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빛 시금치를 맛보다

by 강효진

처참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책장을 덮은 후에도 "시의 옷"을 입은 고통의 감각이 가슴 속에서 이상하고도 황홀하게 피어났다. 고통이 황홀하다니. 그 모순은 헤르타 뮐러의 소설 『숨그네』가 남긴 흔적이었다.


소설은 한겨울 밤, 열일곱 살 소년 레오가 소련으로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루마니아에 살던 독일인들은 나치의 침공으로 무너진 소련을 재건하기 위해 추방되었다. 레오 또한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야 했다.


그들을 실은 가축운반용 열차가 말해주듯, 수용소에서의 삶은 비참했다. 혹독한 추위와 끝도 없는 노동이 레오의 몸과 영혼을 갉아먹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존재를 온통 잠식하는 허기였다. 식사 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금세 배고픔에 휘청이는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랜 허기 속에서, 그들은 봄이면 폐석 위에 자라난 명아주를 꺽어 먹었다. 귀한 소금에 명아주 이파리를 절여 씹어먹기도 하고, 줄기째 뜨거운 물에 삶아 배고픔을 달랬다. 데친 물은 맑은 수프나 녹차로 마셨다. 명아주의 초록이 스며난 뜨거운 물이 허기진 속을 덥힐 수만 있다면.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맑게 우린 차를 후후 불어 마시듯, 그들의 비참한 삶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삶아서 숟가락으로 건져낸 명아주는 거짓말처럼 시금치 맛"이 난다는 문장을 읽는 순간, 잠시 멈칫했다. 담백한 시금치 맛을 나는 알고 있는데. 바닷바람을 맞느라 온몸을 땅바닥에 웅크린 채 튼튼하게 뻗어나간 초록의 생명력을. 새벽 바람에 얼고 한낮의 햇살에 녹기를 반복하는 동안, 분홍색 뿌리에 차곡차곡 모아둔 달큰함까지도.



레오 역시 그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배고픔의 감각 말고는 모든 것을 빼앗겨버린 수용소에서도, 혀끝의 미각은 잊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레오와 마주앉아 시금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가 들려주는 명아주 여린 잎의 부드러운 맛이 내 입가에 전해졌다.


그러나 수용소의 봄은 짧았다. 여름이면 명아주는 금세 자라나 뻣뻣해졌다. 억센 줄기에서는 쓴맛이 났다. 척박한 땅에서 명아주가 무성하게 자라날수록, 레오의 허기는 더욱 집요하게 몸집을 불렸다.


레오가 더 이상 배고픔을 달랠 수 없어졌을 때, 들판엔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명아주가 펼쳐졌다. 은초록빛을 띠던 잎은 여름이 짙어갈수록 분홍에서 선홍빛으로, 점차 청보라색으로 물들었고, 가을이면 마침내 진한 쪽빛이 되었다. 저물녘 노을이 서서히 밤을 향해 몸을 누이던 하늘빛처럼. 나는 레오 곁에서 노을빛으로 물든 명아주 수풀을 바라보았다.


쓸모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드러난 명아주의 아름다움이 놀랍게도 나를 황홀하게 했다. 그 아름다움은 레오가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붙들고 끝내 놓지 않았던, '처참한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의 지극히 인간적인 감각이었다.


소설의 제목인 "숨그네"는 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는 단어이다. 극심한 노동과 허기로 고통받는 착란의 순간, 들숨과 날숨이 그네를 뛰듯 요동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임을, 소설을 읽으며 짐작할 뿐이다. '배고픈 천사', '양철키스', '볼빵', '감자인간'... 헤르타 뮐러가 수용소에서의 삶을 정교하게 그리기 위해 발명한 단어들 가운데, 인간의 체온처럼 안온한 단어는 없다. 곱씹을수록 고통스럽고, 동시에 아름답다. 언어가 처참한 세계를 담기 위해 시의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날 때, 쉽게 말해질 수 없는 고통을 사려 깊게 담으려는 그 애씀이, 시시각각 물들어가는 노을빛이 되어 레오가 머물고있는 세계를 섬세하게 비춘다. 그리고 마침내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나에게 닿고야 만다.


레오가 떠날 때, 그의 할머니는 말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이 한마디 말은 수용소에서 버티는 5년 내내 레오 곁을 지켰고, 결국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지칠 줄 모르고 무성하게 자라나던 명아주의 강인한 빛깔처럼, 할머니의 이 말은 극한의 비참함 속에서도 끝끝내 레오를 붙들어준 가장 인간적이고도 처참한 아름다움이다.



레오가 꺾어 먹던 명아주를 생각하다가 시금치를 사 왔다. 이파리의 선명한 초록빛, 줄기 끝으로 갈수록 연두에서 노랑으로 물들듯 섬세하게 번지는 빛깔, 그리고 굵게 뻗은 분홍빛 뿌리가 아름답다. 뜨거운 물에 시금치를 얼른 데친 후, 레오가 아꼈을 소금을 뿌렸다.


잘 무친 시금치를 씹는다. 한 번도 맛본 적 없던 명아주의 연한 이파리 맛이, 내 혀끝에서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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