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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Jul 18.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16

@ Hsipaw, Myanmar (Trecking Day1)

16번째 맞이하는 아침이다. 공식 일정이 31일이니 이제 드디어 반을 넘긴 셈이다. 근데 과연 공식 일정인 31일로 이번 여행을 끝내게 될까?

오늘은 드디어 트래킹을 떠나는 날이다. 8시까지 어제 예약한 그 여사장님네로 가야 하니 조금 서둘러본다. 어제 숙취로 인한 낮잠을 하도 자서인지 새벽에 잠을 잠깐 깬 이후에 다시 잠에 못 들었다. 그래도 절대적인 수면 시간은 충분하니 괜찮겠지.

일어나자마자 신호가 와서 근심부터 깔끔히 해결한다. 트래킹 중에 신호가 오면 어쩌나 걱정이었는데 기특한 내 몸은 알아서 오전에 해결해준다. 근데 부족 마을의 화장실은 진짜 어쩌려나. 감이 안 온다. 그래도 나름 여행자들이 방문을 꽤나 하는 곳이라니 조금은 외지인에 익숙해져 있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막상 미얀마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안 그럴 거 같기도 하다. 이곳에 나중에 병만족이 오지 탐험! 하면서 나오는 거 아냐?


일어났으니 아침을 먹으러 옥상으로 올라간다. 어제는 속이 안좋아서 제대로 밥을 못 먹었지만 오늘은 육체적으로 힘든 날이니 배를 든든하게 채워야 한다. 오늘 총 8시간을 걷게 된다. 내 발이 괜찮을까? 오늘 하루만 힘 좀 내자 애들아.


자리에 앉으니 아침을 가져다준다. 어제는 볶음밥이더니 오늘은 면이다. 근데 밥에서 면으로의 변화만 있을뿐, 양념이나 계란 프라이 올리는 거 까지 동일하다. 거기에 식빵 2개, 수박, 그리고 바나나까지, 어제는 미처 몰랐던 이곳 조식의 푸짐함을 오늘 알게 된다.

커피를 한잔 타서 밥과 함께 천천히 먹는다. 맛이 훌륭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오늘 하루를 든든하게 해줄 고마운 양식이다. 아침마다 풍기는 미얀마 특유의 분위기가 조식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강가 쪽은 안개가 자욱하게 껴 있고, 반대편은 커다란 나무들이 나와 눈높이를 같이 하고 있다.


친구들과 오래간만에 얘기를 하다가 오늘이 연휴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또 잊었다. 찾아보니 수요일이다. 그러면 어제 하루가 휴일이었던 거니 일하는 월요일이 껴서 막상 연휴는 아니지 않나. 나랑 별 상관없는 쓸데 없는 생각을 해본다.

어제 노여사와 얘기하다가 일정을 연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일찍 가봤자 노여사는 경주로 떠나서 만나지도 못하는데다가, 이번에 가보지 않으면 또 언제 올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라오스, 그리고 시간 나면 베트남까지도 찍기로 결심한다. 아직 빌어먹을 에어아시아의 아세안패스표가 2장이나 남았지만 30일 기한이 촉박해서 이 중에 하나만 쓰기로 한다. 여기서는 인터넷이 너무 느려서 노여사한테 메일로 예약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방콕에서 라오스로 간 이후에는 진짜 아무런 계획된 일정 없이 자유롭게 다니게 된다. 여러곳을 땡기는데로 육로로 이동하다 귀국할때는 대한항공 마일리지를 사용해서 일본까지 편도신공을 펼칠 계획이다. 하노이에서 일본으로 마일리지를 이용해서 편도표를 끊으면 하노이-인천, 인천-일본, 이렇게 표 2장이 생긴다. 인천에서 스탑오버가 1년까지 가능하기에 일본은 1년 안에 언제든 가면 된다. 이리 된거 이번 여행이 끝나면 조만간 노여사와 일본이나 잠깐 갔다 올까 생각 중이다.

아침을 다 먹고 커피를 한잔 마시며 어제 쓴 글을 올린다. 이곳은 와이파이가 느린지라 사진 없이 글만 올린다 해도 잘 안 올라가서 3G를 이용하여 올린다. 이상하게 갈수록 인터넷이 느려지는 거 같다. 오늘은 이동하느라 글을 쓰기 힘들 거 같아서 걱정이다. 어제 긴 글을 한번에 몰아서 써보니 이게 엄청 빡센 작업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그때 써야 재미도 있고 그때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데... 뭐 어쩔 수 없다.

밥을 먹고 쉬다 보니 7시가 넘었다. 이제 슬슬 일어나서 짐을 싸고 나올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도 예의상 나가기 전에 세수는 한번 해줘야겠다. 선크림도 발라야 할까?


내려와서 짐을 싼다. 이것도 트래킹이니 짐이 많으면 피곤해진다. 뭘 가져가고 뭘 남겨놓지? 일단 비 올지 모르니 우비는 집어넣고, 혹시 모르니 반창고와 연고를 챙기고, 잠옷 하나 넣고, 쫄이도 필요할지 모르니 포함시키고, 폭포를 간다고 했으니 수영복까지... 이거 넣다 보니 한 짐이 나온다. 뭐 막상 그렇게 무겁지는 않으니 한번 들고 가봐야겠다.

로비로 내려가서 어제 얘기한 데로 짐을 맡겨놓겠다고 하니 어떤 구석진 방으로 데려간다. 딱히 짐을 안전하게 챙겨놓을 방처럼은 안 보이는데. 뭐 그래도 미얀마에서 최소한 도난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작은 가방을 들고 여사장님네 가게로 출발한다. 2주만에 쫄이를 벗고 운동화를 제대로 신으니 뭔가 발에 느껴지는 감촉이 낯설다. 그래도 역시 쫄이가 최고이긴 하다.

내가 1등이다. 아니 지금 시각이 45분이 지났는데 왜 아무도 없는 거지. 앞으로 코리안 타임이 아니라 웨스턴 타임이라고 지어야겠다. 여기 스태프들과 리버투어를 하며 하루를 함께 보낸 정이 있어서인지 남편분과 가이드 전부 나를 보더니 무척 반가워한다. 아들내미는 지난번에 조금 친해졌었지만 그새 또 내가 어색해졌는지 나를 보더니 도망가서 숨는다. 아기들하고 친해지기 정말 힘들구나.


사람들이 올 때까지 차를 마시면서 글을 좀 쓴다. 텔레비전에서는 싸이가 나오고 있다. 여기 아들내미가 싸이 팬이라더니 정말 여기 티비에서는 주구장창 싸이만 틀어놓는다. 차라리 싸이처럼 머리를 자르고 춤을 제대로 배워서 다녔으면 인기가 좀 있었으려나? 그래봤자 하등 의미 없는 인기였겠지 뭐.

이 이간들 8시가 돼도 안 온다. 아까 숙소에서 아침 먹고 내려 올 때 보니 끄대서야 한 명이 올라오더니만 아직 준비 중인가 보다. 이런 예의 없는 것들.


오랜만에 카톡 하면서 사람들하고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노여사네 회사 선배들 두 명이 지금 연애를 하는데 다 나와 같은 학교 같은 과 후배들이란다. 참 세상 좁다. 역시 죄짓고 살면 안된다.

조금 기다리니 드디어 사람들이 도착했다. 늦게 왔으면서도 당당하게 천천히 들어온다. 그래도 다 도착했으니 이제 출발할 수는 있겠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프랑스 사람들은 진작부터 서로 친하게 지낸 듯해서 같이 잘 어울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자 이제 출발. 가방을 짊어지고 길을 나선다. 가방이 그래도 가벼워서 걸어가기는 편하겠다. 해가 중천에 떠 있어서 얼굴이 시꺼메지겠지만 뭐 결국에는 어차피 까매질 거, 그냥 포기하고 좀 일찍 까매지는게 나을 수도 있다.



프랑스인들과 대화를 좀 하면서 걸어간다. 이 친구들은 2년을 같이 여행 중이란다. 돈이 있을 때는 여행을 하다 돈이 떨어지면 호주로 가서 일해서 다시 돈을 벌고, 이런 식이다. 다들 여행 다니면서 만나 같이 다니고 있단다. 2년을 같이 다닌 사람들 사이에서 친해지려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장님 유머라도 하면서 친해져야 하려나. 모델 포스 언니는 30살 아저씨가 중간에 꼬셔서 같이 다닌다고 한다. 이 아저씨 능력 좋네. 하지만 난 더 능력이 좋지요.


길이 생각보다 꽤나 가파르다. 그래도 뒤처지지 않고 선두 그룹에 끼려고 노력한다. 이런데서 한번 뒤로 처지면 따라 잡기가 더 힘들어진다. 햇볕이 뜨거워서 선글라스를 꺼내서 낀다.


오늘의 가이드는 엊그제 보트 투어를 같이 했던 '해태'와 뉴페이스 새로운 가이드인 '조조'이다. '조조'가 메인 가이드이고 '해태'는 서브이다. 하긴 저번에 보니 해태는 아직 아는 게 없다.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중인가 보다. OJT인건가.


둘 다 한국 노래를 엄청 좋아한다. 이곳에서도 EXO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둘이 계속 '으르렁' 노래를 부르면서 따라온다. 2NE1도 꽤나 인기가 많고 빅뱅은 뭐 당연하게도 유명하다. 의외로 AOA도 인기가 좀 있다. 하지만 역시나 그 누구도 아이유를 모른다. 하....


언제나 그렇듯이 아이유 홍보대사의 임무를 시작한다. 왜 도대체 아이유를 모두가 모르는 걸까. 내가 아무리 아이유가 한국에서 제일 유명하고, 예쁘고, 노래 잘 부르고, 춤도 잘 춘다고 홍보해봤자 관심을 안 갖는다. 소속사가 문제인가? 아이유도 SM으로 가야지만 해외에서 인기를 끌려나. 하긴 일반 한류그룹들과 코드가 다르긴 하다. 팬심에 많이 안타깝다. 좋은 것은 같이 봐야 한다고 빨리 아이유가 알려져야 할 텐데.


걷다가 중간 마을에 들어선다. 전기가 안 들어와서 태양에너지를 사용하고 주변에 흐르는 물을 사용하는 마을임에도 신기하게 슈퍼마켓이 있다. 이곳에서 첫 휴식을 취한다. 

앉아서 일행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술과 음식 얘기가 나온다. 개고기 얘기가 나와서 한국에서는 많이 먹지만 나는 안 먹어봤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의외로 개고기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관대하다. 하긴 자기들은 거위 간을 불려서 먹으니 할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모두 원숭이 뇌를 산채 먹는 중국인에 대해서는 안 좋게 생각한다.

미얀마에서는 맥주를 'Happy Water'라 부르고 쌀을 발효시킨 전통주를 'Work Medicine'이라고 부른단다. 맥주는 행복한 물이고, 소주는 일을 하게 만드는 약이라는 셈이다. 한국과 나름 비슷한 듯하다. 아, 빨리 행복수를 입에 머금고 싶다. 여기 슈퍼마켓에서 전통주를 500키얏 주고 산다. 두병을 사서 저녁에 마시기로 한다. 소주를 가지고 왔으면 오늘 딱 먹을 타이밍인데 아쉽다.


시간이 좀 있어 보이길래, 키보드를 펴고 글을 쓰기 시작하니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한다. 한글도 신기하고 키보드도 신기한가 보다. 그렇다고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글 쓰기가 민망하잖아. 집중하기가 힘들지만 그럭저럭 쓴다.



해태는 16살이고, 조조는 21살이다. 해태는 동년배의 여자친구가 있고, 조조는 5살 연상의 여자친구가 있다.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있는 노여사 사진을 보더니 다들 예쁘다고 몰려든다. 당연하지, 내 여자친구가 제일 예뻐!


근데 해태는 16살임에도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신다. 뭐 이건 이 나라 문화로 받아들여야겠지? 똑똑한 아이 같은데 머리 안 좋아질까 봐 걱정이긴 하다. 정말 걱정도 팔자다. 알아서 하겠지.


물을 다 먹어서 하나 사고 다시 출발한다. 산을 올라가고 또 올라간다. 여기는 내려가는 건 없나 보다. 오르면 내려가야 하거늘 오르기만 한다. 햇빛이 정말 무섭다. 이거 진짜 시꺼머스 되겠다. 선크림 좀 바를걸 그랬나. 뭐 어떻게 한들 서울에 갈때 즈음이면 어차피 까매질 것이 뻔하다. 차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생각보다 경치가 별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무를 다 잘라내서 산이 휑하다. 농업 국가이다 보니 경작을 위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연료를 위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뻥 뚫려있어서 나름 시원하게 보이긴 한다. 중간중간에 생뚱맞게 집이 하나 둘 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도 보인다. 뭐하는 사람들일까?


지하수가 나오는 곳에서 다시 한번 휴식을 취한다. 우리만 트래킹을 하는 게 아닌지라 다른 팀들과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이곳에서 모두 만난다. 어느 그룹이나 프랑스 사람들이 많다. 미얀마는 프랑스 사람 천지다.

우리 일행의 남자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프랑스에서는 정부에서 실업자에게 지원금을 상당히 준다고 한다. 그 돈으로 열심히 여행 다니고 있다며, 이제 곧 미국식 자본주의가 도입되면 이런 시스템이 없어질 거기에 지금 많이 다녀야 한단다. 여행 다니면서 다양한 국가의 사람을 만나보면 우리나라가 절대 선진국이 아님을 느낀다. GDP, GNP 같은 수치는 높을지 몰라도 대기업 의존도가 너무 강하고 무조건 성장 위주의 발전을 해왔는지라 문화나 복지 제도가 너무나도 약하다. 프랑스에서는 우리가 알만한 대기업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많은 것을 상징한다. 삼성공화국에서 벗어나야 우리도 진정한 선진국 대열에 낄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뒤처지지 않기 위하여 가능하면 앞에서 걸어간다. 이놈들은 다 20대라 체력도 좋다. 이거 생각보다 빡세다. 하지만 나, 논산훈련소 출신의 육군 만기 제대한 남자다. 행군도 했는데 이거 하나 못하랴. 그런 생각을 하지만 결국 조금씩 뒤쳐지기 시작한다. 나이는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발가락들이 또 짓물리기 시작한다. 왜일까? 신발이 작나? 내가 걷는 방식에 문제가 있나?


결국 다음 휴식에서 신발을 벗고 오른쪽 새끼 발가락에 반창고를 붙인다. 출발 전에 테이핑이라도 할걸 그랬다. 그러고 다시 걷는데 이번에는 왼쪽 3번째 발가락이 아파온다. 지난 리버투어때 다쳤던 그곳이다. 점심 먹을 때 그쪽에도 반창고를 붙여야겠다.


한참을 걸어서 첫 번째 목적지인 한 마을에 도착한다. 아 이거 생각보다 힘들다. 중간에 포기할뻔했다. 모델 포스 여자분도 잘 걷는데 한국인의 자존심이 있지. 그래도 낙오 안 하고 잘 따라왔다. 원래 이곳을 떠나면 Kalaw에 가서 인레호수까지 트래킹도 할까 생각 했었는데 무조건 패스다. 나 이거 절대로 두 번 못한다. 노여사 말 맞다나 돈 주고 이게 왠 사서 고생이냐.


첫 번째 마을에 들어가는 줄 알았더니 그냥 밖에서만 좀 쉬다가 또 다시 출발한다. 아 이거 진짜 만만치 않다. 근데 어차피 장기간 쉴게 아니라면 조금 쉬었다가 출발해도 그게 그거다.

중간중간 쉴 때마다 글을 쓴다. 처음에는 일행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더니 이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아무래도 4명의 친한 일행에 홀로 껴서 가다 보니 혼자서 뭔가를 할만한 게 필요한데 잘됐다.


그래도 여기부터는 아까의 황무지와는 다르게 녹색이 펼쳐진다. 트래킹의 2부라 다른가보다. 숲이 우거져 있으니 그래도 공기도 좀 시원해지고 걸을만하다. 하지만 계속 꾸준한 언덕길이다. 좀 오른 다음에 내려간다더니 왜 도대체 올라가기만 하는 건데.

발바닥이 심해진다. 난 평발도 아니고 멀쩡한데 왜 이런 걸까. 물집도 잡힐 듯하다. 확실히 걷는 방식에 문제가 있거나 내 발에 문제가 있는 거 같다.


결국 뒤쳐진다. 도저히 못 올라가겠다. 너무 지쳐서 먼저 가라고 손짓을 하며 앉아버리니까 프랑스 젊은 친구 두명이 같이 쉬어준다. 이 둘의 이름은 '니코'와 '코코'다. 이해해줘. 너네도 30살 넘어봐. 30살부터는 확실히 몸의 변화가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서양인을 포함하여 나보다 늙은 배낭여행객을 아직은 못 만났다. 아무래도 체력 때문이겠지? 나도 체력의 한계를 자주 느끼는 거 보니 진짜 막판인가 보다.

좀 쉬다가 기운을 내서 일어난다. 또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래도 경치가 좋다. 발바닥이 아프지만 이곳의 경치를 느껴보려고 노력한다. 여기까지의 길이 힘들어서 바닥만 보고 계속 왔지만 이곳에서 여유를 가지고 고개를 한번 들어본다. 하, 그래. 이걸 보려고 여길 온 건데 미련하게 바닥만 보고 왔구나. 경치가 죽여준다. 숲이 우거진 것이 산속 깊숙이 들어온 것을 드디어 느낀다. 새 소리와 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우렁차게 들려온다. 역시 자연의 소리가 들리면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잠시 내려가나 싶더니 또 다시 올라간다. 도대체 목적지가 어디 있는 걸까. 1시가 넘어가면서 이제는 배고파서 걷기가 힘들어진다. 밥을 내놔라! 배고파 죽겠다. 2시쯤 먹는다고 했는데 이거 2시까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본다. 다리가 아픈 건 그래도 그럭저럭 견딜만한데 발가락의 상처가 문제다. 이거 이러다 발톱 빠지는 건 아니겠지? 쫄이를 신으면 괜찮은데 운동화만 신으면 이렇다.


한참 전에 얼마 남았냐고 물으니 15분이라고 했는데 지금 다시 물어도 15분이란다. 해태, 네 말 안 믿어! 조금 지난 후 다시 물어보니 양심은 있는지 자기도 모르겠다. 보트 투어 할 때도 길을 모르고 아무 데나 데려가서 여사장님한테 한번 혼나더니 여기서도 똑같군.

2시가 넘어가니 진짜 배고파진다. 진짜 거의 악으로 걷는다. 그러다 2시 반쯤 되니 드디어 마을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한다. 문명이다! 마르코 폴로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콜럼버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드디어 쉴 수 있다! 내 밥 내놔!


하지만 오랜만에 행군(?)이라 잠시 잊었다. 행군을 할 때는 마지막 목적지가 보일 때 부터가 사실 제일 힘들다. 역시 마찬가지로 마을이 눈에 들어오니 긴장이 풀리는지 걸음거리가 한층 더 힘들어진다. 언제나 마지막 한걸음이 가장 힘든 법이다. 일행과는 완전히 뒤쳐지지만 어차피 길은 하나라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나저나 참 생뚱맞은 곳에 마을이 있다. 이런 곳에 어떻게 이런 마을이 있지? 그것도 꽤나 큰 마을이다. 인간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조금 다가서니 마을의 모습이 좀 더 자세히 보인다. 내가 생각했던 그런 오지의 마을은 아니다. 바나나 잎을 옷으로 입고 '우가꺄꺄' 하는 그런 곳이 아니고, 나름 차도 있고 물, 전기도 있다. 혹시 모르지, 관광상품으로 코스프레를 해줄지도.




도착하니 나 빼고 모두가 앉아서 이미 쉬고 있다. 아니, 막상 가이드인 해태가 중간에 낙오돼서 아직 안 오고 있다. 제일 젊은 놈이 나보다 늦다니, 쯧쯧. 일단 앉아서 점심을 기다리면서 차를 마신다. 이곳은 무조건 뜨거운 차를 마신다. 더워 죽겠는데도 뜨거운 차를 준다. 아마도 상할까 봐 끓여서 주느라 그런 거겠지. 그래도 냉수 한 사발을 지금 먹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앉자 마자 바로 신발을 벗고 쪼리를 꺼낸다. 왼쪽 발가락을 보니 역시 상처가 꽤나 나있다.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인 후 쪼리로 갈아 신는다. 훨씬 낫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물티슈도 꺼내서 사람들에게 권한다. 물티슈를 인도 여행 다닐 때 매우 유용하게 써서 이번에도 짐에 챙겼었다. 역시 유용하다.

식사를 하러 방문한 이곳은 오늘 밤에 잘 곳이기도 하다. 나름 물부터 맥주, 각종 통조림까지 안 파는 것이 없다. 단, 냉장고가 없다. 맥주를 한 캔씩 사서 마신다. 점심을 기다리면서 맥주를 한모금 마시고 일어나니 갑자기 어지럽다. 빈속인데다 힘든 길을 걸어와서 그런가 보다. 더 마시면 안좋을듯 해서 안 마시고 다른 애들한테 넘겨준다. 프랑스인들은 술 정말 잘 마신다. 와인 때문일까.


여기도 고양이가 있다. 심지어 아깽이도 있다. 우리 둘째 고양이도 처음에 길에서 픽업할 때 저만했는데, 지금은 돼지가 되어버렸다. 너희도 곧 돼지가 될거야. 갑자기 밖에서 고양이가 쥐를 하나 물고 들어온다. 와, 이런거 말로만 들었지 본건 처음이다. 사진을 찍으려고 따라 들어가니 고양이들끼리 싸움이 나더니 한놈이 결국 이기고 전리품으로 쥐를 입에 문체 사라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사진도 못 찍는다. 고양이가 정말 쥐를 먹는구나. 우리 애들은 뚱뚱해서 쥐는 절대 못 잡겠지.


드디어 밥이 나온다. 밥 먹자! 밥과 카레, 그리고 각장 반찬이 같이 나온다. 프랑스 친구들과 함께 둥글게 앉아서 같이 식사를 한다. 미얀마식 김치가 나오고, 카레와 오이 샐러드도 나온다. 다들 배고팠는지 밥을 두세 그릇 먹는다. 나도 세 그릇을 게걸스럽게 먹는다. 밥을 먹으니 드디어 좀 살 거 같다.


밥을 먹고 앉아서 죠죠가 틀어주는 미얀마 노래를 들으면서 키보드를 핀다. 미얀마 음악은 뭔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게 있다. 프랑스 애들은 낮잠을 잔다며 아까 알려준 방으로 올라간다. 나는 죠죠, 해태와 남아서 수다를 떨면서 글을 쓴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긴 했지만 은근히 이곳도 상품화된 건지, 오지의 부족 마을에서 지낸다는 느낌은 전혀 안 든다. 그냥 조금 허르스름한 펜션에 온 기분이라고 할까. 캠프파이어에 전통복을 입고 창을 하늘에 찌르면서 우가우가 하며 불 주위를 도는 것을 원한 거는 아니지만 솔직히 살짝 실망스럽긴 하다.

조조와 해태, 둘 다 한국인은 나를 처음 본다고 한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얘네들한테 한국 단어를 몇 개 알려줬다. 물, 불, 폭포, 돌 같은 간단한 단어들. 나중에 한국인 오면 얘기해보라고 했는데 한국인이 올지를 모르겠다. 언젠가는 미얀마도 인도나 태국처럼 한국 여행자가 넘쳐 나겠지?

아까 오면서 니코한테 들으니 라오스 방비앙에는 지금 여행자 중 80%가 한국 사람이란다. 아주 난리가 났단다. 난 텔레비전에서 어떤 곳을 보여주면 왜 꼭 거기를 가려고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된다. 그런 프로를 보면서 여행이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좋지만 꼭 '라오스 방비앙'을 가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오히려 붐빌게 뻔하니 다른 곳을 가는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미얀마에는 한국인들이 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마음이 건강한 여행자들만.


좀 앉아있다 보니 조조와 해태도 어딘가로 사라진다. 자러 갔나 보다. 이곳의 거주인들이 생활하며 왔다 갔다 하는 곳에 여행자 중에서는 나 혼자 앉아있자니 조금 뻘쭘해서 나도 자러 올라가 본다.


방이 두개인데, 한 방은 이미 30살의 프랑스 아저씨 '욘'과 아직 이름을 파악 못한 모델 언니가 차지한다. 뭔 여기까지 와서 연애질이야. 누구는 여자친구 없나. 쳇. 다른 방에 가니 이곳에는 니코와 코코가 옷을 벗고 이미 잠들어있다. 칙칙한 총각 냄새 나는 방에서 오늘 밤을 불 태우겠군.

서양인들은 진짜 그냥 옷을 훌러덩 훌러덩 잘도 벗는다. 모델 언니도 속옷 패션으로 다니고, 얘네도 좀 덥다 싶으면 망설이지 않고 그냥 벗는다. 그렇다고 몸매가 막 좋은 것도 아니다. 유교권 나라에서 나고 자난 나는 그런 탈의가 쉽지 않다. 친한 친구랑 둘이 있어도 잘 못 그런다.


4시인데 할 일이 없다. 이런 줄 알았으면 책이라도 가지고 오는 건데. 킨들을 넣었다가 어차피 여기서 볼일이 없을듯 싶어서 막판에 가방에서 빼버렸다. 코코는 깊이 잠들었고 니코는 핸드폰으로 책을 보고 있다. 나는 뭐하지? 할게 없을 때는 뭘 하겠어. 키보드나 펴야지.

근데 쓰다보니 현 시점까지 글을 다 써버렸네? 한 시간은 더 보내야 하는데 당황스럽다. 글을 좀 천천히 쓸걸. 스펙터클한 현지 부족 탐방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는데 꾸지르르한 방에서의 완전 정적인 낮잠 체험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저녁에는 조금 이벤트가 있으려나.


글도 다 써서 딱히 할일도 없기에 누워본다. 엄청 덥긴 한데 꿈쩍 안 하고 시체 놀이를 하고 있으니 그래도 조금은 견딜만하다. 열린 창문을 통해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닭소리가 은근히 정겹다. 하지만 방에서 온몸으로 느껴지는 쾌쾌한 총각들의 땀 냄새는 절대 정겹지 않다.

할 일이 없으니 괜히 스케줄이나 좀 짜본다. 오늘이 6일이고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가 12일이니 미얀마에서는 앞으로 6일이 더 남았다. 일단 내일은 시포로 돌아가서 하루 더 잘 생각이다. 이 상태로는 힘들어서 이동도 못하겠거니와 막상 시포에 왔으면서 그곳의 명소는 한번도 못 가봤기에 시간을 내서 떠나기전에 한번쯤 가보고 싶다. 그러면 8일에 기차를 타고 그 유명한 다리를 건너서 핀요린으로 가게된다. 8일 저녁은 핀요린에서 자면 9일에는 버스를 타고 인레호수로 직행할 수 있다. Kalaw에서 인레호수로 넘어가는 트래킹이 좋다고 하긴 하는데, 인간적으로 트래킹은 다시 못하겠다. 마지막 일정을 인레에서 보내고 11일에 만달레이로 돌아와서 내가 좋아하는 Ace Star에서 미얀마의 마지막 밤을 지내고 방콕으로 간다. 인레가 별로면 그냥 기다리지 않고 다음날 바로 만달레이로 가서 남은 이틀을 있는 것도 괜찮지 싶다. 이렇게 짜고 보니 진짜 미얀마에서의 일정이 얼마 안 남은 게 실감 난다. 언젠가 다시 올 수 있을까, 이곳?


잠도 안 오는데 괜히 누워있는 게 바보 같이 느껴져서 키보드와 카메라를 들고 방에서 나와본다. 집을 나와서 마을 한바퀴를 그냥 걷는다. 숙소 앞에서 어떤 청년을 만나는데 학생인가 보다. 갑자기 내게 말을 걸기에 대화를 좀 해보니 영어를 꽤나 한다. 만달레이에서 공부를 하고 있단다. 미얀마에서 만난 영어 공부하는 사람들은 외국인을 보면 보통 적극적으로 말을 건다. 그리고 뭔가 말투에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나보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이 마을에서 한국인은 처음 봤단다. 야, 이거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뭐 한국인이 단 한 명도 안 오진 않은건 아닐 듯 싶지만 그래도 기분이라도 좋게 내가 처음이라 생각할련다. 미개척지를 내가 개척하다! 이곳을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 마을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조금 돌아다녀 보니 마을 전체하고 한적하고 조용한 것이 분위기가 너무 좋다. 방에서 바보처럼 누워있지 말고 진작 나올걸. 단체 관광도 아닌데 왜 가이드를 기다리듯이 그러고 있었을까. 여기에도 역시나 사원이 하나 있기에 그 앞에 앉아서 경치를 바라보며 바람을 쐬며 쉰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나가던 동자승들이 나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다. 여기서는 모두가 말을 건다. 외국인을 그리 많이 못 봐서 신기한 걸까? 아니면 그냥 원래 순수하게 타지인을 보면 무조건말을 거는걸까?



앉아서 혼자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코코와 니코가 저 멀리서 이쪽으로 걸어온다. 아 왜... 혼자 사색에 잠기고 있었는데 왜 방해하는 거니. 혼자 여행 다니다 보니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가 오히려 불편하다. 그냥 혼자 있는 게 제일이다.



그래도 온걸 피할 수는 없지. 앉아서 이들과 함께 잠시 자연을 감상한다. 해가 지고 있지만 산이 높아서 일몰을 보기는 쉽지 않겠다. 아까 숙소 앞에서 봤던 그 학생이 이번에는 이쪽을 지나가다 우리를 보고 멈춘다. 이번에는 친구도 데리고 왔다. 영어로 여러 가지 얘기를 하는데 발음이 안좋아서 사실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도 천천히 얘기를 들어준다. 이곳에서는 신분 상승을 위해서 영어공부를 하는 듯하다.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 뭐.


잠시 앉아있다 일어나서 니코, 코코와 셋이서 동네를 한바퀴 돈다. 미얀마 사람들이 원래 순박하지만 이곳은 미얀마에서마저도 산골동네라 그런지 한층 더 순박하다. 아이들이 따라오면서 까르르 웃으며 '헬로'와 '바이 바이'를 외친다. 돌아보면 도망간다. 하지만 또 다른 곳으로 걸어가면 몰래 뒤따라오면서 계속 헬로를 순박하게 외친다.


이번에는 아까 사원 앞에서 봤던 동자승이 지나가다 산책하는 우리를 보고 멈춰서 또 말을 건다. 하, 지금 이 순간, 동자승이 나무 옆에 서 있는 모습이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이 아름답다. 이거 사진으로 정말 남기고 싶지만, 내 원칙상 사람한테 카메라를 들이대지는 않는다. 아까 아이들의 모습도 너무 순수해서 사진을 찍고 싶은 유혹이 굉장히 강했지만 카메라를 꺼내지는 않았다. 사람은 기념품이 아니다.


여기 마을 사람들은 전부 다 녹차를 재배한단다. 여기 녹차가 매우 유명하다고 아까 죠죠가 얘기를 해주기도 했다. 내일 가기전에 여기서 녹차를 조금 사갈 수 있을까? 한번 슬쩍 물어봐야겠다. 한국 가서 노여사와 타 먹으면 딱이다. 사가서 선물로 주는 것도 괜찮지 싶다.



다시 아까의 숙소로 돌아온다. 해가 지고 어두워졌기에 앉아있으니 전구 하나를 켜준다. 역시 테이블에 앉아서 타자를 치고 있으니 사람들이 몰려든다. 관심을 보이기에 이게 한국어라고 하니, 여행다니면서 많이 들은 질문을 이번에도 듣는다. "한국어는 중국어와 같나요?"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나 보다. 한국어와 일본어, 중국어는 다 다르다고요! 이번 여정은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아이유를 홍보하는 여행이다.

코코가 어디선가 맥주를 두병 가지고 온다. 이제 시작인가? 오늘은 절대로 프랑스 사람들과 경쟁하지 않으리라. 욘이 방에서 내려오면서 이번에는 양주를 가지고 온다. 아 오늘 조심해야겠다. 한잔 준다고 해서 나는 지금 식전이라 안된다며 정중하게 거절한다. 내일 이동도 많은데 어제 처럼 숙취가 있으면 안된다.

같이 한잔 하며 얘기를 나누다가, 이들이 불어로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면 나도 키보드로 글을 쓴다. 한국에서는 가끔 술안주 삼아 영화 같은 영상을 봤다면, 이번 여행 중에는 맥주 한잔 마시고 글 쓰는 게 나에게 하나의 즐거움이 됐다.

프랑스에 뭐가 유명하냐고 물으니 바로 거침 없이 '바게트, 치즈, 프랑스 대혁명'을 얘기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뭐가 유명하냐고 되묻는다. 어라? 뭐가 유명하지? 삼성이라고 답하자니 바보 같고, 김치는 어차피 모른다. 유명한 철학자가 있냐고 묻는데, 없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북한 김정은과 싸이뿐이다. 이런데도 선진국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한글에 대한 얘기를 또 다시 하며 이들에게도 한글을 조금 가르쳐준다. 관심을 갖는다. 문신을 하려고 한다는데 이거 문신으로 적합한 글자인지는 모르겠다며 반긴다. 이들의 부탁을 받아 한글로 각자의 이름을 쓰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여행지를 돌아다니면서 한국에 대해 물을 때마다 참 답답하다. 결국 이들이 우리나라에 대해 아는 것은 이스포츠와 싸이, 이게 거의 전부이다. 둘 다 문화적인 대답일 수는 있지만 역사적인 큰 변화를 준 것들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 이럴 때 가끔 무너진다. 한 기업이 그 나라를 가장 대표한다고 얘기하기에는 좀 아쉽지 않은가. 심지어 그 기업이 그 나라에서 마저 이슈가 많다면 더욱 더 애매하다.

앉아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한 현지인이 대화에 낀다.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도시로 유학을 가서 영어를 공부한 친구라고 한다. 10년 전에만 해도 여기 마을에서 영어를 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단다. 이 친구가 만달레이에 가서 영어를 배우고, 그 지식을 여기의 유일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쳤기에 지금은 그래도 조금씩은 거의 다 한다고 한다.

이 친구, 그런데 21살이다. 게다가 양주를 권하니 "술 마시다가 결혼하게 됐다"고 하며 거절한다. 하긴 술이 사랑의 매개체이긴 하지. 이 친구, 미얀마에서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똑똑해 보인다. 정부에 대한 의견도  거침없이 얘기하는 것이 자기 소신이 있다. 욕심이 많았는데 결혼 이후 책임감으로 생계 유지에 신경 쓰고 있단다. 전 세계 유부남들, 힘내자!

맥주를 먹고, 양주를 비우고 있으니 저녁이 준비됐단다. 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간다. 역시 점심과 비슷한 밥과 카레 등이 나온다. 니코가 방으로 올라가더니 아까 오는 길에 슈퍼마켓에서 산 쌀로 만든 전통주를 가지고 온다. 저 술은 반주로 먹게 될 듯하다.

밥을 먹으며 나도 술을 조금씩 마신다. 이 전통술, 굉장히 독하다. 고량주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베트남 출장 갔을때 이런 술을 사서 마신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로 치면 청주 느낌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독한 버전이다.


밥을 다 먹고 프랑스 일행 4명과 오늘 가이드를 한 조조와 같이 앉아 남은 술을 마신다. 전등 하나에 의존해서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니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헌데 이놈들, 술 좀 취하더니 대화에서 불어를 사용하는 빈도가 높아진다. 그래, 나도 엊그제 술 좀 취하니까 한글이 나오더라. 어쩌겠어. 이해하자.

프랑스 애들이 샹송을 틀더니 4명이서 동시에 따라 부른다. 샹송이라 하면 프랑스에서는 우리나라 트로트 같은 장르라 생각했는데 젊은 애들이 전통 노래를 이리 좋아하는 것을 보니 희한하면서도 보기 좋다. 우리도 예전 우리의 노래 그리고 전통에 대해서 젊은 사람들이 좀 더 관심을 가지면 어떨까. 하긴 우리한테는 장윤정이 있다.


8시가 조금 넘으니 모델 포스 언니가 가장 먼저 졸리다며 일어난다. 남친인 유안, 바로 따라가면 될 텐데 굳이 조금 더 사람들과 함께 담배를 마저 피더니 시간차를 두고 일어난다. 어차피 그래 봤자 둘이 커플인 거 다 아는구먼. 남은 사람들끼리는 아직 남은 술을 마신다.

몇 명 안남고 어두운 곳에 있으니 분위기가 으슥하다. 프랑스 애들이 조조한테 슬쩍 마리화나가 있냐고 물어본다. 왜 안물어보나 했다. 왜 꼭 이런 분위기에서는 마리화나를 필요로 하는 걸까. 마리화나는 몰론 아니지만 아까도 담배를 안피는 나한테 굳이 5번이나 권하더라. 물론 다 거절했었다.


장기 여행자들이 모두 그런 건 아니겠지만 긴 여행을 하는 자들은 마리화나 정도의 가벼운 마약은 많이들 하는 편이다. 이것도 개인의 선택이라 나는 믿긴 하지만 굳이 이런 약에 의존해서 분위기를 탈 필요가 있을까 싶다. 게다가 그 시작이 보통 본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누군가가 권하는 것을 거절할 명분과 용기가 없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특히 어린 친구들은 이런 유혹을 견딜 내면의 힘이 당연히 부족하다. 물론 그냥 호기심 때문에 시작하는 자들도 많다. 나에게 마약은? 그냥 술로도 차고 넘친다.

조조, 한국 문화에 너무 깊이 빠졌다. 어디서 들었는지 나한테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한국 음악과 드라마에 대해 계속 물어본다. 이곳에서는 이민호가 가장 인기가 많고 요즘은 시티헌터라는 드라마가 유명하단다. 그거 한국에서 망한 드라마 아닌가? 요즘 우리나라 드라마는 국내를 겨냥해서 만들 필요가 없다. 이민호도 꽃남자 이후에 그냥 그런가보도 했더니 여기서는 슈퍼 인기이다.

헌데, 조조 좀 과하다. 프랑스 애들하고 넷이 남아있는데 나한테 너무 집착한다. 이해는 되지만 나머지 일행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싶다. 내가 주제를 자꾸 바꾸는데도 계속 현아, 포미닛, 이민호, 티아라 얘기만 한다. 낮이라면 모르겠는데 이런 아늑하고 으슥한 분위기에서 연예인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은데.

결국 니코가 자러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재미없었을 거다. 나도 사실 불편해서 자리를 파하려고 한다. 코코한테 어쩔거냐 물어보니 어차피 자야 하니 이만 일어서자고 그래서 모두 함께 자리를 파한다. 뭔가 아쉬운 저녁이다. 매우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저녁이었음에도 뜨뜨미지근하게 정리를 하게 되었다.

정리를 하고 방으로 올라온다. 우리 방은 불이 없다. 물론 화장실에도 불이 없다. 후레쉬를 챙겨 오지 않아서 코코한테 빌려서 화장실을 자기전에 갔다 온다. 방으로 돌아오니 둘 다 그 어두운 데서 만화를 보고 있다.

나도 정리하고 자야겠다. 이 마을, 생각보다 기억에 남을 마을 같다. 하지만 그것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행군 같았던 트래킹이다. 땀을 흘리고 씻지 못해서 땀 자국을 따라 옷의 프린팅 같은 자국마저 생겼다. 그리 땀을 흘리고 그냥 자자니 영 찝찝하다. 내일은 돌아가자마자 일단 씻고 싶다. 그래도 이곳 마을 사람들이 남긴 인상은 꽤나 강렬하다. 자기만의 전통을 지키려 하지만 또 변하는 세상에 대응하고자 영어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이 다들 멋있어 보인다. 이렇게 조금씩 변하는 거고, 이렇게 조금씩 물드는 걸거다. 순수함이 변하는것이 아쉽지만 이것이 또 순리라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이미 그 길을 넘어온 주제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순수를 지켜!'라고 얘기하는 것만큼 이기적인 것은 없다. 어떤 변화가 오든, 그저 이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땀에 젖은 몸과 함께 잠을 청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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