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고 싶지 않아.

투덜거리기 1.

by 두지

친구 집에 놀러 갔다. 한참을 걷다가 실내로 들어간 참이라 몸이 피곤했다. 나와 친구는 발을 씻고 나와 방바닥에 나란히 누웠다. 친구가 말했다.


“아. 이게 행복이지.”


10년도 더 된 일이다. 별 특징도 없는 과거의 한 순간이 오늘, 느닷없이 떠오른 이유가 뭘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다 한 가지 질문이 딸려 올라왔다. 그게 행복이야?


그때 그 친구였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게 행복이지 그럼. 이렇게 아무 걱정도 없이 몸 편히 쉬고 있는 상태. 그런 게 행복이잖아. 큰데서 바라면 안 돼.


그럼 나는 이렇게 물어볼 것이다.

그러면 걱정이 많고, 몸이 편하지 않은 상태는 불행이야?


그러면 친구는 너는 또 쓸데없이 딴지를 건다고, 너처럼 매사에 부정적이기만 하면 행복한 순간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이런 순간이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즐길 줄을 모르고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고, 역정을 냈겠지.


친구의 말대로라면 나는 행복하지 않다. 아무 걱정 없이 몸 편이 쉬고 있는 순간들이 아주 가끔씩은 있지만, 그렇게 앉아서 혹은 누워서 있다 보면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대게 그렇게 음흉하게 올라오는 생각들이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가만히 앉아서 느닷없이 갓 구운 빵 냄새, 고양이의 포실포실한 털, 할머니가 잘라주신 수박…. 이런 걸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있나? 역시 내가 부정적인 것인가?) 혹여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갓 구운 빵 냄새를 생각하다 열심히 구운 빵을 다 팔지 못해 다음날 반값으로 팔아야 하는 우리 동네 작은 빵집이 생각나 걱정을 시작할 것이다. 고양이의 포실포실한 털을 생각 하다가도 길고양이들을 괴롭히는 고양이 혐오 집단이 떠올라 분노할 것이다. 할머니가 잘라주시던 수박을 생각하다가 왜 수박은 꼭 할머니가 잘라야 했나, 아빠가, 삼촌이, 혹은 오빠가 자를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괜히 할머니 대신 분해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언제 행복한가? 모르겠다. 행복까지는 모르겠고 좋아하는 순간들은 있다. 맛있는 스콘을 먹을 때, 낯선 도시를 하염없이 걸어 다닐 때, 글을 쓸 때, 재미있는 책을 읽을 때, 차가운 맥주를 마실 때…. 하지만 그럴 때 내가 ‘행복한가’라는 생각을 해 보면 그건 잘 모르겠다. 맛있는 스콘을 먹을 땐 조금 행복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일같이 스콘만 먹는다면 질리겠지. 낯선 도시를 하염없이 걸을 땐, 낯선 것들을 맞닥뜨림으로 해서 다가오는 생각과 경험들이 좋다. 한데 그걸 딱히 ‘행복’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다. 글쓰기는 그야말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고통과 괴로움에 가깝다. 재미있는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고통과 괴로움에 관한 책이다. 역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차가운 맥주를 마시는 건 행복하다. 그럼 나의 행복은 차가운 맥주 정도….


근데 그건 나고. 나는 왜, 친구가 행복하다는데, 굳이 그것에 반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것도 10년이나 지난 지금.


여러 사람을 깊게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인생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라는 추상적인 질문에 ‘행복하기 위해서요’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았다. 인터뷰가 아니더라도 주위 사람들과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행복’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궁금하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행복에 집착할까? 그들이 말하는 행복이 뭘까? 물어보면 보통 이런 대답이 나온다. 그냥 소소한 거요. 가족이랑 모여 밥 먹는 거. 맛있는 거 먹는 거…. 부족하지 않은 돈이 있고 남부럽지 않은 직장이 있고 그런 거….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친구가 말한 행복이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행복은 ‘만족’에 좀 더 가까운 개념이 아닌가 싶다. 힘들고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들이 잠시 멀어진 순간의 만족. 그런 만족, 혹은 행복이란 건 대게 갈등이 없는 상황, 시련과 괴로움이 삭제된 현실, 문제나 걱정거리가 해소된 상태 같은 거다. 내가 반감을 느끼는 건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그런 결들이다. 갈등, 시련, 괴로움, 문제, 걱정을 제거하려고 들다 보면, 배제가 생긴다. ‘편안한’ 상태를 흔드는 대상에 대한 혐오가 생기고, 불편하고 부딪혀야 하는 상황을 꺼리게 된다. 갓 구운 스콘에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몸 편히 누워있는데 몸 아픈 엄마가 전화를 하면 괴로워진다. TV를 켰는데 장애인 인권 시위에 대한 뉴스가 나오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런 ‘행복’ 혹은 ‘마음 편한 상태’를 흔들어버리는 무언가가 나타나면 싫어진다. 배제하고 싶다. 안 보고 싶다. 그게 극단적으로 가다 보면 나를 불편하게 하는 대상을 혐오하게 된다.


그리고 구분 짓게 된다. 나보다 불편하고, 적게 가지고, 걱정이 많은 사람을 보면 불행할 것이라 짐작하게 된다. 그런 구분 짓기 뒤에는 공감 대신 동정이, 연대 대신 차별이 뒤따라온다.


소설가 김영하가 말했다. “행복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동양의 철학에는 행복이란 단어가 없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평온하게 살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 머릿속으로 10년 전의 친구와 논쟁을 하다 보니 김영하의 말이 조금 더 분명해진다. 행복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행복에 집착하면 배제와 차별이 생기기가 쉽다. ‘행복’하면 떠오르는 밝고 긍정적이고 편안한 것들만 쫓다 보면 어둡고, 부정적이고, 불편한 것들은 거부하게 된다. 한데 인생이 그런가. 세계가 그런가. 인생은 어둡고 부정적이고 불편한 것들 투성인데.


나는 어두움을 들여다보고 싶다. 페이스북의 화려한 포스팅 뒤에 숨어있는 사람들의 시련과 아픔을 들여다보고 싶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는 대신 거리로 나가 투쟁하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이해해보고 싶다. 만약 그게 행복과 멀어지는 길이라면 나는 차라리, 행복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