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엄마

(2000년 7월, 엄마가 이승을 떠나실 때의 기록)

by 강지영

(사진출처 : 인터넷)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큰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했던가. 아침 일찍 출근 전에 오는 전화는 긴급한 전화임에 틀림이 없다. 더구나 엄마가 통원치료를 받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영아, 엄마가, 엄마가, 흐흐흑 흐흐흑"

"알았어. 언니! 흑흑"

딸아이와 함께 서둘러 택시를 불러 타고 친정으로 갔다. 인천에서 충남 연기군 금남면(지금의 세종시)까지 가는 길이 왜 그렇게 멀었는지. 택시 안에서 내내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어린 딸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잡고 침묵을 지켜주었다. 초등 1학년 내 큰딸, 엄마의 울음이 무엇인지 느낌으로 감이 왔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딸아이를 보니, 눈물이 고여 있다. 그날, 택시 안에서 나는 뜨거운 눈물이 무엇인지 알았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식을 줄을 몰랐다.


엄마가 팔십도 안되어 돌아가시게 된 것이 나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엄마가 남의 집 농사일을 얼마나 많이 다니셨나. 내가 위암에 걸렸을 때 얼마나 맘고생을 하셨으면 저리 일찍 돌아가시겠나. 이뿐인가 내가 시집가서 아기를 세 번씩이나 유산하는 동안, 엄마는 얼마나 맘고생을 하셨을까. 이런 불효가 어디 있나. 엄마가 돌아가신 게 모두 나 때문이라 생각하니, 회한의 눈물이 그칠 줄 몰랐다.


엄마가 편찮으실 때,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병원에도 모시고 가고, 자주 친정에 가서 반찬이며 이불 빨래며 집안 청소까지 해주었는데, 도대체 나는 엄마를 위해서 무얼 했단 말인가.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었다. 아파트 산다고 돈을 아끼느라, 엄마 용돈 한번 풍족히 드린 적도 없고. 큰언니 작은언니에게만 맡기고, 직장을 핑계로 멀다는 핑계로 나는 주말에도 별로 가지 못했다. 자식으로서 딸로서 무슨 도리를 했단 말인가. 그런데 이제 엄마가 이승을 떠나시게 되다니. 내가 친정집에 도착하기 전에 엄마가 돌아가실까 봐 조바심이 나는 것조차 죄송스러웠다.


친정에 도착하니, 엄마는 안방에 반듯하게 누워 계셨다. 눈이 감긴 채로 천천히 호흡을 하시면서. 엄마는 기쁨도 슬픔도 아무것도 없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엷은 옥색 한복이 입혀졌고, 야윈 몸 위로 얇은 이불이 덮여 있었다.

"엄마, 지영이 왔어. 흐흐흑"

큰언니의 말에 엄마는 눈도 뜨지 못하시고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숨만 쉬셨다. 그러다 나는 보았다. 엄마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흐르는 것을.

"엄마,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미안해. 엄마. 흐흐흑"

엄마는 천천히 가냘픈 호흡만 이어갔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숨이 멎었다.

"엄마아, 엄마아, 흐흐흑"

이제 엄마는 우리와 영원히 작별을 하시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엄마는 돌아가셨다. 사람이 숨을 거두어도 가장 늦게까지 남는 것이 청각이라고 했다. 그래도 엄마에게 못난 셋째 딸 목소리라도 들려 드려서 다행이었으려나.


잠시 후, 동네 방송이 나왔다. 친정 동네 이장님이었을 것이다.

"아아, 부고입니다. 강 면장님 형수님께서 방금 운명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

(나의 작은 아버지가 금남면 면장을 지내셔서, 동네에서는 그렇게 말해야 더 알기가 쉬웠을 것이다.)

아버지는 윗방에서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계셨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 평생 가난했으나 엄마랑 그리 정답게 사셨는데, 이제 엄마 먼저 이승을 떠나시니 그 슬픔의 크기는 얼마일까. 우리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또 울었다.


방송이 끝나자, 동네 아주머니들이 안마당에 솥을 걸고 음식 만들 준비를 하였다. 동네 아저씨들이 바깥마당에 천막을 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방에 돌아와 보니, 병풍이 쳐져 있었다. 엄마는 병풍 너머에 계셨다. 병풍 하나로 이승과 저승이 갈라졌다. 우리 오 남매는 상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이했다. 멀리 사시는 고모, 외삼촌, 여러 친인척이 조문을 왔다.


밤이 되자, 노스님이 오셨다. 연세가 많이 드신 스님이었다. 동화 속에서나 보았던 산신령 같은 풍모를 지니고 계셨다.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며 독경하였다. 불경 내용을 알 수는 없었으나, 노스님의 독경 소리를 들으니 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스님은 독경을 멈추고는,

"이 망자는 더 이상 축원기도를 할 필요가 없네요. 아무런 한도 남지 않았어요. 이런 분은 처음입니다. 세상을 이렇게 곱게 사신 분이 있으시네요. 가시는 길도 편안하실 겁니다. 더 이상 이승에 대한 미련도 없습니다. 망자는 지금 아주 평온합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고 기도를 정리하시고 일어서서 천천히 집을 나가셨다.

폭염이 이어지는 한낮이었다. 염을 하는 때가 되었다. 염을 주도한 이는 당숙 아저씨였다. 엄마에게 수의를 입히고 나서, 발목 손목까지 삼베끈으로 꽁꽁 동여맸다. 당숙 아저씨의 이마와 목덜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당숙 아저씨의 염 작업을 돕는 다른 사람들도 눈물과 땀방울이 범벅이었다. 수의를 다 입힌 후에 아저씨는 남동생에게 엄마의 입에 쌀을 먹여 드리라고 했다. 동생은 또다시 통곡을 하며 숟가락으로 쌀을 떠서 먹여드렸다. 마지막 가는 길에 배고프지 말라고 쌀을 넣어드리는 것이라는 의미를, 장례식이 끝나고 한참 후에 알았다.

밤이 되었다. 바깥 마당에 큰 꽃상여가 도착하였다. 동네 아저씨들은 상여를 재정비하고 어깨에 매보고 상여소리를 연습하는 것 같았다. 안방에까지 그 소리가 들렸다. 천막 안에서는 조문객과 동네 사람들이 와서 밤을 지새워 화투를 치거나 술을 마시면서 지난 얘기들을 하였다. 가끔은 자기 얘기를 하면서 우는 이도 있었고, 가끔은 웃는 이도 있었다. 인생살이가 다 그런 거라는 듯이. 모두가 정다운 이웃이었다.


셋째 날인가, 아침에 병풍을 걷어내고, 엄마는 상여로 운구되었다. 엄마의 관 틈새에서는 검은 물이 조금 흘렀고, 역한 냄새가 났다. 한여름이라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이승을 떠나는 사람이 이승에 남은 사람에게서 정을 떼기 위해 역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라는 해석을, 장례식이 끝난 후 한참 후에 누군가에게 들어 알았다.


운구가 끝나자 상여꾼들은 어깨끈을 맸다. 지금 기억으로는 양 옆으로 네댓 명씩이었던 것 같다. 상여꾼은 내가 거의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동네 아저씨들이었다. 이어서 상여가가 이어졌다. 손에 요령(종)을 잡은 분이 메기는 소리를 했다.

"북망산천 멀다더니 집 앞이 북망일세"

상여를 맨 사람들이 메기는 소리를 받아 이런 소리를 냈다.

"어-허 어-허 어-허 어-햐"

등으로 이어지는 상여소리에 우리 오 남매와 친인척은 곡을 하고 동네 사람들도 슬픔을 같이 해 주었다.


상여가 마당을 떠나 동네 길을 지나 선산으로 가는 길에서도 상여소리가 계속되었다. 여름이라 볕이 뜨거웠어도 모두 엄마가 가는 길에 큰 도움을 주었다. 길을 지나 논둑을 지나고 밭둑을 지나 산으로 가는 동안에 상여는 몇 번 쉬어 갔고, 상여꾼들은 막걸리를 마시면서 가끔은 실없는 농담을 하여 좌중을 웃게도 하였다. 슬픔을 이겨내려는 조상들의 지혜라고 생각했다. 두어 번인가 산길을 가는 도중에 상여가 멈추었다. 산길에 접어들자, 상여꾼 교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성한 내 친구들과 동네 오빠들이었다. 산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있으니, 조금이라도 젊은 사람들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일 터였다.


그날은 무더웠다. 상여꾼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는

"엄마가 노자돈이 부족해서 더 이상 못 간댜."

고 하였다. 다른 상여꾼이 또 말했다.

"이 집, 큰사위 어딨어? 큰 사위가 부자라던디, 장모 가는 길에 노자돈 좀 많이 내놔봐. 허허."

그러자, 큰 형부가 큰 소리로 말했다.

"큰사위 여기 있습니다. 우리 장모님, 잘 좀 모셔 주세요."

하더니 상여꾼의 어깨끈에 돈봉투를 끼웠다.

"작은 사위가 섭섭하댜. 작은 사위는 어딨어?"

작은 형부도 상여꾼의 어깨끈에 돈봉투를 끼웠다.

상여꾼들은,

"노자돈이 두둑하니, 이제 힘내서 가봄세."

하면서 상여소리와 발걸음이 이어졌다. 모두가 고통을 해학으로 이겨내고 있는 중이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하니, 이미 동네 아주머니들은 밥과 육개장, 수박, 참외 등으로 상차림을 하고 있었다. 산 위에서는 포클레인이 작업을 마치고 멈춰 있었다. 상여를 내려놓고 절을 하고 그리고 엄마의 관이 땅 속에 묻혔다. 봉분이 만들어졌다. 모든 장례를 마친 사람들은 밥을 먹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육개장 냄새가 나자, 나는 식욕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세상에, 엄마를 땅에 묻은 지 얼마나 된다고. 엄마 무덤 옆에서 음식 냄새를 맡고 식욕이 생긴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내 몸이 내 육체가 너무 치욕스러웠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란 말인가. 그런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인간의 존재는 이토록 가벼운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방금 있었던 식욕이 싹 가셨다. 이렇게 시시 때때로 변하는 게 사람이란 말인가. 인간의 변덕스러움이 혐오스러웠다.


그때였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돗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던 사촌 오빠가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나는 밥맛이 없다고 했다.

"지영아, 네가 밥을 안 먹으면 큰엄마가 얼마나 속상하겠어. 그러니까, 밥 먹고 기운 내. 네가 밥 잘 먹어야 큰엄마가 편히 가시지."

하면서 밥과 국을 권했다. 오빠의 권유에 밥숟가락을 뜨니 밥이 넘어갔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분, 인간이란 이런 것인가요. 나만 그런 건가요.


엄마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었다. 엄마의 묘 근처에는 봄이면 잔디도 초록빛을 띠고 제비꽃도 피고 가을이면 밤도 열리고 겨울이면 눈도 내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엄마의 무덤 옆에는 앙상한 겨울나무가 서 있을 것이다. 봄이 되면 겨울눈에서 새 잎이 날 테고, 또 녹음이 우거지다가 겨울이 올 것이다. 그렇게 자연은 오고 또 오건만 한 번 가신 엄마는 오시지 않는다. 보고 싶어요. 엄마!


(이 글을 쓴 이유는, 더 늦기 전에, 흐려지는 내 엄마의 장례에 대한 기억을 붙잡고자 하는 절박함으로 썼습니다. 쓰다 보니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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