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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Jul 08.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7

ChiangMai, Thailand to Bangkok, Thailand

저렴한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수요 공급의 법칙을 무시하지 말자. 여행 다니면서 항상 생각했던 부분인데 오늘 다시 한번 깨닫는다.

200바트, 이번 여행에서 가장 저렴하게 잡은 방이다. 마이네 리버사이드가 300바트였으니 그거에 비해도 훨씬 저렴하다. 어제 방에 들어올 때만 해도 이런 노다지가 왜 안 알려졌을까 생각했건만...


일단 창문을 열수가 없다. 안쪽 방충망이 망가져서 테이프로 붙여놨는데 이걸 뜯고 밖의 창문을 열면 다시 봉합하는데 문제가 생긴다. 에어컨이 없는 팬방에서 창문을 못 연다는 건, 찜질방에서 선풍기 하나 틀고 자는 거와 같다.

그나마 홈매트 덕분에 모기의 습격은 피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꿀팁인데, 더운 지방 갈 때 홈매트를 들고 가면 의외로 잘 이용된다. 동남아 모기라고 다를 거라 생각하지만, 그냥 모기는 모기일 뿐이다. 이거 틀어놓고 모기 물린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이 방의 또 하나 문제는 수압이다. 아침에 상쾌하게 근심을 해소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물을 내리는데, 안 내려간다. 막힌 게 아니라 수압 때문에 안 빠진다. 카페에서 6년간 일하면서 막힌 병기는 수도 없이 뚫어봐서 이런거는 내가 잘 안다. 이건 막힌 게 절대 아니라 수압이 부족해서 못 내려보내는거다. 아... 이대로 가긴 싫은데. 결국 4번인가를 시도 후 다행히 내 분신은 터널 저 너머로 다행히 넘어보낸다.


그러고 보니 숙면을 취한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난다. 도미토리 가면 사람들이 신경 쓰여서 잘 못 자고, 싱글룸은 또 뭔가 항상 변수가 생겨서 못 잔다. 잠만 잘 자면 이제 다른 건 다 적응된거 같은데, 이게 쉽지가 않다. 하긴 사실 서울에서도 잘 못 잔 건 매한가지다.

오늘은 방콕으로 가는 날이다. 빌어먹을 에어아시아 때문에 미얀마로 넘어가기 전에 방콕에서 강제 1박을 또 하게 됐다. 카오산로드는 저번에 갔기에 다시 가기 싫고, 어디로 가지? 어제 저녁부터 아침까지 고민이다. 일단 태사랑 지도를 펼쳐 놓고 동선을 확인해본다.


지도에서 예상치 못한 멋진 문구를 발견한다. 확실히 태사랑 사람들, 여행을 아는 사람들이다. 진짜로 여행은 남이 가는 길을 가는 게 아니다. 설사 물리적으로 같은 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나만의 길과 나만의 추억, 나만의 스토리를 만드는 거라 생각한다.

근데 그래서 어디를 가지? 좀 찾아보니 아무래도 왕궁과 사원이 유명하다. 소수의 몇 명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하여 만든 왕궁은 원래부터 일말의 관심도 없었고, 사원은 그래도 한번 가볼까 싶다. 태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원 하나 정도는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두개의 사원이 유명해 보이는데 그냥 땡기는 왓 아룬을 가보기로 한다. 별 이유는 없고, 그냥 높다고 하니 계단을 올라가서 위에서 뷰도 보고, 야경이 보이는 곳에 앉아서 책도 좀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래도 시간이 난다면 비행기에서 그 사원의 역사에 대해서는 공부를 좀 해놓아야겠다.


오늘은 이동을 좀 많이 할지도 모르기에, 오랜만에 운동화로 갈아 신는다. 슬리퍼는 가방 안으로 들어간다. 너는 미얀마 가면 나오너라. 그리고 짐을 싸기 시작한다. 싼다기 보다는 언제나 그렇듯이 닥치는데로 가방 안에 쑤셔 넣는다.

다 싸고 나가 볼까 하는데 복대가 안 보인다. 허... 갑자기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 배낭여행자의 쿨한 패션이 아님에도 내 지갑과 내 여권은 소중하기에 항상 복대를 차고 다녔는데 이게 안 보인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 있는 여권이 문제다.

짐을 다시 다 쏟아붓는다. 없다. 언제지? 어디서 잃어버린 거지? 과거 행적을 뒤집으며 화장실까지 싹 다 뒤진다. 분명히 어제 방에 올 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아닌가, 빠이에서 잃어버렸나? 빠이까지 왕복 6시간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눈 앞이 깜깜해진다.

오버하지 말자. 마음을 안정시키고 차근차근 다시 찾아본다. 침대 밑을 보고 배게를 들춰보... 베개 밑에 복대가 고요히 잠들어 있다. 덕분에 아침부터 운동 잘 했다.

이제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선다. 또 다시 어깨에 7.5키로를 메고, 오늘도 공항까지 무사히 가보자. 지금 시간이 8시이고, 10시 10분 비행기이니 아침을 먹고 출발하면 적당할 듯하다. 내려 오면서 어제 그 귀여운 늙은 개한테 인사를 하고 싶은데 안 보인다. 아쉽다. 프런트에 있는 분께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선다.


운동화가 뭔가 낯설다. 이건 여행 패션이 아닌데... 어제 산 선글라스를 꺼내서 껴본다. 이 200바트짜리 가짜 레이번 선글라스를 끼면 뭔가 스스로 멋있어졌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물론 착각이겠지.

조금 내려가다 테라스가 예뻐 보이는 레스토랑이 보여서 들어간다. 여기서 밥도 먹고, 오늘 숙소 갈 위치라도 대략 찾아 봐야겠다. 숙소 예약은 안 하지만 그래도 방콕이 빠이처럼 작은 동네도 아니니 어느 구역으로 갈지정도는 찾아놔야 한다.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메뉴를 본다. 아.. 비싸다. 내가 올 곳이 아닌가? 그래도 와이파이도 잘 터지고 자리도 마음에 들어서 주문한다. 커피까지 해서 135바트이다. 어제 숙소가 200바트인걸 생각하면 사치긴 하다.

주문받는 아이가 인상이 좋다. 그리고 많이 친절하다. 이제 떠나냐고 해서 오늘 방콕 갔다 내일 미얀마로 간다니 자기가 미얀마 사람이라며 반가워한다. 호, 이건 정보를 얻을 기회! 만약 미얀마에서 한군대만 간다면 어딜 가는게 좋냐고 물어보니 바간이나 인레호수란다. 미얀마를 대표하는 너무 유명한 두곳이다. 다 아는 정보라서 좀 식상하긴 하지만 사실 그거 말고 나올 대답이 있나 싶다.



오믈렛과 빵, 별거 아니지만 뭔가 먹음직스럽게 잘 나온다. 거기에 커피 한 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아메리칸식 브레크퍼스트를 먹는다. 와이파이를 연결해서 서울에 있는 사람들과 카톡도 하고 숙소 검색도 하면서 먹다 보니 이제 슬슬 출발할 시간이다.

아까 그 미얀마 청년한테 여기서 공항까지 얼마 줘야 적당하냐고 물어보니 100바트란다. 그럴 리가. 훨씬 먼 공항에서 버스정거장까지가 100바트였는데. 50바트에 가야겠다 생각하며 길을 다시 나선다.


치앙마이의 메인 거리는 어제와는 딴판이다. 이 조용한 거리가 어제 그 화려한 곳과 같은 곳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무엇보다 어제 그 난리를 쳤음에도 길이 깨끗하다. 매주 하는 행사다 보니 시스템이 잘되어 있나 보다.

쌩타우 맞나? 몇번 탔던 그 빨간색 미니버스가 지나가길래 공항까지 얼마냐고 물어본다. 100바트란다. 허, 진짜 그런 건가? 아닐 거 같은데. 일단 보내고 다음에 오는 미니버스를 잡고 다시 물어본다. 또 100바트란다.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약간 표정 관리하면서 말도 안된다. 50바트에 가자, 그러니 잠깐 고민하더니 그냥 타란다. 그럼 그렇지. 여행 다니면서 과하게 디스카운트를 외치는 짓은 진상이라 생각하지만 현지인에 비해 바가지를 쓰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관광객을 다 호구로 보는 거 자체가 잘못이다. 이 부분은 사실 한국도 마찬가지지.



쌩따우 뒷자리에 앉아서 공항으로 향한다. 이제 치앙마이를 떠나는구나. 이곳은 하루 밖에 있지 않았기에 그다지 감상이 없다. 어느 한 곳을 하루 보내고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는 거는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 예의가 아니다. 나에게는 조금 힘겨운 도시였지만 분명히 다른 경험으로 왔다면 다른 매력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20분 정도 걸려서 공항에 도착한다. 약속했던 50바트를 기사님한테 드리고 공항에 들어선다. 하도 공항을 자주 오다 보니 이제는 그냥 내 집처럼 편안하다. 어쩌면 어제 잔 숙소보다도 공항이 심적으로는 더 편한지도 모르겠다.

공항으로 들어서서 헤매지 않고 바로 셀프 체크인을 찾는다. 어차피 짐 부칠 것도 아니니 이게 편하다. 가는 길에 가방 무게를 재는 저울이 또 보인다. 다시 한번 재볼까? 근데 사실 달라질게 없다. 그래도 왠지 모를 기대를 하며 가방을 올려본다.



7키로! 오, 뭐지? 너 나 몰래 다이어트했니? 버린 것도 없고 뺀 것도 없는데 이상하다. 로션 좀 바른 게 문제가 될리는 없고 말이지. 생각해보니 운동화를 빼고 슬리퍼를 넣었다. 그 차이가 500그람인가보다. 아 진작 이럴걸 그랬다. 오늘은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겠다.



셀프티케팅을 간단하게 마치고 보딩 하는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체크인 수속대로 향한다. 쉰다 해도 비행기가 떠나는 게이트 앞으로 가서 쉬어야 마음이 편하다. 가방을 엑스레이 검사대에 올리고, 복대를 벗고, 핸드폰, 카메라ㅇ 넣는다. 근데 얘네는 공항 들어올 때 체크하고 여기서 꼭 또 다시 체크한다.

금속탐지기를 잘 통과하고 짐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내 가방이 나왔다가 다시 검사대로 들어간다. 그리고 스태프들이 화면을 보면서 뭐라 그런다. 뭐지? 문제 될게 있나? 그러더니 스태프가 오더니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라고 지시한다.

뭔가 문제가 있는걸까? 가방을 올려놓으니 열어서 짐을 빼란다. 아 이거 민망한데. 오전에 쑤셔놓았던 빨래 안 한 속옷과 옷들이 주루룩 나온다. 내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예쁘게 짐을 쌌을 텐데. 스태프가 세면도구통을 꺼낸다. 아 이것도 문제가 될 수 있겠구나. 꺼내서 보더니 클렌져인가 얼굴 닦는 비누를 버려야 한단다. 아 그거? 버려버려. 어차피 한번도 안 썼다. 왜 가져왔나 싶다.

그러더니 가방 안에서 또 검은 봉지를 꺼낸다. 아! 이건 문제다. 잠시 잊고 있었던 소주 3병! 이거 뜯지도 않은 건데 문제가 될런가? 생각해보니 원칙적으로 100미리 이상이면 문제인데, 올 때 아무 문제가 안돼서 그냥 잊고 있었다.

스태프가 봉지에서 물건들을 꺼내길래,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거 한국 소주예요, 뜯지도 않았어요" 라며 호소한다. 사실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아닌 건 아닌 거겠지. 급하게 라벨을 확인해보니 하당 200미리다. 아 진로야 진로야. 이왕이면 100미리로 만들 것이지. 누굴 탓하리.


그렇게 나에게 3가지 추억을 가져왔어야 했던 소주 3병은 강렬한 하나의 아픔을 남기고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애들아 안녕. 이건 너희 잘못이 아닌 내 잘못이야. 앞으로는 100미리씩 나눠서 가지고 오든가 할게. 이럴 줄 알았으면 싱가포르 애들하고 먹을걸 그랬다. 엊그제 삼겹살 파티에도 훌륭했을 거다. 좋은 교훈을 얻는다. 아끼면 똥 된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언젠가는 버림받을 애들이었다. 상황상 짐을 부칠 수도 없고 이번에 안 걸렸다면 미얀마 갈 때라도 걸렸을 거다. 그냥 내가 꼼꼼하지 못했던 거지. 그래도 다행히 내가 애정 하는 로션은 뭐라 안 해서 통과됐다. 근데 왜 걔는 되는 거지? 걔도 100미리는 넘을 테고, 무엇보다 개봉을 한 애인데 말이다. 치약도 뭐라 안 하면서. 쳇.


포기하고 들어와서 7번 게이트 앞에 자리 잡는다. 이번에는 표에 게이트 표시가 잘 되어 있다. 보딩까지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서 역시 키보드를 피고 자리를 잡는다. 이젠 이런게 워낙 익숙하다.

다리에 모기 자국이 수두룩하다. 어제 로비에서 글 올리느라 물린 거, 오늘 점심 먹으면서 물린 거, 그리고 그 이전에 수없이 물린 자국들이다. 그런데 물린만큼 몸도 적응했는지 희한하게 물린 후 몇 시간 지나면 그다지 간지럽지가 않다. 사람도 모기에 적응하나 보다.

생각해보면 자연의 신비가 참으로 놀랍다. 모기가 사람의 피를 먹어서 생존하고, 그 모기는 그 위의 포식자에게, 또 그 포식자는 그 위의 포식자에게, 그리고 결국에는 최상위 포식자인 사람에게 돌아온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며 균형이 유지된다. 로봇의 이족 보행에 대한 균형을 만드는 간단해 보이는 것도 제어공학 입장에서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변화무쌍한 자연이 균형을 유지하며 무너지지 않는 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기에 그렇다고 이런 경이로움 앞에서 신의 뜻을 논하지는 않는다.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나도 한때는 종교인으로 살았던 적이 있다. 어렸을 때는 신부님 옆에 서 있는 복사 역할도 꾸준히 하면서 새벽 미사 때 졸다가 미사 중에 넘어진 기억도 있고, 대학교 가서는 전례부를 하며 미사의 사회 담당을, 군 제대 후에는 정신지체 장애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주는 선생님 역할을 4년간 수행하기도 하였다. 보통 사람들이 그런데 왜 이제는 종교를 안 믿냐고 물으면 "진화론을 믿기 시작해서요"라고 답해준다.

하지만 정확히 얘기하자면 인간 중심의 가치관을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과학을 공부하는 학도이자 종교인으로서 진화론과 창조론의 공존이 가능하다 믿었다. 시간의 개념은 상대적이기에, 창세기에 나오는 '첫날, 빛이 생겼다'의 첫날이 하루가 아닌 엄청나게 긴 시간을 뜻한다는 생각이다. 인간을 하루 만에 만들었다는 교리도 진화되는 과정의 시간을 모두 통틀어서 하루라는 개념으로 잡는다면 굳이 창조론과 진화론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다.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 인가? 문득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닌데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창조론, 진화론은 방법적인 얘기가 아니라 목적의 문제이구나. 인간을 중심으로 세상이 만들어진 건지, 아니면 그냥 어쩌다 보니 인간이 자연에 적합하여 진화가 된 것일뿐 다른 동식물보다 전혀 특별한 것이 없는 건지에 대한 견해 차이다. 결국 나는 후자를 믿기로 했다. 물론 사람이 특별하다고 믿는다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마음 편하자고 가치관을 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인간이 만물의 중심이며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라...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가치관을 정한 이후 성당을 안 나가기 시작했다.

6년 전에 인도 여행 중에서 나를 돌아보게 만든 두 가지 사건이 있다. 

처음 델리에서 자이살메르까지 혼자 기차를 12시간 타고 가는 중, 현지인과 얘기를 섞게 되었다. 그쪽에서 먼저 술을 권해서 마시고 나도 지니고 있던 소주 3병 중 한 병을 꺼내서 공유했었다. 얘기를 하다 현지인이 자연스레 종교를 묻기에 "나는 원래 천주교였지만 지금은  무교다"라고 별 생각 없이 대답했는데 그 말을 그 사람들은 도통 이해를 못했다. 그들에게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국적을 바꾸는 정도의 심각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자라 온 환경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뭐가 다를까. 우리가 믿는 진리는 정말 진리일까?


그 이후, 음식을 함께 먹은 후 쓰레기를 버릴 때였다. 먹은 용기를 버리려고 쓰레기통을 찾는데 아무리 봐도 안 보였다. 내가 헤매는걸 보던 아까 그 청년이 웃으면서 내 쓰레기를 넘겨 받더니 갑자기 기차 밖으로 그냥 던져버렸다. 당시에는 이건 뭔가 잘못된거 아닌가 싶었지만 한달 여행을 다니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이건 사실 나만의 생각이긴 해서 틀릴 수도 있지만, 내가 느낀 바로는 인도 사람들은 교리상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 보기에 굳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행동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게 아닌가 싶다. 아침에 모두 나와 길이나 구석에서 변을 보는 행동도 이런 맥락이며, 소를 비롯한 동물들이 길거리에 인간들과 공존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 여겨진다. 물론 쓰레기를 함부러 버리는 이런 행동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럼 장면을 목격하는 것자체가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건, 우리가 우리한테 익숙한 comfort zone에서는 절대 느끼지 못할 것을 다른 곳에서는 느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자기의 고정관념이 적용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생각의 테두리를 부셔보는거다. 모두가 자기는 어느 정도 생각을 하면서 산다고 믿지만 사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우물 안 개구리이다. 물론 어느 정도 선에서는 만족하면서 지내는 것도 행복의 필수조건이라 믿는다. 단지, 알고 만족하는 거와 모르고 만족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믿는다. 무지로 인한 행복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가벼운 행복이다.



뭐 이건 모두 내 생각이고 가치관이기에 누군가에게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다. 종교 또한 논리의 영역을 벗어나는 부분이기에 신념을 가지고 따르는 자는 모두 존중하고, 가끔은 존경한다. 그나저나 비행기만 타면 말이 많아지는 건 확실하군.

그러고 보니 이번 비행기에서도 창가 자리에 앉게 되었다. 창가 자리와의 인연이 놀랍다. 생각해보면 한 줄에 6자리, 그중에서 창가 자리가 2개니 확률은 1/3이다. 근데 사실 그중에서도 난 항상 오른쪽 창가 자리에 앉았지만 그건 무시하기로 하자. 지금까지 총 비행기를 3번 탔으니 확률로만 따지면 1/27, 즉 3.7%, 분명 쉽지 않은 확률이긴 하다. 이거는 좀 지켜볼까나?


내 앞자리에 서양 남성분이 앉아있고 그 대각선 건너편에 이탈리아 여성분이 있다. 둘이 얘기를 나누는데 이건 누가 봐도 여성이 작업을 거는 모습이다. 현실에서 이런 게 존재했단 말인가. 남자분 잘 생기지도 않았다. 근데 들어보니 여자분은 돈므앙 공항에서 바로 다른 로 떠난다. 이어지지는 못하겠구먼. 아쉬워서 어쩌나. 


뭐 이륙하자마자 착륙이다. 사람들이 줄 서서 나가길래 다 나가길 기다렸다가 천천히 터벅터벅 걸어나온다. 지금 시간이 오전 11시 반이다. 남고 남은 게 시간이다. 어차피 이 시간에 돌아다니면 더워서 죽는다. 

태사랑 지도에서 보니 여기서 BTS 정거장까지 셔틀이 있다고 하던데 잘 안 보인다. 그럴 때는 헤매지 말고 바로 인포메이션으로 가는 것이 현명하다. 두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사왓디깝"을 외친다. 이 인사의 포인트는 다소 민망하더라도 인사가 끝날 때까지 합장한 손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 . 며칠 경험해보니 이것만 잘해도 사람들이 굉장히 호의적이 된다.

물어보니 6번 출구에서 A1 셔틀을 타라고 일러준다. 가격은 38바트란다. 두손을 다시 모으고 천천히 "깝꾼깝"을 외치는 것도 잊지 앉는다. 사소한 거지만, 인포 아가씨는 매우 좋아하는 것이 느껴진다. 


6번 출구로 가서 셔틀을 찾아 올라탄다. 역시 인사 한방에 무너지는 여성운전자분, 아 나의 매력이란... 에어컨도 나오고 비록 현대적이진 않지만 꽤나 깔끔하다. 30바트를 준비하고 앉아 있으니 출발 후 직원분이 돈을 수거하신다. 



생각보다 금방 도착한다. BTS역이라고 얘기해줘서 내린다. 내려서 보니 지하철역이 바로 눈앞에 있지만 원래 가려던 모칫역이 아니다. 쳇 함정이구먼. 속지 않고 지나쳐서 더 나아가니 위로 올라가는 역이 나온다. 내가 타야 하는 모칫역이라고 쓰여있다. 



안에서 표를 파는 분이 있는데 'Change'라고 쓰여있다. 사람이 잔돈을 잔돈 바꿔주는 건가? 근데 또 표값이 42바트라고도 쓰여있다. 뭐지? 어차피 사람이 잔돈을 바꿔주는거라면, 잔돈을 바꿀 필요 없이 그냥 저 사람이 팔면 안되는건가? 혼란스럽다.


줄이 길기에 일단 옆에 자판기로 가본다. 역 노선이 있어서 물끄러미 보다 보니 내가 가는 라타체윗역까지 37바트이다. 이 정도는 이제 자판기를 활용해야지. 잔돈을 긁어 모아서 넣으려고 보니 동전만 받는다. 

에잉? 그래서 체인지라고 한 건가? 근데 잔돈 바꿔주는 기계는 없고 사람이던데. 그냥 저기서 사면 되는 건가? 알쏭달쏭한 시스템이구먼. 일단 줄을 선다. 

내 차례가 되어서 당당하게 라타체윗 37바트를 외친다. 금액이 맞긴 한데 여기는 기본 운임인 42바트 표만 판매하고 나머지는 자판기를 이용해야 한단다. 그 잔돈을 이 사람이 바꿔주는 거다. 황당할 정도로 어이없는 시스템이다. 뭔가 이유가 있을까? 잔돈 바꾸는 기계를 하나 두던가 그냥 이 사람이 다 하게 하던가 하면 될텐데 뭐 이리 복잡하고 비효율적으로 만들어놓을까.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건지...



어쨌든 자판기로 가서 잔돈을 넣고 37바트 짜리 표를 제대로 산다. 넣고 들어가는 건 저번과 뭐 똑같다. 단지 저번 표는 칩 같았다면 이 번 거는 카드 형태다. 



차가 와서 탄다. 비싸서 그런지 에어컨이 빵빵하다. 전광판에서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삼성 노트4 광고를 한다. 뭔가 반갑다. 이거 근데 생각해보니 2명 이상이면 택시가 낫겠다. 셔틀 포함해서 67바트면 그리 저렴하지는 않다. 

허, 라인 광고가 지하철에 뜨고, 모델로 엑소가 나온다. 한국말을 한다! 옆에서 공부하던 처자 둘이 갑자기 집중해서 광고를 지켜본다. 야 한류가 진짜긴 진짜구나. 근데 왜 바로 옆에 있는 한국인인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거니. 건너편 유리에 갑자기 내 얼굴이 비친다. 아이고 깜짝이야. 이유는 뭐 알겠군. 

4 정거장인가 가니 오늘 행선지인 라타체윗 정거장에 도착한다는 안내가 나온다. 지금 지하철에 사람들이 꽤 많이 타고 있는지라 미리 준비한다. 이거는 여행자용 차가 아닌지라 뭔가 서울의 5호선에 거지꼴을 하고 탄 느낌이다. 내리기 위하여 배낭을 들고 문 앞으로 간다. 사람이 많은지라 배낭을 메지 않고 들고 서 있는다. 한국의 '지하철 백팩 과연 매너인가' 논란을 이곳 태국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싶지는 않다.




예약은 안 했지만 어제 찜해놨던 것으로 향한다. 이곳이 공항과 가깝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대충 지도만 보고 가도 금방 찾는다. 이제는 길 찾는거에 대한 대충 감이 왔나 보다. 그리고 태국에서 쓰는 길 주소, 이게 은근히 초행길에 도움이 많이 된다.




게스트하우스를 들어오니 사람들이 꽤 모여 있다. 여기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로비에 있는 여행자들도 매우 친숙한 표정이고 프런트 스태프들도 표정이 친화적이다. 게스트하우스를 들어가면 보통 바로 분위기 파악이 바로 된다.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하는지, 경직된 분위기 없이 자연스러운지, 이런 것들을 보면 대충 이곳의 흐름이 잡힌다. 여기는 마음에 든다. 다음에 어차피 다시 방콕에 와야 할텐데 그때도 여기로 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체크인을 위해 조금 기다린다. 내 차례가 되어서 일단 방이 있냐고 물어보니 다행히 있단다.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혹시 없으면 어쩌지 싶었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400바트라고 알려준다. 이분 영어 꽤나 잘하신다. 태국에서 본 사람 중 가장 잘하는 사람 중 하나인 듯하다. 하지만 400바트라... 내가 아고다에서 보기로는 세금 포함 금액이 380바트여서 좀 애매하다.

20바트로 뭐라 하긴 그렇지만 한번 물어본다. 왜 아고다가 더 싸냐, 커미션 떼고 하면 워크인이 더 싸야 한 거 아니냐. 그랬더니 잘못 본 걸 거라고 한다. 흠, 나 이런 거 잘못 보는 사람 아닌데. 와이파이 되냐고 하고 접속해서 보여주겠다고 한다. 아 뭔가 이미지 좋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에 대한 이런 쪼잔한 이미지를 주고 싶지 않은데 첫 걸음을 잘못 땠다. 설상가상으로 와이파이가 안 잡힌다. 일층 와이파이도 안되고, 이 층도 연결이 안된다. 아 몇푼 차이 아닌데 그냥 400바트로 하겠다고 해야겠다.

근데 그때 스탭 여자분이 먼저 그냥 380바트로 해주겠단다. 그렇다면 또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지. 고맙다고 하고 500바트를 지불하고 120바트를 돌려봤는다. 여권을 달라고 해서 준다. 내 여권을 보더니 이분 표정이 갑자기 굉장히 밝아진다. 한류팬이군.

역시나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다. 여권 보면 알잖아요... 뭔가 구구절절 설명한다. 내가 원래 안 이런데, 여행 다니면서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머리를 잘랐는데, 이발소 아저씨가 나를 승려로 만들었다. 원래는 한국의 훈남인데 이리 됐다. 믿어달라. 뭐 이런 식으로...

이분 한국 너무 좋아한단다. 지난달에 서울로 2주 여행을 갔다 왔단다. 흥분해서 막 말도 더듬으면서 얘기하신다. 칾다운, 릴랙스. 한국이 너무 아름답다길래, 한국 사람들은 이곳으로 오고, 이곳 사람들은 한국으로 가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고 대답해준다. 우연찮게 아이스브레이킹이 쉽게 되어버려서 20바트의 쪼잔함은 저 멀리 묻혀버린다. 나이스.






이제 숙소를 보러 올라간다. 구조가 깔끔하게 잘 배치되어 있다. 침대도, 화장실도, 또 락커도 모두 독립적이고 깨끗하다. 여기 오기 잘했다. 태사랑에 경쟁 숙소인듯한 Good day hostel 칭찬이 많아서 거기 갈까 하다 뭔가 지금 몰리는 분위기인 듯해서 근처 다른 곳으로 온건데 잘한 듯 싶다.

락카에 짐을 대부분 넣어놓고 세컨드 백만 들고 로비로 다시 나온다. 차를 한 잔 타서 자리를 잡는다. 앉아서 로비에 앉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하는걸 들어본다. 뭔가 자유롭게 대화하는 분위기가 좋다. 들어보니 여행은 모두 기본 한 달 이상 한 사람들이며, 한 총각은 이곳이 5달여행에서의 마지막이라고 한다. 부럽다고 해야 할까.


난 여행은 여행이어야지만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여행에 중독돼서 그게 삶이 되어 버리면 여행의 의미가 없어진다. 현실은 아무리 떠나 있어도 내가 놔둔 그 상태 그곳에서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여행은 현실의 쉼표이지 마침표가 될 수는 없다. 사실 중요한건 기간보다 마음가짐이다. 일주일을 가도 즐거운 여행이 있는 반면 1년을 다녀와도 느끼는게 없는 여행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일 년 여행은 인생에서 반드시 꼭 한번은 해보고 싶긴 하다. 만약 예전의 대학교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빚을 내서라도 다니지 않을까? 모르겠다. 어차피 똑같이 살 거 같기도 하다.


슬슬 나가 볼까 해서 스태프한테 이것 저것 물어본다. 일단 이름을 물어보니 '핌'이란다. 방콕에는 수로가 잘 닦여 있어서 배를 통한 이동이 가능하다. 한번 배를 타고 이동해볼까 싶다. 핌한테 들어서 이곳에서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의 배 선착장을 먼저 알아내고, 그곳에서 큰 강까지 가서, 큰 강에서 왓 아룬 근처로 가는 방법을 듣는다. 근데 자기도 정확하게는 모르는 듯해서 신뢰가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그럴 수 있는게 사실 한국 사람도 서울 지리 잘 모르지 않나.

어느새 1시 반이다. 슬슬 나가 볼까? 오래 걸어 다니려고 운동화를 신었는데 오히려 새끼 발가락 쪽이 더 아프다. 슬리퍼로 갈아 신을까 하다 일단 반창고를 붙여본다. 저번에 한번 오래 걸어서 그런듯 하다. 그러고 보면 킬힐을 신고 수 많은 곳을 누비는 우리나라 여성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계속 아파오는 것이 왼쪽 새끼 발가락이 좀 짓 물린 듯 싶다. 그냥 가려다 안되겠어서 쫄이로 갈아 신고 온다. 저녁에 잘 때 연고 좀 바르고 자야겠다. 여행 다닐 때마다 고생하는구나 내 발아. 

아 그러고 보니 점심을 안 먹었구나. 왜 배가 고픈가 했네. 밥 먹으러라도 나가야겠다. 핌한테 근처 로컬 식당을 추천해달라니까 유명한 곳이 있다고 고민 안하고 바로 하나 알려준다. 나와서 일러준데로 찾아간다. 가까워서 금방 찾는다. 


확실히 방콕이 물가가 좀 비싼 듯하다. 팟타이를 시킨다. 가장 무난하기도 하고 맛도 이제 익숙해져서 딱히 먹고 싶은게 없을때는 팟타이가 가장 편하다. 주문하니 두 명 중 한 명이 밥은 먹다가 멈추고 요리를 하러 주방으로 들어간다. 아 미안하네. 좀 늦은 시간에 왔더니 지금이 원래 직원들이 늦은 점심을 먹는 시간이었나보다.


팟타이 비주얼이 좋다. 맛도 좋다. 진짜 노여사 말대로 팟타이만 먹고 다녀도 아무 부족함이 없다. 여기 맛도 좋고 친절하고, 모든게 마음에 든다. 다음에 왔을 때도 여기서 먹어야겠다. 


밥을 먹고 있으니 다른 스태프도 밥을 대충 퍼서 그냥 이것 저것 잡탕으로 넣고 앉아서 먹는다. 외식일 하다 보면 자기 식사는 막상 해서 먹기가 엄청 귀찮아진다. 내가 알지. 둘이 서로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각자 보면서 먹는다. 서로 말 한마디도 없다. 흠, 형제 인가 보군. 

밥 먹는데 손님이 또 하나 들어온다. 형은 밥 먹다 일어나서 서빙하고 동생은 요리한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지만 일하다 보면 별 수 있나. 둘 다 묵묵하고 성실한 게 진짜 마음에 든다. 이런 애들이 진국이다. 


콜라를  하나시켜서 나도 정신없이 먹는다. 맛있구먼. 배고팠기에 금방 한 그릇을 비운다. 이제 슬슬 나도 가봐야지. 얼마냐고 물어보니 80바트란다. 퀄리티에 비해 나쁘지 않다. 역시 다음에 오는 것으로 찜!

식당에서 나와서 아까 핌한테 얘기 들은 배 선착장을 찾아간다. 저번에 댓글에서 보니 강 같은 게 아닌 운하를 만들어서 운송수단으로 쓰고 있단다. 나름 괜찮은 방법인 듯 하지만 타 봐야 알겠지.

생각보다 찾기는 쉽다. 그냥 쭉 직진하니까 나온다. 그런데 선착장이 물 건너편에만 있고 내가 가야 하는 방향으로는 없다. 뭐지? 왠지 해멜듯 싶어서 옆에 있는 사람한테 물어보니 무조건 한군 대서 타고 내린다는 것 같다. 그럼 양방향으로 동시에 오면 혼란스럽지 않을까?

건너편으로 넘어간다. 사람들이 몇 명 기다리고 있다. 여기가 일단 맞군, 잘 찾아온 듯하다. 표지판이 있고 노선과 가격이 안내되어 있긴 하지만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아 이거 생각보다 어려운 퀘스트이다.


결국 옆에 현지인한테 물어본다. 말끔하게 차려입었길래 영어가 될 줄 알고 선택한 상대다. 그 분 당황하더니 옆에 또 다른 분에게 물어본다. 자기도 처음 타는 거라고 한다. 귀족 부인의 민중의 삶 체험인가? 어쩌지? 그때 마침 서양분이 오길래 역시 또 가서 물어본다. 역시 모른다. 이거 아는 사람이 있기나 한 거야?

그냥 내가 안내를 보고 연구해보기로 한다. 찬찬히 보니 작은 강 끝까지 가는 건 알겠는데 그 이후에 큰 강으로 환승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열심히 보고 탐험하는데 타고 갈 배가 와버린다.


일단 타고 본다. 안전장치 같은 것도 없어서 알아서 잘 타야 한다. 줄을 잡고 넘어가다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난다. 아 늙으면 배 탈 때도 준비운동을 해야 하나. 쥐가 난 티가 나면 민망할까봐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리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는다. 아, 아프다.


배가 "우우웅"하는 엔진음을 내며 출발한다. 꽤나 스펙터클하다. 물도 사방으로 갈라지며 스피드감도 있는게 한강에서 모토보트 타는 느낌이다. 물이 더러운 거야 어쩔 수 없고, 그다지 신경 쓸 성격도 아니다. 한번 탈만하다.



조금 있다가 돈을 걷으러 오신다. 돈 걷는 분은 배에 안 들어오고 바깥에서만 앞뒤로 움직이신다. 안 위험한가? 자세히 보니 줄이 하나 있어서 어깨에 끼고 다니신다. 하긴 뭐라도 있어야겠지. 근데 얼마를 드리지? 금액을 몰라서 대충 지도를 보여드리고 20바트를 드리니까 11바트를 돌려주신다. 와, 9바트면 정말 저렴하다. 이거 가능하면 자주 애용해야겠다.


정거장 하나 설 때마다 지도를 보면서 파악해본다. 대충 가는 길은 알겠는데 역시 큰 강으로의 환승을 모르겠다. 가서 보면 알게 되겠지? 주변의 광경을 즐기며 배가 앞으로 나가며 불어오는 바람을 시원하게 맞는다.

배가 다소 험하게 가다 보니 중간에 강물이 배 안으로 튀려고도 한다. 강물이 정말 똥물이기에 그건 재앙이다. 이때를 위해 만든건지 양 옆으로 올리는 천이 있다. 그쪽에 앉은 사람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물을 막아낸다. 나름 노하우가 많이 묻어 있는 시스템이다.



몇 번 정거장이 지나고 이제 환승해야 할 정거장이다. 내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다. 이곳이 그냥 종점이다. 환승, 이 딴 거 없나 보다. 일단 내리고 본다. 뭍으로 올라가서 고민해봐야겠다.

환승은 없나보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할듯 싶다. 근데, 여긴 또 어디일가. 대충 방향은 알겠는데 헷갈린다. 지도를 피고 무작정 걸어가본다. 어떤 아저씨가 뭐라고 말을 걸면서 접근한다. 내가 아무리 헤메고 있어도 그렇지, 사기당할 짬은 아니지. 태국은 은근히 생각보다 여행자를 상대로 하는 사기가 많은 거 같다.


일단 지도에 크게 보이는 민주기념관으로 향한다. 조금 가니 금방 나온다. 이 정도면 사원까지 걸어갈 수 있겠다. 근데 왠 민주기념관? 태국은 입헌군주제였던가? 입헌군주제도 민주주의긴 하지.


다시 길을 나선다. 날씨가 덥지만 그늘로 숨으면 참을 만하다. 딱히 급할 것도 없어서 느긋하게 주변을 구경하며 걸어간다. 길을 한번 잘못 들었지만 다시 나와서 또 간다. 중간에 으슥한 골목이 있길래 들어가본다. 왠 개 두 마리가 오길래 아이고 귀여운 것 하고 맞이하려 하는데 이놈들 으르렁 거리며 빠른 속도로 뛰어온다. 태국 온 이후 처음으로 개를 무서워한다. 하지만 조금 지나니 다시 괜찮아져서 나를 놀라게 한 죄로 째려봐준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말야.



또 다시 걷는다. 사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다. 왓아룬을 생각하고 왔었지만 꼭 그곳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니고, 이렇게 그냥 걷다 보면 뭐 들어가고 싶은 곳이 나오겠지. 불교국가 아니랄까 봐 길마다 불상 판매하는 곳이 매우 많이 보인다. 불상의 표정이 아래로 쳐다보고 있는데, 이게 뭘 뜻하는지 조금 궁금해진다.

모두 아래쪽을 지긋이 쳐다보는 불상들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우르르쾅쾅" 하며 천둥이 친다. 허, 뒤를 보니 저 멀리에서 시꺼먼 구름이 다가오고 있다. 큰일 났네, 근처에 들어갈 곳이 안보인다. 일단 조금 걸음거리를 빨리 해본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카페 같이 들어설 만한 곳이 안 나온다. 아까는 가까워 보이던 사원들이 지금은 갑자기 멀게 느껴진다.




뛰면 바로 지쳐서 어차피 끝까지 못 갈테니, 최대한 빨리 걷는다. 천둥이 더 심해진다. 번개도 몇번 뚜렷하게 보인다. 하긴 천둥이 있으면 번개도 당연히 있는 거겠지. 여행 와서 가장 급한 마음으로 걷는다. 여유 따위 챙길 시간이 없다. 아 노여사님, 우산 잃어버려서 미안합니다. 벌 받고 있는 걸까.

중간중간 뭔지 모를 기념관 등이 나오길래 사진만 찍고 정신없이 걷는다. 근데 현지인들은 이 상황에서 왜 이리 태평할까? 이러고 막상 비 안 오는 거 아니야? 외국인들은 다 급해 보이는데 현지인들은 여유가 넘친다.

급하게 걷다가 큰 사고가 날뻔했다. 길을 건너는데 아무래도 우측통행에 길들여져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쪽만 보고 건너려고 하다가 반대편에서 차가 갑자기 나타나서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확 피했다. 천만다행으로 사고는 안났다. 운이 좋았다. 운은 이런데 써야 하는 거다. 좌측통행이 진짜 적응 안된다. 길 건널 때 늘 무의식적으로 반대편을 보게 된다. 게다가 왜 이런 큰 길에 신호등은 없는 건데. 

걷다 보니 목표하지 않았던 왓포가 나타난다. 여기가 아마 엄청 큰 와불상이 있다고 했던 곳 같다. 원래 이곳은 올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따질 때가 아니다. 그새 머리 위까지 먹구름이 왔다. 이제 진짜 쏟아지기 직전이다. 들어가야겠다고 마음 먹고 걸어가는데 입구가 안보인다. 이쪽 입구에서는 옆의 입구로 가라고 하고 그쪽 가면 또 옆으로 가란다. 마음이 급하니 더 멀게 느껴진다.




주변을 보니 드디어 현지인들도 액션을 취하며 장사를 걷기 시작한다. 이제 진짜 임박한 거구나. 비 맞기 싫다. 드디어 정문을 찾는다. 입장료를 물어보니 100바트란다. 지금 돈이 문제인가. 바로 돈을 내고 들어간다.



아, 이제 좀 마음이 놓인다. 급하게 걸어왔더니 몸이 땀 범벅이다. 이거야 뭐 잘 말리면 된다. 그 와중에도 천둥번개는 계속 치고 있다. 일단 첫 번째 보이는 사원으로 들어가서 비를 피해야겠다. 사원 입구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라고 안내문이 쓰여 있다. 신발을 벗어서 비닐봉지에 넣어서 들고 입장한다.


와, 여기가 와불상 있는 곳이구나. 불교가 아니라서 큰 감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규모에 경탄한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살펴본다. 발바닥에도 뭔가 조각이 되어 있다. 뭘 뜻하는 걸까? 조금 공부하고 온다는 걸 깜박했다.


일단 비부터 피할 심상으로 사원 안에 앉을 수 있는 곳에 앉아 키보드를 연다. 글을 쓰고 있는데 계속 천둥번개가 친다. 헌데 이상하게 막상 비는 안 온다. 여기서 비를 피하려고 했는데, 이 상황은 뭘까? 이거 이렇게 난리치고 설마 비는 안 오는 걸가? 앉아서 키보드를 치고 있으니 내 모습이 신기했는지 사람들이 내 사진을 찍어간다. 순식간에 관광사진의 일부가 된다.


에잇, 뭐야 왜 비가 안와! 다시 일어난다. 한번 다시 나가 볼까? 밖을 보니 하늘이 게고 있다. 근데 천둥은 계속 친다. 이거 뭐시다냐. 자세히 보니 비가 오긴 하는데 비라기 보다는 10초에 빗방울 한번 떨어지는 정도다. 짓기만 하고 물지는 못하던 어제 카페에서 본 강아지 생각이 난다. 현지인들이 여유롭게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내 발바닥과 내 땀 어쩔 거야. 진짜 엄청 위기감 느끼면서 전투적으로 걸어왔는데 황당하다. 이리 된 거 사원 구경이라도 제대로 해야겠다. 후...





이제 여유도 생겼겠다, 찬찬히 돌아본다. 흠, 이런 구조 어디서 많이 본거다. 여행 오기 직전에 노여사와 같이 갔었던 경복궁, 거기서 한옥 대신에 노란, 초록 지붕을 넣고 탑 스타일을 바꾸면 거의 동일하다. 작은 문을 지나 또 똑같은 게 나오는 것도 그렇고 진짜 똑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모르니 안 보이는구나.


그래도 평화로운 게 좋다. 그때 경복궁 갔을 때도 구석에 후미진 조용한 자리 찾아서 둘이 같이 두어 시간 책을 보다 나왔었는데 여기도 그런 공간이 많이 보인다. 그 유명한 누워있는 부처상에만 사람이 많지 조금만 들어가도 사람 소리는 사라지고 새소리만 들린다. 그곳에 자리를 잡는다. 마음이 편안해지게 하는 공간이다.

앉아서 사람들 구경을 해본다. 여기도 돈 받고 안내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저번에 경복궁에서도 그런 아저씨들을 몇명 보았다. 어차피 지금 백수인 거, 경복궁에 보니 영어 잘하는 안내원도 안보이던데 여행 갔다 돌아가면 아르바이트로 저 안내나 좀 재미있게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진짜 해볼까? 역사 공부 좀 하고 저렴하게 하면 가능할 거 같기도 한데. 나름 재미있게 얘기하는 것도 자신 있고.




어차피 이리 된 거 조용한 곳에 앉아서 책을 핀다. 그래도 책 보기 좋구먼. 노여사는 인도에서 보면 이런데서 누워서 자기도 하던데. 나는 문명인이라 그건 못하겠다. 

인간이란 낯선 곳에 던져진 존재. 자기가 잘 모르는 낯선 곳에 엉뚱하게 던져 저서 여기가 어딘가를 어리둥절해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존재

김영하 산문은 너무 비관적이라 나랑 좀 안 맞는 부분이 있는데 간혹 이런 깊은 생각을 하는 얘기를 툭 던지는 거 보면 확실히 작가는 작가다. 인간이란 이곳이 어딘지, 우리가 왜 이곳에 떨어졌는지 끝없는 고민을 하다가 가는 존재 같다.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이상한 포즈를 하고 사진을 찍는 중국커플, 셀카봉을 들고 온 서양 젊은이, 종교관광을 온듯한 스님들, 그리고 엄마 사진을 찍어주는 한국 딸 두 명까지. 공통점은 모두 본인이 들어간 기념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다. 왜 자기가 들어간 사진을 찍는 걸까? 구도상으로도 사람이 한 명 들어가면 초점이 두 가지가 되어서 안정적이지 않을 텐데. 이곳에 왔었다는 증거가 필요한 걸까? 뭐라 하는 건 아니다. 나도 가끔 그러니까. 이건 또 과거를 살아가는 방법이겠지.

내가 예전에 어린 시절 하던 것 중에 하나가 어떤 기억하고 싶은 곳에서 마음 속의 사진을 소리 내 찍는 것이었다. 눈을 깜빡이면서 입으로 "찰칵" 소리를 낸다. 의미 없어 보이고 손발 오글거리는 설정이지만 웃긴 건 아직도 그 '찰칵'의 장소 몇 군대는 내 머리 속에 사진으로 기억이 난다는 거다. 진짜 찍혔나 보다.

결국 사람들은 다 과거를 기억하고 살아가고 싶겠지. 그것들이 모여서 내가 되는 거니까. 성격이 내 존재를 나로 만드는 게 아니라 기억이 나를 나로 만든다. 물론 그 기억은 그 성격 때문에 만들어진 거겠지만 말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과거가 되는 현재를 기록하기 위함일 거다. 그런 의미에서 알츠하이머 만큼 슬픈 병도 없다.



한 시간 정도 이곳에 앉아 있었더니 졸리다. 아까 너무 빡세게 걸었다. 한숨 자고 싶은데 여기서 누워서 자면 안되겠지. 고요함이 좋아서 일어나기 싫다. 요즘은 성당을 안 다니지만 가끔 고민이 심할 때 성당 가서 앉아있을 때 느껴지는 그 평온함이 이곳에서도 느껴진다. 종교가 가져오는 심리적인 안정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날 거지 보듯이 보는 거 보니 슬슬 일어나긴 일어나야겠다. 거지라니...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보물들이 얼마인데. 노트4, 리코GR, 킨들 보이지, 코보글로, MS 유니버설 키보드, 이것들을 모두 새것 기준으로 생각하면... 헐 300만원 정도네. 다 팔아버려야 하나? 돈도 없는 놈이 뭘 이리 많이도 질렀데. 

이제 5시다. 일어난다. 결국 비는 안 왔다. 젠장. 뭐 덕분에 좋은 휴식을 가졌다. 여기는 그래도 내 '스토리'가 있었던 곳으로 기억될 거 같다. 뭐 의미 없다. 다시 찾아오고 싶어도 못 올 테니.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슬슬 일어나서 산책 좀 하다가 나가는 길로 가본다. 중간에 화장실이 있어 들어가보니... 이번 여행에서 본 화장실 중에 가장 럭셔리하다. 자동문, 센서로 작동하는 자동 수전, 그리고 항시 청소하는 인원도 있다. 화장실을 나오니 관광객들은 무료로 물도 준단다. 방콕 대표 관광지답게 투자를 장난 아니게 하나보다.


공짜 물은 받아야지. 가서 달라고 하니 들어올 때 표를 달란다. 그거 버렸는데. 버렸다고 하니 잠시 나를 지긋이 쳐다보더니 한병 주신다. 무슨 생각을 하신 걸까.

왓포를 나와서 강 쪽으로 천천히 가본다. 해가 질 때도 됐으니 원래 야경을 보려고 했던 왓아룬으로 가서 있는 것도 좋겠다. 그쪽으로 슬슬 걸어가니 생각보다 가까워서 금방 도착한다.

왓아룬 주위의 광경이 다소 특이한다. 상인들이 몰려 있고, 옆에는 공원이 하나 크게 있다. 들어가는 선착장도 여러 개다. 일단 여기 저기 기웃기웃 거려 본다.



3바트라 쓰여 있는 입구가 보인다. 여기가 입구 맞을까? 티켓이라고 쓰여 있고 스태프가 보이길래 이곳으로 들어가는거 맞냐고 물어보니 손을 피신다. 5바트를 드리니 2바트를 주시고 조용히 있는다. 들어가라는 소린가? 들어간다. 사실 왓 아룬은 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가게 되었다.



왠 배에 올라탄다. 배를 통해서 강을 건너나 보다. 그러니까 초 저렴한 3바트겠지. 조금 앉아있으니 사람이 어느 정도 찬 후에 배가 출발한다. 옆으로 있는 배가 옆으로 출발해서 또 옆으로 도착한다. 이거 모는 기술도 장난 아니겠다.


내려서 왓아룬 사원 쪽으로 향해본다. 근데 다 공사 중인지 제대로 볼 수 있는 게 하나도 안 보인다. 일단 입구 쪽을 찾아본다. 입구에 보니 입장료는 50바트이고 6시에 문을 닫는단다. 지금 시간이 5시 반, 애매하다. 게다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있나 싶다. 그냥 주변에서 구경하며 돌기로 마음 먹는다.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가볼걸 그랬나? 하긴 인도에서 타지마할도 앞에까지 갔음에도 밖에서만 보고 들어가지 않았었는데 이 정도야. 사실 타지마할은 좀 아쉽다.


여기저기 쓰여 있는 '부처는 장식이 아니에요'라는 문구가 신선하다. 아마 불교를 종교로 하지 않는 여행자들이 기념품과 문신으로 부처를 많이 쓰기에 이런 문구를 별도로 써놓지 않았나 싶다. 헌데, 그게 과연 나쁜걸까? 만약 종교 전파가 목적이라면 그런식으로라도 일상 생활에 친근하게 전달되는게 더 좋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종교적인 의미가 있을거기에 그들의 생각도 이해가 된다.


나와서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왓 아룬의 캣맘을 만난다. 원래 자주 먹이를 주시는지 돌아다니는 곳마다 고양이들이 엄청나게 달라붇는다. 생선 머리 하나씩을 던져주신다. 어쩐지 여기 고양이들 상태가 좋더니 챙겨주는 분이 있었나 보다. 버리는 생선을 모아서 주시는 건가? 이거 좀 웃긴 생각이지만... 부럽다...






캣맘을 따라가다 보니 왠 조그마한 철장 안에서 울음소리가 어마어마하게 들린다. 캣맘, 잊지 않고 그 안에도 꼬치에 생선을 끼워서까지 밥을 넣어주신다. 지나가신 후에 보니 안에 새끼 고양이가 있다. 아니 넌 왜 그 안에 있는 거니? 갇힌 건가? 밥을 먹은 다음에도 계속 운다. 불쌍한 것.


이제 다시 건너편으로 가야겠다. 왓 아룬을 배경으로 하는 해지는 모습이 그리 멋지다는데 반대편 공원에서 봐야겠다. 건너편 좋은 자리에 유명한 식당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뭔가 그런 곳은 가기가 싫다. 좋고 비싼 자리를 선점하여 맛과 질을 떠나서 비싼 물품을 판매한다는건 자본이 자본을 불리는 수단 중에 하나로 간주된다. 너무 오버해서 생각하는 건가.

3바트를 내고 다시 건너편으로 돌아온다. 헌데 여기서 밧줄 거는 분, 나랑 매우 닮았다. 헤어라인도 그렇고 두상도 그렇고. 아저씨도 잘 생겼어요. 도착해서 배에서 내려서 공원으로 향한다.





해가 지긴 지는데... 일단 방향이 왓 아룬과 전혀 별개이고, 구름은 엄청 껴서 이미 해는 안 보인다. 은근 기대 많이 했는데 실망이다. 여기 뭐 동지나 하지에 정확하게 왓 아룬 위로 떨어지는 그런 과학적인 유물인가? 그러고 보면 경주만큼 괜찮은 유적지도 은근 없다. 세계에 내놓을 경쟁력 있는 관광지 아닌가 싶다.

아 오늘 땀을 너무 흘렸다.  빨래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닌데. 아까 핌한테 물어보니 빨래하는 가격이 100바트란다. 뭐 이리 비싸냐고 놀래니 7키로까지 된단다. 이봐요, 내 가방이 7키로입니다. 가방 채로 넣고 돌려버릴까? 근데 서양 형님들은 뭘 이리 많이 가지고 다닐까. 난 이 짐으로 1년도 충분히 다닐 거 같은데. 난 더러워서 그런건지도 모르겠군.

여기서 밥을 먹고 갈까 고민하다가 내일부터는 한동안 태국 음식을 못 먹을 듯해서 낮에 먹었던 그 형제네 가기로 한다. 게다가 아까 타고 왔던 배의 막차, 아니 막배가 8시라고 태사랑 지도에 쓰여있다. 지금이 6시 반이니 이곳에서 식사를 하면 이동이 조금 애매해진다.

오늘 많이 걸어서 다리가 좀 아프다. 배 선착장까지 뚝뚝을 타고 가볼까 싶어서 뚝뚝 기사들이 말을 걸면 회피하지 않고 선착장까지 얼마냐고 물어본다. 모두 100바트란다. 일단 무조건 100바트부터 부르고 시작하는구나. 걸어서 20분 거리를 무슨... 차라리 걷고 만다. 두 명한테 물어보고서는 그냥 걷는다. 버스가 당연히 있을 듯도 하지만 인터넷이 안되니 어차피 알 수가 없다.





낮에 올 때 실체 없는 비의 협박에 너무 서둘러 왔던지라 돌아갈때는 여유를 가지고 다소 천천히 걸어가 본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좌측통행은 무의식적인 거라, 게다가 또 아까 사고날뻔한 것이 트라우마가 됐는지 굉장히 신경 쓰인다. 길 건널 때는 두배 집중을 해서 걸어간다.

슬슬 다리도 저려오고 힘들 때쯤 선착장 근처에 도착한다. 아직 배가 있겠지? 지금 시간이 7시인데 혹시라도 끊겼을까 봐 불안하다. 조금 더 일찍 올걸 그랬나 싶다. 해가 지고 어두워서 길 찾아 가는데 좀 애를 먹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찾아간다.




다행히 배는 아직 있다. 하긴 태사랑 지도가 틀릴 리가 없지. 배에 올라타서 자리를 잡는다. 앞에 어떤 여자분이 태사랑 지도를 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한국사람이다! 저분도 이쪽 사원들 구경 왔나?

선장님(?)이 배값을 수거하기 시작한다. 귀를 쫑긋하고 들어보니 아까 여자분 목적지가 나랑 같다. 그쪽에 게스트하우스가 많다더니 비슷한데 묵나 보다. 내리면 한번 말을 걸어볼까 싶다.

배는 생각보다 빨리 움직인다. 세 정거장인데, 운하로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 20분 만에 도착한다. 확실히 좋다. 빠르고, 편하고, 싸다. MB가 젊은 시절 태국을 갔다와서 이상한 생각을 했는지도...?

금방 도착해서 내린다. 아까 여자분도 같이 내린다. 괜히 눈치 보지 않고 내가 먼저 가서 말을 건다.

"한국분이시죠?"
"어? 어떻게 아셨어요?"
"태사랑 지도 가지고 다니셔서..."


걸어가면서 대화를 나눈다. 나보고 얼마나 여행했냐고 물어서 일주일이라고 하니 놀란다. 엄청 오래한 줄 알았단다. 현지인 같다는 얘기도 해주신다. 이게 다 나에게 똥을 준 이발소 아저씨 때문이다.

가는 방향이 어차피 같아서 같이 걸어간다. 2주간 방콕에서 지내신단다. 2주만 방콕에서만 있기 좀 아까운데... 하긴 그건 내 생각이고 모두의 여행은 다 다른 거겠지.

갈림길이 나오고 방향이 달라서 인사하고 헤어진다.

"좋은  여행되세요."

헤어지고 나니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고 할걸 그랬나 싶다. 너무 매너가 없었나. 어차피 혼자 먹을 건데. 근데 그 분이 싫었을 가능성도 굉장히 크다. 여행기를 매일 올린다고 했으니 이거 보실지도 모르겠다. 아까 무서워하지 않고 대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방콕에서 즐거운 2주 보내세요.

이제 아까 그 식당을 찾아간다. 오늘은 똠얌꿍을 시도해볼까 한다. 태국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데 예전에 먹었을 때 너무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제대로 하는데서 한번 시도해봐야겠다.




점심의 그 식당을 찾아가니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야, 네나 맛집이었구나. 아까 맛있긴 했었는데 한가하길래 이정도일줄 몰랐는데 저녁 되니 장난이 아니다. 외국인보다 현지인들한테 유명한가 보다.

앉아있으니 막내아들인듯한 아이가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펴보니 태국말이다. 너 이거 무슨 의미니? 영어 메뉴판을 갖다 달라고 얘기하니 그때서야 갖다 준다. 뭐 사실 시킬 걸 이미 정해놓고 왔던지라 딱히 볼 것도 없다.

똠얌꽁 작은 것을 하나시키고 이곳에서의 마지막 날인 만큼 맥주도 하나 시킨다. 맥주가 또 작은 건 없단다. 큰 거 먹지 뭐.


근데 이렇게 시켜도 되는걸까. 주변을 보니 다들 뭔가 요리 같은걸 시켰다. 다들 탕수육, 라조기를 시켰는데 나만 짜장면을 시킨 느낌이다. 어쩐지 종업원들이 시큰둥하더니.

이곳, 정말 맛집 같은 게 사람들이 계속 음식 사진을 찍고 있다. 여기 사람들도 마찬가지구나. 음식 시키고 먹기 전에 찍고 어딘가에 올리고, 이 신성한 의식을 거쳐야만 식사를 시작한다.



분위기가 딱 맛집 분위기라 기대된다. 음식이 나오고 먹기 시작한다. 확실히 저번의 똠얌꿍은 잘 못하는 집에서 먹었나 보다. 이곳에서의 똠얌꿍은 나쁘지 않다. 아니 꽤나 맛있다.

그런데 내 옆에 테이블에 앉은 커플하고 일하는 사람이랑 서로 아는 사이인가 보다. 서로 한참 서서 얘기하더니 스태프가 내 앞 건너편 자리에 떡하니 앉는다. 뭐 빈자리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뭐지? 신경 안으면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누가 내 바로 앞에 앉아있으니 신경이 좀 쓰인다. 싼 거 시켰다고 무시하나. 그래도 100바트도 넘는 건데. 다음에는 둘이 와서  요리시켜야겠다. 아까 여성 분하고 같이 올걸 싶다. 


뭐 그래도 맛있게 먹고 자리를 일어선다. 조금 신경 쓰여서 결국 맥주는 다 못 먹고 남긴다. 마지막에 조금 안 좋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식당이다. 다음 방콕 방문 때 다시 들려야겠다. 

숙소로 돌아오니 로비에서 사람들이 같이 저녁을 먹고 있다. 내가 땀에 절어서 들어가니 같이 먹자고 한다. 이미 먹고 왔다고 대답한다. 이런 자리가 있는 줄 알았으면 안 먹고 왔을텐데. 이곳 분위기 좋아서 만약 한국인이 있었으면 꽤나 친해졌겠다 싶다. 

일단 샤워부터 한다. 아주 땀에 쩌들었다. 빨래는 지금 못하니까 그냥 이상태로 말려야겠다. 어쩔 수 없다. 지금 빨래를 하면 내일까지 안 마른다. 그나마 엊그제 한번 다 해놔서 다행이다. 

뜨뜻한 물로 씻으니까 한결 살 거 같다. 속옷을 입으려고 보니 어떤 게 오늘 입은 거고 어떤 게 방금 꺼낸 건지 또 모르겠다. 대충 입자. 꺼낸 것도 아마 새 거 아닐 거다. 그래도 잠옷은 깨끗한 한벌로 갈아입는다. 침대에 옷들을 좀 널어놓으려고 도미토리 문을 여는 순간, 땀냄새가... 역시 다 똑같구나. 

오늘 마무리를 하기 위하여 키보드를 챙기고 일층 로비로 간다. 아직도 아까 그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옆에 자리 하나 비었기에 앉아도 되냐고 양해를 구하고 앉는다. 

글 마무리를 하려고 하는데 옆에 얘기에 자꾸 귀를 기울이게 돼서 집중이 안된다. 이리 된 거 나도 스리슬쩍 낀다. 

"여기 최근에 미얀마 다녀오신 분 있나요?"

독일 여자분이 최근에 갔다 왔다고 얘기해주신다. 북부에서만 보름 있을 거라 그쪽 동네 하나를  추천받는다. 자기는 Hsipaw가 좋았단다. 인레호수는 너무 관광지화 돼서 별로란다. 낮에 내가 생각한 거와 같이, 기념사진 찍고 이런 게 꼴보기 싫단다. 

보통 보니 6개월 이상 여행 다닌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영어로 tourist와 traveller를 구분하며 농담을 한다. 너는 tourist 아니었어? 뭐 이런 식이다. 어찌 보면 괜한 자부심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또 이해는 된다. Tourist는 뭔가를 보러 다닌다면 traveller는 뭔가를 느끼기 위해 다니는 차이라고 할까? 사실 그런 경계가 무의미하긴 하다. 어차피 여행은 자기 만족이 제일 중요한 법이다. 

이리 된 거 얘기에 그냥 이들과 합류하여 얘기를 나눈다. 이태리 남자 하나, 아르헨티나 남자 하나, 프랑스 남자 하나, 그리고 아까 독일 여자분 하나이다. 다들 한국에 대해서는 정말 모른다. 이태리 남자가 내가 키보드 치는 거 보면서 우리나라말은 중국어 같은 형상학언어(맞는 표현인지...) 아니냐고 묻는다. "조선 다이네스티 킹 세종 블라블라." 한글의 창제에 대해서 내가 아는 부분을 설명해준다. 특히 고위직들의 전유물이었던 언어를 일반 민중들이 알게 하는 의미가 있으며 그래서 사대부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얘기하니 역시 모든 나라는 똑같다고 모두가 한마디 한다. 

한국에 대해 하도 몰라서 너희한테 우리나라 이미지가 뭐냐고 물으니 '첨단나라' 이거 하나다. 뭐 나쁜 이미지는 아니다. 이탈리아 남자한테는 2002 월드컵을 슬쩍 얘기하니, 이 친구 빵 터진다. 그래 그걸 잊을 수는 없겠지. 

프랑스 남자는 뒤늦데 합류한다. 그런데 내일 모래 미얀마로 간단다. 게다가 지금 거기 살고 있는 자이다. 오 이런 정보통이! 이것 저것 묻는다. 일단 북부에서는 Chin state라고 사람들이 거의 안 가는 곳이 제일 좋았단다. 여기 느낌 좋다. 적어놓는다.

물가를 물으니 외국인에게 관세가 심해서 태국보다 비싸단다. 뭐 예상은 했던 거다. 근데 문제는 지불한 만큼의 서비스가 안 돌아온단다. 태국에서 10달러면 어느 정도 훌륭한 숙소지만 거기서는 같은 가격에 쓰레기 같은 곳에서 묵게 된단다. 침대는 있지? 내가 물어보니 웃으면서 그건 있단다. 그럼 됐지 뭐. 이 사람도 웃으며 동의한다. 

근데 프랑스식 영어는 정말 알아듣기 어렵다. 이태리, 독일 영어는 다 잘 들리는데 프랑스식 억양은 뭔 말인지... 웃긴 건 또 이태리 애는 그걸 다 이해를 한다. 집중하고 들으면서도 그냥 대충 고개만 끄덕인다. 알아듣는 척 하는 거, 이거 은근 쉽지 않다. 

이태리 남자가 중간에 한 말처럼 각 대륙의 대표들이 모여서 대화하는 거 흥미롭긴 하지만 집중이 안돼서 글을 도저히 쓸 수가 없다. 예전 같으면 이런 대화 기회가! 하며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내 일정이 더 소중하다. 

결국 프랑스 아이와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숙소로 올라온다. 오늘은 키보드가 아닌 단모음의 파워로 마무리해야겠다. 근데 쉽지 않다. 손도 아프고 오타 작렬...

확실히 지난번 왔을 때의 방콕은 큰 감흥이 없었지만 오늘의 방콕은 뭔가 정감이 간다. 지난번에는 남의 길을 따라가려 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오늘처럼 그냥 내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발길 닿는 곳으로 향했을 때 도시도 좀 더 알게 되고 내 자신도 더 만족스러운 거 같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는 그곳 여행에서의 기분을 30프로 이상 좌지우지한다. 이 게스트하우스는 뭔가 마음에 든다. 사람들도 열려 있고 분위기도 좋다. 다음번에도 이곳으로 반드시 올듯하다. 

이제 방콕이 더 이상 꺼려지는 도시가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다음 방문이 기대된다. 오늘 하루, 엄청나게 걸으면서 고생했지만 굉장히 의미 있고 만족스러운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로서 이번 여행의 예고편이 드디어 끝나고 내일부터 본편인 미얀마에 입국하게 된다. 가슴이 들뜬다. 하지만 옆 침대에서 지금 심하게 코를 골고 있어서 잘 잘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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