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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Jul 09.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8

Bangkok, Thailand to Mandalay, Myanmar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앞쪽 침대의 몸매 좋으신 서양 누님이 갑자기 옷을 훌러덩 벗더니, 속옷만 남겨놓고 온몸에 바디로션을 바르기 시작했다. 이건 어째야 하는 거지? 당황스러운 광경에 눈이 찌부려지면서... 자세히 응시를... 못하고 그냥 최대한 안 보려고 눈알을 데굴데굴 거렸다. 진짜다.

나름 익숙해진 태국에서 또 다시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게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는지라, 게다가 다음 이동지가 내 여행의 본편이라 생각하고 있는 곳인지라 그런지, 어제 계속 인터넷으로 조사를 좀 하다가 늦게 잠들었다. 다행히 코를 심하게 고시던 그 분은 12시 이후에는 안정을 찾으셨다. 코골이계의 신데렐라인가. 대신 에어컨이 문제였다. 도미토리의 에어컨을 왜 이리 심하게 틀어놓는지 이해가 안된다. 어제는 미리 대비해서 돌돌 말리는 내 명품 유니클로 패딩을 아예 입고 그 위에 이불을 덮었음에도 추워서 잠들기 힘들었다. 그저께는 더워서 못 자고, 어제는 추워서 못 자고, 이 뭔 조화인지.

10시 50분 비행기라 7시 30분에 알람을 맞춰놨는데 6시 좀 지나서 깬 이후 잠을 계속 설친다. 사실 나는 알람을 듣고 일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에 자동으로 눈이 떠지고 알람이 울리기 전에 꺼버린다. 이 예민한 성격 좀 고쳐야 하는데...

계속 이것 저것 찾아보다가 7시가 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난다. 패딩을 말아서 집어넣고, 침대 위 물품들을 모두 세컨백안에 쑤셔 넣는다. 어제 말려놓은 옷의 냄새를 맡아본다. 윽, 왜 맡았지. 괜찮다. 어차피 새옷이어도 나가서 1시간만 돌아다니면 똑같아진다. 이 얼마나 평등한 사회란 말인가.

짐을 대충 들고 일단 바깥으로 나온다. 도미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깰까 봐 아침에 영 신경 쓰인다. 락카에 가서 메인 배낭을 꺼내고 어제 빼놓았던 짐들을 마구 쑤셔 넣는다. 이번에는 공항에서 뺄 것도 없지 뭐.

대충 세수를 하러 가는데 어떤 여자분이 한분 머리 감고 드라이까지 하고 계시는 것을 목격한다. 역시 여자들은 부지런하다.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물만 슬쩍 끼얹고 나온다. 그래도 세수한 거다.


내려와서 아침을 먹으려고 홀을 보니 차림이 다소 부실하다. 계란 등이야 조리가 필요하니 없다 쳐도 시리얼은 왜 없는 거지. 그럼 빵이라도 마구 먹어야겠군. 이거 먹고 다음 식사는 드디어 미얀마에서다. 아 이거 뭔가 떨리는데?


노여사, 이번 주에 경주 간다더니 게하 예약을 못했다며 5월 22일에 가는걸로 일정을 바꾼단다. 어? 내가 21일에 귀국하니까 같이 가면 딱이네! 절대 안된단다. 나보고 차라리 여행을 연장하라고 오히려 윽박지른다. 비행기 연장할 돈 없다니까 돈까지 내준단다. 그래 너도 오랜만에 혼자 여행 가고 싶겠지. 이해해.

혼자 하는 여행과 둘이 하는 여행은 다르다.

자유로움이 다르고, 무엇보다 생각의 깊이가 달라진다. 옆에 누가 있으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오롯이 자기만을 위한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도 대부분 따로 혼자서 본다. 액션 영화 같은 것만 같이 보는 편이다. 아 서울 가면 같이 어벤저스 봐야 하는데.


로비에 앉아있는데 한 동남아인이 배낭을 메고 일어선다. 가려나 보다. 몇 마디 나눈 후 "Have a safe trip!"이라고 외쳐준다. 별거 아니지만 이런 말 한마디가 떠날 때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나도 이제는 이런 말 정도는 해줄 수 있는 여행자는 된다 이 말씀!

좀 앉아 있으니 아까 머리 감은 여자분이 내려온다. 바깥으로 나가더니 갑자기 한국말이... 저분도 한국분이었구나. 다른 일행이 오셨나 보다. 이렇게 오랜만에 보면 엄청 반갑겠다.

들어오셔서 앉길래 내가 먼저 편하게 말을 건다. 이제 좀 이런 상황이 편해졌다. 여행의 긴장감이 좀 풀어졌나 보다. 물어보니 라오스 방비엥에서 오셨단다. 그쪽에 지금 한국 사람들로 넘치지 않냐고 물으니 비수기라 꼭 그렇지만도 않단다. 갈걸 그랬나? 살짝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미얀마가 더 좋을 거다. 얀마야, 잠시 한눈 팔아서 미안하다.

40일 정도 '짧게' 여행하신단다. 그 정도면 긴 거지. 여행 출발하기 전에 처음 보는 사람끼리 일행을 구성해서 왔단다. 나는 혼자 다니는걸 좋아하지만 여자들은 저런 것도 나쁘지 않지. 여행 다닐 때 같이 다니면 생각보다 진짜 금방 친해진다. 보톧 여행지에서의 하루는 현실에서의 한 달과 같다고 얘기한다. 이곳에서 이분들의 사투리를 들으니 마음이 구수해진다. 역시 한국말이 좋긴 하다.

새끼발가락이 심하게 짓물렸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어제 약 바르고 잤는데도 그대로다. 그냥 다닐 때는 상관없는데 트래킹은 좀 걱정이다. 이삼일 안에 낫으려나.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인다. 빨리 나아라.

조금 얘기를 나누니 이제 떠날 시간이다. 데스크에 남자 스태프가 있길래 흥정을 살짝 해본다. "다음에 미리 예약하고 오면 얼마까지 해줄 수 있나요?" 미리 예약하면 375바트에 준단다. 지난번보다 싸네. 메일 보내고 오기로 얘기하고 출발한다. 다들 안전한 여행되세요.


나와서 랏챠테위 전철역으로 향한다. 하루 있었는데 참 친숙하군. 역시 표를 사러 가니 잔돈을 바꿔준다. 자동판매기에 37바트를 잔돈으로 넣어서 표를 받고 역으로 들어간다. 간단하지.


지하철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가방을 벗어서 손에 들고 탄다. 난 언제나 매너남! 이 전철은 시원해서 좋다.


조금 있으니 모칫역에 도착한다. 이제 올 때 타고 왔던 그 A1 셔틀을 타고 가면 된다. 어제 조사한 데로, 3번 출구로 나가서 오른쪽 계단으로... 아 에스칼레이터가 위로 올라오는 길이라 내려갈 수가 없군. 그럼 뒤돌아서 반대편 계단으로 내려간 후 다시 뒤를 돌아서 가면...?

없다. 정류장이 여기 있어야 하는데. 흠, 일단 가볼까? 조금 앞으로 가니 조그만 부스에 여성분 두 분이 있다가 "에어포트, 에어포트!" 라며 얘기 해주신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한 배려구먼. 두손을 모으고 공손히 답례한다. "깝꾼깝."


버스는 금방 온다. 확실히 한번 왔던 길을 다시 가는 건 쉽다. 한번 실패한 길도 다시 가면 훨씬 수월하겠지? 의미 없는 실패는 없다.


30바트를 준비하고 앉아 있으니 직원분이 오셔서 수거해가신다. 이 30바트가 한동안 태국에서의 마지막 지불이 될지도 모르겠다.


바지 주머니 부분이 뜯어진 게 눈에 띈다. 아무 의미 없는 장식일 뿐이지만 왠지 거슬린다. 내 간지바지를... 조만간 바느질 좀 해야겠다. 이럴 줄 알고 바늘과 실도 가져왔다. 일 년 전 제주도에서 청바지를 꿔매기 위해 샀던 바늘과 실이 여기까지 따라왔다. 나도 참 물건 징하게 안버린다.

28분 정도 걸려서 공항에 도착한다. 9시 반, 적당하군. 공항을 들어간다. 여기 몇 번 왔더니 정말 익숙하다. 방콕 공항 익숙하게 해줘서 고마워, 에어아시아.


국제항공은 셀프티케팅이 안 보인다. 창구로 가야 하나? 뭐 어차피 사람도 없어서 창구로 간다. 표와 여권을 주니 조금 보더니 미얀마 비자는 왜 없냐고 묻는다. 새삼스레 이제 태국을 떠난다는 것을 느낀다. 도착하면 받는 걸로 되어있다니 문서는 없냐고 한다. 배낭에서 꺼내서 보여 준다. 다 준비해놨지.


무사통과. 이제는 진짜 체크인이다. 근데 생각보다 여유가 없다. 아무래도 오늘 첫 숙소는 대충 위치라도 봐놓을걸, 너무 아무것도 모른다. 해우소도 가야 하는데. 역시 두 시간 전에 왔어야 했다.

줄 서서 기다리면서 일단 공항 와이파이에 접속한다. 무료긴 한데 매번 새로 가입해야 해서 조금 귀찮긴 하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그리 여유롭지 않아서 멀티테스킹이 필요하다. 체크인 줄을 서서 만달레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검색한다. Agoda, TripAdvisor를 검색해보고 비교해본다. 확실히 미얀마는 태국보다 비싸구나. 물론 모든 곳이 온라인에 올라온 것은 아니겠지만 나온 것 중에 제일 싼 도미토리가 10달러다. 시간이 없다. 일단 지도를 찾아본다. 미얀마는 주소도 뭔가 희한하다. 72번 길과 78번 길 사이에서 23번 길이 만나는 곳, 뭐 이런 식이다. 이거 찾기 힘들겠는데? 당연히 이런 식의 주소를 구글주소에 넣어봤자 오류만 나온다.

찜한 게스트하우스 근처에 유명한 병원이 있길래 그걸 기준으로 찾는다. 구글 지도에서 검색해보고 오프라인으로 지도를 받는다. 참고로, 현재 구글 지도 앱에서는 오프라인 다운로드 버튼이 사라졌다. 이거 진짜 꿀팁인데 검색에 "OK MAP"이라고 치면 메뉴가 없어도 오프라인 지도의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왜 이렇게 숨겨놨는지는 미지수다. 뭐 다 아는 내용일려나?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태국은 오프라인 다운로드를 막아놔서 못 써왔다. 하지만 미얀마는 가능하기에 무조건 받아놓는다.

지도를 봐도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표시를 해둔다. 와이파이 가능할 때 최대한 많은 정보를 찾아야 한다. 그 다음은 예약이다. 체크인은 완료했고 이제는 해우소에서 멀티테스킹을... 급하면 뭘 못하나, 다 하는 거지.

근심까지 깔끔히 씻어내고 해우소에서 숙소도 12달러로 예약을 끝냈다. 400바트 정도라 사실 저렴한 건 아니지만 미얀마 물가가 비싸다니 이 정도면 그래도 양호한 듯하다. 고객 리뷰도 좋아서 마음에 들고, 돈을 떠나서 첫날은 도미토리에서 묵어야지 정보를 얻는 것도 수월하다.

이제 앉아서 탑승을 기다린다. 10시 50분 비행기라서 10시 10분까지 오라더니 40분이 지나서야 보딩을 시작한다. 이건 뭐 이미 예상했었다. 한두 번 속나. 일주일 안에 공항을 4번째 왔더니 그냥 버스 정거장 온 느낌이다.


자 이제 보딩 시작이다. 비행기를 탑승하러 활주로를 이동하는 버스에서 카톡 하시는 중년 남성분을 목격한다. 여행자 같은 느낌은 아니고 그렇다고 비즈니스맨도 아니신 듯 한데 무슨 이유로 이곳을 찾으시는 걸까.


비행기에 탑승한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창가 자리 일려나? 자리를 보니 F열, 역시 창가 자리가 맞다. 뭐지? 근데 내 자리에 어떤 여성분이 이미 앉아있다. "거기 내  자린데요?"라고 하니 남친이랑 왔다고 앞자리랑 바꿔달란다. 뭐 어차피 둘 다 창가 자리라 상관없어서, 그러라고 한다. 알콩달콩 얼마나 가는지 두고 보자.

근데 진짜 4번 연속 오른쪽 창가 자리로 앉았다. 창가 자리 확률로 보면 (1/3)^4=1.23%, 오른쪽 창가 자리 확률로 보면  (1/6)^4=0.08%이다. 이건 더 이상 우연이라 생각할 수 없다. 빨리 티케팅해서 그런 것도 아닌 게 빨리 한적도 있지만 늦게 한적도 있다. 혼자 탑승하기 때문도 아닌 게 지금 비행기에서 창가자리가 아닌 옆자리 남자분도 혼자이고, 그 옆자리 남자분도 혼자이다.

그렇다면 남은 가설은, 내가 이 동네에서 꽤나 먹히는 매력이 있어서 여직원들이 계속해서 좋은 창가 자리를 줬다는 건데... 셜록 홈즈가 그랬던가? '모든 불가능을 제거하고 나면 아무리 아닌 거 같아도 그 가설이 정답이다'라고. 뭐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아 한 가설이 더 있군. 창가 자리를 모두 다 싫어해서 엿 먹으라고 준건지도. 어쨌든 다음 비행에서의 좌석이 또 기대된다.

내 옆자리에 앉은 분은 미얀마 분인듯 한데 비행기를 처음 타시는 거 같다. 태국에서 돌아가는 거니 처음은 아니고 최고 두 번째는 되겠다. 타자 마자 이미그레이션 페이퍼를 작성하시는데 이륙한다고 테이블을 접으라고 스튜어디스들이 얘기를 해도 못 알아들으신다. 내가 손짓으로 알려드리고, 헤매시길래 대신 접어드린다.

이제 이륙한다. 요즘 비행기를 하도 타다 보니 죽음 이 딴 거 생각도 이제는 안 든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옆의 아저씨가 바깥을 매우 보고 싶어 하신다. 난 뭐 어차피 항상 창가 자리 예약이니 슬쩍 보기 편하시게 몸을 뒤로 재껴드린다. 티케팅 아가씨들 마음은 알겠지만, 이런 초행 분들을 창가에 앉혀드리면 얼마나 좋으냐. 이기적인 사람들 같으니라고.


안전벨트 신호가 사라지자마자 테이블을 피고 글을 좀 쓰기 시작한다. 옆에 아저씨는 아까 쓰던걸 마저 쓰시는데 진짜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시는지 엄청 헤매신다. 안타까워서 내가 좀 알려드리니까, 오  잘됐다,라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나에게 여권과 함께 그냥 넘겨버리신다. 약간 당황스럽지만, 뭐 이 정도는 해드릴 수 있지. 아저씨 여권을 보고 서류를 채운다. 근데 이름이 성이 없고 이름만 있다. 미얀마에서는 계급 제도 같은 게 있어서 성을 가지기 힘든걸까. 미얀마에 대해 공부를 좀 해야겠군.

다 적어드리자 앞에 가족 두 명이 갑자기 또 자기들 서류를 들이민다. 아 설마 이거 다 써야 하나? 아저씨, 그래도 착하셔서 내가 적은걸 보고 가족 껄 쓰신다. 이분들의 스토리가 궁금하다.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을 따라다니며 기록하면 하나의 소설, 하나의 영화가 나온다. 그러하기에 사람들과의 만남은 또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이제 진짜 태국을 떠났다. 뭐 다시 돌아오겠지만 그래도 한번 마음의 정리를 해본다. 시차는 보아하니 똑같아서 굳이 시계를 조정할 필요 없다. 그럼 이제 일주일간의 결산을 좀 해볼까? 귀찮아도 꼬박꼬박 가계부 작성한 거는 써먹어야지.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부지런하다.


8일에 21만원을 썼으면 하루에 3만원 이하로 쓴 거니 나쁘지 않다. 물론 미얀마 물가가 더 비쌀 테니 여기서 아낀 거 거기서 더 쓰게 되겠지만 시작으로서는 괜찮다. 식비, 숙박비는 사실 더 아낄 수도 없었을 거고, 쇼핑비는 좀 아쉽다. 나는 확실히 쇼핑에는 소질이 없다. 출발하기 전에 플레이 스토어에서 '여행 가계부'로 검색해서 대충 깔아왔던 어플인데 생각보다 괜찮게 활용하고 있다. 환율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이 정도만 알아도 당연히 큰 도움이 된다. 참고로 숙소는 모두 포함된 거지만 이동은 미리 지불한 빌어먹을 에어아시아 아세안 패스로 다녀서 별도다.

지갑을 꺼내서 남은 태국돈, 7,966바트를 봉투로 옮겨 담고, 대신 봉투에서 922달러를 지갑으로 옮긴다. 옆에 미얀마 아저씨도 내가 지갑 정리를 하니까 따라하신다. 귀엽다고 하면 너무 실례 일려나. 그나저나 8일 동안 태국에서 쓴 게 5,400바트인데 너무 많이 남은 거 아닌가? 마지막 일정은 섬에서 할 예정이니 뭐 괜찮겠지. 그리고 다이빙을 만약 하게 되면 뭐 돈이 남을거라는 배부른 고민은 전혀 무의미해질거다.


환전을 얼마나 하지? 어제 여성분한테 물어보니 미얀마에서는 거의 다 달라를 받아서 환전할 필요를 못 느꼈다고 하는데 그래도 조금은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단 공항에서 100달러만 환전해야겠다. 미얀마는 위조지폐가 워낙 많아서 달라 지폐가 조금이라도 접혀 있거나 구겨져 있으면 바로 거부당한단다. 론리에도 '돈을 보물처럼 다뤄라'라고 쓰여 있라. 미얀마 돈은 환율이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해서 계산은 편하다. 그냥 1:1로 생각하면 대충 맞아 떨어진다.

배고프다. 12시고 그래도 국적기인데 먹을 거 안주나? 삼각김밥도 맛나게 먹을 자신 있는데. 내리면 숙소 가서 바로  밥부터 먹어야겠다.

이제 론리 보면서 공부를 조금 해야 하는데 영 졸리다. 진짜 제대로 한번 잔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난다. 이곳에서 15일은 이제 좀 여유롭게 다니고 싶다. 이 보름 동안은 비행기 일정의 압박에서도 드디어 자유롭다! 괜찮은 도시가 있으면 하루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것도 좋겠다.

그런데 만달레이에서 오래 머물 생각은 없고, 어디로 가지. 숙소 가서 정보를 좀 얻고 결정해야 하겠지만 일단 모두 가는 바간을 먼저 찍을지, 어제 추천받은 시포를 갈지 고민된다. 에이, 끌리는 데로 가자.



생각보다 금방 도착한다. 2시간이 걸렸다. 근데 기장 얘기를 들어보니 시간이 태국과 다르단다. 후딱 핸드폰, 손목시계, 카메라의 시간을 조정한다. 핸드폰 시간에서 양곤을 검색하니 안 나오고 랑군으로 나온다. 국제명 좀 통일시키지.

비행기 밖으로 보이는 광경부터 황량하다. 여기 분위기가 다른 곳들과 사뭇 다르다. 뭔가 설레면서 두근거린다. 여기서는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가게 될까. 그나저나 결국 기내식은 안 주는군. 나쁜 놈들.


비행기가 드디어 착륙하고 사람들과 함께 내린다. 야 여긴 또 신선하다. 내리는데 황량한 분위기가 확 느껴진다. 국제공항에 비행기가 우리뿐이다. 허허. 활주로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허름한 버스를 타러 간다. 버스에 올라타고, 현지 직원들이 하는 인사에서 이유 모를 따뜻함이 느껴진다.


출국 전 한국에서 비자를 받으러 갔지만 미얀마가 설날 연휴라 이주를 쉬는 바람에 결국 인터넷으로 비자를 발급받았었다. 원래 4일 걸린다더니 2만 원 더 내고 몇 시간 만에  발급받았었다. 내 돈... 여하튼 그래서 비자발급창구로 가야 하나 해서 비자 사무실로 가보니 그냥 출국 수속하는 데로 가서 처리하라고 한다.

출국 수속 대기 중인데 바로 앞에 사람이 일본 여행객이다. 몰골이 거지 같은 것이 나랑 비슷하다. 태국에서는 일본 배냥 여행객들이 잘 안보이더니 여기서는 바로 만난다. 짧은 일본어로 말 좀 걸어볼까 하다가 그냥 만다. 험한 인상의 아저씨이기 때문은 절대 아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세관으로 향한다. 여기는 모든 짐을 세관의 엑스레이 검사대로 통과시켜야한다. 다른 공항에서 의심스러운 일부만 집어서 검사하는 것과 다르다. 입국자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 따위는 믿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이다.


일단 200달러를 환전해야겠다. 공항이 환율이 좋다고 해서 환전소에 가본다. 나가는 길에 하나 있는데 활율이 1달라에 1060키얏이다. 시세를 모르니 일단 지나가 본다. 그리고 보통 이리 접근하기 쉬운데서 좋은 환율을 줄리가 없다. 역시 공항 외부쪽으로 가서 환전소 환율을 보니 1달라에  1081키얏을 준다.

200달러를 주니 검사를 하는데, 이 검사가 어마어마하다. 한 장씩 들어서 빛에 비춰보고, 얼룩을 살피고, 조금의 흔적도 넘어가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인다. 돈을 보물처럼 다루라고 했던 이유를 알겠다. 담당자가 백 달러 두 장 중 한 장을 좀 오래 살펴보더니 다른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본다. 뭐지? 한국에서 다 새 돈으로 받아온 거라 문제가 있을리가 없다. 다행히 무사히 넘어가고 첫번째 미얀마 돈을 드디어 받는다. 한국돈과 환율이 비슷해서 대략 28만키얏이 넘게 받았는데 만키얏짜리가 없나 보다. 두툼한 돈 뭉치를 준다. 아 100달러만 먼저 할걸 그랬나 싶다.

에어아시아 무료 셔틀을 타기 위해 서두른다. 에어아시아에서는 공항에서 만달레이 시내까지 무료 셔틀을 운영한다. 그래서 비행기표도 안 버리고 가지고 있다. 택시 타면 4000키얏 정도라니 무료 셔틀을 무조건 타야 한다.


이 나라, 뭔가 고요하다. 사람들 표정도 밝고 고요하다. 아직 서구 문물에 개방이 많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걸까. 확실히 자본주의는 발전을 가지고 오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성을 피폐시킨다는걸 다시 한번 느낀다. 이곳에서의 보름이 기대된다. 그냥 이곳에서 한 달을 했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에어아시아.


버스 좌석커버가 에어아시아 티셔츠다. 신박하군. 버스에 사람들이 꽤나 많이 탄다. 그래 나도 타니 누구든 타겠지. 빌어먹을 에어아시아. 아 그만해야지.

사실 공항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다른 게 아닌 남자들의 의상이다. 전통의상으로 보이는 치마 같은 걸 두르고 있다. 그만큼 서구화가 안되었다는 거겠지. 앉아있는데 아까 비행기에서 내 옆자리에 앉으셨던 미얀마 아저씨가 이제서야 버스에 탑승하신다. 뭐하느라 이리 늦게 오셨지? 눈인사를 나눈다.

차가 출발하고 항공권 검사를 한다. 직원이 돌아다니면서 나라를 물어보는데 아시아 사람은 한명도 안 보인다. 이곳까지 오는 여행자들은 한번 걸러져서 그런지 확실히 사람들의 포스가 다르다. 다들 인도 한바퀴 정도는 돌고 온 듯한 분위기다. 이번 여행 다닌 일주일간 유심히 보니, 배낭 여행객들은 유럽인들, 그중에서도 독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이는 거 같다.


나가는 가는 길이 시골길이다. 공항에서 나가는 길이 이렇다면 미얀마에서 제대로 된 길은 기대하기 힘들겠다. 아 배고프다... 지금 시각이 1시이지만 30분이 당겨졌으니 아직 신체시간은 태국 기준인 1시 반이다. 오전에 빵 두개 더 먹을걸 하는 후회가 든다.

차에 일본어가 여기저기 보인다. 얼핏 듣기로 일본 증고차가 최근에 다량 유입되고 있단다. 갑자기 생뚱 맞게 미생 생각이... 여하튼 원래 미얀마가 영국 식민지였어서 길이 좌측 통행인데 정부에서 몇 년 전에 구시대 산물 정리한다고 갑자기 우측 통행으로 일괄적으로 바꿨단다. 하지만 차는 일본에서 왔으니 운전석은 오른쪽에 있다. 그러니 마주치면 뭔가 어색하다. 가보면 괴랄하고 뭔 말인지 알 거라고 어제 그 영어 알아듣기 힘든 프랑스 청년이 얘기해줬었다.


공항에서 나가는 길이 그냥 황무지다.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밭도 안보인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에 생뚱 맞게 사원은 하나 둘 눈에 띈다. 다른 의미로 참 강렬한 첫인상이다.

여기 버스 직원이 버스 안을 돌아다니면서 여행자 하나하나마다 어디가냐 물어보면서 가는 방법을 자기가 아는데로 상세히 알려준다. 물론 예약이 없으면 자기 명함 주고 예약대행도 해주며 커미션도 받는 듯 하지만 그게 아니어도 그냥 추천도 해주면서 대략적인 정보도 알려준다. 이런 게 한 국가의 첫인상을 만든다. 상업적이긴 하지만 이런건 귀여운 상업성이다. 이 나라, 벌써 마음에 든다. 아 한 달 했어야 하는데, 빌어먹을 에...

중간중간 진짜 생뚱 맞게 서 있는 사원들이 계속해서 눈길을 끈다. 근데 또 생각해보면 통제를 우선으로 하는 나라에서 종교만큼 좋은 수단도 없다. 모든 통치자는 종교를 이용한다. 이 주제로 왠지 지금 너무 깊게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생각보다 오래간다. 배고프고 졸리다. 그냥 오늘 하루는 쉬어버릴까. 괜히 무리해서 아프면 안되는데. 한참 가니 이제 좀 도시 같은 곳이 나타난다. 여기가 미얀마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 맞나? 빠이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치앙마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시골의 느낌이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왜관읍내 정도?


셔틀에서 내리며 보름 후에 이곳에서 다시 셔틀을 탈 것을 대비하여 위치를 체크해둔다. 매일 아침 9시에 셔틀 버스가 이곳으로 온다니 나중에 이곳을 떠날 때 잘 찾아와 봐야겠다.

자, 이제 이곳에서의 첫 번째 미션을 수행해보자. 미얀마에서의 첫 번째 게스트하우스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구글맵에서 오프라인 지도를 진작 다운받아 놓았으니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와이파이가 안되도 GPS는 되기 때문에 어려울게 없다.


그런데 덥다. 너무 덥다. 그리고 생각보다 멀다. 지금까지 걸은 것 중에서 난이도가 상급이다. 아까 버스 직원이 20분 정도 걷으면 된다고 햇지만, 이게 쉬운 20분이 아니다. 꾸역꾸역 걷고, 다리를 넘고, 신호등 없는 길을 주저하며 건넌다. 그 와중에 외국인은 한 명도 못 봤다. 다 어디 숨어있는 거지?


프랑스 친구가 차에 대해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이게 무의식적인 건데 우측통행인데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으니 뭔가 부자연스럽다. 실제로도 내가 알기로는 운전석끼리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 마차시대부터 좌측통행은 운전선을 우측에, 우측통행은 좌측에 배치했다고 한다. 이거 적응 좀 필요하겠군. 게다가 태국에서 실컷 좌측 통행에 익숙해졌더니 이곳에서는 또 다시 우측통행이다. 햇갈리게시리... 젠장.


그래도 안 헤매고 잘 찾는다. 찌는 듯한 더위에 몸은 녹초가 다 됐지만 뿌듯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맞아준다.

리셉션에 있는 스태프, 이가 좀 누렇긴 한데 첫인상이 매우 친절하다. 조금 과할 정도로 친절하다. 이건 친절하다기 보다는 생활에 묻어있는 배려라고 해야겠다. 조식 포함 12달러에 아고다에서 예약했는데 워크인 하면 얼마냐고 물어보니 12달러 같다고 얘기해주며, 나는 이미 예약했으니 여기서 돈은 안내도 된다고 이미 알고 있는 얘기를 거듭 강조한다. 같은 금액이면 커미션 생각해서 직접 내는 쪽으로 유도하고는 하는데 여기는 그런 상업적인 냄새가 전혀 안 난다. 이름을 체크하고 수속을 끝내고서는 침대로 안내한다. 그리고 물 한 병을 가져다준다.

방에서 5분 정도 쉬고 나온다. 역시 시설은 방콕의 게스트하우스들과 비교가 안된다. 이건 뭐 예상했던 거니까... 도미토리 방도 남녀 혼숙이 아니고 별도로 되어 있다. 이건, 좋은 거겠지? 내려오는 길에 컴퓨터를 하고 있는 여성분을 한분 만난다. 너무 배고파서 식당이 어디 있냐고 한번 슬쩍 물어보니 여기 사방이 식당이라고 하며 웃는다.

잠시 대화를 나눠본다. 호주 사람이라길래, "억양 듣고 그런 줄 알았어요"라고 대꾸해준다. 나는 한국 사람이라고 말씀드리니, 아쉽다며, 방금 한국에서 3년간 살았던 서양 여행자 한명이 떠났다고 한다. 난 30년 살았다고 대답 해주며 서로 웃는다. 별거 아닌 얘기에도 참 잘 웃는다.

일단 밥을 먹어야겠기에 1층으로 내려온다. 아까 그 스태프에게 식당 추천을 부탁하니 갑자기 자기를 따라오라며 나를 끌고 밖으로 나온다. 이거 뭐 같이 갈 태세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하나만 알려달라니까 이쪽에 뭐, 저쪽에 뭐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나하나 다 알려준다.


일단 알겠다고 하고 그냥 길 건너편에 있는 식당을 들어간다. 근처에 유명한데가 많다고 하긴 했지만 지쳐서 헤매기도 싫고, 첫 식당은 그냥 아무 곳이나 한번 들어가보고 싶다. 들어서 보니, 영어 메뉴판도 없고, 하나 있는 직원도 당연히 영어를 못해서 손짓 발짓으로 점심 먹으러 왔다고 표현한다.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니 뷔페같은 시스템인가 보다. 직원 밥을 그릇에 담고 반찬을 두개를 고르라고 눈짓으로 얘기하기에 난 잘 모르니 알아서 골라달라고 나도 눈짓으로 얘기한다. 내 말에 수줍게 웃으면서 2개를 골라서 그릇에 담아준다. 이 곳 사람들 웃음에는 뭐가 있다. 단순히 표현하자면 티 없는 웃음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에는 토핑을 고르라기에 역시 알아서 골라달라고 한다.

자리에 앉으니 무우국 비슷한 스프와 각종 야채를 가져다 준다. 드디어 앉아서 점심을 한입 떠 먹는다. 아까 그 청년은 구석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더니 밖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른다. 흥얼거림이 아니라 내 신경을 전혀 쓰지 않은 채 우렁차게 부른다.


설거지를 다 하더니 이번에는 뭔가를 가지고 가게 앞으로 나간다. 그 뭔가가 쌀이었나보다. 가지고 온 쌀을 사방에 펼쳐 뿌리기 시작한다. 먹이를 포착한 비둘기들이 사방에서 마구 몰려든다. 그 청년은 한 통을 다 뿌리고 나서야 다시 들어온다.

이걸 지긋이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눈에 고인다. 이게 무슨 추태냐 싶어서 참으려고 하는데 잘 안 참아진다. 나도 모르는 감정이 안에서 확 밀려 올라온다. 나는 이런 걸 원했었나 보다. 지금은 사라진 인간다움, 정, 행복.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일상 속에서 나오는 이런 모습.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그 무엇인가가 이 청년의 짧은  속에서 느껴진다.

나에게 여행은 어딘가를 가서 뭔가를 보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들의 사이에 들어가서 그들의 마음과 생활을 느끼는 거다. 지금까지 일주일 동안 느끼지 못했던 것을 여기 미얀마의 두 번째 대도시에서 느낀다. 대도시가 이럴진대 다른 곳은 어떨지 너무 기대된다. 아, 빌어먹을 에어아시아!


뭔가 식당에 앉아서 거리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사람들이 왜 미얀마, 미얀마 하는지 알겠다. 아직 때 묻지 않은 몇 곳 안남은 장소, 모두가 해맑고 모두가 아름답다.

물론 한 시간 여의 짧은 인상이기에 다니다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 나라는 이곳이 처음이다. 밥은 사실 맛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충격이 커서 신경 못 쓰면서 그냥 먹었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1200키얏이라고 해서 주고 나온다. 고맙다가 이 나라 말로 뭐였는지 순간 까먹어서 영어로 물어보니 당황하면서 매우 순박한, 어쩔 줄 모르는 민망한 미소를 짓는다. "How do you say Thank You"에서 '땡큐' 부분만 알아 들은듯 같이 땡큐라고 얘기를 할 뿐이다.

알겠다고 하고 웃으며 돌아서니 또 다시 그 순박한 어쩔 줄 모르는 미소가 나온다. 숙소로 향하는데 뒤에서 그 청년의 우렁찬 노랫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감정이 잘 가라앉지 않는다. 일단 숙소로 돌아와서 게스트하우스 옥상을 올라간다. 여기, 인도 자이살메르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타이타닉 게스트하우스 생각이 난다. 옥상에 올라가니 아까 그 호주 여성분과 처음보는 남자분이 같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자리에 앉아서 이들과 잠시 대화를 나눈다. 내가 방금 느꼈던 감정을 공유하니 모두가 미얀마의 사람을 보기만 해도 감동이 온다는 사실에 격하게 동의한다. 남자분은 여기가 이러면 지방은 어떨 거 같냐고 되묻는다. 아 진짜 기대된다.

남자는 얘기해보니 영국인이다. 결국 물어보거야 만다. "두유노 지숑팍?" 집이 맨체스터라고 대답해준다. 와! 신기하군. 지송팍이 한국에서 유명하냐고 해서 정치 나가면 뽑힐지도 모른다고 돌려서 얘기해준다. 이 친구 맨체스터 경기장 근처 슈퍼에서 일했다는데 그때 호날두와 베컴을 모두 봤단다.


한국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남녀 둘 다 최첨단 도시의 이미지라고 대답한다. 어제 서양애들도 그랬는데, 우리나라 이미지가 그런가 보다. 나쁘진 않은데, 또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첨단도시인가 싶다. 초고속 인터넷과 삼성의 도시겠지.

잠시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다 그냥 내가 그쪽 테이블로 넘어간다. 영국 훈남, 내일 떠난다니, 이런 애들한테는 정보를 쏙쏙 뽑아야 한다. 바간, 컬로우, 인레 코스를 얘기한다. 어제 여자분도 그러고 보니 저 코스였던 거 같다. 컬로우에서 인레까지 넘어가는 트래킹이 인상에 많이 남나 보다. 전부 다 그 얘기를 꼭 한다.

호주 여성분은 떠나고 영국 남정네와 둘이 남아서 얘기를 좀 더 나눈다. 닥터 후 얘기도 하고, 러브 액츄얼리, 어바웃 타임 등 내가 아는 영국과 관련된 거는 모두 다 얘기한다. 이 친구는 4개월 여행하고 이곳에서 다음으로는 베트남으로 넘어간단다. 그동안 네덜란드, 호주 여성분들하고 같이 동행으로 다녔단다. 그렇겠지. 젊은 20대에 영국식 영어, 그리고 훈남, 좋을 때다. 나도 너 같은 때가 있었단다.

외국인들은 당연히 남북한에 관심을 많이 보인다. 남북한이 왜 갈라졌냐는 질문에 이차 세계대전, 미국과 소련의 관계, 우리나라의 전략적인 지리적 중요성을 설명하게 되고, 일본과의 관계도 얘기해준다. 근데 그러고 보니 미얀마도 영국의 식민지였었잖아. 현지인들은 영국인들한테 괜찮냐고 물어보니 아무도 신경 안 쓴다고 한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건 문화 차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발전 정도가 너무 달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침입 당시 민중들의 계몽 정도? 모르겠다.

여행 끝나면 호주로 1년 워킹을 계획 중이란다. 한국 사람이나 외국인이나 결국 코스는 비슷하군. 장기여행 후에 워킹. 이 친구는 엄마가 호주 사람이라 아예 사는 것도 생각 중이란다.

한 시간 정도 대화를 하다 갑자기 내일 바간으로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만델레이는 어차피 마지막 돌아갈 때도 와야 하는 곳, 어설프게 다니느니 마지막에 와서 이곳에서 지내면서 좀 쉬다 가야겠다. 여기 옥상 티비에 디빅 플레이어가 설치되어 있다. 영국 훈남이 나중에 저녁에 여기서 무비 파티를 하자고 해서 난 꼭 참여하겠다고 얘기하고 1층으로 내려간다.

그 엄청 친절한 스태프는 로키라고 불린다. 이가 안 좋은 거 때문에 그렇다는데 그러면 그리 부르면 안 좋은 거 아닌가? 여하튼 그 친구를 찾아간다. 일층에 가니 그 친구는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내일 바간 가는 표 예약 좀 하고 싶다고 하니 알겠단다. 9000키얏, 그리 비싸지 않아서 바로 지불한다. 보통은 흥정을 좀 하지만 여기서는 왠지 그럴 필요성을 그다지 못 느낀다. 내일 오전에 아침을 먹고 10시 버스로 출발한다. 5시간 걸리니 오후 3시쯤 도착, 대충 숙소 잡고 할 시간은 날듯하다. 숙소도 추천을 받았는데 좋다기보다는 여행자들이 대부분 그쪽으로 간단다. 정보 얻기도 좋고 동행 구하기도 좋다고 해서 한번 가볼까 싶다.

1층에 주인 포스를 풍기는 분이 내 얘기를 듣더니 Hsipaw까지 가는 10시간 기차도 추천한다. 그게 그렇게 아름답다고 한다. 귀가 얇은지라 갑자기 그쪽으로 올가갈까 싶다가 그냥 원래 계획으로 돌아온다. 봐서 바간에서 돌아온 후에 갔다 오는 것도 괜찮지 싶긴 한데, 15일 동안 여기저기 다니기는 좀 애매해서 고민은 된다. 뭐 일단 바간으로 가서 고민해보자. 사람들 얘기 들으면 또 달라지겠지.

옥상에 빨래 널어놓는 공간이 있다기에 서둘러 샤워를 간단히 하고 빨래를 한다. 항상 입는 바지 빼고 싹 다 빨아버린다. 그래 봤자 옷 3개가 전부이지만. 옷은 옥상에 넣어놓고, 속옷은 그래도 눈치 보여서 침대 옆에 널어놓는다. 속옷, 내일 까지 마르려나.


이제 할게 없다. 뭐 나가기도 그렇고, 그냥 오늘 하루는 쉬기로 한다. 옥상에서 차를 한잔 타서 앉아있는데, 허, 이 차, 고수를 우려낸 차인가 보다. 희한한 향이군. 뭐 나름 맛있다.

호주 여성분 올라오더니 영국 훈남과 한참 얘기를 하더니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나간다. 나한테도 같이 가겠냐고 물어보는데 그냥 있겠다고 한다. 오늘은 진짜 그냥 쉬다가 저녁이나 먹고 일찍 자고 내일을 준비하고 싶다. 미얀마는 더위가 문제다. 덥지만 않으면 참 여행 다니기 좋은 곳 같다.

나도 혼자 옥상에 있기 뻘쭘해서 방으로 돌어온다. 갑자기 피곤함이 격하게 올라온다. 침대에 누워있다가 살폿이 잠든다. 뭔가 이곳 와서 마음이 편안해져서 그런지 잠도 잘온다. 7시까지 꿀잠을 잔다.

슬슬 배가 고파서 일어난다. 밥 먹고, 현지 맥주도 작은 거 하나만 먹어보고 싶다. 숙소에는 나 혼자다. 가방은 많은데 다들 어디 간 거지? 하긴 뭐, 혼자가 편하다. 이제는 일행을 그다지 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태국에서와는 다르게 여기서는 한국 사람 만나면 꽤나 반가울 거 같다. 혹시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다닐 수도 있겠다 싶다.

일단 밑으로 내려간다. 아까는 밥만 먹고 왔기에 이번에는 나가서 천천히 돌아본다. 바람이 많이 분다. 하늘을 보니 비가 올 구름은 아니고 그냥 바람인 듯 싶다. 모래가 좀 끼여있는 듯한 게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모래 폭풍인가 싶기도 하다. 미얀마에도 모래폭풍이 있던가?


좀 돌아다녀보니, 이 동네에는 일단 외국인이 전혀 없고, 둘째로 영어가 안 보인다. 몇몇 호화로운 관광객 상대하는듯한 곳 빼고는 영어가 전혀 없다. 또 하나 눈에 뜨이는 거는, 이들이 태국인들보다는 훨씬 우리 한국인과 닮았다. 약간 더 검은 정도? 그렇다면 나는...? 큰일이다. 옷이라도 관광객처럼 하고 다녀야 하나?

돌아다니다 다 비슷비슷하길래, 일단 숙소에서 가까운 곳 중에서 가장 큰 곳에 들어가본다. 자리에 앉으니 중학생 정도 되는 꼬마 아이가 오더니 현지어로 뭐라 뭐라 한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여기서는 진짜 내가 봐도 현지인과 구분이 안된다. 영어로 메뉴 달라고 영어로 얘기하니 아까 점심에 그 친구가 지었던 표정을 짓는다. 노여사가 가끔 회사에 영어 전화 올 때 짓는다는 그 표정. '이거 뭐야. 어쩌지?'

그 아이, 급하게 둘러보더니 누군가를 부른다. 아, 얘가 영어가 좀 되나 보다. 다행이다. 근데 얘기해보니 영어긴 한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영어 같기도 하고 아닌거 같기도 하고... 일단 메뉴를 달라니 메뉴 자체가 없단다. 어? 그럼 아까 점심이랑 같은 시스템인건가? 뭐라 뭐라 하는데 도통 못 알아듣겠지만 대략 눈치로 때리니 2개를 고른다 뭐 이런 거 같다. 그럼 시스템이 같네. 여기 현지 서민 음식들은 다 이런가?

알겠다고 하고 같이 따라가서 두개를 고른다. 내가 뭘 아나, 그냥 눈에 들어오는 거 아무거나 고른다. 어차피 뭐든 잘 먹으니 사실 상관없다. 그리고 앉아있으니 아까 그 처음 꼬마가 조그만 컵을 준다. 차 따라 마시라는 거군. 앞에 차가 있길래 따라 마시며 기다린다.


여기 프로레슬링이 유행인가 보다. 다들 티비 앞에 앉아서 미국 프로레슬링을 보고 있다. 영어도 못하고 그렇다고 미얀마어로 자막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초집중이다. 직원들이 내가 외국인인걸 누가 얘기했는지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현지인 같은데 왜 외국인이냐고 사기 쳐, 이런 눈빛 같기도 하다.


조금 기다리니 음식이 나온다. 아까랑 비슷하게 카레볶음밥 같은 거와, 방금 전에 고른 두개 반찬, 각종 야채, 그리고 다른 밑반찬과 된장국 같은 게 나온다. 먹어보니 사실 특별히 맛있는 그런 맛은 아니다. 국이 진짜 된장국 비슷한 거와, 밑반찬에 멸치볶음, 그리고 심지어 우리나라 갈치젓갈과 흡사한 게 있다는 것이 다소 특이하다. 일종의 백반인데, 인도에서 자주 먹었던 탈리와도 조금 비슷한 느낌이다.

여기 일하는 아이들은 뭐 이리 신날까? 생각해보면 저 나이에 일한다는 게 사회적 이슈로 볼 수도 있지만 얘네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안 든다. 자기들끼리 웃으면서 돌아다니며, 걷는 걸음마저 즐거워 보인다. 이건 진짜 글로 잘 표현 안되는데, 좀 상투적이지만 '티 없다', 이 말이 가장 어울리는 거 같다.

아까 점심 때는 사실 뭔가 격하게 감정적이 돼서 과하게 감정이입을 했었지만 여행 다닐 때 또 그런 건 안 좋다고 생각한다. 이들한테는 삶일 텐데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뭔가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하는 것은 과하다. 이곳도 좀 냉정하게 지켜보면 길에 이상하게도 신체불구자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식당에서 구걸하는 거지들도 꽤나 많이 보인다. 사람 사는 거, 유토피아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거고, 반대로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거겠지. 그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잃을 용기가 있느냐, 이게 중요하다.

딱히 맛이 있진 않지만 앞으로 한동안 먹게 될 이 이름 모를 밥, 익숙해져야겠다. 다 먹고 일어나면서 가격을 물어보니 또 뭐라 뭐라 하는데 대충 1400키얏임을 캐치한다. 키얏이 원이랑 비슷해서 자꾸 원으로 생각하게 된다. 뭐 사실 그래도 상관없고.

아무래도 이곳 언어부터 공부 좀 해야겠다. 태국이야 사람들이 그래도 영어로 숫자 정도는 할 줄 알고, 아니어도 영어메뉴판이라도 비치되어 있지만 여기는 무슨 외국인을 외계인 보듯이 하니 언어를 모르면 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들에게 영어 하기를 바라는 게 사실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여행 온 사람이 배워야지. 숫자와 기본적인 단어를 찾아서 오늘 저녁이랑 내일 버스에서 달달 외워야겠다. 아 나 암기과목에 약한데...


밥 먹고 나와서 이 근처에 슈퍼마켓이 있다고 들은 듯해서 한번 쭉 돌아본다. 어두워졌지만 워낙 아무도 날 신경 안 써서, 그리고 사람들이 워낙 순해서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근데 슈퍼는 안 보인다. 일단 숙소 옥상으로 가볼까?

들어와보니 또 들어오는 사람 나가는 사람이 많다. 여기는 외국인이 이리 많은데 다 어디로 퍼지기에 길에서는 하나도 안보이는 걸까? 아 여기서는 진짜 한국인 하나 만나고 싶다. 진짜 친해질 수 있겠다. 바간 가면 있겠지?

헥헥 거리며 옥상으로 올라가니 잠겨있다. 뭐지? 열리면 열리긴 한데 뭔가 불안해서 다시 일층으로 내려간다. 스태프들한테 물어보니 지금 모래 바람이 심해서 임시로 닫았단다. 흠 내 맥주... 슈퍼를 물어보니 5분 거리라는데, 사와도 먹을 데가 없다.

에이 그냥 오늘은 하루 정리를 하고 내일부터 제대로 나잇라이프도 즐겨봐야겠다. 옥상에 들어가도 된다고 해서 다시 헥헥 거리며 옥상까지 올라 와서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의자 하나를 펴서 자리에 앉고 하루 정리를 글과 함께 해본다.


미얀마, 첫 느낌은 아주 좋다. 여행자들도 다 물어보니 인도는 기본으로 다녀온 친구들이라 그런지 여행자로서의 마음이 열려 있는 것이 느껴진다. 사실 현지인들이 친근하면 여행자들도 친근해지고, 현지인들이 외국인을 관광객 대하듯이 하면 그들도 관광객이 된다. 주는 만큼 오는 거다. 이제부터의 보름이 매우 기대된다. 오늘 낮처럼 감정 과잉하지 않고 투박하게 내 자신을 찾는 15일이 되었으면 한다. 아 여기 옥상에 모기가 너무 심하다. 그런 이유로,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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