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부신 친구에게

by 강효진

책을 읽다 보면, 마음 깊이 잠들어 있던 기억이 불쑥 깨어난다. 오랜 시간 꺼낸 적 없던 기억이 책 속의 문장 한 줄로 생생히 되살아날 때면, 내 경험이 분명한데도 다른 이의 기억을 훔쳐본 듯 낯설다. 그래서 오히려 오래도록 곱씹게 된다.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대, 이탈리아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 속 릴라와 레누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올리비에로 선생님은 성적이 가장 좋은 학생들에게만 소설책을 빌려주었다. 책이 귀하던 시절, 제자를 향한 선생님의 특별한 애정이었다. 선생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모범생의 자리를 지켜온 레누에게는 『사랑의 학교』를, 자기만의 타고난 영특함을 드러낸 릴라에게는 『작은 아씨들』을 건넸다. 그리고 선생님은 릴라에게만 책을 고른 이유를 덧붙였다.


"이 책은 어른들을 위한 책이지만 너는 읽을 수 있을 게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잊고 있던 열네 살의 여름날로 문득 되돌아가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해, 나는 처음으로 전국 문예 대회에 참가해 뜻밖에도 상을 받았다. 시상식에서 돌아오는 길,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이 떠올랐다. 일기 검사를 할 때면 내가 쓴 문장에 밑줄을 긋고 파란 별을 그려주며, 계속 글을 쓰라고 격려해주던 다정한 분이었다. 선생님께 이 소식을 전하면 기뻐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고, 곧 반가운 답장이 도착했다. 좋은 일이 생기면 잊지 않고 소식을 전해주는 제자가 있어 기쁘다는 선생님의 손 편지가 나를 뿌듯하게 했다. 선생님은 편지와 함께 이해인 수녀의 시집 『시간의 얼굴』을 보내주었다. 내가 시를 좋아한다는 걸 선생님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은 더욱 컸다. 선생님의 손길이 닿았을 시집을 쓰다듬고, 냄새 맡고, 책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몇 번이고 읽었다. 시집은 선생님이 내게 건넨 사랑의 증거였다.


얼마 후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Y의 집에 놀러갔을 때, Y에게도 선생님의 편지와 시집 선물이 도착해 있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라는 근사한 제목의 시집도, 칠레 시인 네루다의 이름도, 그날 처음 알았다. 호기심에 시집을 펼쳤지만, 여자의 육체를 묘사하는 강렬한 시어와 난해한 문장들이 뒤섞인 첫 시에 놀라 멈칫했다. 곁에서 그런 나를 바라보던 Y는, 언제나처럼 의젓한 목소리로 또렷하게 말했다.


"중학생이 읽기엔 네루다의 시가 좀 어렵지만, 선생님은 내게 꼭 이 책을 선물하고 싶으셨대."


친구가 전해주는 선생님의 말은 내게 이렇게 들렸다. 너라면 네루다의 시를 충분히 읽을 수 있어. 너는 어릴 때부터 누구보다 영특한 아이였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네루다의 시를 너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다른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조차도 너는 사려깊게 헤아리는 아이니까. 넌 나의 가장 특별한 제자란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Y의 특별함은 내가 닿을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을, 네루다의 시집이 쓰리게 증명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사랑이라는 환한 빛을 받은 Y의 미소가 눈부셨다. 그 빛을 바라보는 동안 내 이마 위로는 흐릿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늘 아래에서 작아질 대로 작아진 나는, '나의 눈부신 친구'를 감당할 용기를 잃었다. 그늘 속에서 영영 희미해질까 두려웠던 나는, 끝내 친구와의 단절을 선택했다. 그날 이후 우리의 관계는 조금씩 멀어지다가,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끊어지고 말았다.


레누는 달랐다. 유년기와 사춘기를 지나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가지 못한 길을 꿋꿋하게 걸어갔다. 거미줄보다도 복잡하고 끈끈한 애증 속에서, 릴라와 멀어졌다가도 이내 꼭 끌어안았다. 격렬한 질투에 시달리다가도, 릴라의 강인함을 발견할 때면 넋을 잃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릴라의 눈부신 빛은 결국 레누를 일어나게 했다. 생의 어려움을 헤치고 나아가게 했다. 릴라의 눈부신 빛은 어쩌면 릴라만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레누는 몰랐던 자신만의 빛을 릴라가 눈부시게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정이란 기쁨이나 행복의 빛깔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레누와 릴라의 기나긴 우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삶처럼, 우정 역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그 안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미움, 사랑과 아픔을 하루하루 살아낼 수 있을 뿐.



레누가 되지 못한 내 오랜 일기장에는 한꺼번에 여러 장을 무리하게 찢어버리느라 종이 끝이 너덜너덜해진 빈 곳이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도 관계에 서툰 어린 내가 여전히 남아 있는 구석진 자리. 마치 그런 건 없던 것처럼 말끔하게 뜯어내고 싶었던, 그 못나게 빈 귀퉁이를 이제는 잘 간직하려고 한다.


우정이라는 여리고 섬세한 꽃을 가꾸기 위해서는 눈부신 빛과 적당한 그늘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려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나에겐 여전히 눈부신 친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 나의 그늘을 조금 내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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