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서치 Apr 20. 2022

기록이 없으면 사랑도 왜곡된다 2

물증이 있어야 싸움이 끝나는 논쟁

        

#그 여자의 혼잣말


연이은 시련에 갈대처럼 휘청이던 겨울 끝자락 한 남자를 만났다. 여느 때처럼 의무감만 충만한 상태에서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나간 자리였다. 같은 초등학교, 교집합 친구, 같은 동네, 같은 이니셜, 같은 별자리, 같은 소망을 가진, 생각해보면 공통점이 참 많은 남자였다. 시그널로 받아들일 여유도 없이 지쳐 있었다. 추억이 쌓인다는 것은 그런 사소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면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그 남자는 말이 참 많았다. 가슴속에 담아 둔 말을 다 꺼내야 살 수 있는 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말이다. 이따금 위트도 있고, 따뜻하고,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참 많이 웃었다. 무엇보다 나를 많이 웃게 해 줬다. 내가 모르는 나의 장점을 발견해 주는, 내가 이성적으로 바랬던 남자였다. 그 남자가 말했다. "너를 만나면 말이 많아져... 넌 사람에게 말하고 싶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툭툭 소스를 던져줘서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나조차 잊고 있던 이야기를 하게 만들어. 나 원래 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인데..."   

  

함께 간 노래방에서 내가 듣고 싶은 곡을 눌러 가며 노래를 시켜도 묵묵히 다 불러주는 주크박스 같은 사람. 친구들하고 노래방 갔다가 유난히 잘 불러지는 노래가 있다며 다음에 꼭 들려주겠다고 하던 사람. 불고기를 했는데 너무 맛있다며 나에게도 해주겠다고 하던 사람. 된장찌개는 쌀뜨물로 해야 맛나다는 사람. 겨울이 오면 스키 가르쳐 줄 테니 가자고 말하던 사람. 싸이월드에 쓴 나의 글을 읽는 건 왠지 마음을 훔쳐보는 것 같아서 반칙하는 기분이라 안 봤다고 하는 사람. 빌려 준 책 안에 너의 스킨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향수를 갈피마다 뿌려 놓았다던 사람. 그 향수 이름을 맞혔더니 "넌 천재야..."라고 말하던 그런 사람이다.  (*오글거림 주의)   


보고 싶을 땐 1번. 우울할 땐 2번을 누르면 된다고 한 사람. 그런 건 어디서 배웠을까, 어디 가면 가르쳐 주냐고 물었더니 그런 건 다 마음이 가르쳐 주는 거라고 말하던 사람.     

그리고는 문자에 한가득 111111111을 찍었던 사람. 그래서 시베리아의 바이깔 호수 같던 내 마음에 봄이 찾아오게 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롯이 마음을 주지 못했다. 한 발 다가오면 두 발 도망치는 사랑 불능자였다. 그 남자는 내게 참 많은 공수표를 날렸다. 물론 공수표로 만든 게 다 나로 인해서다. 뭔가를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하면 난 여지없이 미루고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급급했다. 누군가는 내가 그 사람을 희망 고문하는 거라 했다. 한 사람에게 익숙해지고 추억이 쌓이고 사라진다는 것이 두려웠다. 늘 도망치느라 늦어 버리는 엇박자 같은 마음이었다.  누군가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행복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이기심이다! 내 마음이 온전히 열릴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할 순 없으니 말이다. 내 마음 추스른다는 명목 하에 그 남자의 마음을 고문했다. 어쩌면 그 남자라는 믿는 구석이 있어 나는 더 추스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모양도 다르고 사랑이 오는 방향도 다르겠지. 하는 순간 사랑이라고 아는 사랑도 있고, 끝난 후에야 아는 사랑도 있고. 지금은 그렇다. 사랑한다, 라는 말 보다 고맙다, 라는 말을 더 해주고 싶은 사람. 서른두 해를 살고 있지만 못해 본 게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준 사람이다. 고맙다! 내 핸드폰에 보호 설정된 몇 개의 따뜻한 글.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그건 3번!       

      

나도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점점 사람을 잃는 게 두렵다. 그 빠져나간 자리에 생긴 멍은 두고두고 나를 아프게 했다. 그래서 마음을 갖는 것도 두렵나 보다. 애초에 가지지 않으면 잃을 것도 없으니.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안다. 나란 사람의 어리석음과 나약함과 부족함을 묵묵히 견뎌준 그 사람에게 참 미안하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건 아니다. 남들이 말하는 그럴듯한 뭔가를 하지 않아도 남는 건 있다는 것을 안다. 그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으니 말이다. 사랑을 많이 해 본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던 그 남자는 왜 하필 바보 같은 나를 만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그 남자가 쓴 글을 읽고  내가 미워진다.  이제 바보짓은 그만해도 좋으련만. 일생 기다리는 게 일이었고, 일생 도망치는 게 일이었던 나는 또 바보짓을 했다.          


2008.10.09  <<미니홈피>> 글 중에서 발췌



그 남자, 그 여자의 오래된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 번의 제안을 거절당한 그 남자는 괜찮은 척하며 친구로 남을 수 없다며 결국 돌아섰다. 그 남자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생각에 처음으로 용기를 냈다.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하기 시작하자 놀라운 변화들이 시작되었다. 뜬금없이 왜 관심 없는 연애 이야기를 시작했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부부로 살다 보면 자녀들이 생기고, 누구나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아빠, 엄마는 어떻게 만났어요? 누가 먼저 좋아한다고 했어요? 그렇다. 이 질문에 그 남자는 늘 “엄마”라고 대답을 한다. 내가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뭔가 밀리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어느 날 문득 싸이월드에 기록했던 그 남자의 글을 증거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기록이 없으면 추억도 왜곡된 채 각색된다. 이런 연유로 증거를 수집하다가 잠시나마  방울방울 시절의 타임슬립을 경험했다. 


        

          




십여 년 전으로 타임슬립


         

작가의 이전글 기록이 없으면 사랑도 왜곡된다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