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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히 Jun 18. 2024

8-1. 녹을 지우는 일

 글쓰기는 미래의 나에게 주는 서프라이즈 선물 같은 것이다. 부끄러워서 숨고만 싶었던 순간도, 대체 나는 왜 이렇게 힘들까 고민한 시간도, 단어와 문장으로 정갈하게 다듬어 포장지에 싸두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그런 걸 적어두었다는 것도 까먹고 지낸 어느 날 나는 우연히 한 편의 선물을 받는다. 포장지를 뜯어 만난 기억이 여전히 상처일 때 그 선물은 위로가 되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그날과 상관없이 살고 있을 땐 추억이 되었다.     


 남자친구의 우울증이 한참 기승을 부리던 어느 겨울, 집 전체를 울리는 게임 소리가 유독 귀에 거슬렸던 날에 이 글쓰기는 시작되었다. 심술 궂은 마음이 입 밖으로 나올까 봐 황급히 노트북을 챙겨 집 근처 카페에 앉았는데 그곳에서 우울증에 걸린 남자친구에 대해 생각하다 글을 썼다. 훌쩍훌쩍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건 이대로도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내 안에 억울함과 서러움을 꾸역꾸역 숨겨 놓았던 탓일 것이다. 그 후에는 게임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 않아도 노트북을 들고 나오는 날이 잦아졌다.

 그곳에 앉아 어느 날은 우울증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것을 생각했다. 내가 생각했던 우리의 30대는 가끔은 고급 음식점에 가서 오붓하게 밥을 먹고, 함께 좋아하는 스포츠를 배우고, 여행은 싫어하지만 여기만은 꼭 가 보고자 했던 몽골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어느 것도 해 보지 못 하고 한참 싹을 틔울 20대의 끝자락과 30대의 시작이 집안 구석에 틀어박혔다. 비가 올 때는 낭만적이라 말하고, 눈이 내리면 되려 마음이 따뜻해지고, 맑은 하늘 아래로 뛰쳐나갔을 날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았을 텐데 그것들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우울증 보고 억울하다고 했다.

 어느 날은 그럼에도 좋은 것들을 생각했다. 상봉이가 일찍이 사회인이 되었다면 함께하지 못했을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 그 시간에 같이 게임을 하며 깔깔 웃었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런 날은 되려 우울증이 조금 고마웠다. 우울증에 패배하지 않는 방법은 우울증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괜찮은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라고, 글을 쓸수록 그 믿음과 다짐이 견고해지고 단단해졌다.      


 우아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말을 차분히 하고 옷을 단정히 입어 봤는데 잘 안 됐다. 왠지 내 자신을 떠올리면 고물을 덕지덕지 덧대어 만든 고철 로봇이 떠올랐다. 내 투박한 손으로 만지고 그리고 글을 쓰는 것들에는 늘 땟국물이 묻었다. 뭘 해도 세련되지 못하고 삐그덕 소리를 내는 건 내가 지나온 촌스러운 시간들을 잊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묵은 때를 지우지 못하고 내놓는 녹슨 글들이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녹슨 부품을 교체하고도 남았을 터인데, 우아함을 타고나는 사람이 있듯 촌스러움도 타고나는 것인지 나는 왠지 녹이 슨 자욱을 들여다보는 일을 좋아했다. 그래서 매번 녹 익은 이야기를 떠드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한 편씩 글을 쓸 때마다 내 철통 같은 몸통에 묻어 있는 녹이 조금씩 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우울증에 걸린 남자친구를 이야기하는 자리에 나의 땟국물이 잔뜩 묻어났던 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지금은 나에게 묻어 있던 어떤 녹은 다 지워져서 어느 한 때에 대해서는 더 이상 유난 부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보다는 늘 이대로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상봉이에게 위로가 되고 추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나를 위한 선물이 된 셈이다.      

 올봄, 상봉이는 6년 만에 새 학번을 받아 슬기로운 대학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학교 공부가 바빠 일주일의 반 이상은 기숙사에서 보내느라 얼굴 볼 일이 줄었지만 그 덕에 나는 좀 더 자유로워졌다. 상봉이의 1년이 나의 1년인 것처럼 그렇게 6년을 꼭 붙어 살았는데, 이제는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꾸려가고 있다. 

 아픈 상봉이에게 마음 쓰던 자리에는 이제 다른 마음들이 채워지고, 녹이 지워진 곳에는 새로운 먼지가 쌓일 것이다. 그럼 나는 또 부지런히 묵은 때를 들여다 보고 흠이 난 곳에는 땜빵을 하며 고군분투한 손때를 여기저기 묻히며 살고 있을 것이다.      


 촌스러운 것은 우아하지 못한 대신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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