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을 삶고 빨래를 갠다. 얼마 전 수리해 온 카메라를 들고 봄이 올 때 집에 들여온 마오리 소포라와 로즈마리를 찍어볼까 싶다. 전쟁 같은 육아에서 패배한, 추위와 함께 마음도 얼어붙었던 지난 겨울에 커피나무도, 올리브도, 동백도 모두 운명을 달리 했다. 그렇게 수년간 함께 했던 식물들을 보내버리고 양심도 없이 또 새 식구들을 들여온 것이다. 그러나 사진은 잠시 미루고 식기건조대 위의 그릇들을 정리한다. 달걀이 다 삶아져 찬물로 식힌다. 싱크대로 흘러가는 물을 보며 어제 치운 음식물 쓰레기를 생각한다. 계절의 변화는 아름답게만 오는 것이 아니어서, 예쁜 벚꽃과 함께 싱크대 배수구에 쌓인 음식물 쓰레기의 냄새도 함께 왔다.
봄은 웅크린 몸의 감각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깨워서, 주변인들의 안부에 마음이 간다. 누군가는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열심히 노동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새로 옮긴 직장에서 바뀐 보직과 사람, 창문과 책상에 낯설어 할 것이다. 누군가는 곧 끝나가는 7일의 장기재직휴가를 아쉬워하며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부친상 이후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그대로 두며 일상에 젖어들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 다른 삶을 살아간다. 눈과 코로, 귀와 손으로 감각되는 그것으로 자기 삶을 받아들이고 각자 지금의 나에 집중해 살아갈 것이다.
지금을 산다는 것은 지금 나와 밀착해서 벌어지는 일들이 내 행복과 불행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지금 나에게 벌어지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지극히 미시적인 나는 지금의 희비에 울고 웃지만, 나름의 시간을 살아온 나는 또한 지금의 일희일비가 내 인생 전반을 지배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머리로나마 안다. 그래서 기쁠 때는 기쁨 대신 감사가, 슬플 때는 슬픔 대신 공감과 연대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나마 안다. 이 생을 소풍이라고 부르는 건 노시인이 되어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럴 깜냥이 안 되는 지금은 기쁜 일에 감사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는 곁에 있는 이에게 말할 용기를 내어 그의 위로를 얻어보려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함께 도망가자고 하고, 누군가는 한숨을 듣고 품을 내어주며, 또 누군가는 라디오를 틀고,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준다. 방식은 달라도 뜻은 같다. 그 길을 너 혼자 걸어가게 두지 않겠다는 것. 손을 맞잡든 어깨를 걸치든 눈을 마주하든 같이 있자는 것. 그런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인생 멀리 보라는 말뿐인 충고쯤 가볍게 무시하고 지금에 집중해도 괜찮지 않나 싶다. 원래 봄은 여름의 열기가 아니라 겨울의 한기를 뚫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