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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희 Aug 18. 2024

현장법사(1) - 천축으로 가는 길

간다라 이야기 #33

당나라의 ‘현장(玄奘, Xuanzang, 602~ 664)’. 필자가 생각하기에 동아시아 승려 중 가장 인상적인 인생을 살았던 독보적인 인물이 아닐까 싶다. 다방면에서 화려한 인생을 살았던 만큼 그를 한 단어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우선 현장을 부르는 가장 일반적인 호칭 '삼장법사'이다. 삼장이란 부처님의 말씀(경장), 불교의 계율(율장), 경과 율의 주석서(논장)에 통달한 '승려'에게 부여되는 별칭으로, 당대에 가장 뛰어난 학승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장이 평생을 통해 이룩한 불교적 성취를 돌아보그를 삼장이라는 별칭으로 충분히 표현할 수 없음을 알수 있다. 


그를 정의하는 또 다른 직업은 '여행가'이다. 그는 세계적인 여행가 이븐 바투타, 마르코 폴로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놀라운 여행을 했다고 평가된다. 629년(혹은 627년) 중국을 출발하여 서역을 거쳐 인도 전역을 둘러보고 645년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여행은 현장이 직접 작성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와 동시대를 살았던 혜립(慧立) 스님과 언종(彦悰) 스님이 현장의 일생에 대해 남긴 '자은전(慈恩傳)'에서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다. 이 기록물들은 단순히 여행기에 그치지 않고, 지리지 혹은 역사서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게다가 여정 중 그는 일반 여행객이 아니라 훌륭한 '외교관'급의 성취를 얻었다. 수많은 통치권자들을 만나고, 당나라와의 관계를 개선시켰다. 인도에서는 불교뿐 아니라 힌두교, 자이나교 등 수많은 사상가들과 논쟁을 통해 당대의 철학적 사유를 크게 발전시킨 '철학자'였다.


귀국길에는 520 상자의 불경을 당나라로 가져왔으며, 평생을 번역에 매진하여 1338권의 불경들을 번역하는 한편으로 후학들도 교육했다. 한 마디로 정리하기도 불가능한 그의 놀라운 성취는 그가 입적하기 이전부터 사람들에게 알려져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승려, 여행가, 외교관, 철학자, 번역가 그리고 교육자로 7세기에 한 획을 그었던 '현장법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도쿄박물관 소장 삼장법사상 ⓒ Tokyo National Museum



위대한 여정의 시작


629년(혹은 627년), 현장은 용단을 내렸다. 출국을 엄격히 금했던 당나라 황실의 명령을 어기고, 서역을 통해 천축국으로 향했다. 다른 여러 승려들과 함께 황실에 몇 차례 출국 허가를 청하였지만 불허되었다. 그럼에도 현장은 홀로 출국을 강행했다. 진리에 대한 갈구가 컸던 것인지 혹은 젊은 승려의 간이 컸던 것인지, 국법은 크게 여의치 않고 옥문관(당시 당나라 서쪽의 마지막 관문)을 떠났다. 다행스럽게도 불심이 깊었던 양주의 관리자 '이창'은 현장이 불법출국을 할 것이라는 첩보를 받고서도 이 것이 구법여행임을 알고 눈감아 주었다.


현장에게 두려웠던 것은 오히려 여행길이었다. 메마른 사막을 횡단해야 하고, 하늘에 맞닿은 설산을 넘어야 했다. 도처에 산짐승이 즐비했으며, 강도나 산적은 언제 나타날지 몰랐다. 지금처럼 내비게이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략적인 지도나 애매한 글로 남겨진 정보만 믿고 수 만리 길을 가야 했다. 모든 것이 여행 초보자로서 첫 도전이었다.


비록 대의를 품고 떠나는 것이에도 밀려오는 불안은 현장도 어쩔 수 없었던 듯 하다. 그의 행보를 통해서 그가 느꼈을 불안을 짐작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장안에서 '하홍달'이라는 유명한 점쟁이로부터 점을 보았는데, "붉고 야윈 늙은 말을 타고 사막을 건너갈 것"이라는 점괴를 받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옥문관을 나서기 직전, 한 늙은 노인이 늙고 야윈 말을 추천하며, "지금 그 말은 어려서 긴 여행을 못 버틸 것이다. 대신 이 말은 열 다섯 번도 넘게 사막을 횡단한 말이니 이 말을 가지고 가라."고 했다. 현장은 점쟁이의 말과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에 가지고 있던 젊은 말과 늙은 말을 바꾸기로 했다. 아마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미신이라도 믿고 싶었던 듯하다.


안시 유림굴 3 굴에 그려진 서유기의 초기형태 ©Mogao Grottoes



불운과 행운


현장은 옥문관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운에 맞닥뜨렸다.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들어가는 초입길을 안내하기로 했던 서역인 '반타(Bandha)'가 밤이 되자 강도로 돌변한 것이었다. 현장이 할 수 있는 것은 염불을 왜는 수 밖에 없었다. 마음이 약해진 반타는 현장과 늙은 말을 두고 떠났다. 이렇게 사막에 홀로 남겨졌다. 큰 각오를 하고 떠난 만큼 돌아갈 수 없었다. 현장은 묵묵히 서쪽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메마른 사막에서 5일 밤낮을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길을 잃었다. 현장은 환영과 환청을 겪으며 쓰러졌다. 그런데 천만다행인 것이 늙은 말이 정신을 잃은 현장을 오아시스로 이끌었다. 결국 점쟁이의 말을 듣고 산 늙은 말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고창의 고성 유적 ⓒ flickr


첫 고비를 넘긴 현장은 고창(Gaochang)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현장은 여행을 성공할 수 있게 해 준 큰 은인을 만났다. 바로 고창의 왕이었다. 불심이 돈독했던 고창왕은 현장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왕은 밤낮으로 현장의 법문을 청했고, 심지어 현장에게 고창의 국사가 되어달라며 길을 떠나지 못하게 만류했다. 하지만 목표가 명확했던 현장은 왕의 청을 거절했다. 대신 1개월간 고창의 사람들에게 불법을 강의하고, 천축에서 돌아오는 길에 3년간 체재하며 머무르기로 약속했다. 훗날 현장 천축에서 돌아올 때, 이 약속을 지키고자 일부러 육로로 돌아왔는데 그때 고창은 이미 망하여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왕은 현장이 풍족한 여행을 할 수 있게 지원했다. 황금 100냥, 은전 3만 매, 비단 500 필, 말 30 필, 25명의 일꾼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20년간 풍족한 여행을 하여도 충분한 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있는 24개 나라의 왕들에게 길을 잘 통과하고 여행을 도와주도록 각각 서신을 써주었다. 덕분에 현장의 여행은 밀출입국자의 여행에서 국빈의 여행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쿠차의 왕과 왕비 ⓒ Public Domain



환대가 이어진 인도로 가는 길


현장은 사막의 오아시스 국가들 서돌궐의 통치자들 모두로부터 환대를 받으며 여행길을 계속했다. 천 개의 석굴이 있는 카라샤르(Karashahr), 쿠마라지바가 태어난 곳이자 키질 석굴로 유명한 쿠챠(Kucha), 오아시스 도시 악수(Aksu)를 거치며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길을 나아갔다. 이어 눈으로 뒤덮인 천산산맥을 넘었다. 가장 높은 한텡그리(Khan-Tengri) 봉은 높이가 7,000m가 넘었다. 눈사태와 추위 배고픔으로 일행 중 10중 3-4는 목숨을 잃었다. 얼지 않는 호수 이식쿨(Issykkul)에서 휴식을 취하고 서돌궐의 대 칸을 만났다. 대 칸 고창왕의 편지를 가져온 현장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또한 현장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고창왕이 했던 것 처럼 구법 여행을 만류하였지만 현장은 그의 결심을 보이며 거절하였다.


현장은 대 칸의 소개장과 지원을 받고 여행을 이어나갔다. 타슈켄트(Tashkent), 사마르칸트(Samarkant), 테르메즈(Termez)를 지나 쿤두즈(Kunduz)까지 각지의 왕들을 만나며 환대받는 여행을 계속했다. 이들이 서돌궐의 휘하에 있는 왕국들이었기도 했지만, 왕들과의 인맥 점 쌓아가면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 예를 들어 쿤두즈의 국왕은 현장을 특히 좋아했던 고창왕의 매부였고, 고창왕의 친서를 들고 방문하였으니, 현장에 대한 대접은 단순한 방문객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현장은 불교가 융성했던 발흐(Balkh)를 거쳐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바미얀(Bamiyan)에 도착했다. 현장은 2001년 탈레반에 의해 파괴된 바미얀 대불을 보고 기록을 남겼다. '왕성 동북쪽 산에 140-150척의 불상과, 100여 척의 석가상이 있다.' 실제의 높이가 각각 55m와 38m로 매우 정확한 기록이다. 또한  기록은 바미얀 대불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다. 또한 흥미로운 풍습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바미얀의 왕은 무차대회(공양과 보시를 하는 불교 행사)를 열고, 자신의 왕비 포함한 모든 소유물을 보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차대회 이후 관료들이 보시를 받은 승려들 흥정해서 되사왔다한다.


현장은 카시피(Kapisi) 평원을 지나 천축의 초입, 간다라에 도착했다. 간다라 지역에서는 잘랄라바드(Jalalabad), 페샤와르(Peshwar), 다렐(Dalel), 훈드(Hund), 탁실라(Taxila)를 거쳐가며, 주요 스투파와 유명한 불교 성지들을 하나씩 방문하며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간다라에 대한 이야기는 '현장법사가 본 간다라' 편에서 자세하게 다루려고 한다.


현장의 여행로


비록 밀출국자로 중국을 출발하였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빈 대접을 받으며 인도에 도착한 현장의 여정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인생이 잘 풀리자면 이렇게까지 잘 풀릴 수 있구나 싶을 정도이다. 사실 왕들의 환대가 이어졌다고 하더라도, 설산과 낭떠러지가 이어진 산맥을 지나면서 많은 일행들이 죽었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도적들을 만나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했었다. 어떤 경우는 가진 물건을 다 넘겨주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기지를 발휘해 도망치기도 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도적들이 반성을 하고 함께 불공을 드리기도 했다.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여행이었다.


천축국에서의 활약상과 중국으로 돌아온 후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나가고자 한다.



참고자료

현장 저, 권덕주 역, "대당서역기", 올재, 2012

혜립 저, 김영률 역,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동국대학교한글대장경

신소연, 김민구 역, 샐리 하비 리긴스 저, "현장법사", 민음사, 2010

자현스님, "붓다로드", 유튜브




2009년,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을 공부하고자 일본의 국사관 대학 석사과정에 막 입학을 했을 때다. 연구실에는 나 말고 두 명의 동급생이 있었는데, 한 명은 요르단의 페트라를 연구하고자 하는 중년의 여성 분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샤미센을 취미로 하며 앞으로 무엇을 할지 정하지 못했던 과묵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 과묵한 청년의 할아버지가 꽤나 유명한 사람인 듯했다. 수업에 들어오는 교수님들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분의 손자분이시군요."라는 것이었다. 모두가 당연히 알고 있다는 뉘앙스였기에 할아버지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해 겨울 그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세상이 떠들썩해졌다. 자연스립게 그의 할아버지가 평생 실크로드를 주제로 그림을 그려왔던 '히라야마 이쿠오'라는 거장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의 고별전에 초대받았다. 사막, 낙타, 승려, 달과 같은 주제로, 몽환적인 분위기로 그려졌진 그림들로 가득했던 전시실을 기억한다. 다만 앙코르만 바라보던 25살의 어린 한국인 유학생에게는 그 그림들은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는 하지만, 왜 그 때는 실크로드에 관심이 없었는지,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크다.


히라야마 이쿠오, 불교전래와 여행의 궤적 특별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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