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더로드 Jan 06. 2020

문명의 유산이 잠든 터키로 떠난 시간 여행

인류 태초의 신앙이 탄생한 신비의 유적을 찾아 떠나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시간 여행을 하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세계를 호령한 문명의 유산이, 이 시대와 저 시대가 소통하며 만들어낸 문화가, 여태 지하에 잠들어 있는 비밀이 끊임없이 당신에게 말을 걸 테니.

이스탄불 유람선에서 바라보는 구시가지의 모습. 가장 높이 솟은 건축물이 술탄 아흐메트 사원이다. © SHUTTERSTOCK


비행기가 채 활주로에 들어서기도 전에 잠을 청한다. 7시간의 시차로 인해 아직 터키는 새벽 어스름이 깔린 이른 아침이다. 눈을 감기가 무섭게 누군가 황급히 잠을 깨운다.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정중한 목소리는 영어로 세 가지 인사를 연달아 빠르게 말한다. 잠을 깨워서 미안하지만, 반갑고, 좋은 아침이라는 의미. 그는 옆자리 승객 오누르 바이라크(Onur Bayrak)다. 출판업에 종사한다는 이 예의 바른 남자는 동양인 여행자가 샨르우르파(Şanliurfa)로 향하는 이유를 궁금해한다. 낯선 이의 잠을 깨울 만큼. 바이라크가 말한다. “거긴 제 고향이거든요.” 터키 남동부는 아시아인이 즐겨 찾는 여행지는 아니다. 시리아와 접경한, 상대적으로 위험한 지역이기도 하거니와 남부나 서부에 비해 휴양지의 색채도 옅다. 근사한 리조트나 해변도 없고, 영어도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럽인 여행자가 심심찮게 그곳에 가는 이유는 역사적 가치 때문이다. 구약성경 여러 장의 배경이자, 인류 최초의 신전이 발굴된 곳이기에. 질문에 대한 답으로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를 보러 간다”라고 하자 바이라크는 ‘과연’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거기에 쉰 번도 더 가봤다고 답한다. 귀한 손님이 오면 가장 먼저 보여줘야 하는 곳이라는 말과 함께.


괴베클리 테페로 오르는 난간에서 주변 경치를 감상하는 주민들. © 오성윤


인류 태초의 신앙, 괴베클리 테페


괴베클리 테페는 문자 그대로 인류사를 새로 쓴 거석 유적이다. 탄소 연대로 추정한 이 신전의 형성 시기는 기원전 1만2,000년경. 영국의 스톤헨지보다 무려 7,000년이나 앞선다. 기원전 인류가 괴베클리 테페를 흙과 돌로 매장했기 때문에 1963년에야 재발견됐고, 현재까지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며 여행 마니아의 이목을 집중시킨 때가 2018년 여름의 일. “왜 이 신전을 매장했는지는 알 수 없어요. 종교가 바뀌었거나 침략자의 만행이었을 수도 있죠. 이렇게 오래된 유적을 연구하다 보면 때론 할 수 있는 게 짐작밖에 없거든요.” 가이드인 우수프 우술(Usuf Usul)이 손을 뻗어 괴베클리 테페의 요소요소를 짚으며 설명한다. 저 석상은 사람, 저 조각상은 여우, 저 그림은 대머리 독수리…. 어떤 설명은 여러 번 들어도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다. 더러는 1만2,000년의 시간 차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지만. 우술의 말처럼 괴베클리 테페를 둘러싼 정보 대부분 이 추정에 의존하고, 몇 가지는 아예 그조차 어렵다. 이를테면 신석기시대의 기술과 소통 능력으로 수십 톤에 이르는 석재를 어떻게 이 높은 언덕까지 옮겨왔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방문객에게 공개하는 괴베클리 테페의 일부. © 오성윤


괴베클리 테페를 신전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단순히 예술적 표현이 많아서만은 아니다. 수원지도, 취사의 흔적도 없으나 무수한 동물 뼈가 이곳에서 발견됐다. 최근에는 인간의 뼈도 나왔다. 당시 무엇을 섬겼는지는 알 수 없다. 동물 그림 중에서도 유독 여우가 많고, 중심부에는 달과 별의 형상을 한 그림이 보인다는 사실로 몇 가지 추측만 할 따름이다. 어떤 이는 이곳이 천문대였다거나, 고대인이 블랙홀을 인지했을 정도로 고도의 문명을 갖췄을지 모른다고 믿기도 한다. 우술도 그중 1명이다. 그는 휴대폰으로 유적 중앙부의 그림과 전파망원경으로 관측한 블랙홀 사진을 비교하는 기사를 찾아 자랑스레 내민다. “거석 기둥들로 만들어진 구조물은 괴베클리 테페에서만 4개가 발견됐어요. 십수 개에 이르는 터가 매장됐을 거라 추정하는 과학자도 있죠. 관광객에게 공개한 터는 이곳 하나뿐이지만, 다른 현장도 멀리 떨어져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괴베클리 테페는 거석 유적 자체가 아니라 지역을 지칭한다. 뜻은 ‘배불뚝이 언덕’. 나무가 거의 없는 구릉지대인데, 경사가 꽤 가팔라 유적을 에둘러 만든 계단만 올라도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그 대신 어느 지점에 멈춰 숨을 골라도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진다. 적이 어느 방향에서 침략하더라도 방어할 수 있는 탁 트인 장소. 그게 신전을 세우기 위한 고대인의 주요 요건이었다. 언덕의 계단으로 현지 주민인 듯한 행색의 할머니와 소년이 걸어간다. 거석 유적보다는 등성이가 만들어내는 풍경에 더 관심이 많은지, 그들은 몇 걸음 걷다 멈춰 서서 산세를 굽어보기를 반복한다.


아브라함이 화형 위기에 처했을 때 불길이 물로 변해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연못 발륵르괼. ⓒ 오성윤


전설이 쓰인 도시, 우르파


붉은빛이 감도는 황색 평야가 펼쳐진 터키 남동부는 꽤나 비옥한 지역이다. 밀, 보리, 녹두, 포도, 목화, 고추, 석류 등. 온갖 작물이 자란다. 개중에서도 샨르우르파는 세계 최고의 피스타치오 산지로 꼽힌다. 인근 지역은 오늘날 성경 속 노아의 방주가 도달한 ‘풍요로운 땅’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그뿐이 아니다. 선지자의 고향 샨르우르파는 구약성경 속 다양한 인물이 살았던 배경으로 나온다. 욥, 엘리야, 모세, 아브라함. 마을 중심부에는 아브라함이 태어났다는 동굴 사원과 그가 화형의 위기에 처했을 때 불길이 변해 만들었다는 호수가 있다. 불길이 물로 변할 때 나무 장작이 생선으로 변했다고 하여 발륵르괼(Balıklıgöl, 물고기 연못)이라 불린다.


오늘날 발륵르괼 연못의 사방을 둘러싼 인파는 물고기밥을 사서 던지거나, 코스프레에 가까운 조악한 품질의 전통 의상을 대여해 사진을 찍거나, 바로 곁에 조성된 공원 벤치에서 낮잠을 잔다. 한쪽 모퉁이에는 성인이 묻혔다는 작은 공동묘지도 있지만, 딱히 이곳을 경건한 마음으로 대하는 이는 찾기 힘들다.


샨르우르파의 재래시장 속 노천카페 귐리크 하느. 통상 현지 주민은 차이(Çay)를, 관광객은 피스타치오 커피를 마신다. © 오성윤


발륵르괼의 물줄기는 성터를 지나 공원 깊숙이까지 이어진다. 공원 내부의 연못은 한층 더 시민 공원의 분위기를 낸다. 중앙에 솟은 분수와 뱃놀이용 나룻배, 경계를 빙 두른 노천카페, 곳곳에 포진한 전통 빵 시미트 상점. 공원이 끝나자 곧장 사원이 줄지어 자리하고, 다시 사원이 끝나는 지점에 재래시장 카자즈 바자르(Kazzaz Bazaar)가 펼쳐진다. 어디까지가 신성이고 어디까지가 일상이라 말하기가 힘들다.


오스만제국 시대에 지은 바자르는 개미굴처럼 복잡한 구조와 이색적인 정취를 품고 있다. 찻집을 기웃거리는 이방인에게 대뜸 차를 가져다주고 요금을 건네려 하면 손을 내젓는 인심까지도.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헤집고 들어가니, 어느 순간 비밀 기지처럼 탁 트인 노천카페 귐뤼크 하느(Gümrük Hanı)가 나온다. 해 질 무렵 피스타치오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기 좋은 곳이라 한다. ‘피스타치오 커피’라는 생경한 음식의 이름을 듣자 문득 궁금해진다. 그건 대체 어느 시대의 유산일까? 우슬에게 물으려다, 그냥 삼키고 만다. 하루 동안 샨르우르파 시내를 걸으며 그에게 던진 연원과 시대에 대한 질문만 족히 십수 개는 넘었다.


문득 비행기에서 만난 바이라크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대화 내내 그는 샨르우르파를 ‘우르파’라고 불렀다. 샨르우르파는 본래 우르파였다가 터키 독립전쟁 당시 시민이 프랑스군을 쫓아낸 후 샨르(Şanlı, 영광스러운)라는 표현이 붙었다. 이유를 묻자 바이라크는 이렇게 답했다. “좋은 뜻을 담고 있긴 하지만 좀 길잖아요. 어색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그건 고작 100년의 역사밖에 못 담는 지명이니까요. 우르파는 1만2,000년의 역사와 예언자의 삶, 동서양의 온갖 문화가 다 서린 땅인데 말이죠.”



글/ 사진. 오성윤은 <에스콰이어 코리아> 에디터다. 터키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일정 탓에 하맘(터키식 사우나)에는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에 표시해놓은 ‘가볼 만한 하맘’ 리스트는 원고를 마칠 무렵 막 10개를 돌파했다.


ⓘ 취재 협조 터키문화관광부(Turkish Ministry of Culture and Tourism)



'문명의 유산이 잠든 터키로 떠난 시간 여행'에 이어진 이야기

▶ 터키의 시간 pt.2 - 아디야만 넴루트산

▶ 터키의 시간 pt.3 - 이스탄불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와 함께 최고의 여행을 만나보세요.

▶ 론리플래닛 코리아 웹사이트

▶ 론리플래닛 코리아 페이스북     

작가의 이전글 여행에 기묘한 순간을 선사하는, 전국의 기묘한 장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