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하고 실망하고 꺾이고 또 꺾일, 그녀 앞에 놓인 긴 시간
팔레스타인 라말라의 호스텔 부엌에 앉아 맥주를 마신다. 호스텔에는 남편과 나 둘뿐이다. 프런트를 지키는 직원은 어디 갔는지 없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여니 생기가 철철 넘쳐흐르는 서양 여자가 서 있다. 안녕! 나는 덴마크에서 온 아만다라고 해! 생기가 넘치다 못해 곧 터져버릴 것만 같은 볼을 움직이며 아만다가 말한다. 아만다가 손을 내민다. 나도 나의 건조한 손을 내밀어 그녀와 악수를 한다. 직원이 아무도 없다고 하니 당황하는 아만다. 호스텔에 묵으러 온 게 아니라 자원봉사를 하러 왔단다. ‘워크 어웨이’라는, 본국 밖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지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왔다고. 동유럽 지역의 호스텔에서 묵을 때 이런 친구들을 많이 봤다. 호스텔 일을 도와주는 대신 공짜로 묵을 수 있고, 원하는 도시에 오래 머물 수 있다. 아만다의 경우 아랍어를 공부하기 위해 이곳을 선택했단다.
“아랍어는 왜 공부하고 싶은지 물어봐도 돼?”
내가 물었다.
“군인이 되고 싶어서. 싸우는 군인 말고 통역 장교. 언어가 통한다면, 서로 이해할 수 있다면, 갈등을 고조시키는 대신 완화시킬 수 있잖아.”
참신한 생각이네. 한편으로는 단순한 것 같기도 하고. 나라와 나라, 지역과 지역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그 갈등이 생기는 이유가 언어 때문은 아닐 텐데…. 하지만 나의 시니컬하고 기 죽이는 코멘트는 꾹 삼키기로 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아만다는 무려 열아홉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 대학은 가지 않았는데, 이번 호스텔 자원봉사가 끝난 후에는 덴마크 돌아가 코뮨 비슷한 커뮤니티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할 거라고. 아만다의 계획과 포부와 꿈을 주야장천 듣고 있으려니 뭔가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나이 어린 손녀의 장래희망을 듣는 할머니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호스텔 직원 세라가 돌아왔다. 세라도 프랑스에서 온 자원봉사자다. 일을 하러 왔다고, 아만다가 본인을 소개했다. 언제까지 일할 계획이냐고 세라가 물었다. 크리스마스 때까지 있으려고. 아만다가 말했다. 세라의 얼굴이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왜? 안 좋은 계획인 것 같아? 여기 별로야?”
아만다가 기겁을 한다.
“크리스마스 때 까지면 2 달이잖아. 너무 길어.”
“왜? 뭐가 문제인데?”
“사람을 너무 부려먹는달까…. 돈 주고 고용하는 직원이 몇 명은 있어야 하는데. 필요한 모든 노동을 자원봉사자로 때워. 그러다 보니 내 시간도 너무 없고. 내가 하려고 계획했던 일들도 하나도 못하고.”
“사람들은 어때?”
“사람들은 뭐…. 그냥 괜찮아.”
“넌 얼마나 있었는데?”
“열흘 있었는데, 그것도 엄청 길었어. 모레 떠나.”
“망했다.”
아만다의 안색도 세라의 그것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상황이 약간 코믹해서 조금 웃어버렸는데 곧 미안해졌다. 안타깝기도 하고. 아랍어는 어쩌나. 군인이 되려는 계획이 틀어져 버리는 건 아닌가. 자로 그린 표처럼 잘 정리해 둔 계획이 벌써 삐끗해버려서 어쩌나.
늦은 저녁. 호스텔 부엌에 앉아 추가로 사 온 맥주를 홀짝였다. 문이 열리더니 생기 넘치는 아만다의 얼굴이 보였다. 안녕! 또 맥주 마시는구나! 좀 적응이 됐냐고 물으니 피곤해서 낮잠을 잤단다. 그랬더니 기력이 살아났다고. 살아난 정도가 아니라 새 생명을 얻은 것 같은 얼굴이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생기가 넘친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별로라는 동료의 증언도 열아홉 아만다의 생기를 꺾을 순 없다.
나는 안다. 아만다의 계획은 정해둔 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란 걸. 열 가지 중 한 가지만 이뤄내도 행운일 것이다. 아랍어가 생각보다 어려울 수도 있고, 이곳 생활을 견디다 못해 이틀 만에 짐을 싸서 귀국을 해 버릴 수도 있다. 아랍어는 성공적으로 배웠지만 군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어쩌다 싹 사라질 수도 있다. 커뮤니티에서의 공부가 너무 재밌어 군인 대신 기자가 될 수도 있다. 호스텔에서 여행자들을 많이 만나다 여행에 욕심이 생겨 긴 여행을 떠날지도 모른다. 혹은 여기가 마음에 쏙 들어 눌러앉아 버릴 수도 있다. 호스텔에서의 첫날이 실망으로 시작되었던 것처럼 일은 잘 풀리지 않을 것이고, 계획은 변동될 것이고, 마음은 끊임없이 바뀔 것이며, 예상치 못한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이 닥치고 닥치고 또 닥쳐 그것만 해치우기에도 정신이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부럽다. 좌절하고 실망하고 꺾이고 또 꺾일, 그녀 앞에 놓인 긴 시간이. 아만다야, 화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