한다. 한동안 낮은 연봉으로 인기가 줄어들었던 공무원의 인기도 최근 3년간 다시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연봉이 올라서가 아니라 고용안정 때문으로 해석된다. 젊은이의 다양한 꿈과 희망이 몇몇 가지 학과나 직업군에 매몰되고, 그러다 보니 한정된 분야의 경쟁률만 높아진다. 취업이 되었다 해도 대부분의 직군에서 고용불안은 여전하다.
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 <어쩔 수가 없다>가 요즘 장안의 화제다. 해고노동자의 취업 분투기! 그것도 광기 어린 투쟁기! <어쩔 수가 없다>는 공간적 배경, 음악, 그리고 무엇보다도 버크의 심리를 잘 구현하였다.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날의 풍경이 스크린 가득 담겨있다. 속도감 있게 펼쳐지는 음악! 주인공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러 경쟁자를 죽이려 난투극을 벌이는 와중에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노래가 울려 퍼진다. 선곡이 적절하다. '거사'를 치르고 귀가하는 주인공의 비애를 묘사하는 배경 음악, 가수 김창완의 '그래 걷자'도 인상적이다. 일을 해치우기는 했지만 심란한 속내를 나타내는 음악으로 알맞다. 소설 속 버크를 연기한 배우 이병헌의 연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어리숙하면서도 치밀하고, 순진한 듯하면서도 섬뜩한 버크를 연기하는데 딱 맞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로 영화를 보는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 다만 영화와 소설을 둘 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소설을 먼저 읽기를 권한다.
다음은 영화 <어쩔 수가 없다>에 삽입된 곡입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처음 듣는 것 같습니다.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습니다. 감상해 보십시오~^^
그래 걷자 발길 닿는 데로 빗물에 쓸어버리자 이 마음
한없이 정처 없이 떠돌아 빗물에 떠다니누나 이 마음
조그만 곰인형이 웃네 밤늦은 가게불이 웃네
끌러버린 가방 속처럼 너절한 옛일을 난 못 잊어하네
그래 걷자 발길 닿는 데로 빗물에 쓸어버리자 이 마음
한없이 정처 없이 떠돌아 빗물에 떠다니누나 이 마음
지나치는 사람들은 몰라 외로운 가로등도 몰라
한꺼번에 피어버린 꽃밭처럼 어지러운 그 옛일을 몰라
......
-'그래 걷자' 김창완 작사 작곡 (1983년 작품)-
https://youtu.be/i2EFHwDU1pk?si=5AJGDNvWQ-xuHvo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