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이 일을 대충한다고요?
누군가 임원에게 물었다.
“워킹맘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한 말씀을 내려주겠다던 임원은 “저는 워킹맘이라고해서 일을 대충하는 걸 용납하지 못합니다.”라고 말을 시작했다. 남녀는 평등하게 경쟁해야 하며, 여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제도나 교육은 역차별이라고 했다. 듣고 있던 사람들 표정이 일제히 굳었다. 그 자리에는 결혼을 한 사람도,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고, 워킹맘이라고 해서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임원은 여자였다.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었다. 위로의 말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분위기는 마치 훈육에 가까웠다. 워킹맘이라고 해서 일을 대충한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나를 포함해, 내가 아는 워킹맘들은 워킹맘이니까 일을 좀 적게 주세요,라던가 일을 대충하겠다고 말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워킹맘들이 우는 이유는 일도, 육아도 대충하고 싶은데 시간은 한정적이고, 체력도 한정적이고, 일도 육아도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열정을 이야기 하는 사회다. 열정이 있어야만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임원이 되는 것처럼 회자된다. 그러나 평범한 사원도 일에 대한 열정은 있다. 매일 하루 3시간 밖에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해도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는다. 그것이 엄마다. 워킹맘은 이 식지 않는 두 가지 열정과 사랑 사이에서 균형을 잡느라 힘든 것이다. 어느 곳에서 힘을 빼야 할지, 어느 곳에서 힘을 주어야 할지 갈팡질팡 한다.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워킹맘들에게 열정을 더 가지라거나, 일을 더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워킹맘들에겐 격려가 필요하다. 그들은 회사의 중요한 일에 나설 수 없음에 절망하고, 열이 나는 아이 옆에서 있어줄 수 없어서 절망한다.
워킹맘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보라고 말했더니 ‘힘들다’, ‘안쓰럽다’라는 단어들이 줄을 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힘들지만, 세상이 알아주지 않지만, 오늘도 일을 하고, 아이들과 대화를 한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회사를 위해서도 아니고, 아이를 위해서도 아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하는 것들이다.
남녀는 평등하게 경쟁해야한다. 평등 경쟁이라는 것은 제반조건을 똑같이 했을 때 평등한 경쟁이 된다. 제반조건이 다른데 평등한 경쟁이 될 수 있나? 사회가 엄마에게 부여한 역할이 많다. 어린이집에서도, 학교에서도 1차 연락망은 다름 아닌 ‘엄마’다. 남자들이 집안 일을 도와준다고 하지만, 그야말로 도와주는 것일 뿐, 주 책임자는 여자다. 언젠가 부동산에 집을 보러 갔더니 부동산 중개인이 그런 말을 했다.
“여기 엄마가 일을 다녀서 집이 좀 지저분해요.”
그 부동산 중개인도 여자였으며, 집을 보겠다는 나도 여자였고, 집 주인도 여자였다. 우리는 여자임에도 평등한 제반조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섰고, 경쟁에서 뒤처지는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경험하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한 인생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실패한 사람은 실패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실패는 하고 싶지 않지만, 자꾸 성공에서 멀어지는 내 자신을 바라보는 건 참담하다. 일에서든, 육아에서든 성공이라는 키워드는 얼마나 잡기 힘든 키워드이던가.
그 잡기 힘든 키워드를 내려 놓으니, 다른 세상이 보였다. 밝은 햇살 아래에서 웃는 아이가 보였고, 엄마가 세상의 전부인 양 뛰어와 안기는 아이가 보였다. 같은 일을 하면서 조용히 협력하는 동료가 보였고, 매일 다르게 거울 앞에 서는 내가 비로소 보였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은 열정의 온도는 한 곳에서 100도 넘게 끓어 넘치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안에서 중심을 잡으면 주변을 70도이 온도로 행복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대충 일하지 않는다.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할 뿐이다.한정된 자원 안에서 발에 땀이 나도록 뛰고 있다.
내가 경험한 세상을, 일상을 풀어놓을 예정이다. 내 경험이 누군가에겐 반드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워킹맘들에게 내가 먼저 한 고민이 도움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나는 출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