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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Jul 13.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11

@ Bagan, Myanmar

집착이 시작되었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밤새 핸드폰을 보며 계속 다운로드 상황을 확인한다. 여행 와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이게 아닌데...


다행히 에버노트는 로그인에 성공한다. 어제 썼던 게 완벽히 다 살아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행히 중간에 백업이 됐는지 꽤 많이 살아남았다. 밤새 티스토리 어플도 설치도 잘되고, 크롬 설치에도 성공한다. 아무래도 저녁에 사람이 안 쓸 때 인터넷 속도가 낮보다는 더 잘 나오나 보다. 그래봤자 모뎀보다도 느리지만.

5시가 되니 룸메이트들의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다. 잠은 많이 못 잤지만 그래도 나도 오늘은 해돋이를 보러 가야겠다. 이들의 눈에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까? 하루 종일 스마트폰만 잡고 있는 게... 나도 이건 영 아니지 싶다.

5,000원을 주고 자전거를 다시 한번 하루 종일 임대한다. 그래 봤자 아마 해돋이와 일몰만 보지 않을까. 어제의 기분이라면 한낮에도 좀 다녀볼 텐데, 지금은 엄두도 안 나고 의욕도 사실 없다.


그래도 큰 길을 새벽에 달리니 기분은 좀 풀린다. 그러고 보면 여행 와서 일몰은 많이 봤어도 해돋이는 빠이에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안봤다. 왜일까? 항상 일찍 일어났는데도 뭔가 예전처럼 해돋이에 의미를 많이 부여하지 않는 것 같다. 여행 자체를 즐기게 된 건지, 아니면 그냥 무심해진 건지 잘 모르겠다.

혼자 새벽 길을, 해 뜨는 방향을 응시하며 자전거에 올라타서 달려본다. 어디서 봐야 할지 전혀 계획을 안잡고 나왔기에 가다가 좋은 장소가 보이면 그냥 그곳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근데 조금 늦었나? 자전거를 몰고 가다 막혀 있던 시야가 뚫리고 멀리 바라보니, 이미 해가 반 정도 떠 있다.

일찍 나온 거 같은데 이게 늦게 나온 거란 말인가. 5시 반에 나오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었나 보다. 마음이 급해져서 계속 적당한 장소를 찾는 와중에 다행히 때마침 우측으로 작은 길이 열리고 안에 제법 괜찮아 보이는 사원이 모습을 나타낸다.

그 길로 들어선다. 사실 다른 선택권이 있지도 않다. 조금 들어가니 일출을 보러 온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뭐 그래 봤자 3명 정도다. 왠지 그쪽에 합류하고 싶지는 않아서 반대편 왼쪽의 논두덩이로 들어간다. 이 전기 자전거가 안 좋은 길에 약하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크게 한번 넘어진다. 어제 넘어진 거까지 총 두 번 넘어졌다. 스쿠터 탈 때는 한번도 안 그랬는데, 확실히 차체가 약해서 그런지 균형이 더 약하다.

사실 좀 크게 꽈당했는데 저쪽에서 서너 명이 내가 괜찮은지 지긋이 쳐다보고 있으니 아프다는 티를 못 내겠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어난다. 지금은 내 기분도 평소 같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왠지 지금은 약해보이기 싫다.

조심히 논두렁이를 벗어나서 나도 결국 그냥 그 세명이 들어간 사원으로 따라 들어가본다. 그 와중에도 해는 계속 올라오고 있다.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다. 들어가면서 보니 이미 해의 꼬리가 지평선을 올라섰다.

3명은 한 탑의 옥상에 올라가 있다. 어떻게 올라간 건지는 모르겠다. 왠지 그쪽으로 가면 안될 듯해서 옆의 다른 탑으로 들어가서 올라가는 길을 찾아본다. 안 보인다. 이거 이러다 쇼는 끝나버리겠다. 일단 그냥 아무 데나 털썩 주저 앉아서 해를 지켜본다. 이미 사전적인 의미의 해돋이는 지나갔을지 모르나 여운은 남아있다.

여기 사원 복구에 한국이 힘을 좀 보탰나 보다. 이곳에서 한국어로 된 비석을 보니 뭔가 기분이 희한하다. 그 비석 옆에 자리를 잡는다.


머리 속이 복잡하지만 해를 보고 있으니 또 마음이 다소 진정된다. 뭐 사실 그래 봐야 핸드폰 하나 잃어버린 것뿐인데, 뭐 이리 호들갑이냐. 만약 글을 안 쓰게 되면 압박감에서 벗어나서 더 자유로운 여행을 할 수도 있는 거지 뭐. 지나면 다 추억이다. 인간은 모두 좋게 포장하기 때문에 지금의 이 순간도 분명히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될 거다. 마음을 편하게 갖자.


좀 생각하며 앉아있다가 너무 더워지기 전에 갈려고 일어선다. 문득 뒤를 보니 아까 그 3명은 다 가고 없다. 아까 걔네가 일출 봤던 저기에 한번 들어가볼까? 그 자리 진짜 명당 같았는데 혹시 내일 또 올지도 모르니 한번 탐사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들어간다.


사원 안에 들어왔지만 올라가는 길이 안보인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 왼쪽으로 자그마한 출입구가 있긴 한데 막다른 길 같아 보인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플래시를 키고 비춰 보니 올라가는 길이 드디어 보인다. 여기 숨어있었군. 굉장히 좁고 높은 계단을 올라간다. 당연히 안전장치 이 딴 거는 없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하며 올라간다.


다 올라서니 시야가 확 넓어진다. 밑에서는 해돋이가 모니터로 보는 영화 같았다면 이 위에서는 아이맥스관에서 보는 영화다. 여기 좋은데? 해는 이미 떴지만 잠시 바닥에 앉아서 경치를 음미본다. 생각해보니 대충 들어온 여기에 이런 곳이 있다면 바간에는 정말 숨은 명당이 많겠다 싶다. 정말 예전 인도 오르차의 판박이다.

넓게 펼쳐진 장관을 바라보다 내려온다. 살인적인 더위의 바간이니, 너무 뜨거워지기 전에는 돌아가야겠다. 하지만 지금이 아침 6시 반, 아직 시간이 너무 많다. 여기까지 온 김에 어제 못 갔던 올드 바간이나 한번 가볼까? 거긴 또 뭐가 있으려나.


올드 바간을 향해 길을 나서 본다. 역시 곳곳에 엽서에서 봤을 듯한 멋진 사원과 탑들이 퍼져 있다. 중간에 아주 큰 탑이 보이길래 멈춰서 한번 올라가 본다. 역시 올라가는 길이 좁고 가파르다. 하지만 못 올라가게 중간에서 막아났다. 여기는 올라가기 위해서 만든 걸까, 올라가지 말라고 이리 해놓을 걸까.


비록 탑의 정상이 아닌 중간일 뿐이지만, 위에서 보는 바간의 모습이 참 멋지다. 조금 위태위태하지만 계단에 잠시 앉아 있는다. 바간은 나중에 나한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짜증 나고 괴로운 도시로 기억에 남을까, 아니면 나름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었던 추억의 도시가 될까.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


이곳에 앉아 있으니 뭔가 더 둘러보고 싶은 욕구가 사라졌다. 전기자전거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 온다. 오는 길에 혹시나 싶어서 경찰서에 들려서 어제 산 내 현지 번호를 알려준다. 하지만 역시 기적은 생기지 않겠지.

더워서 일단 방으로 들어온다. 이제 어플도 다 받았겠다, 밀린 글을 한번 써볼까? 키보드를 펴고 새로 산 스마트폰을 연결하여 글을 쓰려한다. 첫 단어 두어 개를 쓰자 스마트폰이 갑자기 재부팅을 한다. 허 뭐지. 어제 현장에서 키모드가 블루투스로 붙는 것만 확인했지, 실제 타이핑은 지금이 처음이다. 아 큰일이다. 글을 못 쓴다면 이걸 산 게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데.

일단 어제 샵에 한번 다시 가봐야겠다. 아직 9시가 안되었기에 누워서 잠시 기다려본다. 9시가 되자마자 다시 박스를 싸들고 어제 그 샵으로 다시 간다. 근데 이거 교환될까? 이미 뜯었기에 안 해준다고 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확인 못한 내가 잘못이다. 카톡도 등록되고 다 됐는데 키보드만 안된다. 하지만 나에게는 키보드가 전부라는게 문제다.

어제의 마음씨 좋게 생긴 아저씨와 처녀가 다시 날 맞이해준다. 여러번 봤더니 이제는 서로 보자마자 웃는다. 자연스레 어제 영어를 좀 하시던 그 키다리 아저씨도 나를 보더니 이쪽으로 온다. 셋이 다 모인 후 또 다시 바뀐 내 상황을 설명한다. 한참을 듣더니 사장님이 다른 걸로 한번 시도를 해보자고 한다.

어제 원래 사려고 했던 7만 원짜리 스마트폰을 붙여본다. 스펙을 자세히 읽어보니 보니, 램은 거의 다 512 메가라 같은데 어제 산 놈이 1.3 GHz 듀얼코어이고 원래 골랐던 더 싼 놈이 쿼드코어다. 이건 CPU 문제인 듯하다. 쿼드코어인 놈을 붙여보니 역시 잘 된다. 아 그냥 처음 골랐던 더 싼 놈으로 갔어야 했다.

아저씨한테 더 싼 걸로 가는 대신 차액은 받지 않겠다고 제의를 해본다. 미안해서 8기가 SD카드도 하나 5000키얏에 산다. 미얀마에서의 전자제품이 생각보다 그리 비싸진 않다. 아저씨 흔쾌하게 바꿔주신다. 거절해도 되는 상황인데 너무 감사하다. 어찌 보면 바간에서의 내 기억은 이 아저씨로 인하여 그나마 좋게 남을 수 있을거다.

방으로 돌아와서 박스를 뜯고 침대에 눕는다. 이제 또 다시 다 설정을 해야 한다. 어제 저녁에 한번 다 했던 것을 다시 하자니 한숨부터 나온다. 그래도 한번 했던 거라 어제보다는 쉽게 된다. 단, 문자 인증이 안돼서 카톡은 안되는데, 뭐 이건 괜찮다. 안 되는 것이 단절에 더 좋을 수도 있다.

키보드를 스마트폰에 붙이고 침대에 자리 잡고 앉는다. 에버노트로 썼던 어제 부분에 그 이후 이야기를 추가해서 드디어 마무리하고 여행기를 올린다. 하도 고생을 했던 지라 올리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좀 쉬면서 책을 보다가 식사 시간이 되어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 점심은 크게 여러곳을 탐험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냥 어제 먹었던 그곳으로 다시 간다.

역시나 밥은 그냥 그렇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맛이 없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좀 제대로 하는데서 먹어봐야겠다. 한 끼라도 맛있게 먹고 싶다.

돌아오니 룸메이트들도 모두 돌아와서 누워서 쉬고 있다. 낮 시간에는 바간의 더위가 너무 강렬해서 도저히 돌아다닐 수가 없다. 나도 이들과 함께 누워서 한숨 낮잠을 청한다. 그래도 여기 뭔가 잠은 잘 온다. 에어컨도 시원하고, 룸메이트들도 코를 아무도 안 골아서 잠자기 참 좋은 환경이다.

4시가 되어서 다 같이 일어난다. 다들 무슨 약속이 있는건지 일어나고서는 한명씩 어딘가로 향한다. 나도 이제 해돋이를 보러 나가 봐야겠다. 괜히 헤매지 말고 첫날 일몰을 보았던 그곳으로 가고 싶다. 가는 길에 데이터도 충전해야겠다. 아직 설정이 다 안 끝났는데도 데이터를 벌써 다 써버렸다. 그럼 그 샵에 또 다시 들려야 하네. 그 아저씨, 날 보면 또 웃겠군.

내가 그 샵을 다시 찾아갔을 때는 이미 키다리 아저씨와 다 같이 모여있다. 여기 복덕방 같은 곳인가? 괜히 오해할까 봐 교환하러 온거 아니라는 뜻으로 손을 막 흔들며 들어간다. 이번에는 또 다른 구매를 하러 온 거예요, 손님입니다! 알겠다고 막 웃으신다. 여기 있으면 뭔가 마음이 편해진다. 그만큼 미얀마 사람들이 착해서일거다. 3,000키얏으로 400메가 정도의 데이터를 산다. 속도가 엄청 느려서 400메가 이상은 사실 쓰기도 힘들다. 인사를 하고 나온다. 내일 떠나기 전에 이곳에는 들려서 인사를 하고 가야겠다.

전기자전거에 올라타고 길을 나선다. 아무 생각 없이 새로 산 핸드폰을 왼쪽, 카메라를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 길을 달린다. 약간 둔턱이 있어서 자전거로 덜컹거리며 지나간다. 갑자기 옆에 사람이 "할로"를 외치는게 들리는데 그냥 무시하고 간다. 근데 가다 보니 뭔가 어색해서 주머니를 보니 핸드폰을 넣었던 왼쪽 주머니가 비어있다. 화들짝 놀래서 뒤를 돌아보니 한 어린 아이가 줏어서 나에게 달려오고 있다.

겁자기 깨닫는다. 어차피 잊어버릴 거였구나. 그냥 그때 잊어버린 것뿐이지, 나의 성격의 인과를 봤을 때 걔는 그냥 내 것이 아니었다. 줏어서 달려오는 아이를 보니 현지인들을 조금이나마 의심하고 불신했던 내 자신에 대해 오히려 반성하게 된다. 완전히 100% 내 잘못인데 괜히 남이나 의심했다.

근데 엊그제 봤던 그 강이 어딘지 전혀 감이 없다. 아직 시간이 좀 이르니까 그냥 대충 아무데로나 가볼까. 골목길로 당기는 데로 가다 보니 결국 또 경찰서가 있고 내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던 그 큰 길이 나온다. 무슨 모든 길은 이길로 연결되어 있는 건가. 어쩔까? 또 올드시티를 가? 하지만 뭔가 나에게 바간은 그 유명한 사원들과 전혀 상관없는 곳이 되었다. 온 김에 경찰서나 들리도록 하자.

경찰서에 가서 정보를 조금 업데이트하러 왔다고 한다. 전에 작성한 것을 찾으시려고 막 뒤지시는데 못 찾는다. 아, 아마도 핸드폰을 찾기는 힘들겠구나. 뭐 어차피 기대는 하지 않지만 가끔 5년 후에 잃어버린 물건이 돌아오는 그런 영화도 있으니 한번 기록을 남겨볼까 한다.

결국 저번에 썼던 종이를 못 찾아서 그냥 다시 쓴다. 이번에는 조금 부담을 느끼시고 관리를 좀 하시라고 약간 보고서 형태로 작성한다. 그래 봤자 그냥 나열이지만. 

이름 : 이경훈
국적 : 한국 (남쪽)
보고 : 올드바간으로 가는 길에 삼성 노트 4를 분실하였음
번호 : 092-###-#### (~5/12)
이메일 : leekh@me.com
주소 : **********, 서울, 한국
* 혹시라도 찾게 되면 메일을 주시거나 저 주소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람들이 경찰서에 많이 모여 있다. 모여있던 사람들, 경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사건에 대해 이런 저런 관심을 갖는다. 바간을 떠난 후에 어디로 갈 거냐 묻길래, 사실 나도 확실하진 않지만 일단 Kalaw로 간다고 한다. 얘기했으니 이제 거기로 가야겠네. 그쪽 경찰서에도 연락하겠다고 한다. 내 번호를 다시 한번 알려준다. 그래도 이리 관심을 가져주니 좋다. 근데 진짜 이 많은 사람들 중 진짜 누가 경찰이지?

아까 첫날 일몰 사원을 못 찾고 헤맸기에 이번에는 다시 출발하기 전에 지도를 잠시 본다. 그래도 마지막 일몰은 마음이 편한 곳에서 보고 싶다. 우연히 찾아갔지만 정말 아름다운 일몰을 선사했던 그곳, 찾아보니 대충 감이 잡힌다. 전기 자전거에 다시 몸을 싣고 다시 출발한다.

가다가 샛길이 보이길래 본능처럼 또 들어 가본다. 배구를 하던 지난번 애들도 보이고, 엄청난 높이의 네트로 족구를 하는 신기한 광경도 본다. 역시 공 하나만 있으면 되는 운동이 좋다. 빈부, 남녀노소 상관 없이 이런 곳에서도 모두가 즐길 수 있다.



다른 샛길이 보이길래 역시 또 들어가본다. 여기는 뭐지? 조금 가니 강이 나온다. 저번에 일몰을 봤던 그 강이다. 강으로 내려가 보니 애들이 수영도 하고 있고 배에서 사람들이 낚시도 하고 있다. 아, 아름답다. 뒤에서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는 해와, 밑에서 배경이 되어 주는 산과 강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잠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생각에 잠긴다. 나는 결국 하루를 허비한 거다. 시간을 허비한 게 아니라 마음을 허비했다.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리 마음 졸이고 했는지, 만약 필요하면 사면되고, 아니면 말면 될 것을. 하루를 쓴 거는 아깝지 않은데 그 하루 동안 잠시 여행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이곳에 앉아있으니 다시 마음이 여행자로 돌아온다. 평온을 다시 찾는다. 이제 다시 나의 여행을 할 수 있을 거 같다. 어제 안 떠나고 하루 더 있기로 하길 잘했다. 강에서 헤엄치는 아이들이 "할로"라고 밝게 인사하길래 나도 웃으며 "밍글라바"라고 대답해준다. 이곳 사람들은 너무 해맑다. 인사하면 무조건 웃으면 인사를 돌려준다.


근데 이곳에 오래 앉아 있기는 좀 그렇다. 사방이 쓰레기다. 나름 머물만한 장소를 잡아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여긴 아니다. 왼쪽을 보니 그때 그 사원이 보인다. 멀리서 봐도 역시 멋있다. 그래, 다시 저기로 가자. 바간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편했던 곳이다.


전기자전거를 타고 가니 금방이다. 내려서 익숙하게 신발을 벗고 사원으로 올라간다. 오늘따라 사람이 매우 많다. 오늘 무슨 날인가? 생각해보니 금요일 같기도 하다. 그래도 요일을 잊고 있는 거 보니 여행자가 맞긴 하다.


자리를 잡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을 보더니 사람들이 갑자기 모여든다. 처음에는 한 명이 오더니 갑자기 사람들이 우루루 와서 나를 에워쌌다. 왜 이런 거지?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약 20명이 둘러싸고 있다. 아 이제 갔다. 아 아니다, 다시 왔다. 다른 애들이... 이렇게 포위하고 있으면 쓸 말이 생각 안 나는데. 애들아 무서워.... 아 이제 진짜 갔다. 후...

미얀마에서 첫 한국인을 여기서 마주친다. 한국말이 들리길래 보니 어르신 4분이 가이드랑 같이 오신게 보인다. 이 사원이 나름 유명한 사원인가 보다. 근데 설명 좀 듣고 한바퀴를 둘러보시더니 그냥 떠나신다. 아니 이 좋은 일몰을 왜 안 보고 그냥 가시지. 여기까지 오셨으면 그래도 좀 있다 가시지. 안타깝다. 이건 가이드의 문제다. 강가 쪽에 유명한 식당이 있던데 혹시 거기서 보시려나? 그래도 거기서 보는 거랑 여기서 보는 거랑 다른데...

이번에는 한 꼬마가 옆에 와서 나를 쳐다 보길래 친근해지고자 내 카메라를 주고 날 좀 찍으라고 부탁해본다. 수줍어하면서 찍는다... 내가 찐따처럼 나왔다. 눈도 감고 있고, 야 잘 좀 찍지. 아 마음의 여유가 진짜 완전히 돌아왔다. 아까 경찰서 들린 게 내 미련의 마지막 마무리였나 보다. 내일 떠나면 마음을 다지기 위해서 여행복 MK3나 한번 준비해볼까?


아직도 해는 중간에 있다. 조금 더 시간이 있어야 하나보다. 그래도 해가 지려고 하니 조금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슬쩍 엊그제 그 자리로 가본다. 아직은 아무도 벽에 안 앉아있다. 내가 올라가면 저번처럼 또 다들 올라오겠지?


저번에 이미 한번 했던 일이라 그런지 눈치 안 보고 벽에 올라가 앉는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지만 앉아서 그냥 멍하니 해를 바라본다. 역시 내가 올라가니 한둘 올라와서 자리를 잡는다. 이래서 처음 행동을 하는 용기가 중요하다.


앉아서 멍 때리고 있으니 많은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은 집착이 문제다. 그 집착을 버리면 편해지는데, 그걸 버리는 게 너무나도 어렵다. 그깟 물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안 다치고 다니는 게 어디냐. 거꾸로 카메라를 잊어버렸으면 그 사진과 추억은 어떻게 할 뻔했나.



남들과 같아야 한다는 집착, 내 친구는 어디서 얼마를 버는데 나도 그만큼은 벌어야 하지 않겠냐는 집착, 나름 명문대를 나왔으면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집착, 현실의 수 없는 집착에서 나는 과연 내 자신을 지키고 있는 걸까. 집착은 나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닌 눈 앞에 당장 처리해야 하는, 당장 비교되기 싫은 일을 하게 만든다.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여행은 원효대사의 해골바가지를 계속해서 발견해가는 과정인가 보다. 이제 진짜 머리 속에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은 그냥 내 물건이 아니었던 거다. 오히려 얘 때문에 또 내 자신을 더 다스리게 되었으니 오히려 고맙다. 게다가 계속 쓰고 싶었지만 못 썼던 트루 핫핑크 핸드폰도 이곳에서 드디어 써보게 되었다. 나만의 유니크한 "Bought in Myanmar, Made in China!!"


해는 구름에 가려져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상적인 일몰은 보지 못할 거 같다. 그래도 괜찮다. 그냥 뭔가 마음이 편해졌다. 내려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여유가 생겨서 주위를 둘러보고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밍글라바"라고 웃으며 인사를 나눈다.


전기자전거를 몰고 숙소로 돌아온다. 오늘 저녁은 뭔가 맛있게 먹고 싶다, 아니 뭘 먹어도 맛있게 먹을 듯하다. 자전거를 반납하고, 어제 핸드폰 판매 아저씨가 추천해줬었던 식당을 찾아가본다. 어제는 가보니 문 닫아서 못 갔는데, 오늘은 열었으려나?


역시 문 닫았다. 좀 아쉽지만, 뭐 다른데 가면 된다. 큰 길로 가서 사람이 좀 많은 곳 중 그냥 아무 데나 들어간다. 뭔지 모르지만 카레 뭐시기를 시키고 물을 같이 시켰다가 마음을 바꾸고 맥주로 바꾼다. 그래도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인데 맥주 한잔 해야지.

생각보다 한참 후에 음식이 나온다. 역시 그냥 밥과 카레, 조촐한 한상이다. 거기에 마늘, 고추 소스를 준다. 밥을 한 숟가락 뜨고, 그 위에 정체 모를 고기와 카레를 얹고, 마늘, 고추를 한 조각씩 얹는다. 입을 크게 벌려 한입에 집어넣는다.

맛있다. 미얀마 와서 거의 처음으로 진짜 맛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향신료가 강하거나 그런 느낌이 아니라 순수하게 맛있다. 이게 내 마음이 열려서 맛있는 건지, 실제 맛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맛있으니 됐다.


정신없이 다 비운다. 맥주도 벌컥벌컥 마신다. 처음으로 일하시는 분에게 맛있다가 미얀마어로 뭐냐고 물어본다. "깝..." 뭐라고 하셨는데 잊어버렸다. 아 이놈의 기억력.


밥 다 먹고 여운을 즐기고 있는데 옆에 왠 동양 남자애가 혼자 온다. 슬쩍 말을 걸어보니 홍콩 사람이다. 혼자 온 사람들은 말을 걸면 누구나 다 좋아한다. 내가 먹은 메뉴가 맛있었다고 추천해주고, 더불어 내가 아는 바간에서의 노하우를 조금 전달해준다.

이제 돌아가야지.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선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핸드폰 판매하는 곳 처자가 마감을 하고 있다. 낮에 왔을 때 둘이 아버지, 딸이냐고 물어봤다가 아주 민망한 상황이 왔었다. 그 둘이 부부란다. 여자가 훨씬 젊어 보이는데... 아저씨 능력 좋다.

원래 내일 음료라도 하나 사가지고 가서 인사하려고 했는데, 내일 일찍 떠날지도 몰라서 그냥 지금 들린다. 아들인지, 동생인지 항상 떠도는 아이와 젊은 사모님이 함께 마감을 하고 있기에 내일 떠난다고 그동안 감사했다고 꾸벅 인사를 한다. 그분도 반가워하는 눈빛으로 환하게 내 인사를 받아준다. 여기 신세를 진짜 많이 졌다. 어찌 보면 내 바간에서의 추억은 이곳과 해지는 곳을 본 그 사원 둘 뿐인 거 같다. 안녕히 계세요. 제주디마레.

여기까지 인사를 하고 나니 이제 바간에서의 마지막 정리가 끝난 거 같다. 마음을 비우고 나니 아까는 굉장히 안좋아보였던 곳들도 다 정이 간다. 갑자기 하루 더 있을까 생각이 들다가 이내 생각을 지워버린다. 나름의 깔끔한 이별이다. 더 이상 있는 건 영화에서 깔끔한 엔딩이 끝난 후에 또 다른 얘기를 시작하는 것과 같다. 원래 생각대로 내일 떠나자.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마음을 정한다. 원래는 Kalaw로 가서 Inle Lake로 가려고 했는데 생각을 바꿔서 Hsipaw로 가련다. 칼로우에서 인레호수로 가는 국민코스를 따라 가게 되면 지금의 흐름에서 뭔가 크게 변화가 없을 듯하다. 어제 머물렀던 Ostello Bello의 느낌이 나지 않을까. 차라리 사람들이 잘 안 가는 곳으로 가서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보고 싶다. 아직 미얀마에서의 여행은 10일이나 남았으니, 시포로 가서 또 다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런 이유로 내일 다시 Mandalay로 돌아가고자 한다. 오자마자 나에게 가장 좋은 기억을 심어줬던 Ace Star Hostel도 다시 가고 싶다. 그곳에서 다시 한번 재정비를 하고 북쪽으로, 시포로 출발하자. 뭔가 다시 새로운 여행에 가슴이 들뜬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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