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하루를 계획했다. 아침을 먹자마자 집을 나서 버스를 타고, 20여 분 달려서 다시 한번 버스를 갈아타야만 도착할 수 있는 바다에 가기로.
아침 바다를 천천히 산책하다가, 점심을 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에 식당에 들어가, 소주 두어 잔에 회를 먹겠다는 상상. 그러곤 다시 해변길을 따라 오래도록 걸어 카페에 들어가, 오랜만에 카페인이 잔뜩 들어간 커피를 마시며 좋아하는 책을 조금 읽는 거다. 다시 한참을 걸어서 오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돌아오는 하루.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다면 너무 빨리 끝나버렸을 일에, 내 하루를 모두 써보는 일.
§ 프랑스의 영성 깊은 철학자 시몬 베유는 사치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사치는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는 아름다움 자체이며, 막연히 우주가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는 분위기를 형성한다고. 한편 사치에 대해서라면 가난한 이에게 더 특권이 있다고도 했다. 과연 그렇다. 가난한 사람이 부릴 수 있는 사치가 부유한 사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다.
버스를 타고 포항의 낯선 골목골목을 굽이굽이 돌 때면, 정말로 내가 용인으로부터 꽤나 먼 곳에 와 살고 있음을 체감한다. 가장 번화한 거리를 지날 때조차 내리쬐는 햇살과 풍경을 둘러싼 공기가 헐렁하게 부유한다. 그 틈으로 나를 향해 조심스레 숨구멍이 열린다. 그 틈을 향해서 가장 느린 속도로 걸어가는 산책이야말로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호사스런 사치가 아닐까.
§ 흔히 말하듯, 돈이 여유로울 때는 시간이 부족하고 시간이 여유로울 때는 돈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후자의 경우야말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적절한 시기라고 말하고 싶다. 이 적절한 시기에 매우 적절하게 부릴 수 있는 사치 중의 하나가 다름 아닌, 산책이라고도.
길을 걷다가 주차장 구석에 은은한 향기를 퍼뜨리던 매화나무를 발견했다. 볼품없이 가지치기를 한 나무 끝마다 순진한 얼굴로 피어난 꽃들. 그 사이로 꿀벌이 부지런히 날아다녔다.
해변을 따라 걷다가 숲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을 발견했다. 소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이다니, 최고의 산책길.
오늘 내 산책 친구는 정고요 시인의 에세이 『산책자의 마음』이었다. 강릉에 살고 있는 시인의 책에게, 이곳 바닷가 산책을 꼭 한번 시켜주고 싶었다. 바다를 품고 있는 문장들에 바다 향기가 더욱 깊게 스미도록.
§ 나는 나를 둘러싼 우주가 아름답다고 느끼고 싶어서 사치를 궁리하곤 한다. 우주가 아름답다고 느낄 때 더욱 온 마음을 다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 말고 다른 것은 주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만 준다.
이곳에 살면서 가장 놀라는 것은 바람이다. 경기도에서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힘과 결을 지닌 바람. 산책할 때마다 숲을 뒤흔드는 바람결에 나무들은 서로 어깨를 맞대고 파도를 탄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우리 동네에서도 몰아치는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다. 숲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버리니까.
오늘 해변을 따라 산책을 하는 동안에는 내 온몸으로 바람을 밀어내며 걸어야 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내 어깨와 몸통, 다리를 꽤나 큰 힘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바람을 마주보며 힘겹게 걷다가 바닷가로 고개를 돌렸을 때, 뒤집힌 배 한 척을 발견했다. 가만 보니 두 사람이 배 주위를 분주히 맴돌며 헤엄치고 있었다. 그들은 무사히 배를 건졌을까.
온통 바람 속을 걷다가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보니, 아침에 단정히 빗었던 머리카락이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머리칼을 매만진 손끝에 염분기를 머금은 끈적함이 묻어났다. 엉망인 머리를 어쩌지 못해 챙겨간 캡모자를 눌러썼다.
늦은 오후, 우리 동네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리는데 바닷가에서부터 끈질기게 따라온 바람이 기어코 모자를 벗겨 횡단보도 건너편으로 날려버리고 말았다. 함께 내린 백발의 할아버지가 모자가 떨어진 곳을 향해 다급히 손짓을 했다. 어린 강아지처럼 팔랑팔랑 달아나는 모자를 쫓아가 겨우 주워 쓰고 났을 때, 우리 앞을 걷던 바로 그 할아버지가 기세 좋게 외쳤다.
"바람아, 이왕이면 더 화끈하게 불어라!
더 시원하게 불어!"
§ (...) 이런 사치의 파편들이 모이고 모여서 어느덧 귀여운 먼지 폭탄처럼 폭발해 잔잔하지만 찬란한 빛가루들을 내 안에 퍼트릴 것을 알고 있기에. 산책이라는 행위는 내게 우연히 속할 뿐이지만 그로 인해 나는 필연적으로 나 자신이 될 것임을 알기에.
바다와 바람을 듬뿍 섞어 사치스럽게 산책을 하고 나니, 어쩐지 오늘은 내가 가장 나인 것만 같다.
+ 인용문은 모두 정고요의 『산책자의 마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