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이 맞다면, 거기는 인천의 '남항부두'였다. 시댁 어른들 몇 분과 남편의 유골함을 들고 배를 탔다. 딸아이 둘은 너무 어려서 배는 타지 않았다. 큰딸은 아홉 살, 작은딸은 네 살. 너무 어려서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시어머니의 말에 따랐다. 부두를 벗어나 한참을 갔다. 시어른이 유골을 뿌리라고 했다. 함을 열고 한 줌 쥐었다. 유골은 그때까지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손가락을 폈다. 바람은 유골을 멀리 보내기도 하고, 바닷속으로 바로 떨어지게도 했다. 내 상복 치마에 날아왔다가 바다 위로 떨어지게도 했다. 2월의 차가운 겨울 바다로 마지막 배웅을 하였다.
남편은 고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생물 과목을 가르쳤다. 오랫 동안 고3담임을 하면서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했다. 나 또한 그의 건강에 세심한 관심을 갖지 못한 탓이 컸다. 돌이켜 보면 회한만 남는다. 좀 더 일찍 건강검진이라도 할 걸. 후회해도 소용없건만 그게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았다.
세상은 모두 그대로였다. 나무는 그대로 서 있었고, 건물들도 그 자리에 있고, 창문을 열면 여전히 찬바람이 들어오고. 아침이면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오후가 되면 따뜻한 햇볕에 노인들이 산책을 나오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고, 엄마들은 저녁 찬거리를 사러 마트에 가고. 아빠들이 퇴근하고. 세상 모든 게 그대로인데, 내 옆에 있던 한 사람만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 있는데, 남편만 없다. 실감 나지 않았다.
거리에 나가서 잘 생기고 건장한 사람이 지나가면 그이인 듯하여 한 번 돌아보게 되고, 그가 모퉁이를 돌아가면 그제야 나는 제정신이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그의 구두가 있었다. 그가 일찍 퇴근을 했나,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거실로 뛰어 들어오기도 했다. (그의 유품들을 정리할 때, 시어머니는 그의 구두를 현관에 그냥 두라고 했다. 집 안에 남자가 없는 줄 알면 사람들이 깔볼 수 있다고 하면서, 집에 남자가 있는 것처럼 하라고 해서 남겨 둔 구두였다.) 그걸 남편의 퇴근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식탁에서도 그의 자리는 비었다. 처음엔 남편의 수저 젓가락까지 놓기도 했다. 늘 해오던 대로. 그렇게 저렇게 날이 갔다. 학교에 출근하였다. 교실에서 나는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그를 그리워할 시간이 없었다. 학생들은 담임 선생님이 돌아왔다고 하하 호호 난리가 났다. 너무나 명랑하고 너무나 발랄했다. 수업과 밀린 업무를 하느라고 정신없이 바쁘게 며칠을 보냈다. 집에 오면 고단하여 한 시간가량이나 쉬어야 저녁식사 준비를 할 정도였다.
퇴근 후엔 시장에 가서 딸아이가 좋아할 찬거리를 샀다. 집에 돌아오면, 나는 먼저 소파에 누웠다. 밥이고 뭐고 그냥 자고만 싶었다. 그런데, 딸아이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아이에게만은 슬픔을 나타내기 싫었다. 내가 슬퍼하면 내 딸이 더 가여워질 것 같았다. 애써 웃음을 띠었다. 억지웃음도 자주 웃으면 습관이 된다. 때로는 인간의 뇌가 참 바보스럽기도 하다.
나는 소파에 누워서 양팔을 벌리고 다영이를 불렀다.
"다영아, 엄마 힘들어. 나에게 힘을 줄래?"
"응, 엄마!"
그러면서 다영이는 누워 있는 내 가슴 위에 제 가슴을 대고 꼭 끌어안았다. 그러고 있으면 하루의 고단함이 사라졌다. 에구구, 우리 딸 밥해줘야지, 하고 일어나 저녁 밥상을 차렸다. 남편이 있을 때보다 더 맛있는 반찬을 해서 딸을 먹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나 혼자였으면 나는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