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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n 22. 2017

'나폴레옹의 길'을 따라 피레네를 넘다

산티아고 순례 에세이-

-
피레네 국경
'나폴레옹의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이더라.
오르고 또 올라도 정상은 보이지 않더라.

그러나,...
거기엔 정상도 있었고
끝도 있었다.

-


밤새 피레네 산자락 '상쟝 삐에 드 뽀르(Sant Jean Pied de Port)'의 '호텔 까뮈'의 창문은 드르륵 이를 갈아대며 나의 잠을 방해했다. 온밤을 뒤척이다 아침 7시 쯤에 일어났는데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조용한 아침이었다.

산티아고 순례의 첫째 날이다. 정확히 8시에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인 할매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었다. 나외엔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얘기하기 좋아하는 호텔 주인 할배는 옆 테이블에서 어제밤에 못 물어봤던 질문들을 쏟아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뭘 하는지, 어떻게 이 순례길을 알았는지 등등. 난 늦으면 안된다는 부담감에 제대로 대화를 즐기지 못해 미안했다. 할배가 안 늦다고 얘기해 주셨지만 부담되는 건 사실이었다. 크로아상을 그냥 손에 들고 먹으며 스마트 폰 구글 지도를 열어 어디로 가야할 지 대강 점검했다. 아침을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 이것저것 다 챙겼는지 마지막 점검을 했다. 배낭을 짊어진 뒤 난 호텔방 큰 거울 속에 나를 비추어  보았다. 웃음이 나왔다. 셀피를 찍으려다 그만뒀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고 어색했다.

난 지금부터 한 달간 나그네이자 순례자이다. 목월 시인이 읇었듯이 “구름에 달가 듯” 걷고 걸어 목적지 산티아고를 한달 뒤에 도착할 계획이다. 낭만적인 생각이 잠깐 스치곤 이내 잘 할수 있을까 의문의 먹구름이 끼었다. 이런저런 근심으로 아침 커피를 두잔이나 마셨어도 머리 속은 아직 정리가 덜 되었다. 아침 9시 30분. 상쟝 거리에 나와보니 기대했던 많던 순례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다시 슬슬 기어 올라왔다. 도보순례뿐 아니라 늦는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한다. 특히 인생에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 따라잡아야 한다는 부담과 두려움이 있다. 산티아고 첫날부터 이 두려움이 내겐 있었다.

스마트 폰의 구글 맵을 다시 살펴보고 가는 행선지를 살펴보았다. 작은 마을임에도 두 갈래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나폴레옹의 길'이라 불리고  다른 하나는 '샤를마뉴 대제'의 길. 이 두 걸출한 프랑스의 영웅들도 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자기 욕심을 채우려 넘었다. 나폴레옹은 더구나 거만하게(arrogant) 한마디 했다.

“이 피레네를 넘으면 유럽이 아니야”

스페인 사람들은 이 말에 꽤나 불쾌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스페인에 잔학한 짓을 저질렀다. 그런데도 프랑스의 화가인 ‘쟝 쟈끄 다비드’는 너무나 잘 알려진 나폴레옹이 칼을 들고 말위에서 피레네를 넘는 그림을 그렸다. 내가 중학교 학생이었을 때 내 책받침의 그림이 바로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 밑에 쓰여진

“나의 사전엔 불가능이 없다.”

그 땐 참 멋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스페인 화가 ‘고야’의 나폴레옹 군대의 스페인에서의 잔학상을 그린 그림들을 보며 내 생각을 달리했다. 그는 결코 영웅이 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난 이 나폴레옹 길을 택했다. 스페인 정복이 아니라 '나'를 찾아서, 아니 날 정복하기 위해서. 오늘 이 불가능(?)의 산맥을 넘어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 지금까지 보고 살아온 내가 아닌 또다른 나를 발견할수 있기를 기원하며 이 길을 걸었다.

처음부터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늦었다는 부담감이 시작부터 발걸음을 재촉시켰다. 상쟝을 벗어나자 한 두명의 순례자들이 드디어 보였다. 다들 나보다 더 큰 배낭을 짊어지고 순례자 지팡이를 짚으며 가고 있었다. 배낭뒤엔 산티아고 순례자의 표시인 조개 껍질이 보폭을 따라 찰랑거렸다. 산을 오를수록 내 뒤에 펼쳐진 상쟝 마을은 점점  멀어지고 또 작아지고 있었다. 안 돌아보기로 했지만 자꾸 얼마나 올라왔는지 뒤돌아 보았다. 순례자들은 두 세명씩 무리를 지어 오르고 있었다. 나의 걸음은 빨랐고 또 몇 팀을 제치고 나니 신도 났다. 프랑스인고 제치고 미국인도 제쳤다. 그리고 발빠른 독일인도 제치며 끊임없이 얘기하며 걷는 브라질 팀도 쉽게 제쳤다. 그러나 오르막길을 그렇게 빠른 보폭으로 걸으니 숨이 가빠오고 한 시간 정도 지나자 힘이 쑥 빠졌다. 조금 가면 평지가 나오겠지... 그러나 이 곳이 1500m 높이의 산이며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이다. 힘들었지만 가끔씩 뒤돌아 왔던 길을 보며 또 올라갈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산 능선을 보며 갖은 힘을 다 내었다. 가끔씩 멈추어 서서 가지고 온 스마트 폰으로 사진를 찍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엊ㅅ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놓지고 쉽지 않았다.

한참을 더 올라가자 드디어 평원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끝에 바위로 이루어진 조그만 언덕이 나타났다. 그 바위위에 성모상이 서 있었다. 우선 반가웠다. 사진에서도 봤고, 영화 “The Way”에서도 보았다. 영화속엔 '마틴 쉰'이 이곳에 죽은 아들의 '재'를 꺼내 뿌렸다. 죽은 아들의 재를 뿌리는 아버지의 처참한 마음을 상기하고 성모송을 조용히 올렸다. 아버지 판 '피에타'였다. 영화속엔 안개가 끼어 몇미터 앞이 보이지 않던 그곳이었지만 내가 다다랐을땐 화창했다. 무거운 배낭을 바위위에 얹어 놓고 등산화를 벗고 휴식을 취했다.

휴식은 언제나 달콤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이 힘이 들었다. 발도 벌써 아파오고 허리도 뻐근하였다. 가지고 온 바게트와 사과를 씹어 먹었다. 마침 그때, 오는 길에 잠깐 인사를 나눈 그 독일인이 다가와 얘기를 꺼냈다. 나의 힘겨워 쳐진 모습을 보더니 예견한듯 한마디 했다. 지나치는 나의 숨소릴 들으니 곧 지칠 것이라 쉽게 알아차렸다 했다. 그리고 도보 순례의 '팁'을 알려주었다. 내심 부끄럽기도 했다.

'철저한 독일인이구나. 숨소릴 듣고 내 상태를 예견하다니.'

그 분은 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좋아 벌써 세번째란다. 그리고 이 피레네 산맥의 풍경뿐 아니라 청정한 공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바쁘게 걷고 사진 찍느라 이 청정한 공기로 숨쉬었다는 걸 눈치 채지도 못했다. 의식적으로 이 청정한 산공기를 폐 깊숙히 들이마셔 보았다. 바삐 걷다보니 중요한 것을 잊었고, 바쁘게 살다보니 얼마나 나의 삶이 축복(blessing)으로 채워졌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다시 일어서서 걸었다. 오르고 또 오르고. 그러면서 옛 시조처럼 "못 오를리 없건마는' 난 힘이 서서히 부쳤다. 시간도 몇시가 됐는지 그리고 사방팔방이 다 사진찍을 풍경이라 사진 찍는 것도 귀찮아 그만 뒀다. 찍어도 내가 본 만큼 나오지도 않았다. 대신에 가슴에 남겨두자. 이 공기와 풍경, 나무와 산에 핀 꽃들 그리고 이 자연의 소리.

어찌 카메라가 이 모두를 담으리?
어찌 찍은 사진으로도 이를 다 설명할수 있으리?

사진 찍기를 멈추다보니 이 풍경을 더 즐길 수 있었다. 마음의 영유도 조금 생겼다. 그러나 정상이 어딘지 그리고 혹시 지나쳤는지 가늠할수 없었다. 여기가 정상이겠지 했는데 가다보니 또 오르막길이 있었고 다른 정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정상을 가늠한다는게 어려웠다. 그렇다고 대부분이 초행길인 다른 순례자에게 물어볼수도 없고 힘이 빠져 스마트 폰을 꺼내 GPS까지 볼 여력도 없었다. 5월이라 음지엔 아직 눈이 덮여있었다. 한참 뒤에 드디어 내리막길이 보였다. '내리막 길은 조금 쉽겠지...' 그러나 그것도 45도 정도의 경사진 길이었다. 쉽다고 여겨진 내리막길이 힘이 빠진 상태에서 그래서 밸런스를 잘 못맛추는 상태에선 더 힘들었고 시간은 더 들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숲이 이어져 시원해 좋았고 순례자들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첫 도착지인 '론체스바예스(Roncesvalles)'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오늘 하루 약 25km를 걷는 것이다. 이는 하루 평균거리이며 한달을 계속해서 걸어야되는 거리이다. 비록 오늘이 처음이고 산악지대라 하지만 만약에 오늘처럼 힘이 부친다면 큰일이라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몸을 옆으로해서 어정쩡한 자세로 45도 각도의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저 밑에 나이드신 할배가 등산화 대신에 샌달을 신고 내려가시는 것이 보였다. 브라질에서 오셨다고 했다. 가까이서 보니 각 발가락사이에 밴드를 각각 끼워 붙여놓았는데 보기 흉했다. 포르투갈 말을 몰라 괜찮으냐고 묻는다는 것이 그저 '따봉'이라고 했다. 발가락이 아파서 그리고 보호의 목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손짓으로 앞서 가라고 하셨다. 굉장히 느린 걸음이셨는데 그래도 순례에 도전하신 걸 보면 정말 대단하시단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론체스바예스'에 도착했다. 다리는 금방이라도 스러질듯 아프고 통증이 왔다. 이렇게 고통이 심하다니... 예상은 했지만 실제는 더했다.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산 세일해서 산 싼 등산화는 가벼웠지만 장거리 산행에는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마을 입구의 흐르는 개울 위 작은 다리에서 적어도 도착지에 왔다는 안도감으로 아픈 다리를 주륵주륵 주무르며 쉬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 느린 걸음보의 브라질 할배가 나타나시며 얼른 알베르게에 가자고 제촉하셨다. 난 영문을 몰랐지만 아픈 다리를 끌고 할배를 따라 마을로 들어갔다. 작은 경당을 지나고 또 마을 성당도 지나 고풍스런 중세식 아치형의 문을 통해 스페인 ‘나바라’ 지방행정당국이 운영하는 대형 알베르게 건물에 도착했다. 본 사무실 앞엔 한 20명의 순례자들이 긴 줄을 이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난 왜 할아버지가 날 제촉했는지 그 이유를 알수 있었다. 수속하는 시간이 스페인식이라 긴 줄이 좀체 짧아지지도 않았고 도리어 속속 도착하는 순례자들로 내 뒤의 줄은 늘어만 갔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한 30분 정도만 늦었더라면 난 이 알베르게에 머물수가 없었을 것이다. 늦게 온 순례자들은 이곳 순례자 사무실에서 제공한 컨테이너안에서 잠을 잤다고 했다. 난 한 50명이 잠자는 층의 2층 침대를 배정받았다.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너무 피곤해 이런 불편함은 안중에도 없었다. 무려 세시간을 이층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휴식을 취하자 겨우 기운이 조금 났다.

샤워를 마치고 8시에 있는 미사를 보기위해 성당으로 갔다. 연세 지긋한 세명의 스페인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했는데 다 스페인어라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당안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로도 좋았다. 미사가 끝나자 신부님이 순례자 모두 제단 앞으로 나오게 하더니 “순례자를 위한 강복”을 주셨다.

'강복도 받았으니 다시 힘내자.'

미사를 끝내고 알베르게 등록때 미리 사둔 식권표를 들고 레스토랑으로 갔다. 우리 테이블엔 온통 젊은이들 뿐이었는데 각각 나라가 달랐다. 캐나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미국 등등. 산티아고 순례의 이점은 또 이렇게 다국적 사람들과 마주친다는 것이다. 피곤했지만 저녁을 먹으니 기운도 나고 얘기도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자기소개가 끝나면서는 축구 얘기가 대부분이었지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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