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들어도 벌써 그리운 샤를드골 공항에서 파리 시내로 가기 위해 전철을 탔다. 파리는 두번째였고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으로 온 것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전철을 타고 보니 급행이 아니라 완행이었다. 파리에서 완행열차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름 모를 역에 정차할 때마다 남루해보이는 옷을 입은 흑인들이 하나둘 탑승하더니 북역에 도착할 때쯤 차내는 흑인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대각선으로 마주 앉은 채 각자의 옆에 커다란 캐리어를 누가 가져갈 새라 꼭 쥐고 있었다. 그러니까 동양에서 온 여행자 둘이 감히 네 자리를 축내고 있었던 것이다. 북역이 파리 외곽의 탑승객들에게 종착지이자 환승역이었는지, 문이 열리자 많은 사람들이 내렸고 우리는 안도했다.
몇가지 짚을게 있다.
먼저, 그들은 정말 모두 흑인들이었나? 몇년이 지난 일을 정확하게 되새길 수는 없지만, 비율이 꽤 높았던 것 같다. 프랑스에 흑인인구비율이 이렇게 높은가 싶을 정도로 열차내 흑인이 많았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에게 눈치를 주거나 적대감을 표출했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저 이방인이 제발 저렸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모두 이민자였나? 잘은 몰라도 누군가는 이민 1세대, 누군가는 이민 2세대, 또 누군가는 그 이상을 프랑스에서 살아온 시민권자였을 것이다. 프랑스 인구구성과 문화에 무지한 우리가 유럽=백인이라는 선입견이 있었기에 그들이 이민자겠거니 했던 것이다.
신혼여행을 떠올리면 빠지지 않고 그 장면이 생각날만큼 강렬한 경험이었다. 인종다양성을 숫자로 표현한다 치자. 수가 클수록 인종이 다양한 것이고 1에 수렴할수록 단일인종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해보자. 우리나라는 1에 가깝게 수렴할 것이다. 그런 곳에서 평생을 자라왔다. 교환학생이라는 선입견 방지턱이 있기는 했지만, 대학은 구성원에 대한 한단계 검증이 이루어진 곳이다. 대중교통은 그렇지 않다. 필터 없이 모인 그들과 한 공간에 있는 것은 무지와 선입견에서 시작된 불안감을 일으켰다. 몽마르뜨 언덕에 출몰해서 여행자의 주머니를 갈취한다는 흑인 무리도 그 불안감에 한몫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집단이나 그렇듯 묵묵히 성실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앞에 나선 튀는 이들에게 가려지기 마련이다. 어쨌든 바다 건너 멀리에서 들려오는 난민문제는 대한민국 사람이 쉽게 왈가왈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양성은 정치, 문화, 사회 영역에서 중요한 이슈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정권에 따라 그것이 지켜야 할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비효율과 위험으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것을 유럽과 미국이 먼저 보여주었고,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피할 수 없는 논제이다. 정치 이야기는 감히 내가 숟가락 올릴 깜냥도 능력도 없으므로 피한다. 다만 신혼여행에서의 경험이 말해준 것은 다양성이 홀로 설 수 있는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 사회 안에 다양한 인종, 성별이 있다고 해서 다양성이 올라가는게 아니고, 그들이 섞일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 나와 다른 그 사람도 나와 같은 공동체에 속했다는 의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보다는 화학적 결합이어야 한다.
인간의 역사는 곧 계급의 역사였다. 계급은 나와 저들이 다르다는 감각에 기반한다. 계급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아있다. 계급이 사라진 지금에도 우리는 수저의 색깔을 논한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또한 그 계급을 없애온 역사다. 인종과 재산, 성별, 그 어떤 것도 사람 위에 사람을 앉히지 못 하도록 에이브러험 링컨이, 버지니아 울프가, 수많은 이름 모를 이들이 시민의 이름으로 지난하게 싸워온 역사. 법정 의무 연수지만 늘 흘려들었던 다문화 연수를 생각한다. 학교에서 노트북 작은 화면을 통해 접한 연수와 파리 지하철에서의 경험은 그 간극이 둘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