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트넘 대 크리스탈팰리스
열심히 일했으니 보상받을 차례다. 런던에 사는 아주 큰 장점 중 하나라면 역시 프리미어리그가 아닐까 싶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지 않더라도 경기를 직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작 바쁜 핑계로 경기를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뉴욕에서 친한 지인 부부가 놀러 왔고, 덕분에 그토록 보고 싶던 프리미어리그, 그것도 자랑스러운 손흥민 선수의 골이 터지는 토트넘 경기까지 볼 수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가보자.
토트넘 핫스퍼 경기장은 런던 북동부에 위치한 토트넘(Tottenham)이라는 지역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이 런던 북부에 위치해있다 보니, 마찬가지로 런던 북부에 위치한 아스널과 묶어 북런던더비라고 부른다.
먼저, 경기장까지 가야 한다. 손님 부부의 편의를 위해 차로 이동한다. 미리 영국 주차 어플인 RingGo를 통해 봐 둔 자리가 있었다. 그러나 어플에서 알려주지 않은 사실이 있었으니, “경기가 있는 날에는 2시간까지만 주차가 가능“하다는 것!
당황해서 차를 돌리니 미국에서처럼 사설 주차장이 보인다. 눈물을 머금고 35파운드를 내고 주차를 한다. 그런데 2-3분쯤 경기장 쪽으로 걸어가니, 25파운드짜리 주차장이 보이는 게 아닌가! 저 주차장은 위험할 거야라고 혼자 생각하면서 눈물을 삼켜본다.
주차장에서 5분 정도 걸어가니, 드디어 경기장이 보인다.
경기장으로 걸어가는 길은 흥분으로 가득 차있다. 아무래도 약팀인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경기이다 보니, 경기장으로 향하는 홈 팬들은 다들 승리에 대한 기대로 눈빛이 빛났다. 덩달아 우리의 마음도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보안 검색을 통과한 후, 드디어 경기장으로 들어선다. 참고로 A4용지 크기 이상의 가방이나 긴 우산은 반입이 불가능하니, 참고하시길...
2017년에 새로운 구장 건축을 위해 완전히 무너뜨리기 전까지, 토트넘의 홈구장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화이트하트 레인"이었다. 그간 영어로 된 이름을 본 적이 없어서, 화이트하트 레인을 "하얀색 심장에 내리는 비"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뭔가 영국 역사나 문화에 관련된, 희한한 이름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경기장에 와보니 알 수 있었다. 화이트하트 레인은 다름 아닌 경기장 앞쪽의 "길(Lane)" 이름이었던 것.
2019년에 새로 구장한 "토트넘핫스퍼 경기장"에는 위 사진처럼 토트넘 구단의 모토인 "TO DARE IS TO DO"라고 적혀있다. 한국어로 직역하자면 "도전이야 말로 해야 할 일", 의역하자면 "도전하라" 정도의 뜻이다. 리그 내에서 젊은 피로 통하는 지금의 토트넘에 걸맞은 구호인 셈.
아침까지 비가 와서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경기 시간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이 맑아졌다. 비가 오다가 우박이 내리다가 갑자기 맑아지는 영국 날씨다 보니,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 자리가 있는 5층 19번 구역 (519번 구역)을 찾아간다.
함성을 들으며 경기장 안에 들어서자 가슴이 웅장해졌다. 티비에서나 보던 그 공간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감격스러웠다. 비록 구호는 모르지만, 이미 우리는 수많은 토트넘 팬 중의 하나가 되어있었다.
경기 시작 직전, 경기장의 사회자가 선수들을 하나하나씩 호명하며 라인업을 소개해준다. 선수가 하나씩 소개될 때마다 관중들은 함성을 질렀다. 마지막은 역시 대한민국의 자랑이자 토트넘의 주장인 손흥민! 손흥민 선수의 이름이 호명되자마자 엄청난 함성이 울린다. 손흥민 선수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하고, 어느새 북적이던 경기장의 관중들은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현재 15위인 크리스탈 팰리스는 이기지 못하더라도 절대 지지는 않겠다는 자세로 경기에 돌입한다. 11명의 모든 선수가 완전히 수비에 전념한 것.
크리스탈 팰리스의 강력한 수비에 막혀 답답한 경기가 이어진다. 그러다 결국 59분, 세트피스 상황을 얻은 크리스탈 팰리스가 완벽한 프리킥으로 먼저 선취골을 가져간다. 그동안 조용하던 크리스탈 팰리스 팬들은 골과 함께 열광의 도가니. 그 후에도 한동안 열정적인 응원을 펼친다.
그러나 그때부터 전반전 내내 소극적이던 토트넘 선수들이 완전히 달라진다. 정신을 차린 듯, 엄청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나온 것. 결국 77분 티모 베르너 선수의 동점골을 시작으로, 크리스티안 로메로 선수의 역전골, 그리고 우리의 자랑 손흥민 선수의 세 번째 쐐기골로 극적인 역전극이 펼쳐진다.
"전광석화"라는 말을 드디어 이해할 수가 있는 순간이었다. 손흥민 선수가 공을 잡은 순간, 전광석화처럼 골대를 향해 달리더니, 반대쪽 포스트로 완벽한 슛을 날린다. 영상을 찍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 공을 잡자마자 무섭게 돌변하는 손흥민 선수를 보니, 어마어마한 집중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쐐기골이 들어가자 크리스탈 팰리스 선수들도 이제는 포기한 듯,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결국 경기는 토트넘의 승리로 기분 좋게 끝났다.
그렇게 생애 첫 프리미어리그 직관 경기가 끝이 났다. 엄청난 기대감을 가지고 시작해 77분 동안 욕하다가, 남은 20분 동안 한껏 소리를 질렀던, 너무 즐거웠던 경기였다.
그렇게 경기가 끝나고, 기념품점에 들러 기념품 쇼핑을 하고 경기장을 나섰다. 차를 가지로 주차장에 가니, 사람은 온 데 간 데 없고 여우 한 마리만 우리를 반겼다(참고로 한국의 길냥이처럼 런던에는 길여우가 있다). 내가 지켜보는지 아랑곳하지도 않는 게 괘씸해서 영상을 찍어봤다.
이렇게 프리미어리그 직관을 끝내고, 소호에 들러 런던 최고의 치킨집인 난도스(Nando's)에서 저녁을 먹었다. 양손에 매콤한 피리피리 치킨을 들고 뜯으면서도 우리는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 계속 축구얘기를 했다. 짜릿했던 경기는 물론, 아끼는 사람들과의 즐거운 저녁식사까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하루였다.
만약 런던 여행을 하는데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있다. 경기를 보기 위해 하루를 다 쓰기가 애매해 망설이고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