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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아나 Apr 06. 2022

대중교통

우울의 사회

“당신은 대한민국의 시민의식을 체험해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 보시라, 8:00~9:00시, 18:00~19:00시까지의 시간을 가장 추천 드린다.”


시민의식 체험이라는 이벤트를 만든다면 광고 문구로 이것만큼 적합한 문구가 있을까,


내 생각에 공공 이동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시민의식을 몸소 체험해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들은 진정 몸으로 말한다. 눈에는 스마트폰, 귀에는 이어폰, 폰에 지배당한 사람들은 음성을 잃어가는 듯했다.


사람은 의중을 전하기 위해 ‘말’이라는 것을 만들었고 언어는 소통하자는 서로의 약속이다. ‘너’와 ‘나’가 있기에 소통이 존재하고 ‘말’이 존재한다.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벽이나 가림막이 아닌 사람이다. “실례합니다. 지나갈게요.” 딱 한마디면 모르는 사람과의 신체 접촉이 피차 불편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음성이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음을 학습한 듯하다. 이어폰은 의사소통을 위해 발명한 언어를 뒤로하고 몸으로 말하여 문명을 회귀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서로에게 분노를 느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보면, 운이 나쁘면 달에 1번 운이 좋으면 몇 달에 1번 꼴로 싸움판을 구경한다. 서로를 향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남을 탓하는 음성만이 날카롭게 허공을 헤집는다.


도로 위에서 일어나는 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음성을 나눌 수 없기에 신호로 의사소통을 약속했으나 대각선 차에서 회전 깜빡이가 반짝이면, 끼워주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앞차의 뒤꽁무니를 따라간다. 그리고 다음 신호등에서 나란히 서있는 민망한 광경을 마주한다. 심한 경우, ‘감히 네가 나보다 뒤에 있다가 앞질러 나오냐’는 의중을 나타내기 위해 경적을 연달아 눌러대거나 상향등을 깜박거리고 안전거리를 무시하여서 과도하게 밀착하며 보복운전을한다. 더 한 경우 앞질러와, 차를 멈춰 세우고 폭력을 일삼기도 한다는 뉴스 보도도 보았다.


지하철 안에서

용서나 배려를 모르는 분노는 대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그들은 행복하지 않은 본인의 삶 자체가 불만일 수 있거나,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용서가 안되니까 타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일 수도 있다. 물론 자신의 잘못은 알아채지 못하고 타인의 잘못을 매섭게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원래 인간은 기본적인 마음에 ‘너’보다 ‘나’가 옳기에 ‘너’는 언제나 악하고 ‘나’는 언제나 선하다는 전제를 포기하기 어렵다.


타인에 둘러싸여 사는 세상에서 타인을 지옥으로 인식하는 것은 스스로가 지옥의 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자신의 인생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이고, 남 탓에 빠져 허우적대는 지옥을 살게 된다. 이것은 스스로를 존중하는 삶이 아니다. 자존감은 자신은 언제나 옳고 남은 틀리다는 근자감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우울함과 분노, 그리고 자존감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보인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스스로가 느끼기에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보통은 타아와 자아에 대한 존중이 부재한 이들이 분노를 조절하기가 어렵고 타아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존중이 부재한 자아는 외롭고 쓸쓸하여 우울하다.


그렇기에 자존감의 부재는 분노를 끌어올린다. 스스로의 실수에 크게 짜증을 내고, 타인의 작은 행동이나 작은 말 하나들에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가 치미는 것이다. 분노는 에너지를 너무나 많이 소비한다. 때문에 분노라는 자극을 기피하게 되고, 양날의 검을 품은 채 타인과 거리 조절이 불가능한 내 스스로를 공공으로부터 격리하게 되거나, 혹은 자아성찰을 이루지 못한 상태로 사회 속에서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결국 자아성찰이나 마음 챙김은 그들로부터 상처받은 피해자들만이 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휴대폰으로 시야를 축소하고 이어폰으로 귀를 막았기에 조심스러운 몸짓과 나긋한 음성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일까.


경험이 사람을 만들기에 소수의 사람은 나에게 다수의 사람이 되고 내가 본 세상이 세상의 전부가 된다. 우리는 누군가를 아프게 하기 전에 나로 인해 아파진 누군가가 또다시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결국 ‘너’에게 투영되기에, 공격적인 사람들을 보면 혼자만의 치열하고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 측은지심이 생긴다.


우리는 언제쯤 우리가 될 수 있을까,


내 음성이 너에게 닿지 않는 우울한 세상에 마음이 미어진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경험한 소수의 인간들로 하여금 내 마음속 인류애를 상실해 감을 경계하며 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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