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더로드 Oct 19. 2017

서천의 아련한 맛


Nostalgic Flavor in Seoncheon

서천의 아련한 맛



영화로운 시절과 서정적 풍광이 깊게 서린 곳. 

원초적 미각의 기억을 일깨워주는 서천의 포구와 마을로 향하다.





장항선 끝자락의 아귀찜


장항 송림산림욕장 끝자락의 해변을 따라 250m 길이로 설치한 장항스카이워크. ⓒ 김주원

“서천이면, 진주 아랫동네 말하는 거죠? 아, 거긴 사천이었나?” 처음 만난 이와 서로 연고를 묻던 서천 사람은 이런 어수룩한 대꾸에도 무덤덤하게 반응한다. 보령 아래 혹은 군산 위라 부연 설명을 해야 위치를 파악할 만큼 타지 사람에게 서천은 낯선 곳이다. 단, 이곳에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동네가 있다. 충청남도 최남단의 산업 단지이자 장항선 종착지인 장항. 특정 지명을 사용한 철도 노선 중 가장 긴 장항선의 존재는 금강하구 어귀에서 오랜 기간 부귀영화를 누리던 장항의 위세를 짐작하게 한다. 서울에서 군산으로 가려면 기차를 타고 장항역에 도착한 뒤, 도선장에서 배를 갈아타고 금강을 건너던 시절이 있었으니. 이는 장항이 번성하던 먼 과거의 이야기다. 2008년 장항선 직선화 공사를 마친 이후에는 군산을 지나 익산까지 철로가 연결됐고, 옛 종착지이던 장항역은 장항화물역으로 남았다. 그렇게 충청남도 서해안을 느긋하게 달리던 장항선 기차는 영화롭던 옛 포구를 멀찍이 비켜 간다.


강 건너 군산은 근대 문화유산의 흔적을 찾아 온 여행객으로 붐빈다. 이런 반면, 아직 장항은 세월의 영겁을 무기력하게 응시하는 듯하다. 이 같은 분위기는 근대화의 산물이던 장항제련소의 높다란 굴뚝을 보며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장항제련소 굴뚝에서 늘 영원감(永遠感)을 체험했다. 장항제련소의 굴뚝과 그 긴 연기야말로 내 운명의 서장(序章)이다.” 시인 고은은 자신의 회고담에 장항제련소 굴뚝을 영원불멸의 존재로 묘사하기도 했다. 1936년에 세운 높이 100미터의 굴뚝은 1989년 제련소가 문을 닫은 이후 애처롭게 서 있을 뿐이다. 소임을 다한 굴뚝의 연기와 더불어 시계가 멈춘 듯한 쓸쓸한 포구 마을을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서천군 문화예술창작공간에는 근대 창고 건축 골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 김주원

2012년 공장미술제를 기점으로 장항은 차츰 변화를 맞고 있다. 당시 미술제의 주 무대이던 미곡창고는 이후 대대적인 레너베이션을 거쳐 2015년 서천군 문화예술창작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인형 극단 또봄이 위탁 운영을 맡은 이곳은 매년 창작 인형극을 제작해 상연하고,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쇠락한 포구에 활력을 불어넣는 중이다. 1936년, 장항역 지척에 들어선 미곡창고는 일제강점기에 충청도의 곡물을 수탈하던 본거지였다. 해방을 맞은 후 대한통운 창고, 철공소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가 오랜 시간 텅 빈 창고로 방치됐다. “미곡창고는 콘크리트 기둥과 목제 트러스 등 근대 창고의 원형이 잘 남아 있는 건축 유산이죠. 사실 장항이라는 동네 자체가 하나의 근대 유산이나 다름없어요. 이 근방에는 아직 사람들이 잘 모르는 크고 작은 창고와 근대 건축물이 남아 있으니까요.” 서천군 문화예술창작공간 이애숙 대표의 말처럼 문화 공간으로 변모한 미곡창고를 시작으로 장항은 조만간 애달픈 기억을 하나둘 끄집어낼지 모른다.



장항의 아귀찜은 푸짐한 양과 과하지 않은 양념 맛으로 오랜 기간 현지인에게 사랑받고 있다. ⓒ 김주원

미곡창고 너머에는 옛 포구의 맛을 기억하는 골목이 자리한다. 셔터를 굳게 내린 다방과 여관 사이에 비집고 들어선 식당 외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몇몇 식당은 좀 더 번듯한 새 건물로 가게를 확장해 옮겨 갔지만, 장서로29번길에는 군데군데 식당이 여전히 성업 중이다. 한 집 건너 한 집이라는 말처럼 나란히 간판을 내건 우리식당과 연화식당, 중앙식당. 이 셋은 현지인이 아귀 요리가 당길 때 즐겨 찾는 집으로, 30년 이상 골목을 지켜왔다. 군산 어청도와 서천 북단의 홍원항에서 겨우내 잡아 올린 아귀로 조리한 아귀찜은 포구와 제련소에서 고단한 하루를 마감한 이들이 허기를 달래기에 적당한 메뉴였다고. 일단 도시의 빈약한 아귀찜과 달리 두툼하게 살이 붙은 아귀를 푸짐하게 담은 장항의 아귀찜은 비주얼 자체가 남다르다. 슴슴하게 양념이 밴 아귀에 살짝 데친 미나리와 고소한 참기름을 버무려 맛도 자극적이지 않다. 넉넉한 인심과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이 음식은 풍요롭던 포구의 기억을 고이 품고 있는 듯하다. 




한산 장인의 술

 왼쪽부터 대를 이어 자향소곡주를 운영하는 유경희 대표. 세 가지 맛으로 선보이는 자향소곡주. ⓒ 김주원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오는 한산면에는 수백 년간 장인의 손길을 거친 특산품이 있다. 그것도 둘씩이나. 우선 모시의 일반명사처럼 각인된 한산모시는 섬세하고 단아한 만듦새로 유명하다. 2011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기도 했으며, 매년 초여름 지역에서 성대한 축제를 열어 그 우수성을 알린다. 한산면의 또 다른 명물로 한산소곡주를 빼놓을 수 없겠다. 한번 맛보면 자리를 뜨기 힘들어 ‘앉은뱅이술’이라 부르는 소곡주의 역사는 백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500년 가까이 지역의 대표 가양주로 명맥을 이어오던 한산소곡주는 일제강점기에도 집집마다 비법을 남몰래 전수했다고. 오늘날 한산면에서 소곡주를 빚는 양조장은 50여 곳에 이른다.


“소곡주를 만들면서 선조의 지혜에 감탄할 때가 많아요.” 15년 전 고향 한산면으로 귀농한 유경희 씨는 부모님을 이어 자향소곡주를 운영하고 있다. “우선 메주콩이 누룩의 시큼한 향을 알맞게 잡아줘요. 생강과 고추는 소곡주의 다섯 가지 맛이 조화를 이루게 하죠.” 한산소곡주는 기본적으로 찹쌀과 누룩에 약초국화, 고추, 메주콩, 엿기름, 생강을 섞어 양조한다. 최근에는 지역 명물인 모싯잎 가루나 솔잎 가루 등을 가미해 보다 독특한 풍미를 내기도 한다. 13~14도의 저온에서 약 100일간 발효시켜야 해서 100일주라는 애칭으로도 부른다고. “사실 요즘 트렌드에 맞춰 드라이한 맛을 강조한 소곡주도 일부 있어요. 저는 최대한 고유의 맛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죠. 한산소곡주의 깊은 맛을 더 많이 알리고 싶거든요.” 유경희 씨가 건넨 한산소곡주의 첫맛은 달큰하면서 부드럽다. 이어 맵고, 짜고, 신 복잡 미묘한 맛이 차례로 입안을 맴돌기 시작한다. 마치 술을 처음 마신 것처럼 오감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기분도 든다.



왼쪽부터 문헌서원 주변을 두르는 소나무와 백일홍은 고즈넉한 정취를 더한다.  차분한 하룻밤을 선사하는 문헌전통호텔. ⓒ 김주원


자동차 여행자에게 양조장에서의 시음은 감질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게다가 한산소곡주의 알코올 도수는 18도로, 전통 발효주 중 꽤 묵직한 편이다. 그러니 기분 좋게 소곡주를 음미하며 풍류객의 기분을 이어가고 싶다면 한산면 서쪽에 맞닿아 있는 기산면의 문헌서원으로 향하자. 고려 시대 말 대학자 가정 이곡과 그의 아들 목은 이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중기 한산군수와 지방 유림이 세운 서원이다. 특히 이색은 정몽주, 길재와 함께 고려 후기 3대 충신으로 추앙받았으며, 후대 성리학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이 직접 현판과 신도비를 남기기도 했다. 조선 시대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거했다가 1969년 지역 유림이 재건했고, 2012년 현재의 기린봉 자락 아래로 터전을 옮겼다.



문헌전통호텔의 시우관에서 서천산 식자재로 차린 서원정식. ⓒ 김주원

산책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휘휘 서원을 돌아본 뒤에는 고즈넉한 한옥에서 한상 벌일 차례다. 올봄 서원 초입에 문을 연 문헌전통호텔은 7개의 한옥 객실을 비롯해 한정식을 내는 식당 시우관을 갖췄다. 역모리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이곳에서는 한옥의 정취를 느끼며 식사를 즐기고 호젓하게 하룻밤 보낼 수 있다. 시우관이 선보이는 한정식의 찬 대다수는 서천에서 난 식자재를 사용한다. 나물 두 가지와 김치 두 가지, 전 두 가지를 기본으로 약 스무 가지의 찬이 거나하게 상 위를 채운다. 제철을 맞은 꽃게를 소금에 무친 게장, 기산면에서 재배한 연으로 만든 연근조림과 연잎밥도 눈에 띈다. “서천에서 난 식자재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조미료는 거의 사용하지 않아요. 꾸준히 서천의 향토 음식을 연구해 메뉴를 추가할 생각이에요.” 문헌전통호텔을 운영하는 이우송 단장이 서천산 말린 박대를 권하며 말한다. 일일이 헤아리기 힘든 찬을 두루 섭렵하려면 젓가락을 부지런히 옮겨야만 한다. 물론 틈틈이 술잔을 채우는 일도 잊지 말자. 오묘한 풍미를 지닌 한산소곡주는 시우관의 담백한 요리와 더없이 잘 어울리니까.










글. 고현       사진. 김주원






서천 여행 Part 2. 판교마을&홍원항

서천 자동차 여행 노하우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와 함께 최고의 여행을 만나보세요.

▶ 론리플래닛 코리아 웹사이트

▶ 론리플래닛 코리아 페이스북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 일주도로 자동차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