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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희 Mar 24. 2024

탁실라의 마지막 도시 '시르숙'

간다라 이야기 #14

지난 편에서 살펴봤던 시르캅 유적에서 동북방향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탁실라의 마지막 고대도시 '시르숙(Sirsukh) 유적'이 있다. 시르캅의 성벽도 두텁고 튼튼하지만, 시르숙의 성벽은 남다르다. 촘촘히 쌓아 올린 석벽, 잘 무너지지 않게 둥그스름하게 마감한 상부 모서리 부분, 약 30m의 등간격으로 설치된 부채꼴 의 튼튼한 치에 이르기까지, 르숙의 성벽의 여러 요소로 부터 이을 쌓아 올린 사람들 성벽 축조의 풍부한 경험이 있었던 사람들임을 유추할 수 있다.


(좌) 둥그렇게 마감한 시르숙의 성벽 상부, (우) 부채꼴 모양이 명확한 시르숙의 치



어떻게 유목민이 성곽도시를 만들었지?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성벽을 쌓은 것은 '쿠샨(Kushan)'이다. 쿠샨은 성벽을 쌓고 땅을 지키는 정주민족아니라, 조상 대대로 말을 타고 떠돌아다니는 것에 익숙했던 유목민족의 국가이다. 떻게 유목민족이 이런 성벽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일까?


쿠샨의 뿌리는 중국 북쪽에서 거주하던 '월지(月氏, Yuezhi)'있다. 월지는 기원전 3~2세기 경 중국의 북서쪽인 둔황과 기련지역을 근거지로 유목생활을 했다. 하지만 흉노의 급성장으로 월지의 대부분은 근거지를 버리고 서쪽의 일리강 유역으로 터전을 옮겼다. 하지만 또다시 오손(烏孫, Wusun)의 공격을 받, 더욱 서쪽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중앙아시아인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 일대에 다시 터전을 마련했다. 불과 반세기 만에 외세의 공격에 두 번이나 근거지를 옮긴 것이다. 이후 월지를 구성하던 다섯 부족 중 쿠샨족이 권력을 잡았고, 국명을 '쿠샨'이라 칭하였다. 


월지의 이동 (출처: 위키피디아)


통치권을 일원화시킨 쿠샨은 영역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방향은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 쪽이었다. 쿠샨이 침공한 1세기 경의 간다라는 기원전 3~2세기 그리스-박트리아가 침공해  후, 기원전 2세기 탁실라를 중심으로 인도-그리스 왕국으로 새로운 왕국을 만들었고, 곧이어 기원전 2세기에 들어선 인도-스키타이, 기원전후에 성립된 인도-파르티아가 난립하여 혼란했던 상황이었다. 쿠샨은 카불 지역과 페샤와르 지역을 손쉽게 병합할 수 있었고 각각에 거점도시를 설치하였다. 탁실라 지역도 1세기 경에 흡수하였다. 이후 인도 본토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일반적으로 1~2세기를 쿠샨의 전성기로 보는데 당시의 영토는 아래의 지도와 같다.


1~2세기의 쿠샨왕국 지도 (출처: Asia Society)


쿠샨의 뿌리를 생각하면 쿠샨은 더욱 흥미로운 왕국으로 다가온다. 쿠샨은 간다라 불교문화를 발전시켜 이를 중앙아시아로 퍼트린 주역으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이들은 흔히들 야만인이라 말하는 유목민들이었다. 어떻게 이들이 불교라는 철학적 종교와 그리스쪽에서 넘어온 예술을 결함시켜 간다라 불교를 이끌어 낸 것일까? 쿠샨이 만든 시르숙의 성벽에서도 유사한 의구심이 든다. 어떻게 유목민들이 오랜 정주 생활을 하며 성벽을 쌓아온 민족들이 만든 것 그 이상의 것을 만들었지 싶다.


이는 유목민에 대한 야만적이라는 편견을 걷어내고, 자유롭고 유연하세 수용할 수 있는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들이라 생각하면 납득이 가기 시작한다. 중국 북쪽에서 흘러온 월지는 중앙아시아를 거치면서 간다라에 이르기까지 그냥 도망쳐 온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정수들을 배워온 것이다. 그래서 중앙아시아의 뛰어난 성곽축조기술을 손에 넣은 것이었고, 간다라에서는 불교와 예술도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었다. 쿠샨은 문화에 대한 관대함을 넘어선 적극적인 수용의 자세가 있었고, 이 힘은 쿠샨이 간다라의 문화적 전성기를 이끌어 내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라 본다.


고대 성벽도시 시르숙의 모습



고대도시 시르숙의 발굴조사


시르숙 유적은 중요도에 비해서 발굴조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발굴조사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이전인 1915-1916년에 영국인 고고학자 존마셜에 의해 이루어졌다. 존마셜은 시르숙에 대해서 남북으로 약 1500야드(1.3km), 동서로 약 1100야드(1km)에 이르는 거대한 도시라고 발굴기록에 남겼다. 그리고 처음에는 카니슈카(Kanishka, 127–150 CE) 시기에 건설되었을 것이라 추측하였지만, 석축기술이나 유물을 통해서 그보다 거슬러 올라간 비마 카시프세스(Vima Kadphises, 113–127 CE)시기에 지어진 것이라고 견해를 남겼다. 다만 주목할 만한 유물들은 거의 출토되지 않았고, 유적이 저지대에 있어 충분한 발굴이 이루어지기도 어려웠다고 기록한다. 아마도 차오르는 지하수로 유구의 보존도 어려웠을 것이다.


존 마셜에 의한 시르숙 발굴조사 기록(1916)


안타깝게도 시르숙 유적에서 거대한 고대도시의 전모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쿠샨인들이 쌓아 올린 성벽은 2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늠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유목민들이 쌓아 올린 성벽'을 볼 수 있고, 간다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낸 쿠샨인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에, 시르숙 유적은 한 번쯤 방문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탁실라의 마지막 고대도시 '시르숙'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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