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화'에 빠진 나에게 낯선 위로를 건네보기
모든 것이 내 탓인것만 같았다.
조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러니까 회사에서 새로운 업무를 수주하거나 의미있는 성과를 남길 때, 혹은 조직 내의 갈등이 생기거나 업무 상의 크고 작은 실수, 혹은 오류들이 발생했을 때. 심지어 회사 안 구성원간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있어서도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다 내 책임이라고, 최소한 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잘 되면 괜찮지만 잘 되지 않는다면 더더욱. 내가 이 조직의 리더이자 책임자이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힘이 들었다.
일이 잘 될 땐 더 없이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 나쁜 일들이 생겨날 때면 그 무게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조직과 그 구성원들이 행복할 수 있을지 내 모든 것을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조직이 커질수록 무게는 커졌다. 다섯명에서 열명, 열다섯명, 스무명에서 그리고 스물 다섯명, 서른명까지. 늘어나는 사람들만큼 어려움과 갈등의 숫자는 제곱으로 늘었고, 무게 또한 강해졌다.
사실 나는 이런 부담의 무게쯤은 얼마든지 괜찮을 줄 알았다. 항상 어려운 순간마다 정면돌파로 헤쳐나왔고, 지금까지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이겨내며 살아왔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또 다음번에도 나는 괜찮을거라 생각했다.
내가 힘든 이 증상의 이름이 '주지화'라고 했다.
'주지화(intellectualization)'라고 했다. 자꾸 발생하는 걱정과 스트레스를 논리적으로 이겨내려고 하다가 그 대미지가 쌓여 갑자기 무기력해지는, 그런 증상이라고 했다. 나는 괜찮은게 아니었다. 괜찮기 위해 계속 '노력'했고, 노력이란 이름으로 꾹꾹 눌러담았던 내 감정은 결국 나도 모르게 터져나와 바닥에서부터 나를 끌어 당기고 있었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내 증상의 이름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마전부터 찾아온 걱정과 스트레스, 무기력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적어도 "나 우울증 아닐까? 혹은 더 심한 병이 아닐까?"라는 걱정에선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증상을 알고 나서도 나에겐 비슷한 상황들이 반복되었고(지금도 반복되고 있고), '노력으로 극복하려는 것이 문제'임을 알면서도 나는 또다시 '노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증상은 알지만 쉬이 고쳐지지 않았다.
약도 없고, 딱히 이렇다 할 치료제도 없었다. 걱정을 줄이는 수밖에, 스트레스를 줄이는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한참을 고민하다, 또 망설이다 나에게 말했다. "네 탓이 아니야."
"네 탓이 아니"라고, 주문처럼 말했다.
내가, 오늘도 여전히 어려움을 극복하겠다고 '노력'하고 있는 나에게 말헀다. "네 탓이 아니야"라고. "지금 네게 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네가 짊어질 필요는 없다고. 네 탓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헀다.
정혜신 박사가 그랬다. "당신이 옳다"고 말해주라고.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다면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묻고, 그의 대답에 "당신이 옳다"고 말해주라고 했다. 나는 지금 내게 그 말을 한다.
"네가 옳다"고. "모든게 다 네 탓은 아니"라고. 아직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계속 습관처럼 되뇌어보며 이 말을 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쓴다.
"괜찮아. 모든게 네 탓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