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 쥬조
또 키보드를 결국 펴고 말았다. 지금은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 엊그제 갑자기 정한 일본 여행을 떠나는 길이다. 짧은 여행이라 그냥 조용히 다녀오려 했는데 어쩔려고 키보드를 핀건지… 글 쓰는건 좋긴 한데 한번 쓰기 시작하면 이게 또 은근 스트레스긴 하다. 뭐 내가 그렇지.
그나저나 시작부터 이거 낌새가 스펙타클하다. 나리타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편도신공으로 구매했는데, 여러가지 복잡다양 컴플렉스한 이유로 온라인 결제를 못하고 꼭 현장에서 결제를 해야 한다. 오늘 5시까지 결제를 해야 하는데 지금이 4시이고 난 여전히 공항 버스에 올라타 있다. 아까 낮에 회사에서 퇴근할때만 해도 시간이 넉넉하다 여겼는데 애들 화장실 준비하고 사료에 물에 정신 없이 챙기다보니 결국 이리 되었다. 이거 이러다 비행기 못 타는거 아니야? 사실 좀 걱정되는 상황이긴 한데 딱히 많이 걱정되지는 않는다. 경험상 항상 어떻게든 되더라. 그리고 걱정은 절대 현실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저 스트레스와 탈모를 가져올 뿐이다.
이번 여행은 딱히 뭔가를 피해서 가는 여행은 아니다. 작년 이맘때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후 표가 하나 더 남았는데 그 기한이 다음달인거를 지난 주에 대한항공에서 보내준 카톡으로 갑작스레 알게 되었고 그 표를 이용할 뿐이다. 그럼에도 공항 버스를 타는 순간 두근거리는 것을 보니 확실히 여행이 체질에 맞긴 맞나보다.
갑작스럽게 결정한 여행인만큼 아무 계획도 잡혀 있지 않다. 오늘 저녁에만 일정이 하나 있다. 8년 전쯤 인도 여행 다니다 만난 친한 동생이 도쿄에 살고 있어서 오늘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하였고 그래서 오늘 아침에 급하게 그 근처 숙소를 예약해놨다. 사실 도쿄로 행선지를 잡은 것도 그 친구 때문이긴 한데, 어차피 도시를 좋아하지 않아서 내일은 도쿄를 떠나지 않을까 싶다. 어디로 갈지는 오늘 그 친구 얘기도 한번 들어보고 마음이 끄는 데로 갈 예정이다.
공항에 도착하니 4시 15분! 역시 큰 문제 없이 도착했다. 사실 늦게 도착해서 못 탔어도 다른 비행기를 찾거나 아니면 그냥 뭐 취소해도 큰 불만 없었을 것 같다. 늘그막에(?) 깨달은 인생의 진리라면 흐름을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 내 주체성만 확실히 하는 것이다.
그래도 먼저 할 것은 해야지. 후딱 대한항공 발권센터로 가서 일부터 해치운다. 마일리지가 복잡하게 엮여 있어서 이게 좀 복잡한 일인가보다. 한동안 뭔가 계속 부스럭부스럭 하시더니 정리를 해주신다. 그래도 확실히 대한항공이라 서비스가 남다르다. 내가 대한항공을 타고 다니다니. 마일리지 신공은 정말 써줄만하다. 헌데 이번에 알아보니 편도 신공을 막으려는지 예약을 변경할 경우 위약금도 꽤나 발생하고 여러가지로 불편해지고 있다. 그래도 써보는데까지는 써봐야지…
셀프 체크인을 하고 보딩 수속까지 끝내고 들어온다. 물론 면세점은 바로 바이패스다. 버릇처럼 일단 내가 탑승해야 하는 7번 탑승구로 향한다. 목적지를 먼저 가놓고 주변에서 쉬어야 마음이 편하다. 무빙워크에 올라타고 천천히 걸어간다.
그리고, 내가 여행을 시작했음을, 내가 이 느낌에 얼마나 익숙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여행이 시작되면 가장 처음 달라지는 것이 발걸음이다. 지금부터 목적지는 있지만 기한은 없어지며 꼭 가야 할 곳은 사라진다. 비록 짧디 짧은 4일의 시간이지만 내가 삶의 주도권을 오롯이 가져올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이게 나한테는 여행이다.
무빙워크를 타며 천천히 걷는데 주변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가족 여행을 왔는지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이 보이고 여행 왔다 다시 돌아가려는 일본인 커플의 약간 지친듯한 대화가 들려온다. 의자에 누워서 지친 몸과 영혼을 달래는 젊은 여행자들도 보인다. 삶이 앞을 향해 가고 내일을 보는 거라면 여행은 현재에 존재하고 이곳을 느끼는 것이다.
항상 여행 다닐때면 없는 돈에 쥐어짜서 다닌지라 탑승구를 찾아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구석진 곳을 가서 더 구석진 곳까지 들어갔었다. 하지만 오늘은 대한항공이다! 7번 탑승구! 행운의 숫자기도 하지만 한자리 수 탑승구는 일단 위치가 가깝다. 도착해서 보니 의자도 고급스러움이 좔좔 흐른다. 그래, 나도 대접 좀 받아보자. 뭐 대기석 의자에 대접 운운하는 내가 새삼 웃기기도 하다.
자리에 앉아서 키보드를 켜니 옛 생각이 스윽 올라오며 금새 익숙해진다. 내가 이중인격인가… 공항만 들어서면 내 안에 어떤 스위치가 켜지는 기분이다. 현실에서도 나 자신을 지키려 많이 노력하지만 이렇게 떠나게 되면 정말 오롯한 내가 되는 것이 느껴진다. 이번 여행은 글을 쓰지 말아야겠다 생각했었는데 막상 키보드를 여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자신의 성찰은 확실히 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한시간 정도 책을 보며 기다리다 비행기에 오른다. 사실 비행기에 오르고 보면 저가항공이나 이런 대한항공이나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육신의 편안함에 그다지 신경쓰는 편도 아니거니와 삼각김밥도 진수성찬 처럼 잘 먹을 수 있어서 그게 그거라 느껴지기도 한다.
내 옆 자리에는… 일본인 여자 두분이 앉아 있다. 여행하러 온걸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잘도 로맨스가 생기지만 난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 뭔가 쳐다보기 부끄럽다고나 할까. 그런 주제에 이런 짧은 여행에도 로맨스가 생길까 기대하는 것도 참 한결 같다. 이거 근데 나만 그런건 아니겠지? 그래도 출입국 신고서도 써야 하니 나중에 펜이라도 빌리면서 말을 터볼까 싶기도 하다. 또 혹시 알어? 희망은 희망을 끌고 온다.
기내식이다! 확실히 대한항공가 가장 다른 점은 이거지. 아까 티케팅할때 기내식 있냐고 묻는데 카운터의 누님이 날 보며 살짝 미소를 지은 것이 떠오른다. 무시의 미소는 아니었지 싶고… 그냥 귀여워서 그런거겠지? 여튼 나도 복수로 누님이라 불렀으니 됐다.
치킨 데리야끼는 일본식 스타일로 요리가 되어 있다. 벌써 일본 특유의 요리향이 느껴진다. 일본 음식의 특징은 간장이다. 간장을 이런 저런 형태로 쓰고 그 맛의 깊이를 추구하기에 우리나라처럼 매운 맛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에 대체적으로 음식이 짜다. 라고 일본 한두번 가본 초보가 얘기를 해본다.
스튜어디스의 친절함도 대한항공만의 강점이다. 특히 실장님으로 보이는 남자분 한분이 내가 일본여인 두명과 앉아 있는게 안쓰러워보였는지 자꾸 각별히 신경쓰신다. 내가 치한처럼 보여서 그런건가. 그런데 이 아저씨 너무 친절하다. 출입국신고서를 써야지 싶어서 옆에 처자들한테 빌릴까 하는데… 갑자기 먼저 펜이 필요하냐고 묻는다. 게다가 직접 주는 것도 아니고 주머니에 있으니 가져가라며 몸을 내민다. 결국 손을 주머니에 깊숙히 찔러 볼펜을 꺼내고 만다. 그래 이것도 다 추억이지…
오늘 저녁에 만날 친구, 후배는 인도 여행에서 거진 한달을 같이 다닌 아이다. 그때 나랑 이 후배랑 다른 여인 하나랑 셋이 같이 다녔고, 그 여인은 나의 전여친이 되었다. 그때 나름 삼각관계였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친구 이거 다 볼텐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난 거짓말 못하니.
살다 보면 10살 혹은 그 이상 차이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이 아이도… 아마다 11살 차이인가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어리다고 해서 내가 뭘 꼭 가르쳐야 한다거나 우위에 설 생각은 없다. 나이가 그 사람의 위치를 정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어느 정도 인생을 알고 난 서른 부터는 그냥 살아온 환경에 따라 다를 뿐, 시간이 경험을 뜻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설사 경험이 더 많다 하더라도 그 자와 나의 가치관이 다르다면 굳이 강요할 필요도 없다. 그냥 나는 내 삶을 살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존중해주면 그뿐이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나이차가 나도, 사회적 지위가 달라도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 회사에서도 나는 부사장님을 비롯하여 우리 부장님, 그리고 막내 조대리까지도 모두 친구라 생각한다. 아 그 분들도 이거 보려나… 뭐 어때. 좋은 얘기겠지…?
베트남 여행에서 만난 나보다 약 서른살 많았던 데이브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그 친구도 나에게 뭔가를 가르치려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친구의 행동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그 영향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지금 구청에서 어머니들과 그림을 배우는 것도 그 친구의 영향이고,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집착하지 않는 것도 그 친구의 영향이다. 멘터는 뭔가를 말로서 설명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보면서 스스로 깨닫게 하는 사람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알게 모르게 멘터가 되어주고 있을까? 나는 누군가의 첫 사랑이었을까? 아 이 드립은 머리속에서만 생각하고 쓰지 말았어야 하는데.
두 시간 정도 걸린 셈인가? 밥을 먹으니 바로 비행기가 하강하더니 도쿄에 도착한다. 내릴때까지 옆에 있는 여성분은 눈도 못 마주친다. 역시 로맨스는 쉬운게 아니다. 그게 쉬웠으면 내가 이 나이에 이러고 있을리가 없지.
체크아웃을 하자 마자 심카드부터 찾는다. 이번 여행에서는 심카드를 쓰기로 했다. 너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채 오기도 했고 기본적인 구글 지도는 있어야지 이동이 가능할 것 같아서다. 특히 도쿄 같이 지하철이 미로 처럼 되어 있는 곳에서 잘못하면 미아 되는 것 순식간이다.
자연스럽게 둘러보는데, 어둠의 기운이 공항에 퍼져 있다. 아, 지금 몇시지? 시간을 보니 9시가 넘었다. 결국 다 문 닫고 인포메이션에서 한 여자분만 슬픈 눈으로 야근, 아니 야간근무를 하고 계신다. 심카드 생각하고 아무것도 준비 안했는데 어쩌지? 뭐 어떻게든 갈 수 있을거 같긴 한데 불안하다. 그래 일단 한번 물어보자. 인포메이션 용도가 그런건데 저 심심해하는 분에게 업무의 의미를 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의외로 해결은 쉽게 나온다. 자판기의 천국 답게 심카드도 자판기가 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자판기에서 팔기 딱 좋은 상품인데 우리나라 사고방식 때문인지 생각도 못했다. 알려준 곳으로 가보니 자판기가 두대가 있다. 그래, 이런 세심한 부분이 일본에서 느끼는 문화 중 하나다. 환전한 돈을 처음으로 꺼내서 2500엔짜리 심카드를 하나 산다. 마이크로, 나노에서 조금 고민하지만 이 정도 함정은 공대생 어리어댑터인 나에게는 껌이다. 아이폰은 나노! 갤럭시는 마이크로! 이건 상식이지.
일단 시간이 늦어서 급하니 심카드는 챙기기만 하고 기차를 타러 간다. 도쿄 시내로 나를 이동 시켜줄 고속기차는… 또 2500엔이다. 일본 교통비는 역시 헉 스럽다. 30분 가는데 25,000원이다. 음식값은 안그런거 같은데 지하철부터 기차는 참으로 감당이 안된다.
일단 기차 시간이 남아서 자리를 잡고 심카드 부터 뜯어본다. APN 세팅 등 할 것들이 있지만 수도 없이 해봤으니 후딱 해치워버려야겠다. 뜯어서 보니 뭐 상세한 설명부터 알 수 없는 쿠폰까지, 거기다가 이해할 수 없지만 왠 얼굴의 개기름을 닦는 기름 종이도 있다. 역시 일본 사람들 세심해…
어라? 그런데 뭔가 있어야 할 것이 아무리 찾아봐도 안보인다. 다시 한번 살펴 보지만 없다. 아니 이 사람들아. 자판기에서 심카드를 팔면서 철사를 안넣어주면 핸드폰에서 어떻게 기존 심카드를 뽑니. 아 어이가 없네. 아니, 개기름 닦을 기름종이까지 넣어주면서 철사를 안넣어주는 것은 도데체 누구의 발상이냐. 일본도 전부 세심한건 아닌가보다. 무인자판기면 진짜 당연한거 아닌가. 생각하니 또 열받네.
그나저나 어쩌지? 후배랑 연락할 방도가 없다. 일단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역시 역에서 와이파이는 된다. 그래 이리 생각하면 또 세심한 부분이 있단 말이야. 그래도 기름종이를 위해 철사를 희생하는건 도저히 용서가… 여하튼 후딱 연결해서 후배랑 얘기를 나눠본다. 일단 어떻게든 호텔을 찾아가고 후배는 아예 그 호텔에서 만나기로 한다. 이 친구를 만나려고 얘네 집 근처 호텔 잡았으니 그 정도는 해줘야지. 첫날은 늦은 시간에 들어가면 민폐지 싶어서 게스트하우스를 안잡고 호텔을 잡긴 했는데 1박 5만원짜리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막 물 세고 그런건 아니겠지.
기차는 빠른 속도로 닛포리로 향한다. 물론 닛포리가 어딘지 나는 전혀 감이 없다. 새로 온 도시에서 지역의 이름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그때야 나도 익숙해진거다. 내가 아는 도쿄는 아키하바라다. 남자라면 아키하바라지! 일요일에 한번 슬쩍 가볼까… 매우 귀찮지만 난 의리남이니 친구들이 사달라고 한 야동을 위해서라도…
닛포리까지는 쉬웠다.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다. 눈앞에 있는 JR선 노선표를 한없이 바라보지만 한문으로만 덕지 덕지 쓰여 있는 노선도를 아무리 봐봤자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만 강해질뿐이다. 아니 하다 못해 히라가나, 아니 카타카나라도 쓰여 있으면 찾기라도 할텐데 한문만 있으면 내가 어떻게 읽으란 말이냐. 목적지인 히가시 쥬조가 한문으로 뭔지 내가 어떻게 알어. 우리나라도 외국인들이 오면 이런 답답함을 느낄까?
결국 동생한테 굴욕적인 SOS를 보낸다. 나 혼자 할 수 있다고 그리 큰 소리 땅땅 쳤는데 도쿄 지하철에서 벌써 무너져버린다. 한문으로 히가시쥬조를 알려달라고 하고 찾아보는데 역시 안보인다. 여기서 분명히 갈아타지 않고 한번에 간다고 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직행 노선에는 히가시 쥬조가 없다.
사진을 찍어서 동생한테 보내고 나서야 찾는다. 초록색선만 주구장창 보고 있었는데 파란색선이다. 분명히 노선도에는 파란색선이 이곳까지 이어지지 않고 초록선으로 두어정거장 후에 이어지고 있다. 여기 파란선이 오는 역이라면 초록선, 파란선 다 표시해야 하는거 아니야? 논리도 없고 배려도 없는 도쿄 지하철, 각오하고 오긴 했지만 더 혼란스럽다.
그래도 지하철을 타고 드디어 이동한다. 헤매는 내가 불안했는지 동생은 결국 마중 나와서 지하철 안에서 만난다. 이놈 만난지 한 일년 됐나? 지난번 봤을때는 이 친구와 일본인 여자친구가 우리집 옥탑방 마당에서 파티를 한번 열어줬었다. 일년만에 보니 무척 반갑다. 인도에서 만난 인연은 십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참 내 인생에 질기게 남아있다. 지난 주에도 인도에서 만났던 열살 어린 동생이 우리 집에 자기 여자친구랑 놀러왔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들은 다 연애하는데… 예의없는 놈들.
후배와 함께 히가시 쥬조에서 내린다. 역에서 보니 아예 '히가시 쥬조'라고 일본어, 한글, 영문으로 다 쓰여 있다. 아니 노선도에 써놔야지 이걸 왜 여기다 써놔. 여기까지 온 사람은 어차피 다 알고 온거 아냐? 역시 제품이든, 서비스든. 시스템이든, 써보지 않은 사람이 만들면 이런 허점들이 티가 나는 법이다.
호텔은 아담한게 딱 일본 호텔스럽다. 뭐, 5천엔에 이정도면 일본에서는 훌륭하다. 친구랑 가볍게 한잔 하기 전에 심카드 부터 바꿔보기로 한다. 얘한테 부탁해서 철사를 준비했다. 내일 뭐할지를 정해야 하기에 인터넷이 필수다.
갤럭시 노트가 언제부터 나노유심을 쓰게 된걸까? 나 분명히 마이크로 유심으로 봤었는데. 이게 왜 나노지? 내가 혹시 이전에 쓰던 블랙베리와 햇갈렸나? 하… 이거 2.5만원짜리 유심인데…
그래도 내가 공대생인게 다행이다. 유심은 사실 사이즈와 상관없이 잘 잘라서 넣으면 작동한다. 후배한테 이 지식을 잠깐 자랑하고 가위로 스윽 잘라서 집어넣는다. APN 세팅도 후딱 해치우고 해보니 속도가 느리지만 연결은 된다. 오키! 이제 나도 넷에 연결됐다.
후배가 아는 이자카야를 찾아가니 시간이 벌써 11시다. 한국에서 4시에 출발했으니 여기까지 7시간 걸린 셈이다. 이렇게 보면 도쿄가 가깝지만 막상 또 그리 가깝지는 않다. 하긴 같은 서울에 있는 본가도 한달에 한번 가기도 힘든걸 보면 거리는 결국 마음의 문제긴 하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의 일본 생활의 일부를 잠시 열어서 맥주 한잔과 함께 들어본다. 한국의 팍팍한 경쟁이 버거워서 일본으로 왔다는 이 친구의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차이점이 뭘까 생각해본다. 여기도 힘든건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이곳에서는 편의점 알바만으로도 생활을 영위할수가 있다. 최저시급이 문제일까? 아님 자본주의에 너무 급격하게 물들면서 급속한 경쟁으로 인건비가 낮아진 것이 문제일까. 생각해보면 일본에서 비싼 것은 항상 인건비가 들어갈때이다. 택시나 택배가 가장 대표적인 차이다. 사람이 최소한으로 필요한 자판기가 흥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또 어느정도 엘리트층이 받는 연봉을 생각하면 사실 일본과 한국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 사실 정확한 자료를 모르겠지만 삼성전자와 소니 임직원의 연봉 차이는 크지 않을 것 같다. 결국 양극화가 문제인걸까. 양극화가 자본주의의 필요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 우리나라가 자본주의에 더 충실하게 적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본에 오면 항상 느끼는 장점이 신구의 조화이다. 예전의 전통은 지키면서도 자기들식으로 새로운 세대를 접목하였다. 대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확실하게 느껴진다. 우리나라는 조금만 낙후되면 재개발을 하며 자꾸 우리의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깍으려 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번에 리뉴얼된 노량진 수산시장도 그렇고 각종 재래시장들도 그렇고 기초적인 색깔은 유지한채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어느쪽이나 부작용은 있을거다. 이 친구한테 들으니 일본에서는 집 계약할때도 건물주에게 자기를 받아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돈을 주기도 한단다. 예전 전통이라나… 내가 내 돈 내고 산다는데 왜 돈을 줘야 하지.
하나 확실한 것은 일본은 정말 근본부터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예전에는 인종도, 문화도, 성격도 비슷하다 여겼지만 몇번 와본 결과 그냥 완전히 다르다 여겨진다. 같은 것이 오히려 적다. 같은 동양권이 아니라면 같다는 얘기도 안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다르기 때문에 서로 욕을 그렇게 하면서도 또 좋아하는 것 아닐까. 문화는 상대적이기에 누가 좋다 나쁘다 얘기하는 것은 위험하다. 다만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열린 마음가짐은 중요하다.
그 친구와 2차 이자까야까지 달리고 호텔로 돌아오니 벌써 새벽 2시가 넘었다. 결국 내일 어디 갈지 정하지도 못했다. 옵션만 대여섯개 정했다. 그래도 뭐 큰 걱정은 안든다. 엄청 스펙타클한 여행을 원했으면 사실 도쿄를 오지도 않았을거다. 그냥 내 발길이 이끄는 곳으로 가다 보면 분명 나만의 여행이 기다리고 있을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