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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May 26. 2017

지중해의 진주, 타오르미나

이탈리아 여행 에세이-예술가들이 영감을 얻었던 곳

중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 타오르미나이다. 옛 건물을 운치있게 꾸민 옛 사진관이 사람들을 맞는다.

"Many artists have sojourned in Taormina, the pearl of the Mediterranean..."


바다쪽에서 산을 올려보았다. 거기 정상쯤에 작은 도시가 걸터 앉아 있었다. 구름도 중턱에 턱 걸릴 법한 그런 높이였다. 왜 저런 높은 곳에 도시를 세웠을까? 그것도 2500년 전에... 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이해가 안됐다. 도대체 뭘 하며 먹고 살았을까? 농토도 없는 바위산인데. 바다에서 물고길 잡았다 쳐도 저기 꼭대기까지 올라가려면 보통일이 아닐텐데. 또, 산 정상이라면 우물도 없었을텐데 물은 또 어떻게 날라다 마셨을까? 테크놀로지와 과학적인 물음이 올라오자 갑자기 신비로운 도시의 이미지가 사라졌고 여행의 흥미도 급감되었다. 그래, 접어두자. 그러자 문득 예루살렘이 떠올랐다. 언덕위에 다윗 왕이 세웠다고 하나 사실 지금은 평지와 다름없는 예루살렘이었다. 요한 묵시록은 이 ‘지상의 예루살렘(Earthly Jerusalem)’과 높은 곳에 솟은 종말적이고 예언적인 ‘천상의 예루살렘(Heavenly Jerusalem)’을 기록하고 있다. 사방 몇 킬로미터가 되는지 자상하게도 기록하였다. 구약의 에제키엘 예언자도 이를 비전(환상. Vision)으로 보고 기록하였다. 지상의 예루살렘이 아닌 천상의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적지이다. 한번도 가 본적 없는 그곳을 그리스도인은 신앙에 의지하고서 순례자로 걸어서 가야 한다. 이곳 바다에서 타오르미나를 올려다 보면 꿈같은 천상의 예루살렘을 떠올리게 했다. 저기 저 높은데서 보면 세상이 다 보일것 같았다. 그런데 세상에 대해서 다 알수도 있을까? 다시 여기 고대 ‘이오니아’파 철학자들이 하루같이 바라보았던 쪽빛 이오니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천상의 예루살렘에 가면 지상의 예루살렘이 보일까? '이오니아'파 철학자처럼 타오르미나에 오르면 세상사는 지혜도 설파할 수 있을까?  


타오르미나의 거리. 길거리에서 그림을 파는 게 보인다. 누구라도 타오르미나 한폭을 가져가고 싶어한다.


약 250미터의 깎은 듯한 산세에다 거의 정상 부분에 ‘타오르미나(Taormina)’는 세워졌다. 그래서 타오르미나는 2500년이란 세월을 오롯이 품은 옛 도시였다. 거기에선 시간관념을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 난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순례자처럼 그리고 철학자처럼 배회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망상이었다. 옛 사람들처럼 걸어서 올라간게 아니라 50인승 대형코치를 타고 올라갔다. 산중턱까지는 서울역 고가다리처럼 산을 에우며 둥글게 만들어 놓은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지났다. 약간 과장해서 백척간두였다. 그 회색의 시멘트 도로는 산중턱에 불룩 튀어나와 산을 휘돌아 감는 곡선임에도 내겐  흉물이었다. 그 위를 무거운 코치는 빙글빙글 돌며 산 정상의 도시가 아닌 그리 크지 않은 산중턱 주차장에 우리를 떨궈 놓았다. 다시 무료로 운행하는 미니벤을 나눠 타고서 대형차가 못오르는 좁고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가야 했다. 웬걸. 올라가니 여긴 명동이나 남포동처럼 화려했다. 그리고 사람들로 붐볐다.


친절하고 구수한 시칠리아 농부. 담배를 입에 물고선 담벼락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옛 도시의 고풍스런 정문이 보였다. 일명 ‘메시나의 대문’ 이었다 그리고 대문안으로 바로 뻗은 거리의 끝은 ‘카타니아의 대문’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도시가 아닌 사실 타운 정도의 크기였다. 그것도 산 정상의 이곳 옛 구역은 더 작았다. 그러고보니 시칠리아의 큰 두 도시,  '메시나''카타니아'의 중간에 사랑하는 자식같은 타오르미나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이 메시나의 정문에서 왼쪽으로 돌면 고대 그리스 극장이 아직도 남아 연극과 음악 콘스트를 공연했다. 다시한번 지금 이태리의 시칠리아가 옛날 옛적엔 그리스의 영토였고 그 찬란한 철학과 문화를 고스란히 받았다는 걸 보여줬다.


산위 비틀진 곳에 세워진 역사깊은 도시라 조그만 계단길 골목이 곳곳에 있다.

걸출한 입담을 자랑하는 시칠리아 가이드가 메시나의 대문에 약속 시간이 훌쩍 지난 뒤에야 나타났다. 두 팔을 크게 벌리며 미안하다고 했다.  여긴 시칠리아이고 이 시칠리아 시간에 맞출수 밖에 없었다. 가이드는 고대 극장으로 올라 가는 사이 두번이나 거리의 가게 앞 멈추고 타오르미나의 특산품을 소개했다. 모두들 신기해하며 그 가게에서 물건들을 샀다. 그런데 극장 구경을 마친뒤에도 서너번의 특산품 가게를 더 소개했다. 그리고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맛있는지, 조금씩  맛도 보여주었다. 우리중의 한명이 눈치가 빨랐다. 그 많은 선물 가게중에 왜 이 가게들에만 멈추었을까? 아하, 사실은 이 가게들은 가이드의 친구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자기 친구집 가게마다 멈추어 소개하며 물건을 사도록 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자분들은  한바탕 까르르 웃었다. 가이드는 머쓱해 했지만 시칠리아의 끈끈한 정이라 오히려 좋았다.

타오르미나의 중심광장. 중세의 성당이 가운데 보인다. 뒤돌아 보면 깍아지른 듯한 절벽과 그 아래로 푸른 이오니아 해가 바로 보인다.


일자로 뻗은 거리의 양편으로 시칠리아 특유의 아기자기한 가게들과 레스토랑 그리고 바(bars)와  카페(Cafes)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코르소 움베르토 1세(Corso Umberoto I)’라 이름붙은 이 일자형 거리는 타오르미나의 중심이며 대부분의 볼것들이 여기 다 모여있었다. 각 가게마다 특유한 데코레이션을 경쟁하며 건물들도 일률적이 아닌 각자의 개성들을 뽐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난 시칠리아식 베란다가 있는 건물이 좋았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명품을 파는 가게들도 많이 있어 파리와 밀라노에 뒤지지(?) 않는다고 했고 관광객을 유혹한다고 했다. 내 눈에는 뭐가 명품인지 뭐가 싸구려인지 구별이 안갔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한 시칠리아의 명품 커피만은 마시고 싶었다.

길거리엔 많은 기념품점과 과일주스 그리고 유명한 시칠리아 아이스크림을 판다.


이곳 타오르미나는 빅토리아 시기, 즉 19세기부터 유럽과 미국의 예술가나 문인들 그리고 황족들의 인기있는 휴양지가 되었다. 산아래 아름다운 바다와 해수욕장이 있어 금상첨화였다. 그리고  독특한 지형과 풍경때문에 여기서 영감을 받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 사람들도 많았다. 이름도 기억안나는 추운 유럽의 최북쪽 아이슬란드의 어느 작가는 이 더운 유럽의 남단 타오르미나에서 글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았단다. 해마다 노벨상 시즌이 오면 왁자지껄한 노벨문학상 하나없는 우리나라인데 이 소국(인구로)이 몇십년전에 벌써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데 어이가 없었다. 기억도 안나는 이름이라면 그렇게 유명한 문필가는 아니지 싶었다. 가이드도 기억못했다. 하여튼  ‘고은’시인이 언젠가 정말 받았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다. 가까운 프란치스코회 카푸친 성당으로 들어갔다. 생전 처음으로 우리나라 문인도 노벨문학상 받게 해달라고 염원했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톨스토이에게 상도 주지 않은 그런상인데 뭘...  

여러 성당 중 하나. 붉은 기운이 도는 벽 색깔이 아름답다. 늦은 오후 황혼녁에 그 색이 피어난다. 꼭 들러보아야 할 산토 니콜라스 성당입구.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타오르미나를 방문한 유명인사들이 엄청많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니콜라스 1세 황제, 독일의 대문호 괴테, 음악가 바그너, 그리고 영국의 문인 오스카 와일드도 여기에 머물렀다고 했다. 철학자 니체는 여기에서 아예 그의 역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Thus Spoke Zarathustra)’을 썼다고 한다.  영국의 D. H. 로렌스(D. H. Lawrence)도 그의 독일인 아내와 여기 머물며 시와 소설을 썼다고 했다. 거기에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때, 그의 일대기가 영화로도 만들어진 미국의 ‘트루만 카포테(Truman Capote)’가 여기 머물렀다고 했고, 극작가  ‘테네시 윌리암스(Tennessee Williams)’ 그리고 프랑스의 ‘쟝 콕토(Jean Cocteau)’ 도 여길 방문했다고 하니 기도 대신에 커피나 마시면서 그 이유나 생각해 봐야겠다고 광장 성당 옆의 카페로 들어갔다.

바로크식 건물이 타오르미나엔 즐비하다. 특히 스페인 통치시기중에 건축되었다.


그 카페는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던 카페라고 했다. 웨이트는 그 이름들을 줄줄이 외웠다. 특히 유명한 영화배우들의 이름이 많았다. 리차드 버튼과 엘리자벳 테일러도 나왔다. 그가 쟁반에 들고 온 아이들 소꿉장난같은 이태리의 커피(에스프레소)는 미국식으로 커피를 마시는 영국과 달랐다. 진하고 아주 양이 작은 에스프레소를 ‘더블’로 시켜 마시고 카페 어딘가에 남아있을 예술가들의 흔적을 눈뜨고 찾아 보기 시작했다. 어디, 어느 구석에 영감(inspiration)이 숨어있을까? 카페인 때문에 머리는 맑아지기 시작했다. 카페 앞의 광장을 제대로 보았다. 그리 크지않은 광장이었다. 이곳은 특이하게 ‘4월 9일 광장(Piazza IX Aprile)’이라고 불렸다. 4.19 광장으로 착각했다. 김주열 열사가 순간 떠올랐다. 이승만 독재를 물리친... 광장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커피를 비우고 광장의 다른 쪽 끝으로 어슬렁대며 가로질러갔다. 아, 거기엔 깍아지른 절벽이 있었다. 그러나 절벽보다 거기서 보이는 지중해의 바다는 문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그렇구나! 진한 커피로도 알아내지 못한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여기 있었구나...

중세건물안의 상점.


여기선 ‘산수’, 즉 산과 물이 다 있어 산의 정기도 받고 물의 정기도 받을 수 있는 풍수상의 요지로 보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와 중세와 현대를 막론하고 이런곳에 살고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떻게보면 인간은 단순하고 똑같다. 예술의 원천과 영감은 사실 그들 머리에서 나오는게 아닌 바깥, 즉 그들이 몸담은 자연에서 오는게 아닐까? 에드문드 버크는 그래서 예술철학에서 미(Beauty)와 다른 숭고(Sublime)를 고안해 내었다. 그리고 영국의 화가 ‘터너’는 신발이 닳도록 무거운 화구를 짊어지고 영국 곳곳을 누빈 이유가 여기 있지 않았을까? 더구나 지겨운 영국날씨까지 감안하면… 난 그래서 영감을 찾아 헤메던 터너를 존경하지 않을수 없었다. '터너'의 그림들을 떠올리며 풍경에 맟추어 보니 더 눈을 뗄수가 없었다. 가슴에 담아 두어야지 하며 스마트 폰을 가방에 도로 집어넣었다. 한참만에 등을 돌려 다시 가로질러 온 광장을 보았다. 정면에 있는 성당이 산을 배경으로 고적하게 서 있었다. ‘에트나(Etna)’라는 소리가 웅성거리며 들렸다. 왼쪽을 보니 삼각형 산이 어렴풋이 보였고 거기 정상이 활화산인 에트나 화산이라고 했다.


"예술적 영감의 화산은 언제 터질까"


 우리네 인생처럼 예고없이 찾아올까? 성당으로 다시 갔다. 끊임없는 외세의 침입과 예고없는 자연재해로 예고없는 인생을 경험한 시칠리아 사람들이 그래서 신앙심도 깊을까? 믿을건 단 하나. 그분이라고...

성당 안 풍경.


움페르토 1세의 거리 끝에 카타니아의 대문이 있었다. 그 쪽으로 걸어가 왼쪽에 있는 대성당을 방문했다. 그리 크지 않은 성당이었지만 볼것은 많았다. 성당은 ‘두오모 광장(Piazza del Duomo)’에 있었고 13세기에 완성됐다고 하니 거의 7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가까이엔 성당과 같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바로크식 분수가 있었다. 이 성당은 ‘바리의 니콜라스 성인(Saint Nicholas of Bari)’에 봉헌되었는데 이태리 동쪽 연안의 ‘바리(Bari)’는 '파드레 비오' 성인의 ‘산 죠반니 로톤도’에서 그리 멀리않은 아드리아해에 면한 항구 도시이다. 우리가 잘 아는 크리스마스의 ‘산타 클라우스’의 원 이름 ‘세인트 니콜라스’가 ‘산타 클라우스’로 변한 것이다. 바리의 대성당에 이 니콜라스 성인의 유물이 아직도 있다고 한다. 산타 클라우스의 이름을 지닌 타오르미나의 이 대성당은 겉보기에 참으로 견고하게 지어졌다. 그래서 꼭 성채처럼 보이기도 했다. 외세의 침입이 잦아 그러했으리라. 그러나 성당안은 고딕원형으로 잘 보존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장미창(장미꽃 모양의 스테인드그라스. 고딕 성당의 대표적 심볼. a rose window)도 아름답게 서쪽 벽 끝에 있었다.

사시사철 관광객이 붐빈다.


거리로 다시 나왔다. 해가 뉘엿 뉘엿 저물고 있었다. 밤이되면 다시 인간의 발명품인 전기불을 빼면 여기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을 것이다. 대낮에 보였던 그 숭고의 풍경은 어둠속에서 아름다운 자취를 숨길 것이다. 그러나 낮에 카메라로 찍어댄 수많은 풍경들을 사람들은 꺼내 볼 것이고 타오르미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이야기 할것이다. 그렇다. 시인은 시로 읇고, 화가는 그림으로 그려서 타오르미나의 풍경을 우리들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린 그새 참지 못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코치 안에서 벌써 이야기 보따리를 풀고 있었다.


타오르미나의 수많은 이야기를…


마차의 바퀴를 가게 앞에 전시해 놓았다.
시칠리아 산 농산물을 파는 가게 앞의 데코.
베란다에도 꽃이나 식물을 키워 멋을 내었다.
카타니아 대문쪽 광장. 바다말(Seahorse) 상.
아무도 없었다. 왜?
심플하지만 지중해의 신선한 올리브 유를 쳐서 먹으면 에피타저로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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