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설 자리

by 강지영

사별에 관한 얘기를 브런치에 쓰기 전에, 쓸까 말까 망설였다. 지금의 나를 쓰려면 남편에 관한 얘기를 쓰긴 써야겠는데, 어디부터 어디까지 쓸까 고심했다. 고심하던 중에 가슴이 조여왔다. 숨이 막혀 왔다. 병원, 화장터, 유골함이 떠올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거리로 나갔다. 여기저기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닦지 않았다. 마스크 속으로 눈물이 흘러들었다. 그냥 뒀다.

"괜찮아. 괜찮아. 울지 마. 울지 마."

를 중얼대며 거리를 쏘다녔다. 해 있을 때 나갔는데, 거리의 불빛이 점점 늘어나고 선명해졌다. 한 시간 넘게 배회한 것 같았다. 울음을 그치니 추위가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서 따끈한 우유를 머그잔 가득 한 잔 마셨다. 내가 좋아하는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을 들으면서.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곡이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와 브론스키가 이 곡에 맞추어 경쾌하게 왈츠를 춘다. 우유를 다 마시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컴퓨터를 켰다. 신기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고, 글이 써졌다. 오호, 글의 힘이 이런 건가. 이게 문학의 힘인가,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책꽂이에서 이성복 시인의 책을 꺼냈다. 시인은 그의 아포리즘 책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문학동네, 2012)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

불행을 이야기하면 불행이 아니라고? 불행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행을 객관화시킨다는 건가. 그 불행은 이제 나에게서 가버린다는 건가. 그렇다면 어디까지 쓸까 고민하지 말고 생각나는 대로 다 쓰자. 그러면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기겠지. 이성복 시인의 말을 믿고 써 버렸다. 그랬더니 그렇게 했더니 후련해졌다. 이제 행복이 설 차례다.


20여 년간 남편의 사망과 관련한 이야기를 글로 쓴 것은 브런치가 처음이다. 왜 그랬을까. 남편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이 가장 컸고, 다른 사람이 나를 동정하는 것이 싫었다. 심지어는 시어머니가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도 싫었다. 세상 어느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시댁에 가면 시어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주 그러셨다.

"으이구, 너나 나나 복이 없어서 그런 걸 어쩌냐."

"..."

아들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내가 어머니를 위로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린아이들을 키워내야 하는 큰일이 앞에 있으니, 시어머니처럼 신세타령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시어머니 만나는 것도 싫었다. 신세타령, 복타령이나 하는 것을 듣기가 고역이었다. 시어머니의 그런 말은 위로도 격려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머니, 죄송하지만 자주 못 올 거예요. 이젠 저는 며느리라기보다는 아이들 엄마로 사는 데에 집중할 거예요.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시어머니로서는 너무너무 서운하셨을 테지만, 나는 그렇게 선언을 해 버렸다. 어떤 비난도 감수하기로 했다. 며느리와 아이들 엄마, 두 역할을 다 하기에는 벅차다고 판단했다.


3월 초에 남편의 사망신고를 하고, 새 학년을 맞이했다. 큰딸이 초등2학년이 되었다. 아빠의 역할까지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나에게 '힘'이 필요했다. 컴퓨터활용능력 시험도 보고, 운전면허 시험도 봤다. 다행히 모두 성공하였다. 이제 남편의 도움 없이도 컴퓨터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면허증이 있으니 아반떼를 사서 운전도 하였다. 광명시 시누이집에 다정이를 데려다줄 때, 지하철을 타지 않고도 편히 갈 수 있어 좋았다.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나면 온전히 내 시간이 되었다. 긴긴밤을 나 홀로 무엇을 했을 것 같은가. 답은 독서다. 무너진 내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 책을 읽었다. 대학원 시험을 보고, 면접을 보고 합격을 하였다. 휴, 이 모든 걸 일 년 동안 다 했다. 신바람이 났다.


남편을 떠나보낸 1년 후, 모교인 공주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 초등국어교육과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교육대학원은 주로 현직 교사들을 위해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교육대학원은 야간제와 계절제가 있다. 나는 계절제를 선택하였다. 계절제는 방학 중에 출석 수업을 받는 제도다. 그런 제도가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나를 위한 맞춤제도!


2002년 여름 방학이 되었다. 나는 딸아이 둘을 차에 태우고, 트렁크에는 각종 놀이기구와 동화책 그리고 옷가지들을 싣고 대전 큰언니네로 갔다. 큰언니가 두 아이를 맡아 주기로 했다. 아침에 나는 공주로 공부하러 가고, 아이들은 큰언니가 돌봐주고. 큰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큰언니뿐 아니라, 큰형부에게도 늘 고마운 마음이다. 두 분 덕택으로 대학원 공부까지 했다.

그렇게 여름방학 3번, 겨울방학 3번 교육대학원 공부를 하는 동안, 석사논문도 무사히 통과되고 다시 새 학년을 맞이했다. 학교에서 나는 수업연구에 몰두했다.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6학년 담임도 자청하여 맡았다. 교감도 되고, 교장까지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연구대회 논문도 썼다. 그렇게 부지런히 교사생활을 하는 동안에, 어느 날 문득 딸아이들을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가 승진하고 출세하는 것보다 이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논문 쓴답시고 퇴근도 늦고, 딸아이들에게 짜장면이나 시켜주고 라면이나 끓여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승진도 포기했다. 박사학위에 대한 욕심도 있었으나 그것도 포기했다. 두 아이에 집중했다. 그렇다고 아이들 공부시킨다고 닦달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공연도 보러 다니고, 박물관에도 다니고, 인형극도 보러 다녔다. 뮤지컬 <라이온 킹>, <오페라의 유령>, <노트르담 드 파리> 등도 봤다. 초등학교 교과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게 중요하다 싶어서 간섭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학교 공부에 대해 물어올 때면, 엄마에게 묻지 말고 학교 담임 선생님께 질문하라고 했다. 엄마보다 너희들 담임 선생님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집에서는 엄마이지, 선생님이 아니지 않은가. 아이들이 기특하게도 내 말을 잘 따라 주었다.


초등학교 때 사교육은 피아노 학원만 보냈다. 아이들 지능개발에 피아노가 최적이라는 것을 어느 교육학 관련 책에서 보았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뇌 개발에 효과가 좋다고 나와 있었다. 특히 손가락 끝이 건반에 닿는 순간 뇌를 자극하게 된다는 논리였는데, 그럴듯했다. 촉각과 청각을 동시에 만족시킨다는 말도 일리가 있었다. 초등학교 6년간 두 아이 다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피아노 살 돈이 부족해서 두 아이 백일 반지와 돌 반지를 팔았다. 멋진 피아노를 집에 들여놓았다. 딸들이 피아노 치는 모습에 얼마나 감격했던가!


이것보다 더 감격했던 일이 있었다. 바로 둘째 딸 다정이가 유치원 다닐 때였다. 어느 날 자전거를 사달라고 했다. 두 발 자전거를.

"다정아, 자전거도 못 타는데 무슨 자전거를 사니?"

"아냐, 엄마, 나 자전거 탈 수 있어."

"엄마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타?"

"친구한테 배웠지."

그랬다. 바깥에서 친구들과 실컷 놀게 두었더니, 어느새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워 왔다. 아이 말을 믿고 자전거를 샀다. 학교 운동장에 갔다. 큰딸에게는 내가 자전거를 가르쳤다. 해가 질 때까지 세 여자가 자전거를 탔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시인의 말이 맞다. 불행을 이야기 하고나니 행복이 설 자리가 찾아왔다. 역시 시인!

이로써 숨바꼭질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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