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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Aug 10. 2015

예술의 도시 광주 여행

무등산과 5.18민주화운동으로 대표되던 광주가 아트 도시로 재생의 물꼬를 틀었다. 일상에 예술이 스민 도시 속 동네 투어.


 유미정 ・ 사진 조지영

대인예술시장 주차장은 야구 경기를 하는 선수들의 벽화가 둘러싸고 있다. © 조지영

시장, 아트 지구가 되다

가로 세로 빽빽하게 차를 세운 주차장에 내리니 야구 선수 선동렬을 그린 벽화가 눈에 띈다. 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셔터를 내린 가게 앞에 어느 젊은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 연신 페인트를 칠한다. 건어물 가게, 이불집, 방앗간. 정겨운 간판을 보니 영락없는 재래시장. 그런데 셔터에는 장미란 선수를 묘사한 그림이 번쩍이고, 천장에는 가위질로 독특한 무늬를 낸 색지 장식이 펄럭인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시장 입구와 멀지 않은 ‘갤러리 다다’. 이곳은 작품을 판매하는 갤러리였지만, 작년부터 대인예술시장 사무국으로 사용한다. 현재 대인예술시장에 머무는 작가는 40명 내외. 어쩌다 그들은 재래시장에 머물게 되었을까? 시장이 있는 광주 동구는 짧은 시간에 도청과 시청, 터미널이 한번에 이전하면서 빠르게 쇄락했다. 급속한 도심화와 맞물려 재래시장은 가장 먼저 타격을 받았고, 사람의 발길이 줄자 문을 닫은 가게도 늘어갔다. 이곳에 예술의 불씨를 지핀 것은 2007년. 시장을 다시 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입주한 지역 작가는 재래시장을 공공 미술 작업장으로 바꾸는 발판을 마련했다. 시장과 예술이 상생하는 프로그램이 본격적인 정부 문화 사업으로 발전했고, 지금은 광주 도시 재생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날씨가 많이 덥죠?”, “사장님, 맛있게 드십시오. 저도 1그릇 먹고 싶네요.” 대인예술시장의 정삼조 총감독은 시장 한 바퀴를 도는 내내 상인과 일일이 인사를 하고 말을 건넨다. 누군가는 생계를 위한 치열한 전쟁터로, 누군가는 예술의 장으로 한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쉽지만은 않았을 터. 하지만 시장에 입주한 작가는 간판에 그림을 그리고, 가게 주인장의 얼굴을 벽화로 남기면서 상인의 마음을 열었다. 비록 맡은 바는 달라도, 시들어가는 동네를 함께 살려보자는 마음만은 같았으니까.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앞에서 본 <으랏차차 장미란> 작품. 역기를 들어 올리듯 문닫은 가게의 셔터가 모두 열렸으면 하는 작가의 바람으로 시작했다. 어느새 주인 없이 버려진 가게는 시장의 캔버스가 된 것. 평일에 아무 생각 없이 시장 골목을 걷다 보면 간이 테이블에 앉아 옛날 팥빙수를 먹고 있는 아저씨, 파리채를 들고 벌레를 쫓고 있는 시장 상인을 많이 마주친다. 화려한 조형물도 없다. 대신 간판이 독특하거나, 허름한 가게 앞에서 아티스트의 기운이 느껴지는 누군가가 편안한 복장에 담배를 물고 어슬렁거린다면, 그곳은 작가의 작업실일 확률이 높다.

1달에 6명의 작가가 1평의 공간을 빌려 작품을 전시하는 시장 속 한평 갤러리. © 조지영

골목 끝에 ‘재무늬네’라고 쓴 낡은 가게는 추억이 담긴 옷을 소재로 조형물을 만드는 조각가 재문 씨의 아틀리에. 바닥에 물감을 지저분하게 펼쳐놓고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그는 조금 전에 시장 입구에 앉아 페인트를 칠하던 청년이다. “골목마다 숨어 있는 작은 갤러리를 찾고, 작가의 오픈 스튜디오를 엿보는 것이 대인예술시장의 재미예요. 작가에겐 오픈 스튜디오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대중과 가까이에서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요.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이 골목에 ‘작가와의 대담’이라는 거창한 말을 걸어두고 ‘공짜 인생 상담’을 해요. 제가 직접 만든 칵테일도 파는데, 기분 좋으면 그냥 1잔씩 드리는 게 많아서 남는 것은 별로 없어요.” 매달 둘째 주와 넷째 주 금 토요일 밤이면 은밀하게 불을 밝히는 대인 야시장에서 재문 씨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는 작품의 원천이 된다고. 천 조각을 겹겹이 쌓은 가위가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조형물은 대인예술시장을 찾은 어느 헤어 디자이너의 삶의 역사를 듣고 ‘그동안 수고했다’는 의미를 담아 오직한 사람을 위한 작품으로 탄생했다. 재문 씨의 작업실 옆에는 ‘우그로(Ugro)’ 카페가 있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으면 지나칠 법한 낡은 건물 안은 의외로 아늑하다. 사창가가 있던 당시 이곳은 소위 말하는 ‘빨간집’이었다. 카페로 개조해 지금은 대인예술시장에 입주한 작가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한다. 바로 맞은편에는 지하 갤러리 ‘미테(Mite)’, 그 옆에는 해외 작가가 묵을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 ‘자자(ZAZA)’가 있어 좁은 골목에서 작가의 편의를 모두 해결한다. 세 공간의 이름을 가만히 보니, 정겨운 전라도 사투리의 발음이 들리지 않는가?


“낡고 오래된 건물도 작가의 손이 닿으면 작업실이 돼요.” 오래된 옛날 세탁소, 의상실, 미용실에 붙은 아기자기한 간판에 감탄하고 있는데, 대인예술시장의 박종철 사무국장이 이야기를 건넨다. 쇄락하는 재래시장에 자발적으로 들어온 작가는 이처럼 시장에 소소한 재미를 불어넣었다. 특히 야시장 ‘별장’은 작가와 상인이 이웃과 나누는 공동체 프로젝트로 시작해 지금은 광주의 명물로 성장했다. 시장통에서 벌어지는 미술 경매, 클래식에서 댄스까지 망라한 공연, 커피를 내리는 젊은 청년과 국밥을 나르는 상인이 합세해 모두가 함께 즐기는 축제. 한적한 평일과 달리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잘나가던 시절 시장의 활기가 화려하게 부활한다. 현재 시장에는 20개의 벽화와 예술 간판, 설치미술 그리고 22명의 예술인 작업실, 10개의 문화 공간이 있다. 개중에 시장에서 유독 튀거나 거창한 것은 찾기 힘들다. 시장이라는 일상 공간에 예술이 자연스럽게 물들게 만든 7년의 노력은 유명한 작가를 데려오는 것보다 더 어려웠으리라. 화제를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인과 예술인이 만든 공공 미술의 장’이라는 목표에 전혀 흔들림이 없다. 그래서 이곳은 저명한 미술 평론가가 아니라 물건을 파는 어머니가 인정하는 작품이 최고의 찬사로 통한다.


대인예술시장의 총감독을 맡고 있는 정삼조 씨/ 이색적인 한옥의 게스트하우스 천공소리 /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대인예술시장은 볼거리, 먹거리를 찾아온 사람들로 꽉 찬다. © 조지영

버려진 땅에 근대가 싹트다

작년, 양림동은 광주에서 가장 ‘핫’한 동네로 통했다. 근대역사둘레길, 아기자기한 벽화로 꼭 가봐야 할 광주 명소였다. 하지만 정작 양림동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전라도 특유의 무덤덤함으로 응수한다. 마치 이제야 알았냐는 듯이. 지난겨울에 취재차 들른 골목에도 아티스트의 손길이 느껴지는 이색 간판이 늘었다. 만남의 거점은 대체로 이동하기 편한 호남신학대학교. 뒤편으로 사직공원과 광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 선교사가 묻힌 묘역이 있다. 아래는 광주 100년의 시간이 깃든 우일선 선교사 사택이다. 사택 마당에 들어서자, 영화 세트처럼 ‘미국 집’ 한 채가 숲 속에 숨어 있다. 그 안에서 벽안의 선교사가 광주에 머물렀던 세월이 재생된다. 은단풍나무 아래에서 강강술래를 하는 어린아이, 한복을 입고 찍은 선교사 윌슨(한국 이름 우일선)의 모습, 죽기 전까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개수를 외우고 있었다는 딸의 사진이 흑백영화처럼 펼쳐진다.


오래전, 이곳은 시신을 내다버리는 풍장터였다. 유교 문화가 뿌리깊은 나주에서 쫓겨나다시피 광주로 온 선교사는 땅값이 싼 이곳을 선교 지역으로 택했다. 버려진 땅에 자리 잡은 그들은 기독교를 전하는 과업 말고도 학교와 병원을 지어 아프고 헐벗은 광주 시민을 품었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광주 최초의 여학교인 수피아여중·고교, 오른쪽에는 남학교, 앞에는 제중원을 세워 근대 교육과 의료를 싹틔운 것. 학교와 병원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일자리를 얻은 신지식인은 양림동에 모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본인이 점거한 광주 읍성과 달리 이곳은 ‘그들만의 리그’를 보여주는 미지의 동네가 된다. 재미있게도 당시 어르신에게는 ‘서양촌, 코쟁이 사는 동네’였지만, 호기심 가득한 모던 걸·보이에게는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산속 아지트로 통했다. 일이 끝나면 이 언덕으로 올라와 신지식과 문물을 접하며 일찍이 세상에 눈을 뜬 청춘은 광주를 인권의 시발지로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실로 양림동은 2.8독립선언을 시작으로 광주 애국 청년과 기독인이 모여 3.1만세운동의 거사를 준비한 곳으로 4.19혁명과 5.18민주화 운동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근간을 품고 있다.

호랑가시나무 언덕에서 바라본 우일선 선교사 사택. © 조지영

옛이야기를 덮어둔 채, 이제 와 양림동을 예술인 동네라고 띄우는 것은 양림동을 진짜 아는 사람에게는 섭섭한 말일지 모른다. “양림동 출신의 문화 예술인이 정말 많아요. 김현승, 이수덕 시인, 중국의 3대 음악가 정율성, 배동신 화백, 곽재구 시인을 비롯해 소설가 황석영이 <장길산>을 쓴 곳이기도 하고요. 뛰어난 시인이 워낙 많아서 웬만한 작가는 인사하기 바빠 고개도 제대로 들고 다닐 수 없었대요.” 호랑나무창작소의 정헌기 대표의 말이다. 그는 최근 우일선 사택 아래 양쪽 꼭지점을 맡고 있는 2채의 선교사 사택을 개조해 각각 게스트하우스와 작가 레지던스로 만든 문화 기획자다. 그는 아무리 느릿하게 걸어도 1시간 30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양림동이 ‘볼 것 없는 동네’라는 외지인의 말에 오기가 발동했다. 알면 알수록 오래 머물고 싶은 이 동네를 대강 훑어보고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오래 잡아두고 싶었던 것이다. 오로지 예쁜 벽화로 관광객의 이목을 끌려는 욕심은 애초에 없었다. 대신 양림동을 거쳐간 문화 예술인이 좁은 골목을 걸으며 느꼈을 감성을 곳곳에 감춰둔다. 골목길을 걷다가 무심코 눈을 돌렸을 때 담벼락의 시구가 들어오고, 오래된 고목 아래에 드러누워 책이라도 몇 줄 읽고 가고 싶은 휴식처가 손짓한다. 오웬기념각 안에서 공연을 열어 동네의 숨은 이야기를 곁들이고, 양림동의 인물을 재해석한 작가의 전시를 동네 골목에 펼쳐둔다. 정 대표의 말처럼 양림동은 스스로 느껴야 할 것이 많다. 오늘날 젊은 예술가가 양림동을 찾는 이유 또한 예향(藝鄕)의 기운 때문일 터. 어느 이탈리아 작가는 이곳에 들어와서 한 달에 작품을 20점이나 그렸고, 3주에 3곡을 편곡하고 간 예술가도 있다고 한다.

“화려한 볼거리가 많아요”가 아니라, “이곳에서는 책이 잘 읽힙니다”라고 덤덤하게 말하는 정 대표의 말. 그게 양림동에 오래 머물고 싶게 만든다. 시간에 따라 느낌이 다른 양림동에서 하루쯤 묵어 가는 것도 현명한 일이다. 아침에는 큰 고목에 걸린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장관과 새소리가 어우러지는 산책길을 걷고, 김현승 시인의 다형다방 앞에 앉아 석양을 기다리다 보면, 분명 내일 아침의 양림동이 다시 궁금해질 테니까.

고(故) 김현승 시인을 위한 다형다방은 자발적으로 500원을 내고 커피를 마시고 가는 양림동 쉼터다. © 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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