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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l 24. 2017

아일랜드 작가의 'Korea'란 제목의 단편소설

런던 에세이- 존 맥가헌

Korea I  (After John McGahern) by Cormac O'Leary. Pastel on paper 8 x 11 ins

(스포일러가 들어있음)


아일랜드의 소설가 존 맥가헌(John McGahern. 1934-2006)의 단편소설 모음집인, ‘The Collected Stories’(Vintage International 펴냄. 1994)엔 ‘한국(Korea)’이란 제목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겨우 몇 페이지 분량 약 4천자 정도의 짧은 소설이지만 상징성과 폭력성, 고요함과 소음, 그리고 평화로운 시골풍경과 전쟁의 광기까지 서로 연결되어있다.


먼저 제목이 눈에 다. 어떻게 제목을 유럽의 구석에 위치한 작은 나라의 작가가 극동의 나라 ‘한국’이란 제목을 붙였을까 관심이 갔다. 나중에 읽어보곤 한국과 관계가 있지만 역시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아님을 알고 실망과 동시에 안심(?)도 되었다.


우선 이 단편소설은 시작부터가 의미심장하다. 강으로 고기잡이(민물장어 잡이) 가는 아버지와 아들을 배경으로 작은 배안에서 아들이 묻는다. 아들은 이야기를 끌고가는 나레이터이기도 하다.


첫문장은,


“사형집행을 그때 보았죠, 아버지. 그렇죠?”, 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노를 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You saw an execution then too, didn’t

you?”, I asked my father, and he started to tell as he rowed.


이 시작 문장은 이 소설의 핵심이고 소설의 열쇠이다. 아버지는 1919년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참여했다. 그때 평생 상처로 남은 포로 두명의 사형집행 장면을 목격했다. 이 폭력적인 장면은 아버지에 의해 여러 번 이야기됐음을 이 첫문장의 부가 의문문을 통해 눈치챌 수 있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이 전쟁의 상처는 아버지의 삶에 깊숙히 잠복되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아일랜드 서부 시골의 어느 강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시골 강가의 고기잡이는 낭만적이지도 목가적이지도 않다. 곧 지역 군청에서 더이상 이 강에서 고기잡이를 못하도록 할 방침이다. 이리로 낚시관광오는 영국인들을 위해서 마지막 남은 민물장어잡이 면허도 취소할 것이다. 벌이가 훨씬 더 나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전통이자 생계인 지역민의 민물장어잡이를 금지시키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허탈감을 느낀다. 폭력적인 사형집행 장면까지 목격하며 처참한 전쟁에 참여하여 이룩한 독립된 아일랜드에서 뭔가 큰 실망감을 느낀다. 그래서 이상과 실제의 간격은 크다. 독립전쟁후 30여년의 세월이 지나도 버밍햄이나 리버풀에서 찾아오는 영국 관광객을 위해 장어잡이까지 포기해야 할 지경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잡은 일등품 장어는 산채로 일주일에 한번 런던의 유명한 빌링스게이트(Billingsgate) 생선시장(자갈치 시장같은)으로 보내진다. 이 경제적 예속상태는 조용한 아일랜드의 시골 고기잡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소설의 배경은 영국보다 소득이 높은 지금의 아일랜드가 아니다.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대 초이다. 꿈많던 독립투사 아버지에겐 이 50년대 시골 아일랜드엔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아들에게 ‘슬쩍’ 묻는다.


“이 여름뒤에 뭐 할 계획있냐?

“Have you any idea what

you’ll do after this summer?”


아들은 시험결과에 따를 것이라고 한다. 결과가 좋으면 자기 하고싶은 걸하고 아니면 선택이 없을거라 대답한다. 이에, 아버지는 또다시 ‘슬쩍’ 운을 뗀다.


“건데, 만약 (시험결과가) 좋게 나온다면, 이 나라를 아예 버리고 미국간다는 소릴 안할, 안할거지?”


“But say, say even if you do well, you wouldn’t think of throwing this country up altogether and going to America?”


이에 아들이 답한다.


“배표는 누가 사주게요?”

“Who’d pay the fare?”


이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원한다면 없는 돈 다 모아서 미국 보내줄거라 한다. 거기엔 기회가 있는 땅이고 이 촌구석 뒤떨어진 아일랜드엔 미래가 없다고 은지시 얘기한다.


그러다 어느날 아들이 고기잡이 미끼로 쓸  벌레들을 잡아 벌레들을 모아놓은 흙박스가 있는 화장실로 간다. (이 부분에서 역겨움이 난다… 작가의 의도이다.) 그런데 두런두런 아버지와 가축장수 아저씨의 대화가 화장실 바깥에서 들려온다. 아들은 지나치려다 귀기울여 들어본다.


‘난 알지. 정확한 액수를 말이야. 그들은 루크가 죽었을 때 만 달러를 받았어. 미국군 목숨엔 각 한명당 만 달러가 보험처럼 정해져 있지.’

‘I know. I heard the exact sum. They got ten thousand dollars when Luke was killed. Every American soldier’s life is insured to the tune of ten thousand dollars.’


이어서,


‘그들은 마이클과 샘이 미군에서 복무를 하는 동안 한 달에 각각 250달러를 받아.’하고 그는 말했다.

‘I heard they get two hundred and fifty dollars a month each for Michael and Sam while they’re serving,’ he said.


아들은 이 화장실 밖의 대화를 몰래 엿들으며 당연하게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의 청춘(youth)은 바로 이때 사라져 버렸다고 말한다.


소설 속 고향사람 루크(Luke)는 한국전에 미군으로 참전했다 전사했다. 정다운 아일랜드 시골 고향엔 송장으로 관에 실려 돌아왔다. 미국 대사관의 차가 의 관을 실은 장례차를 뒤따랐고 성조기가 그의 관위에 엄숙하게 덮였다. 아들은 이 사실을 상기한다.


50년대 당시 가난한 아일랜드에선 젊은이들이 영국과 미국으로 돈을 벌러 정든 고향을 등졌다. 아일랜드 젊은이가 당시 경제부흥기인 미국에 건너가면 두가지 직업을 가장 손쉽게 구했다. 하나는 경찰이었고 다른 하나는 군인이었다. 뉴욕의 9/11 트윈타워 테러때도 많은 아일랜드 계 경찰과 소방수가 목숨을 달리했다. 몇십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미국 경찰엔 아이리쉬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군대는 어떤가? 고향 부산에 세계에서 오직 하나있는 대연동 ‘유엔 묘지’엔 6.25당시 많은 아일랜드 출신의 전사한 미군이 묻혀있다. 오래전에 아일랜드 신학생과 유엔묘지를 방문했다. 여기도 아일랜드, 저기도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머피(Murphy)도 있었고 맥마흔(McMahon)도 있었다. 오록클린(O’Loughlin)도 있었고 셰리단(Sheridan)도 있었다. 거기에서 그 아일랜드 신학생은 한숨을 쉬면서 기도를 올렸다. 이 멀리까지 어떻게 다들 왔고 또 전쟁중 전사해 여기 묻혔을까? 소설을 읽으며 그 먼곳까지 가서 전사한 아일랜드 젊은이들을 떠올렸다. 자까 맥가헌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 아직 고향땅에 돌아오지 못하고 부산의 묘지에 누워있는 전사자들도 아직 있다고 한다(또 많은 전사자들의 유해는 고향땅으로 보내졌다.)


왜 그들은 그곳까지 갔을까?

왜 그곳까지 갈수밖에 없었을까?


이 소설의 아버지는 아직도 어린 사춘기 아들의 장래는 이 가난한 아일랜드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 거긴 아들의 장례식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그래서 아일랜드 독립투사인 아버지조차 어린 아들까지 미국으로 가라고 은근히 부추기는 희망없는 나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아버지도 전쟁의 희생자이다. 그 충격의 사형집행 장면 특히 집행당시 어린 소년의 웃옷 단추가 공중에 날아오르던 장면은 계속 연상되어 아버지의 트로우마로 남아있다. 심지어는 행복해야할 신혼여행지에서 본 가시금작화(Furze) 꽃 봉우리가 그 단추로 연상되서 신혼여행까지 망친 아버지이다. 그러나 이런 상처가 깊은 아버지가 아들이 미국가서 군대입대하면 다달이 250달러란 거금을 받을 수 있고 혹시 전사하면 만 달러를 받는다는 사실에 혹하여 겨우 사춘기 넘긴 아들을 은근히 부추기는 것이다. 소설엔 아버지가 처음으로 흥분(exited)된 어조로 말한다고 나와있다.


당시는 한국전쟁 중으로 한반도엔 전쟁의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한반도와 전혀 관계없을 것같은 유럽의 구석 한쪽 아일랜드 시골에서도 그 처참한 전쟁의 진도는 무지막지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한국의 많은 젊은이가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고 미국의 아일랜드 출신 용병들도 아프리카계 미군들도 이 전쟁의 땅 한반도에서 목숨을 잃었다.


존 맥가헌은 몇 페이지 짧은 소설에서 한번도 ‘반전주의’나 ‘경제제국주의’를 언급하지 않는다. 뻔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아일랜드의 시골 강을 따라 조용히 배를 타고 민물장어를 잡는 목가적인 부자의 모습과 그들의 대화를 시적으로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이는 이 단편소설을 시와 같이 읽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속을 알면 충격에 빠진다. 고요한 시골강에서 노가 물에 부딪치며 찰싹이는 소리,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속에 엄청난 전쟁의 포탄이 떨어질 것같은 충격이 숨어있다.  그리고 이 단편을 읽으며 마음이 “싸아” 해지는 것은 비단 불교의 화엄경 세계처럼 서로 얽히고 설켜있는 인간군상 뿐만도 아니고 순수한 인간성을 갉아먹는 돈과 파워때문만도 아니다. 무언가 알수없는 신비가 여기 있다. 그건 아들이 엿들은 아버지의 말처럼 충격적이다.


삼성 스마트 폰으로 페이스북을 하고 현대 차를 타며 강남 스타일 춤을 추는 지금의 아일랜드 젊은이들은 한국은 물론이려니와 이 소설을 이해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단편소설 속의 한국, 전쟁의 땅이자 죽음의 땅인 한국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 널려 있다. 그래서 우린 결코 그 ‘다른 한국 땅’에 일어나는 사태를 도외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존 맥가헌의 단편 ‘한국(Korea)’은 읽어도 읽어도 완전 이해가 어려운 아르헨티나의 소설가겸 시인인 호르헤 보르헤스의 단편 ‘갈래길들의 정원(The Garden of Forking Paths. 1941)’과 같은 문학성을 지닌 최고의 단편이라고 생각한다.


:::::


*위 글의 모든 인용은 존 맥가헌의 단편집(McGahern, John. The Collected Stories, New York: Vintage International, 1994.)에서 따온 것임을 밝힌다.

*이 ‘한국(Korea)’이란 단편소설은 영화로도 1995년에 Darryl Collins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직접보지는 못했다.

*영어권 학교에선 문학 시험에서 존 맥가헌의 이 단편을 다루는 곳도 많다고 들었다.


Korea II(After John McGahern) by Cormac O'Leary. Pastel on paper 8 x 11 ins
Korea III(After John McGahern) by Cormac O'Leary. Pastel on paper 8 x 11 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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