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년경 인도의 서북쪽인 간다라 지역을 통해서 인도에 도착한 현장은 643년까지 약 14년동안 인도 곳곳을 누비며 활동했다. 원래의 목적이었던 불경 수집에 더불어,저명한 승려와 사원을 방문하여 불교의 가르침을 배웠다. 또한 부처님과 관련된 성지들을 순례하였다. 이런 활동 자체도 대단하지만 대당서역기를 통해서 남긴 상세한 기록은 그 활동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그의 활동 중에서 불교 성지들을 방문하고 남긴 기록 부분도 흥미롭다.현장이 인도를 방문한 시점은 이미 부처님이 돌아가신 시점으로부터 천 년이 훨씬 지난 뒤였기에 성지들은 이미 오래된 유적이 된 뒤였다. 황폐해진 상태거나 건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많은 부분은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복원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교사를 깊이 있게 공부한 현장에게 있어 그 역사의 현장을 방문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역사를 공부하는 우리가 해당 문화유산을 직접 보고싶어져 답사를 가게 되는것과 비슷한 심정이 있지 않았나 싶다.
부처님과 관련된 장소 중에는 8대 성지로 꼽히는 곳들이 있다. 우선 싯다르타가 태어난 룸비니(Lumbini),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Bodigaya), 첫 설법의 장인 사르나트(Sarnath), 열반에 이른 쿠시나가라(Kusinagara)는 특히 중요한 4대 성지라 불린다. 여기에 대신변을 보인 스라바스티(Sravasti), 술에 취한 코끼리를 제압했던 라자그리하(Rajagrha), 원숭이에게 꿀을 받았던 바이샬리(Vaisali), 도솔천에서 다시 내려온 상카시야(Sangkasya)까지 4개소가 더해 8대 성지라 불린다. 이번 글에서는 현장이 8대 성지를 방문하고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려 한다.
룸비니(Lumbini)
룸비니는 기원전 623년(혹은 563년) 부처님이 태어난 곳으로, 지금의 네팔 중부의 남쪽 편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산기가 찬 여성들은 친정으로 돌아가서 아기를 낳는 관습이 있었다. 카필라바스투 왕국을 다스리던 정반왕에게 시집간 마야부인은 임신 후 관습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 친정인 데바드하(Devadha)로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룸비니에 이르렀을 때, 산통이 찾아왔고 갑작스럽게 출산을 하게 되었다. 마야부인은 룸비니의 언덕 위에서 오른손으로 나뭇가지를 붙잡고 서서 출산을 하였다. 싯다르타는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세상에 태어난 싯다르타는 일곱 걸음을 내딛으며, 그 유명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싯다르타의 탄생(페샤와르 박물관)
현장은 카필라바스투국을 방문한 당시 룸비니를 다녀갔다. 대당서역기에서 석가의 탄생과 관련된 설화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주요 내용 중에는 '붓다가 인도 달력상의 2월 8일에 태어났는데 이는 중국의 3월 8일에 해당한다.', '룸비니 동쪽에 있는 두 스투파는 두 마리의 용이 태자를 목욕시킨 곳에 아소카 왕이 지은 것이다.', '싯다르타가 태어나 천상천아 유아독존이라 말하였고 또한 이번 생은 마지막 생으로 앞으로 윤회하지 않을 것라고 말했다.'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현장의 기록은 룸비니와 부처님 탄생에 대한 사료 중에서도 상당히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자료이다.
룸비니는 부처님의 사후부터 오랫동안 불교도들의 순례지로 활용되었다. 불교왕으로 유명한 아소카왕도 이곳을 방문하였고, 석주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15~16세기 이후로 황폐화 되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다가, 1896년 포이러(A.Fuhrer) 박사가 흙더미 속에서 이곳에세워진 아소카 석주를 확인하여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룸비니에서 발견된 아소카 석주, 싯다르타의 탄생에 대한 비문이 확인되었다. ⓒ Public Domain
보드가야(Bodigaya)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6년간 고행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 방법은 극단에 치우친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고행을 중단하였다. 이어 니란자라(Lilajan) 강변에서 목욕을 하였고, 두 명의 여성이 보시한 우유죽을 마셨다. 그리고 보리수나무 아래에 정좌를 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명상에 들었다. 이후 마왕 마라가 나타나 방해하였지만, 부처님은 오른손으로 땅을 짚어 땅의 신을 불러내어 자신의 공덕을 증명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 난 곳이 보드가야이다.
싯다르타 고행상(라호르 박물관)
대당서역기에는 보드가야의 곳곳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다. 특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곳과 관련해서 전하는 이야기들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현장의 특별한 마음이 느껴진다. 보리수나무와 금강좌, 열반 후 여러차례 보리수나무를 죽이려 했지만 다시 자라났다는 기적들, 아소카왕이 건립한 보드가야 대탑, 마왕 마라의 방해, 범천의 설법 요청, 우유죽을 보시했던 두 목녀의 집, 무찰린다 용왕의 연못, 사천왕의 봉발, 싯다르타가 목욕한 니란자나 강 등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후에 행한 세세한 행동들과 이와 관련된 장소들에 대해서 매우 자세하게 기록을 남겼다.
지금의 보드가야에는 높이 55m의 마하보디 사원이 있다. 이는 아소카 대왕이 건립한 이후에 새롭게 증축한 것인데, 현장은 지금보다는 작은 모습의 탑을 보았다. 보드가야는 지금도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성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데, 현장이 다녀 간 시점과 비교하면 사뭇 다를 듯하다. 하지만 이를 비교해서 살펴보면 더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1899년의 마하보디 사원 ⓒ Public Domain
사르나트(Sarnath)
사르나트는 힌두교의 성지로 유명한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사슴이 많은 숲이라 하여 '녹야원'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부처님이첫 번째 설법을 한 곳이다. 법의 바퀴를 처음 돌린 곳이라고 하여 '초전법륜지'라고도 불린다. 부처님은이곳에서불교의 핵심이 되는 가르침을 전하였다.중도를 설법하였고, 팔정도와 사성제를 가르쳤다. 첫 번째 청중은 다섯 명의 수행자로 싯다르타가 고행을 하다가 만난 사람들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여기서 중도를 설법하였고, 팔정도, 사성제를 가르쳤다. 또한 제석천과 범천, 사천왕 등이 나타나 가르침을 들었다고 한다.
사르나트에 대해서는 대당서역기의 바이샬리국 편에 기록되어 있다. 현장이 방문했을 때에는 이곳에 천 오백의 승려들이 기거하는 녹야가람이라는 사찰이 있었고, 그곳에서 초전법륜상을 보았다고 기록한다. 과연 이 상이 불교조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사르나트 출토 초전법륜상(사르나트 박물관 소장)과 같은 것일지 궁금하다. 또한 현장은 아소카 왕이 건립한 스투파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미 많이 손상된 상태였다 한다. 또한 사자상이 조각된 석주도 묘사하고 있는데, 이 석주는 아소카의 석주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다. 특히 사자의 발치에 있는 바퀴모양의 심벌은 인도의 국기에도 사용되고 있다. 현장이 기록한 이 사자모양 주두는 1905년에 발굴을 통해 새롭게 발견되어 의의가 크다.
1905년 사르나트 발굴조사 ⓒ Public Domain
쿠시나가라(Kusinagara)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약 45년간 가르침을 전하다가 8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그 장소가 쿠시나가라이다. 당시 '춘다'라는 대장장이로부터 돼지고기 토란 죽을 공양받았는데, 탈이 나서 열반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입적 후에는 제자들이 부처님을 화장하였고, 그 후에 나온 유골과 재들을 분배하여 여덟 개의 탑을 만들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장은 대당서역기 쿠시나가라국 편에서 이 지역에 대해 기록하였다. 현장은 부처님이 입멸한 성지를 방문하고 허물어져 가는 아소카 대왕의 스투파와 석주를 보았다. 또한 부처님을 다비한 곳에 지어졌다는 스투파를 방문하였는데, 흥미로운 부분은 '마음을 가다듬고 찾으면 불사리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고 기록한 점이다. 또한 부처님에게 마지막 공양을 드린 춘다의 집터라 불리는 곳도 방문했다. 그 외에도 입멸과 관련된 다양한 전설을 기록하고 있는데, 입멸 후 마야부인과 금강역사가 슬퍼했다는 이야기, 제자 카샤바가 올 때까지 향나무에 불이 붙지 않았던 이야기, 그리고 사리를 여덟 등분하려고 하였더니 천신과 용왕이 나타나 자신들에게도 나누어 줄 것을 요청하여, 우선 3등분 한 뒤 이를 다시 여덟 등분했다는 이야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