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처럼 에워싼 산자락, 너른 초원, 반짝이는 호수, 넘실대는 포도밭 … 차창 밖 풍경이 수시로 바뀌는 동안 스위스라는 거대한 캔버스가 채워진다. 길 위를 달리는 것. 그 자체가 이 자동차 여행의 목적이다.
글 표영소 ・ 사진 신규철 ・ 취재 협조 스위스관광청(MySwitzerland.com)
“이 차는 완전 새 거예요. 최신형인 데다 25킬로미터밖에 안 달렸거든요.” 취리히공항 내에 있는 유럽카(Europcar) 직원이 자동차 키를 넘겨주며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그 말을 듣는 내 심정은 그와 정반대다. 평소 자가운전자도 아니고, 해외 운전은 처음이며, 만약을 대비한 사고 대비 보증금을 신용카드로 막 결제하고 나온 참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공항을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먹구름이 빗방울을 뿌려대기 시작한다. 도착 직전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 일기예보 그대로지만, 그랜드 투어의 시작으로는 분명 예상을 빗겨간 그림이다.
2달여 전, ‘스위스 그랜드 투어’를 처음 접하고 무릎을 쳤다. 관광 인프라가 얼마나 풍부하면 기차 강국이 하루아침에 자동차 여행을 내세울 수 있는 걸까 싶어서. 대중교통으로 갈 수 없는 스위스의 속살까지 둘러볼 수 있다는 그 루트가 꽤나 매력적이어서. 18세기 유럽에서 엘리트 교육의 일환으로 유행한 여행과 이름이 같은 이 거창한 투어로 말할 것 같으면, 하루에 평균 5시간씩 운전하면 8일 안에 스위스를 1바퀴 완주할 수 있다. 고속도로보다는 국도와 작은 도로를 이용하고, 알프스의 고갯길도 지난다. 아말피 해안도로나 프로방스를 누비는 상상에 스위스를 추가해도 좋겠다고 생각한 게 불과 얼마 전인데, 나는 영화 속 주인공 월터 미티처럼 어느새 운전대 앞이다. 취리히에서 출발해 스위스 영토를 크게 돌아 다시 취리히로 돌아오는 일정. 원래 루트를 따른다면 1,600여 킬로미터를 달려야 하겠지만, 이번에는 그중 로잔에서 바젤까지 이어지는 스위스 서부는 제외한다.
취리히를 벗어나 북쪽으로 달린 지 40분 남짓. 낯선 자동차와 내비게이션, 스위스식 도로 표지판에 적응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잔뜩 긴장한 몸을 한 번쯤 풀어주기엔 적절한 타이밍인지라, 첫 목적지인 라인 폭포(Rhienfall)가 유독 반갑다. 취리히 주와 샤프하우젠(Schaffhausen) 주의 경계에 위치한 이곳은 ‘유럽 최대”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명소다. 높이가 23미터에 불과해 웅장한 느낌은 덜하지만, 너비가 150미터에 이르고 1초당 60만 리터의 유수량을 자랑한다. 폭포 측면에 위치한 전망대 위에 서면 어마어마한 물살에 자욱한 물보라까지 더해져 눈앞은 온통 하얗고, 귓가엔 거센 마찰음만 들릴 뿐이다. 바꿔 말하면, 아찔한 절벽을 타고 우아하게 흘러내리는 폭포는 아니라는 뜻. 그게 바로 라인 폭포의 매력이다. 지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무지막지한 힘이 느껴진다. 거대한 빙하 지대가 일순간 녹기 시작하면 이런 모습일까?
“라인 폭포를 여러 번 봤지만 매번 달라요. 햇빛에 따라 물의 빛깔이 늘 바뀌니까요. 여름철에는 초록빛을 띠기도 합니다.” 샤프하우젠 출신인 가이드 세이프(Seif)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한 순간 폭포 위의 하늘이 개면서 햇살 한 자락이 비춘 순간을 목격하기도 했다. 라인 폭포를 가장 적극적으로 즐기는 방법은 유람선을 타고 폭포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바위에서 내려 그 꼭대기에 오르는 것. 경치를 따진다면 강가에 자리한 슐뢰슬리 뵈르트(Schlössli Wörth)로 가는 방법도 괜찮다. 14세기 요새이던 이곳에선 폭포는 물론, 건너편 절벽 위에 자리한 고성 슐로스 라우펜(Schloss Laufen)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라인 강을 사이에 두고 슐뢰슬리 뵈르트가 샤프하우젠 주, 슐로스 라우펜은 취리히 주에 속한다.
여기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샤프하우젠은 폭포 덕을 톡톡히 누린 소도시다. 라인 폭포가 라인 강을 따라 발달한 물길을 가로막고 선 까닭에 무역로가 우회하면서 자연히 이곳에서 무역업이 번성한 것. 도심의 보르더가세(Vordergasse)를 따라 늘어선 건물은 화려한 옛 시절의 흔적이다. 노른자위를 차지한 이들은 오직 옆집보다 더 멋진 퇴창, 더 화려한 벽화를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옆 도시 장크트갈렌(St. Gallen)의 구시가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보행자 전용 거리인 물터가세(Multergasse)를 걷다 보면 대담한 조각과 그림으로 장식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이 경쟁하듯 이어진다. 20세기 직물 산업으로 전성기를 맞은 장크트갈렌에는 파리를 오가는 직행열차가 있었다. 그러니 당시 지역 거상들이 건물에 한껏 멋을 부린 것쯤은 약과다. 바로크 양식의 전형인 대성당(St. Gallen Cathedral)과 17만 권의 고서를 소장한 수도원 도서관(Abbey Library)에 비하면 스케일도 소박한 수준이고.
책과 섬유, 바로크에서 공공 미술까지. 장크트갈렌이 시대를 불문하고 끊임없이 동시대 미와 예술을 좇은 도시라면, 아펜첼은 그와 대척점에 있는 도시다. 7대째 아펜첼 전통 공예를 이어가고 있는 가죽 공방, 지드부어스트(Sidevurst, 아펜첼 수제 소시지)를 만드는 비법이 할아버지에게서 손자로 전해진 정육점, 톱밥 더미 속에서 치즈 보드를 조각하는 목수의 작업실 등이 모퉁이를 돌 때마다 하나씩 튀어나온다. 1991년 스위스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했고, 매년 마을 광장에 모든 주민이 모여 거수로 주요 안건을 결정하는 곳. 아펜첼은 시대의 흐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꼬장꼬장한 보수주의자다. 자고로 그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아는 것이 여행의 첫 순서라고 한다면, 이번 그랜드 투어의 시작은 합격점을 받을 수 있을 듯하다.
지금은 비가 내리지만, 어제는 눈이 내렸단다. 스위스 알프스 전지대(Swiss Prealps)의 5월 날씨는 완만한 구릉을 따라 초록빛 목초지가 펼쳐진 풍경만큼 평화롭지 않은 것 같다. 그 때문에 잔뜩 기대한 에벤알프(Ebenalp, 아펜첼 알프스의 산봉우리 중 하나) 하이킹과 절벽 위 산장 베르가스트하우스 에셔(Berggasthaus Äscher)에서의 점심 식사가 물 건너 갔다. 그리고 슈바그알프스트라세(Schwagalpstrasse)까지 그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 아펜첼을 출발해 마이엔펠트로 가는 도중에 센티스(Säntis) 산을 바라보며 달릴 수 있는데, 그 고갯길이 바로 슈바그알프스트라세다. 멋진 도로를 운전하는 것이야말로 자동차 여행의 묘미. 그러니까 이 길은 이번 여정의 첫 번째 하이라이트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야생화 덮인 들판은 눈 쌓인 산등성이로 바뀌고, 마치 만년설을 뒤집어 쓴 것 같은 산봉우리가 가까워진다. 시계는 흐릿하고, 설산 주위로 안개까지 더해져 겨울 분위기가 제대로 난다. 스위스 동북부 알프슈타인(Alpstein)의 산자락 중 가장 높은 산을 정면에 마주한 채 계절을 거슬러 오르는 이 기묘한 드라이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확실한 것은 어쨌거나 ‘그 길을 거쳐왔다’는 점에선 운이 좋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마이엔펠트에 도착할 때만 해도 그것을 알 리 없었다. 라인 계곡에 자리 잡은 이 조용한 동네도 1880년 이전에는 ‘하이디 마을(Heidiland)’로 불리게 될 줄 꿈에도 몰랐으리라.
요하나 슈피리(Johanna Spyri)가 창조한 하이디 이야기는 소설로 먼저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소설 속 배경을 관광 명소로 만든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공이 크다. 프린세스 에드워드 섬이 <빨강머리 앤>(1979)으로 유명해지기 전에 마이엔펠트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1974)가 있던 셈이다. 하이디 호텔에 짐을 풀고, 하이디 트레일을 지나 하이디 박물관과 하이디 집을 둘러본 뒤 하이디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 개인적으로 소설 속 가상 세계를 재현해놓은 것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하이디로 점철된 이 동화 속 마을이 크게 불편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자연 때문이다. 산자락 사이에 폭 안긴 듯한 아늑한 지형, 염소와 젖소가 한가로이 어우러진 푸른 언덕, 관광지답지 않은 차분한 분위기. 머릿속으로 그리던 알프스 소녀의 고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설사 레스토랑 통유리창 너머, 하늘이 잿빛일지라도. 작년 7월호 스위스 파노라마 기사에서 소개했듯 ‘날씨마저 화창한 여름날에는 눈이 부실 만큼 깨끗한 풍경’을 선보일 것이다,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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