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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로드 Dec 23. 2019

여행에 기묘한 순간을 선사하는, 전국의 기묘한 장소

이상하고 묘한 느낌 때문에, 오히려 더 끌리는 여행지들.

"기묘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생김새 따위가 이상하고 묘하다'라는 뜻이다.
허름하고, 특이하고, 키치하고, 이상한 장소들.
때로 우리는 그 기묘한 기분에 무작정 이끌린다.

이제껏 여행해본 곳 중에서 여러 이유로 낯설고도 흥미로운 인상을 남기며,
그 자체로 여행의 이유가 되는 기묘한 장소를
론리플래닛 매거진 에디터와 여행 사진가, 필진들이 꼽았다.


1. 충청남도 당진 왜목마을

왜목마을의 일출. © 이기선

당진시에서도 차로 30분 더 들어가야 하는 왜목마을 앞에는 꼭 ‘해 뜨고 지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낚시꾼을 빼면 사람들이 이 외진 땅 끄트머리에 가는 이유는 딱 하나, 서해안의 일출이라는 아이러니한 현상을 목격하기 위해서다. 북쪽으로 돌출된 지형 탓에 벌어지는 당연한 자연현상인 걸 알아도 여전히 신기하다. 이를테면 ‘신비의바닷길’이나 ‘도깨비도로’ 처럼. 인간은 늘 기적을 믿고 싶은 존재라, 때로는 기적의 착시 현상에 일부러 속는 건지도 모른다.


비치타운모텔에 예약 전화를 하자 주인장은 대번 바다 전망 방의 가격을 알려주었다. 다음 날 늦은 오후, 나는 왜목마을을 상징하는 고전적인 일출 사진(노적봉 위로 해가 떠오르는 장면) 아래 ‘왜목마을’이라 쓰인 조악한 아치형 조형물을 통과했다. 마을이라고 하지만 ‘썬라이즈’ ‘해돋이’ ‘비치’ 같은 이름을 붙인 숙박 시설이 해변 앞에 모여 있는 정도다. 1층에 횟집을 운영하고 하루짜리 손님이 드나드는 숙소들. 지름 139만 킬로미터의 펄펄 끓는 항성이 이들을 불러 모았다. 국내 최대 규모의 해상 조형물인 새빛왜목은 공상과학영화에 나올 것 같은 은빛으로 번쩍였다. 이 해수욕장에서는 일몰이 보이지 않아 마을 뒷동산 격인 석문산에 올랐다. 동쪽 바닷가 위로 송편 같은 달이 떠올랐고, 반대편 들판 너머로는 이 여행의 목적인 거대한 항성이 최후의 빛을 뿜으며 가라앉았다.


이튿날 동이 트기 전에 컴컴한 해변으로 나가자 이미 몇몇 동지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붉어오는 수평선을 보며 살짝 두려움을 느꼈다. ‘서해안의 일출’이라는, 통념을 거스르는 일이 벌어질 참이었다. 미리 확인한 일출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영 보일 기미가 없기에 긴장을 놓은 찰나, 국화도의 낮은 실루엣 위로 새빨간 빛 덩어리가 빼꼼 나타났다. 일출에 놀라다니. 하지만 사실이다. 거무스름한 펄 너머로 그 빛 덩어리가 상승하는 모습은 지나치게 극적이었다. 목표를 달성한 사진 동호회 사람들은 일출을 배경으로 다 같이 기념사진을 찍더니, 후다닥 차에 올라타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그날 아침엔 해변 앞 편의점 직원도, 택시기사도 안부를 건네듯 물었다. “일출 봤어요?”


— 론리플래닛 매거진 에디터 이기선(인스타그램 @lee.kisun)


2. 강원도 춘천 육림랜드

육림랜드. © 이기선


산림을 조성한다는 뜻의 육림(育林)은 지금은 쇠락한 춘천 기반의 기업 이름이며,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춘천 약사명동 번영기의 상징이다. 춘천의 명물 육림극장과 여기에서 이름을 딴 육림고개 외에도 슈퍼마켓, 약국 등 여러 가게가 육림이라는 이름을 보증 마크처럼 달았다. 그 이름이 유명무실해진 건 1990년대 도심 밖에 신도시를 개발하면서다. 2000년대 중반 영업을 중단한 육림극장은 2016년 폐업했고, 인근의 상점 대부분도 문을 닫았다. 2015년경부터 시에서는 약사명동 일대에 상인 창업 지원, 청년몰조성 등 도시 재생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시의적절하게 레트로 트렌드라는 순풍이 불어온 참이다. 그래도 아직 ‘부활’이라고 보기에는 이르지만.


육림고개에서 닭갈비를 먹고 차로 10분 달리면 의암호에 면한 육림랜드에 도착한다. ‘육림’이라는 간판을 단 녹슨 관람차가 멈춰 서 있는 모습이 인근 도로에서부터 보이는데, 이는 오늘의 육림랜드를 그대로 보여주는 간판에 가깝다. 1975년 개장한 이 테마파크는 레트로 유행과 폐허 포르노의 맥락에 애매하게 걸쳐 있다. 이를테면 폐장한 뒤 오히려 출사지로 명성을 얻은 용마랜드와 달리 이곳은 뚜렷한 방향성 없이, 노후해가는 시설을 그대로 운영하고 있을 따름이다. 평일 오후의 육림랜드는 당황스러울 만큼 썰렁했다. 이곳에서 촬영한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 장면을 담은 플래카드와 대조되는 분위기였다. 손님이라고는 두 아이를 데려온 젊은 엄마뿐이었고, 몇 안 되는 놀이기구 중 다수가 어린이용이었다. 안쪽 매표소에서 타고 싶은 놀이기구 표를 산 다음, 놀이기구 앞에서 10분 정도 기다리자 매표소 직원이 와서 기구를 작동시켜주었다. 작은 동물원과 체험 농장도 있다고 들었으나 부러 확인하지는 않았다. 종말 후 놀이공원을 독점하는 기분, 회전목마에서 가장 멋진 말을 고르는 특권 정도면 충분했다.


— 론리플래닛 매거진 에디터 이기선(인스타그램 @lee.kisun)


3. 서울 용산구 구 오리온 공장

서울 용산구의 옛 오리온 공장 건물. © 오영욱


내가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동화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다. 달콤한 강이 흐르고 사탕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환상의 세계는 상상만으로도 신이 났다. 현실과 다른 공간과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는 풍경은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커다란 도시 서울은 속속들이 알기 어렵다. 어느 여름, 용산역 인근이었다. 길이 너무 막혀 지쳐가던 나는 잠시 차를 낯선 골목으로 돌렸다.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자 싶었다. 지도상 지명은 문배동.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다. 구 경의선과 신 경의선이 분기하는 철도 중간 지점이었다. 이상한 기운을 느껴차를 고가도로 하부에 대고 조금 더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서울에 갑자기 솟아난 것 같은 초콜릿 공장을 마주했다. 연분홍빛 케이크를 닮은 낡고 귀여운 건물이었다.


정체를 알아내긴 쉬웠다. 오리온의 본사였다. 회사가 설립될 당시의 옛 공장 건물이 여전히 남아 있던 것이다. 회사 건물이라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상상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충만해졌다. 그날 나는 감격에 겨워 이런 메모를 적었다.


“이 공장을 그대로 보존해 초코파이 박물관으로 만든다면 평생 이 회사의 충실한 고객이 되겠습니다.”


오기사디자인 대표 오영욱(blog.naver.com/nifilwag)



4. 전라북도 순창 야생차나무 군락

야생차나무 군락으로 찾아가는 기묘한 길. © 최남용


지난해 봄, 순창의 한 베이커리에서 진행하는 소셜 다이닝을 취재했다. 차(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참가자가 엉뚱한 제안을 건넸다. “순창에 사는 ‘차 요정’을 한번 만나 보실래요? 워낙 차에 박식해서 지인들은 다들 그렇게 부르죠. 마침 오늘 선생님과 차숲에 가기로 했습니다.” 차 요정이 진행하는 차 숲 탐방이라…. 다음 일정까지의 시간이 좀 걱정됐지만, 호기심이 동해 일단 만나보기로 했다.


강경마을회관 초입. 아궁이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새어 나오는 검박한 황톳집에서 ‘차 요정’ 박시도 선생을 만났다. 목젖 아래까지 턱수염을 기른 그는 언뜻 도사 같은 면모를 풍겼다. 인사를 나누고 곧장 사륜구동 SUV에 올라타 지도에 나오지 않는 불암산 자락의 비포장길을 털털거리며 달렸다. 자동차로 진입할 수 없는 구릉에 이른 뒤에는 낙엽이 수북이 깔린 산길을 따라 걸었다. 유난히 걸음이 날쌘 차 요정을 쫓으며 관목이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자 파릇하게 잎이 돋아난 차나무 군락이 고아하게 펼쳐졌다.


차나무 군락. © 최남용


선운사의 차밭을 관리하기도 한 박시도 선생은 십수 년 전부터 섬진강 일대의 자생 차나무에 관심을 쏟았고, 순창의 차나무 군락을 발견하면서 야생차를 수확하기 시작했다고. “차 숲은 사람의 관리가 전혀 필요 없지요. 씨앗이 떨어져 자연 발아를 하고, 키 큰 관목이 그늘을 만들고, 잡초가 영양분을 고르게 나눠주거든요. 숲의 정령처럼 서로 도와주는 셈이죠.” 그가 실제 야생차를 수확하기 위해 하는 일이라곤 숲을 어슬렁거리며 덩굴을 제거하는 정도라고. 날이 풀리면 차숲 한쪽에 만든 움막과 화롯대에서 다도를 즐긴다고 한다. “야생차는 밭에서 기른 재생차보다 씁쓸한 맛이 훨씬 강해요.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쓴맛으로 차의 깊이를 느낄 수 있죠.” 차 숲 탐방을 마치고 그가 내어준 야생차에선 텁텁하고 알쏭달쏭한 맛이 혀끝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순창의 비밀스러운 차 숲은 꽤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지만, 정작 기사에 소개하기엔 좀 애매했다.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 진행하는 탓에 일반인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 그런데 최근 차 요정이 자신의 야생차를 적극 알리기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거처에 다문(茶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미리 연락을 준 방문객과 차담을 나눈다고. 비밀의 차 숲과 그가 내린 야생차가 궁금하다면 ‘차 요정’ 박시도 선생에게 전화(010 2860 8607)를 걸어보자.


— 론리플래닛 매거진 에디터 고현(인스타그램 @kohyun23)


5. 경기도 동두천 보산동 외국인관광특구

보산동 외국인관광특구의 가게 풍경 그리고 그래피티. © 이기선


지하철 1호선 보산역 1번 출구 앞, 보산동 외국인관광특구 거리와 지하철역 교각은 스타일이 서로 다른 그라피티로 덮여 있다. 경기도미술관과 동두천시가 2015년부터 진행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세계 각국의 작가가 참여한 작품이다. 경기도 내 다른 미군 기지와 마찬가지로 동두천 캠프 케이시의 반환 역시 미뤄지면서 이 지역 경기 침체도 지속되고 있다.


내가 찾은 일요일 오후에도 거리에 인적이 드물었다. 클럽, 미용실, 양복점, 식당 같은 가게는 모두 영어 간판을 달고 가격을 달러로 표시해두었다. ‘마추픽추’와 ‘타지마할’ 식당이 나란히 붙어 있는가 하면 새로 생긴 카페와 공방도 보였다. 얼핏 오키나와 도심 뒷골목이 떠오르기도 했다. 골목 끝자락까지 가자 동두천시 면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캠프 케이시의 담이 보였다.


오륙하우스 정식과 킹버거. © 이기선

경양식당 오륙하우스 안은 평화로웠다. 미군 장교 식당 출신 요리사가 1969년에 열었고, 롯데호텔 조리부에서 근무하던 그의 아들이 1997년 말 물려받아 지금껏 운영하는 이곳에는 번영했던 과거가 박제되어 있다. 나는 고기 패티와 달걀 프라이, 슬라이스 치즈를 넣은 킹버거와 오륙하우스 정식을 먹었다. 정직한 맛이었다. “모든 소스를 직접 만들고 플레이팅도 세심히 신경 써요. 시아버지가 운영하던 시절에는 1년간 번 돈으로 집을 샀다고 하더라고요. 미국 음식을 이렇게 제대로 내는 곳도 없던 시절이니까요. 주말에는 여기 거리가 사람으로 꽉 찼고요.” 오춘호 셰프의 부인이 착잡한 기색도 없이 말했다. 지역 경제가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 믿는다는 그녀의 얼굴은 동두천에서 내가 본 가장 환한 표정이었다.


— 에디터 이기선(인스타그램 @lee.kisun)












편집.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편집부 


'전국의 기묘한 장소'에 이어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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