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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발적아싸 Jun 02. 2023

아들을 보고 나의 근원을 마주하다.

진짜 오랜만이야. 

아내가 금주 토요일에 엄마아빠가 참여하는 어린이집 행사가 있다고 말해줬다. 온 가족이 어린이집에 가서 노는 부모참여 놀이수업이었다. 나는 평소 어린 아들의 어린이집 생활이 궁금했기에 토요일 행사가 기대됐다. 


토요일 아침 우리 가족은 어린이집에 방문했다. 가서 보니 어린이집에서 준비를 다양하게 해 놓았다. 입구부터 포토존이 있었고 튜브형 바이킹, 큰 블록더미로 성 만들기, 눈의 왕국 같은 교실과 이글루, 범퍼카까지 아이들을 신나게 할 만한 풍경과 기구들을 잔뜩 준비해 놓았다.  

나는 우리 아이가 얼마나 신나 할지 기대돼서 아들을 쳐다봤는데, 아들은 신나 하기보다 불편해 보였다. 새로운 놀이기구에 관심이 가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잔뜩 움츠려 있었다. 나와 아내에게 딱 달라붙어 매달렸다. 아들에겐 낯선 이 환경이 무서운 것 같았다. 


관심 있으면서도 무서워하는 아이가 그래도 행사를 즐겼으면 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놀이에 참여해 봤다. 내가 재밌게 노는 걸 보여주고 몸으로 우리 아이 앞을 막아 아이가 주변환경에 신경 쓰지 않고 놀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줬다. 그제야 아이는 긴장이 풀린듯했고 놀이기구를 조금씩 만져보고, 장난치기도 하며 놀기 시작했다.  

 

아들의 이런 소극적인 태도를 보자 나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맞아 나도 어릴 때 저런 성격이었어. 내성적이고 조심스러웠었어. 맞아 그랬지. 어릴 때는 참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내성적인 성격이 열등하다고 생각하신 부모님께서 조금씩 훈련시켜 지금은 일에 적극적이고, 사람들 앞에서 말도 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적극적인 성격은 마치 덧칠한 색처럼 시간이 지나도 내 것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필요할 때만 가면을 쓰는 느낌이랄까? 필요할 때만 사용하는 느낌인데, 가면을 벗고 나면 언제나 혼란스러웠다. 


내가 자랄 때만 해도 내향적인 성격은 열등한 거고 외향적인 성격이 우월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 내가 나서야 할 때 나서지 못하면 어머니께서 나를 독려해 주곤 하셨다. 남자는 자신감이 있어야 돼. 나가서 자신 있게 발표해 봐. 넌 할 수 있어 말씀해 주셨다. 


어머니의 응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것은 용기가 생겨 나가는 게 아니라 두려워 나가는 거였다. 자신 없는 남자로 인식될까 봐, 당당하지 못한 태도가 계집애 같다고 조롱당할까 봐 두려워서 나가는 거였다. 어릴 적에 이런 두려움이 생겨서 나는 외향적으로 보이고 싶어 했고,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내 성향과 다른 성향을 마치 내 것인 척하며 살려니까 힘들었다. 에너지 소모가 무척 심했다. 내향적인 내가 외향적인 사람을 흉내 내는 건 힘든 일이었다. 또 외향적이지 못한 것은 열등하고 창피한 거라고 여기니 나의 내향적인 성격이 부끄럽고 창피할 때도 많았다. 나는 나를 칭찬할 때보다 질책할 때가 많게 되었다. 내가 나를 비난하는 힘들고 고된 시간이었다. 


내 성격과 다른 성격을 흉내 내다보면 그런 성격이 될 거라 생각한 것같이 내가 착각한 것이 또 하나 있다.  

감정을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전회사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왕따로 지냈는데, 나를 제외한 같은 팀 사람들이 사무실에서 끝나고 술 먹으러 가자 , 오늘 놀자 얘기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안 친한 사람들 사이에 눈치 없이 끼어들어간 것처럼 불편했다. 이성으로는 친한 사람들끼리 술자리를 갖는 게 맞지, 사실 나보고 오라고 해도 불편해서 안 갈 거야. 나와 관계없는 일이다. 생각했지만 감정적으로는 투명인간이 취급받는 느낌에 수치스러웠다. 


그때는 안 좋은 감정을 내가 이성적으로 잘 다스리고 있다 생각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건 다스린 게 아니라 눌러둔 거였다. 너무 수치스러워서 그 감정을 다루기 어려웠던 거였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나와 관계없는 일이다. 남에 인생에 집적되지 말자 생각하며 정리한 척했지만, 감정은 정리되지 않았고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쌓여 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면 대꾸하지 않고, 이성으로 눌러 덮어왔다. 그게 내가 감정을 다루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해야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으니까. 그래야 남들 앞에서 괜찮은 척할 수 있으니까. 그런 상황에 남들 앞에서 슬프고 기죽은 내색을 하면 그게 더 자존심 상하고 창피하니까 일단 그런 식으로 처리를 한 거였다.  


사실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면 친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게 왜 내가 기분 나쁠 일이겠는가?  하지만 다 같이 있는데 나한테만 권유하지 않으면 소외감이 드는 것도, 수치심이 드는 것도 당연한 거 아닐까? 나의 감정도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는데 나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 들어주지 않았고, 그게 얼마나 당연한 기분인지 인정해 주지 않았었다. 


그렇게 완결되지 못한 감정들은 내 안에 가득 쌓여있었다. 그것들은 나를 은밀하게 나의 자존감을 깍아내리고, 힘들게 하고, 병들게 했다. 


글을 쓰며 생각하니 그때도 나의 감정은 감정대로 인정해 주면서도, 행동은 이성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감정이 일어나면 그 감정의 얘기도 듣고, 그럴만하다고 인정도 해주며 존중하고 싶다. 이성만큼이나 감정도 소중한 '나'라는 걸 이제는 알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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