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에서 생각했다. 나, 참 무식하다.
베들레헴에 와 있다.
‘베들레헴’에 ‘와’ 있다니. 영 신기한 일이다. 베들레헴은 나에게 있어 뭐랄까. 해리 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와 같은 느낌의 공간이었으니까. 예수가 탄생한 곳. 크리스마스 때마다 울려 퍼지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가의 배경. 그런 ‘배경’으로서의 이미지로만 각인되어 있던 곳. 유명한 이야기의 배경 공간이라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곳.
한데 막상 와서 보니 베들레헴은 아주 구체적인 공간이다. 구체적인 사람들이 구체적인 일상을 살고 있는. 엔지니어라는 직업을 가지고, 세 아이를 키우며, 시어머니와 남편과 함께 한 공간에 거주하며, 슈퍼마켓과 채소 가게에서 장을 보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고…. 메신저로 카카오톡을 사용한다든가, 저녁에 홍대 앞에서 친구를 만나 즉석 떡볶이를 먹는다든가 하는, 서울 사람들의 일상과는 디테일의 차이는 다소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매우 비슷한 일상.
좀 쪽팔린 고백이지만 베들레헴이 진짜(?) 동네라는 데 나는 좀 충격을 받았고, 나의 무식함에는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 살고 있는 동네를 ‘예수가 태어난 곳’ 이상으로 상상해보지 못한 나의 부족한 상상력에도.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영토에 속한 곳이다. 나의 무식함은 베들레헴에서 절정에 달했지만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 베들레헴 못지않게, 팔레스타인도 내 머릿속에 어떤 고정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던 공간이다. 그 이미지라 함은 ‘가자 지구’. 그리고 인터넷 어디선가 본, 지나가는 팔레스타인 여성에게 와인을 뿌리는 이스라엘 남성의 사진. 이 이미지는 팔레스타인 영토의 행정수도인 라말라에 머무는 동안 무너졌다. 라말라는 활기찬 도시였다. 거리에 사람들이 넘쳐났다. 거리 가득한 식당, 카페, 술 가게, 라이브 음악이 유명하다는 바, 베이커리, 채소 시장….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자 지구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차별이 없는 것도 아닐 터다. 다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거다. 뉴스를 보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상이 정치와 분쟁에 모두 사로잡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근데 아니다. 그 너머의 일상이, 사회가, 문화가 있다. 당연하게도.
나름 여행을 꽤 했다고 생각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가 보지 못한 공간에 대한 추상적인 이미지가 가득하다. 소말리야-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사는 곳. 두바이-석유 부자들이 사는 곳. 러시아-추운 나라. 마다가스카르-하쿠나 마타타(응?). 내가 부지런히 여행을 다니는 이유에는 그런 공간들에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채워나가기 위함도 있다.
차별과 선입견은 상상력의 부족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국인=돈 많고 무례한 여행자. 무슬림=테러집단. 난민=국민의 직업을 빼앗아가고 지역에 위험을 초래하는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남의 나라에 와서 편하게 돈 벌 궁리만 하는 사람들. 이런 이미지와 편견은 그들의 구체적인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물론 그렇게 쉽게 판단해버리면 골치가 덜 아프다는 장점은 있다. 그들보다 우위에 선 기분을 느끼며 우쭐해할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함정은, 그 누구도 그런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거다. 나는 매우 구체적이고 복잡한 인간이지만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눈엔 그렇지 않을 거다. 나를 처음 본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아시아인. 여자. 백수. 아마 그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쉽게 판단받고 싶지 않다. 저기 그게 아니고요. 저는 아시아인이 맞긴 한데 그중에서도 한국 사람이고요, 그중에서도 남한 사람이고,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고, 이런저런 시절을 거쳐 이런 일을 하고 이런 경험을 하고 성격은 이런 편이고…. 이런 끝없는 덧붙임을 하고 싶어진다. 내가 함부로 판단받고 싶지 않은 만큼, 남도 함부로 판단하고 싶지 않다. 비록 아직 비루한 상상력이지만, 천천히 여행해가면서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아주 조금씩 늘려가고 있다. 끝없는 덧붙임을 이어가며.
그러니 계속 여행할 일이다. 나의 무식함에 충격을 받고 부끄러워하는 일이 잦더라도. 베들레헴은 예수가 태어난 공간이기도 하지만 이브라함, 마스지드, 아흐메드가 사는 구체적인 삶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집트를 여행하자. 케냐를 여행하자. 러시아를 여행하자.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나갈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