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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Jul 31. 2018

박찬일 셰프의 이탈리아 와인 기행


Rediscover Italian Wines

다시, 이탈리아 와인에 빠지다. 



요리사 박찬일이 요리와 와인을 배웠던 이탈리아 피에몬테와 토스카나를 20년 만에 다시 찾았다. 엉뚱하고 아련한 맛의 기억과 함께.

피에몬테는 경사진 언덕으로 이루어진 고급 와이너리가 곳곳에 산재한다. 완벽한 배수 시설과 일조량을 갖춘 포도밭에서 최고의 바롤로를 생산한다.  20여 년 만에 피에몬테의 와인과 음식의 품으로 돌아온 박찬일. 그는 한때 피에몬테에서 요리사와 소믈리에의 꿈을 키웠다. ⓒ 이현준



피에몬테에 온 이방인

 20여 년 전, 나는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주 시골의 요리 학교에 있었다. 피에몬테라면 모르는 이가 많을 수도 있겠다. 김연아가 주도인 토리노(Torino)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 메달을 땄다고 설명하면 쉬우려나. 하여튼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유복하고 아름다운 주(州)다. 그 시절 나는 요리 수업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크림 카르 보나라’나, 마늘이 왕창 들어간 ‘알리오 올리오 스파게티’를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이 요리들은 사실 이탈리아에 없다. 없으니, 선생들도 가르쳐줄 수 없던 것이다. 나는 애 아버지였고 얼른 한국에서 잘 팔릴 만한 스파게티 몇 가지를 잘 배워서 개업해야하는 처지였다. 일주일의 커리큘럼은 상당히 빡빡했는데, 그중 지옥의 시간이 있었다. 학교 건물 지하의 카브(이탈리아어로는 칸티나(cantina)라고 한다)에서 열리는 와인 수업이었다. 요리를 배우러 갔는데, 술은 왜 가르친담. 전체 수업의 20퍼센트쯤 차지하는 비중이라 더 의아했고, 시원한 지하는 졸기에 아주 좋았다. 와인 선생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 전까지는.


“와인은 포도로만 만듭니다. 포도가 100퍼센트예요.”


포도 100퍼센트라고?  대충 주정에 설탕 넣고 포도즙 섞어 만드는 것이 와인이 아니었단 말인가. 20여 년 전, 한국은 와인의 불모지였다. ‘마주앙=본격 포도주’이던 시절이었으니까. 나는 무섭게 와인에 빨려 들어갔다. 후에 내가 본격적으로 처음 쓴 책이 <와인 스캔들>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와인 상식의 허무함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그 학교는 와인을 잘 가르쳤다. 와인 없는 식사는 이탈리아식이 아니었으니까. 공교롭게도 그 동네는 이탈리아, 아니 세계에서 손꼽는 와인 주산지였다. 바롤로(Barolo)라는 엄청난 술이 있었다. 지금 세계 와인 마니아들이 신줏단지 떠받들 듯하는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의 와인에 비견되기도 하는. 학교 시음 수업에도 바롤로가 나왔다(안 믿는 분도 있겠다).


요리 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탈리아를 돌며 와인을 공부했다. 피에몬테와 토스카나(이탈리아의 양대 와인 산지)를 취재했다. 그리고 20여 년 만에 다시 이곳을 찾았다. 와인값이 오르고, 음식이 세련되어진 것 말고는 변한 게 없었다. 이탈리아는 ‘변하지 않는’ 것을 파는 나라니까. 





바롤로의 땅은 좋은 포도를 낸다

신의 선물이라고 일컬어지는 이탈리아의 자연은 완벽한 와인까지 선물했다. 구릉은 경작지와 맞물리면서 와인의 가치를 드높인다.  ⓒ 이현준

바롤로의 주산지는 피에몬테주 중심에서 아래쪽에 자리한 작은 시 알바(Alba)를 중심으로 근처 지역이다. 바롤로라는 동명의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만 생산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전체 11개 마을에서 생산된다. 라 모라(La Morra), 바롤로, 세라룽가 달바(Serralunga d’Alba), 몬포르테 달바 (Monforte d ’Alba), 카스틸리오네 팔레토(Castiglione Falleto) 등 5개 마을이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마을마다 타닌의 강도와 부드러움, 세밀한 향과 밀도의 차이가 있다. 한 마을에서 생산된 포도로만 만들기도 하고, 여러 마을 것을 섞을 수도 있다. 아예 한 마을의 특정 밭(싱글 비니어드)에서 생산된 것으로만 만들기도 한다. 유명한 생산자일수록, 싱글 비니어드일수록 와인 가격이 올라간다. 상표에 그냥 바롤로라고 써 있고 생산자 이름만 보인다면 대개 ‘레귤러’라고 해서 값이 싼 편이다. 싸다고 해도 물론 만만치 않다. 한국에선 레스토랑 가격으로 20만 원쯤 지불해야 한다. 현지 식당에서는 60~80유로 선이다.




오랜 와이너리 저장고(칸티나)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비매품들이 언제 개봉될지 모른 채 숙성되고 있다. 피에몬테의 한 레스토랑에서 지역 전통 요리를 맛본 박찬일 셰프.  ⓒ 이현준

 이번에 취재 차 들른 피에몬테의 바롤로 생산자는 피오 체사레(Pio Cesare, piocesare.it)다. 한국에서 상당히 유명한 곳이지만 생산량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와이너리는 지역에서 상당한 파워를 자랑한다. 재력이 있고, 품질 좋은 바롤로를 생산하는 곳으로 존경을 받는다. 특히 레귤러 바롤로의 품질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라벨에 ‘PLEASE DON’T CALL IT REGULAR’라는 문구를 새긴. 최근 출시된 빈티지 역시 상당히 독특하고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좋은 생산자에게는 빈티지가 큰 의미가 없다. 매해 어떤 조건에서든 완성도 높은 와인을 선보이므로. 그 미세한 차이가 나중에 큰 가격 차이를 만들어낸다. 유명 와인 잡지에서 높은 평가를 받거나, 생산량이 적어서 시중에 남은 와인은 별로 없는데 갑자기 미국의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 같은 이가 ‘명품’이라는 평을 내려도 그렇다.



피오 체사레. ⓒ 이현준

이탈리아는 프랑스처럼 와인에 관련한 법률을 상당히 엄격하게 적용한다. 바롤로의 경우 출시 전에 최소 3년의 숙성(캐스크와 병입 포함)을 거쳐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 시중에는 2016년, 2017년 빈티지의 바롤로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20년 전, 바롤로는 지금보다 훨씬 쌌다. 전설의 1990년 빈티지가 소비자가 5~6만 원에 팔렸다. 지금은? 만약 그 빈티지라면 100만 원을 줘도 구하기 힘들다. 와인은 시간과 세평에 의해 급변하는 상품이다. 그래서 투기꾼들이 몰리기도 한다. 당신도 한번 바롤로에 투자해 볼 생각이 있는가? 그렇다면 피오 체사레를 추천한다. 현지에서 서너병 사는 정도의 가벼운 투자라면 오케이. 


피오 체사레는 앞서 말한 엔트리급 바롤로 외에도 싱글 비니어드에서 더 고급의 바롤로를 출시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바롤로 뒤에 ‘블라~블라~’ 추가로 이름이 붙는 와인을 말한다. 무엇이든 가치 있는 와인인데, ‘그냥 바롤로’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바롤로다운 개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아함과 세련미, 힘차고 강건한 뼈대가 느껴질 뿐 아니라. 잔향이 오래도록 입과 코에 남는다. 그 옛날 요리학교 시절, 나는 와인 선생이 애지중지하는 바롤로를 훔쳐 마신 적이 있다. 그가 얼마나 사랑하는 와인이었던지, 딱 1잔을 마셨는데도 다음날 바로 알아챘을 정도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누가 내 바롤로 마셨어!”


나는 지금도 바롤로 1잔에 좋은 고기 1점을 먹고 싶다. 그건, 호사라고 부를 만한 일이다. 서울의 와인 상점에서 15만 원쯤 주고 바롤로 1병을 산다, 정육점에서 등심 1근을 산다. 소금만 조금 뿌려서 굽고, 와인을 마신다. 친구도 불러야지.












바롤로의 신흥 귀족 파올로 스카비노는 미국 등 외국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아서 가격이 뛰고 있다. ⓒ 이현준

 피에몬테에서 두 번째로 방문한 와이너리는 이른바 ‘신흥 귀족’이다. 피오 체사레가 유서 깊은 가문이라면, 이 집은 좀 더 세련되고 국제적인 감각의 와인을 만든다. 파올로 스카비노(Paolo Scavino, paoloscavino.com)다. 물론 한국에도 수입된다. 미국 유명 와인 잡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와 로버트 파커에게서 좋은 평을 받으면서 일약(그렇다 일약!) 떠버린 와이너리다. 그렇더라도 설립 시기는 이미 1921년이다. 보통 이 나라의 ‘오래된’ 것이란 100년은 넘어야 명함을 내민다. 이 와이너리는 프렌치 오크를 잘 쓴다. 좋은 포도에 프렌치 오크는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바롤로는 원래 프렌치 오크를 쓰지 않았다. 현대의 와인 생산자들이 이것을 쓰면서 바롤로의 전체 평가가 올라간 것이다. 확실히 프렌치 오크는 마술이다. 와인을 더 오래 숙성할 수 있게 해주고 그윽하고 우아한 향을 더해준다. 요리에서 미원 같은 존재다(이 문장은 물론 농담이다). 이제 프렌치 오크는 바롤로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 고급 와인의 품질을 국제화하는 요소가 되었다. 물론 이 때문에 이탈리아 와인의 개성이 죽었다는 말도 돈다.




파올로 스카비노의 지하 저장고.  파올로 스카비노의 와인은 혀를 강하게 조이면서도 풍성한 뒷맛으로 완벽한 밸런스를 보여준다. 와인이 맛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쓴다. ⓒ 이현준

이들의 생산 라인업 중에서 브릭 델 피아삭(Bric del Fiasc)은 이탈리아 와인 중 유일하게 다섯 차례에 걸쳐 <와인 스펙테이터>의 TOP 100에 올랐다. 이제 와인 시장도 미국의 영향이 크다. 국제적 와인 애호가 사이에서는 그래서 “브릭 델 피아삭은 눈에 보이면 사라!”라는 말이 생겼는데, 이는 투자 가치를 염두에 둔 말이다. 국내에도 소량 수입되고 있을 정도. 30만 원을 훌쩍 넘는다. 사서 한 20년쯤 숙성시키면 좋다고‘들’ 한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최근에 태어난 아이의 성인식 또는 어린 자식의 결혼식,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부부의 30주년 결혼기념일에 따면 좋을 와인이라고, 써본다. 어떤 날에 쓰든 고급 바롤로는 셀러에 잘 보관한다면 20~30년 정도는 너끈히 훌륭한 맛을 보여줄 것이다. 이건 확실하다.




브롤리아는 가족 경영을 한다. 3대째 계승자가 자사의 와인을 선보이고 있다. ⓒ 이현준

 피에몬테는 확실히 레드 와인으로 유명하다. 바르바레스코(Barbaresco)나 바르베라(Barbera) 등도 인기가 덩달아 올랐다. 바롤로의 ‘언더 카피’ 정도로 여겨지던 바르바레스코도 가야(Gaja) 등의 인기로 병당 100만 원을 넘기는건 우스운 일이 되어버렸다. 한때 테이블 와인이던 바르베라도 고급화의 길에 들어서서 왕년의 바롤로 가격(국내 가격 10만 원 정도)에 이른 게 흔하다. 그런데 피에몬테의 화이트 와인도 아주 강렬하다. 아마도, 한 번쯤 마셔봤을 가비(Gavi)가 그중 하나다. 요즘은 국제 품종인 샤르도네를 곳곳에서 재배하지만, 피에몬테라면 역시 가비다. 그중 최고 명가 브롤리아(Broglia, broglia.it)를 찾았다. 바롤로 지역에서 남동쪽으로 달려가면 나오는 가비에는 등락이 심한 바롤로의 지형과 달리 평탄하다가 가끔 구릉이 보인다. 그야말로 한가롭고 목가적인, 부자 나라의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이럴 때 우리가 흔하게 하는 말.


“아, 저런 데서 한 며칠 쉬어갔으면 좋겠다.”




피에몬테는 좋은 육가공품 살라미 등도 고품질을 자랑한다. ⓒ 이현준

브롤리아 와이너리는 그런 분위기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전형적인 포도 농가이며, 겉멋이 없다. 가비는 중간 정도의 무게감에 신선함과 적당한 유려함이 뒤섞인 고급 와인이다. 음식을 곁들이지 않고 아페리티프로 마셔도 좋고, 당연한 얘기지만 해산물이나 닭 같은 가벼운 육류 요리, 파스타에도 더없이 잘 어울린다. 물론 나는 적당히 차가워진 이 와이너리의 가비를 천천히 마셨다. 프로슈토와 구운 라비올리를 안주로 해서. 한 모금 머금자, 수수한 피에몬테 들판의 향기, 그 들판에 부는 바람의 기운이 물씬 풍길 리는 없고…. 그냥 옛날 생각이 났다.


요리사 보조이던 20여 년 전, 나는 돈이 없어 식당에서 손님이 남긴 화이트 와인을 가져다 마셨다. 안주 없이 먹기에 화이트가 더 나았으니까. 간혹 슈퍼에서 종이팩에 담긴 1리터짜리 화이트 와인을 사서 마셨다. 내가 이탈리아 와인의 ‘위대함’을 느낀 본류는 바롤로도 그 어떤 와인도 아니었고 바로 그 싸구려 종이팩 화이트였다. 요리에 쓰는, 고작1,000원 하는 그 와인이 충분히 맛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정말로.

브롤리아 와이너리가 만드는 화아트 와인 중에서도 대표 주자 격인 라 메이라나(La Meirana)는 여러분이 잊지 않기를 바란다. 972년(한반도는 고려 시대였다), 가비 지역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문서에 등장할 만큼 가비의 역사와 궤를 함께해왔다. 가비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은 분을 위해 언급하자면 가비에 쓰는 포도는 토착 품종인 코르테제다. 반짝이는 생명력이랄까, 기분 좋은 미네랄이 충만한 와인이다.






셰프이자 음식 칼럼니스트인 박찬일은 ‘로칸다 몽로’와 ‘광화문 국밥’ 등의 식당을 지휘하고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등의 여러 매체를 통해 자신의 음식 철학을 설파하며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최근 27개의 노포를 기록한 책 <노포의 장사법>(인플루엔셜, 1만6,800원)을 펴냈다.



ⓘ 취재 협조 CSR와인(thevincsr.com)




글. 박찬일




Part 2. 토스카나의 맛

이탈리아 와인 여행 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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