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여행 다큐를 좋아한다. 우연히 모로코 관련 여행 다큐를 보았다. 카사블랑카의 한 카페. 한 조종사가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메뉴를 주문한다. 가끔 수첩에 글도 쓰고 낙서도 한다. 그는 바로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였다.
이해가 안 되는 영감을 받을 때가 있다. 생텍쥐페리가 앉았다는 테이블과 의자를 보자 바쁜 일상과 공부 때문에 잠시 서랍장에 넣어놨던 꿈이 떠올랐다. 아이를 위해 직접 동화책을 만드는 것. 이미 몇 가지 스토리는 구상해놓았다. 적당히 그림의 구도도 생각해놓았다. 피터 브뢰겔의 군상화(?) 스타일은 어떨까 싶었다.
결국 동화책은 글과 그림인데, 그림은 어린 시절 잠시 미술학원 다닌 것이 전부였다. 만족할 때까지 그림 연습을 하기로 했다. 글은 내가 쓰고 그림은 전문가에게 부탁하는 방법도 있지만, 아이에게 온전히 아빠의 손으로 만든 동화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현실적인 동기도 있었다. 기대수명이 100살을 넘어가는 시대, 회사를 다니는 기간은 인생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3분의 1을 무엇을 하며 살아야 의미 있게 살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여기서 조종사이자 작가였던 생텍쥐페리의 이야기가 나의 고민과 맞닿았다. 사실 겉멋도 살짝 들었다. 카페에서 뭔가 그리면 멋있어 보이니까. 다들 제멋에 사는 거 아니겠는가.
어쨌든 아마존에서 책을 주문하고 그림 연습을 시작했다. 장기 프로젝트가 될 예정이다. 매일 시간을 내지 못할 수도 있다. 다른 브런치 포스팅을 하느라 미룰 수도 있다. 그래도 1년 정도 꾸준히 하면 어설프게나마 단편 한 편은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것도 나중에 돌아볼 때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첫날은 가볍게 시작했다. 우선은 교재.
가볍게 동그라미부터 시작해 사람 얼굴 그리는 연습을 했다.
처음 여섯 개의 동그라미는 그냥 따라 그렸다. 그 후엔 책에서 알려준 원칙들에 따라 마음대로 얼굴을 그려봤다.
그릴 때는 왜 이렇게 그리고, 왜 저렇게 그렸는지, 의식하면서 그리려 애썼다. 예전에 게임 캐릭터 그림 외주를 준 적이 있었는데(참 별거 다 해봤다), "오래 입어 바지의 무릎 부분이 늘어졌다"라는 설명을 보고 한참 감탄했던 적이 있다. 늘어진 무릎 부분으로 캐릭터의 성격까지 짐작케 했던 것이다. 이런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캐릭터가 살아있는 그림. 끊임없는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느낀 점 세 가지:
1. 아저씨 얼굴이 비교적 그리기 쉽다.
2. 머리카락은 그리기 어렵다.
3. 동그라미는 위대하다.
가볍게 얼굴 열다섯 개 그리고 아이 돌보고 하다 보니 금세 밤이 깊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앞으로의 거취 때문에 심란했는데, 그림을 그리면서 차분해졌다. 이제는 미국에 계속 남든, 폴란드나 헝가리로 가든, 제3국으로 가든, 아니면 한국에 돌아가든 상관이 없어져버렸다.
글을 쓰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디에서나 할 수 있잖은가. 마찬가지로 행복해지는 것도 장소와 무관할 것이다.
그러니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행복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