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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28. 2019

꽃보다 테너

테너 김현수 가곡콘서트 <꽃>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2019. 7.21

  그 날은 좀 이상한 날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오후엔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하게 비가 내렸다. 미세먼지보다 낫긴 하지만 비 역시 그다지 반갑지 않다. 손에 든 긴 우산이 귀찮았지만, 그래도 마음은 어느 때 보다 보송보송했다. 꽃보다 아름다운 테너 김현수 가곡 콘서트 《꽃》을 보러 가는 길이니까.



♬ 한 남자가 있어~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로비에 들어서는데 한 남자가 보였다. 한구석에 조용히, 그러나 매우 눈에 띄게 서 있는 그는 포르테 디 콰트로 이벼리 군이다. 현수형이 하는 콘서트에 기꺼이 온 벼리 군은 휴대폰을 들고 다가오는 관객들과 사진 찍느라 바빠 보였다. 나 같으면 형이 있는 대기실에 가있거나 관객들 눈에 안 띄게 피해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공연 시작 전까지 꿋꿋하게 로비를 떠나지 않았다. 나도 같이 사진 찍고 싶었지만 수줍어서 머뭇거렸다. (날 아는 사람들은 '웃기고 있네~' 하겠지만, 난 의외로 소심하고 부끄러움도 많이 탄다. ㅎㅎ) 이렇게 가까이 벼리 군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계속 흘끔거리다가, 이때가 아니면 언제 볼까 싶어 용기를 짜내어 다가가 같이 사진 찍고 사인도 받았다. (소심하지만 할 건 또 다 한다. ㅎㅎ)    



♬ 슬프지만 아름다운 뒤태


  체임버홀은 처음인데, 들어서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예매할  좌석 배치도를 보고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시야가  좋을  몰랐다.  튀기는 티켓팅 때문에 간신히 구한 나의 자리는 2 끝자리다. 아티스트 뒤통수만 보이는 시야에 가슴 답답해졌다.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잘못이다. 그래도 울컥 짜증이 났다. 벼리  때문에 좋았던 기분이 금세 다운됐다.


  드디어 현수 군이 등장하고, 그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예의 그 폭포수 같은 음성으로 열창했다. 이 공연이 실황 음반으로 나온다는 뜻밖의 소식에 잠시 기분이 좋아지긴 했지만, 공연 내내 아티스트의 얼굴을 거의 못 봤다. 대신 그의 뒤통수와 뒤태는 원 없이 봤다. 포디콰 공연을 꽤 다녔는데, 이렇게 한 남자의 뒤태만 감상하는 건 또 처음이다. 현수 군이 간간이 2층 사이드 쪽으로 시선을 주긴 했지만, 섬광처럼 지나가는 찰나일 뿐이다. 공연 초반엔 나의 어리석은 티켓팅에 절망해 기분이 안 좋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시선은 공연장을 이리저리 훑으며 이상한 딴짓(?)을 하게 됐다.



♬ 당신의(?) 가시나무 숲 같네~


  공연장이 그리 크지 않아 객석이 한눈에 보였다. 현수군 뒤태와 더불어 그의 발치 모니터에 명멸하는 프롬프터 또한 잘 보였다. 주로 노래 가사와 노래 사이에 현수 군이 해야 할 멘트가 나오는데, 난 자연히 프롬프터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굳이 보고 싶지 않아도, 내 시선이 딱 꽂히는 곳에 모니터가 있어 안 볼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가 노래 끝나고 무슨 얘기를 할지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일찍 알 수 있었다. (ㅋㅋ) 그리고 그 공연장에 있던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을 현수 군의 깜찍한(?) 실수 같지 않은 실수까지 포착했다.


  본 공연이 끝나고 앙코르곡으로 부른 「가시나무」에서, 중간에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부분을 현수 군은 당신의 가시나무 숲 같네~로 불렀다. 원래 가사와 다르게 부른 걸 누군가 눈치챘을까. 글세, 적어도 객석에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현수 군이 너무나 능숙하고 매끈하게 불렀다. 나도 그의 얼굴을 넋 놓고 보며 들었다면 가사가 바뀐 걸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모니터의 가사와 들리는 가사가 다른 걸 관객 중엔 나 말고 아무도 몰랐을 거라 확신한다. (ㅎㅎ) 혹시 무대 위 연주자들은 알았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현수 군 본인도 가사를 바꿔 부른 걸 몰랐을지도 모른다.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CD를 집어삼킨 듯한 목소리로 열창했고, 무성하건 말건 그의 입에서 나오는 가시나무 숲은 무척 아름답고 황홀한 숲임에 틀림없다.



♬ 꽃보다 아름다운 테너 김현수


  아티스트의 얼굴은 거의 못 봤지만, 홀을 꽉 채우고도 남는 그의 음성은 여전히 포근하고 아름다웠다. 동그란 뒤통수와 늘씬한 뒤태, 그리고 가끔 팔을 들어 올리며 부를 때 보이는 그의 희고 긴 섬섬옥수(纖纖玉手)는 실컷 봤다.


  중간에 땀까지 삐질삐질 흘리며 열창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변함없이 성실하고 다정한 테너 김현수였다. 1부 때 입었던 검정 슈트는 2013년 독창회 때 입었던 옷인데,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부러 입고 나왔다고 한다. 그 마음도 감동스럽지만, 그때 옷이 지금 맞을 정도로 몸매가 변하지 않았다는 게 더 신기하다.


  그가 부른 「꽃밭에서」는 음원을 꼭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답다. 이 노래뿐 아니라 공연장에서 흘러나온 모든 노래를 한곡 한곡 마음에 저장했지만, 특히 이 노래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름다웠다.


  2부에서는 기타와 베이스도 함께 해 테너의 음성을 돋보이게 했다. 사실, 현수 군의 섬섬옥수와 뒤태 못지않게 나의 시선이 많이 간 곳은 객석이다. 공연을 보며 이렇게 객석을 노골적으로 오래 본 건 처음인데, 간혹 눈을 감고 감상하다 주무시는 관객도 눈에 띄었다. 현수 군 목소리가 부드럽고 포근해도 때때로 힘차고 격정적인데 주무시다니. (ㅠㅠ) 조금만 집중하면 현수 군 얼굴의 점까지 볼 수 있는 자리에서 주무시는 관객을 보며, 안타깝기도 하고 얼마나 피곤했으면 저럴까 싶기도 했다. 현수 군이 「엄마의 프로필은 왜 꽃밭일까」를 부를 땐, 엄마 생각을 하셨는지 몇몇 분이 조용히 눈물을 훔치셨다.


  꽃을 주제로 우리 가곡과 가요, 외국 가곡으로 꽉 채웠던 이번 콘서트는 아름다운 노래와 더 아름다운 테너, 연주자들의 정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무대였다. 새삼스럽지만 꽃보다 음악보다 사람이 더 아름다웠다.



♬ 혼자서도 잘해요~


  넷이 아닌 홀로 선 무대에서 현수 군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레퍼토리와 분위기로 좌중을 압도했다. 그는 포르테 디 콰트로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관객들을 만났고, 아름다운 가곡들을 선별해 들려줬다. 그가 아니면 저렇게 아름다운 노래가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을 것이다. 다른 때와 달리 그의 얼굴을 거의 못 봐서 몹시 섭섭했지만, 대신 객석을 볼 수 있었다.


  시야는 좀 다르겠지만, 무대 위 아티스트들이 공연 내내 시선을 주는 객석을 이렇게 오래 본 것은 처음이다. 무대를 집중해서 보는 관객의 얼굴은 심오하고 때론 격정적이다. 그래서 집중하는 모습이 노려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마 내 얼굴도 그랬을 것이다. 특히 정색한 채 팔짱을 끼고 무대를 집중해서 보면 (관객의 의도와 달리) 좀 심각해 보인다. 나도 곧잘 팔짱을 끼고 공연을 감상하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말고 좀 웃으며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공연하는 아티스트는 개의치 않을지 모르겠지만.


  소프라노 조수미 씨가 대극장에서 공연할 때 객석에서 껌 씹는 관객까지 다 눈에 들어온다고 말했었는데, 진짜 그렇다는 걸 알았다. 생각보다 객석은 디테일하게 잘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멀지만 때론 가깝다. 그걸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다음엔 무대를 볼 수 없는 이런 자리는 예매하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건, 운이 좀 없었던 게 아니라 고문에 가까운 암울함이다.


  모처럼 의미 있고 좋은 기획으로 우리 가곡 알리기에 나선 김현수 콘서트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앞으로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세상의 모든 노래를 현수 군 성대로 필터링해 듣고 싶은 관객이 어디 나뿐일까. 그리고 형 공연장을 찾은 착한 벼리 군도 솔로 음반 내고 단독 콘서트 하길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테너 두 사람이 함께해도 좋을 듯싶다. (상상만 해도 멋진데.. ㅎㅎ)


  * PS- 같은 날 공연하는 태진 군 콘서트는 사정상 가지 못했는데, 너무 아쉽다. 다음 그의 단독 콘서트는 꼭 갈 것이다. 다음에 또 두 사람이 같은 날 콘서트를 하진 않겠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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