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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Jul 20.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17

@ Hsipaw, Myanmar (Trecking Day 2)

"꼬꼬댁꼬!"
"꾸륵꾸륵!"


여기까지는 견딘다.

"이히히힝!"

말 울음 소리에 더 이상 못 견디지 못하고 일어난다. 이곳에서 말 소리까지 들릴지는 몰랐다. 여기 닭은 뭐 이리 부지런할까? 새벽 3시부터 울기 시작한 것이 밤새 쉬지 않고 끊임없이 운다.


어제 조조의 확언대로 신기하게 이곳에 밤새 모기는 없었다. 엄청난 모기의 공격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건 의외다. 하지만 그렇다고 잠을 잘 잔 것은 또 아니다. 그 힘든 여정을 하고 나서도 목욕을 하지 못한 탓에 온 몸이 마른 땀으로 인하여 과하게 찝찝하기도 했고, 그것을 떠나서 뭔가 이상하게 졸리지가 않았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 걸까?


새벽 5시, 아직 이른 새벽이지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잠도 안 오는데 누워 있으면 뭐하나, 산책이라도 해야겠다. 나와보니 아직 달님이 해님한테 자리를 비키지도 않았는데 이곳의 하루는 진작에 시작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찾아서 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말의 먹이를 주고 있고, 한쪽에서는 잎을 말리고 있다.

여기 녹차가 엄청 유명하다고 말들을 많이 해서 어제 저녁에 조금 살 수 있냐고 물었었다. 조조가 자꾸 내말을 이해 못하고 이상한 소리를 해대기에 현지인한테 직접 물었더니 녹차는 작은 것이 500키얏, 그리고 큰 것이 1000키얏이라고 대답해줬다. 여기에서 녹차나 기념품 및 선물로 좀 사갈까 생각 중이다.


이른 새벽 공기의 냄새를 맡으며, 동네 한바퀴를 둘러보고 어제도 왔었던 이곳의 유일한 사원 계단에 자리 잡고 앉는다. 앞집에서는 엄마와 딸의 대화가 이어진다. 애들은 왜 잠이 없을까? 우리 조카도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오면 항상 새벽부터 날 깨워서 놀자고 난리다.


동자승 두 명이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어제 봤던 그 영어를 꽤나 하던 동자승도 온다. "굿모닝"이라고 영어로 인사를 먼저 건넨다. 손에 뭔가를 들고 오는데 유심히 보니 아침인것 같다. 슬쩍 물어보니 아침이 맞단다. 시내에서는 스님들이 아침마다 탁선을 하러 돌아다니더니 여기서는 사람들이 아예 저렇게 도시락 식으로 준비해주나 보다.


계단에 앉아서 키보드를 열고 핸드폰을 거치대에 얹으니 언제나 그렇듯이 블루투스로 연결된다. 에버노트를 키고 새로운 글을 누르고 Day 17이라 제목을 타이핑한다. 잠깐, 근데 Day 16이 안보이는 것 같다. 잘못 본거겠지? 어플을 껏다가 다시 실행시켜봐도 없다.


허, 너 왜 이러니. 어제 쓴 글은 절대 다시 못 친다. 에버노트는 이러면 안되잖아. 순간 화들짝 놀라서 에버노트만 껐다 다시 켜보고, 전체 리부팅도 해본다. 없다. 순간 혹시나 싶어 맨 밑으로 리스트를 내리니 거기에 수줍게 숨어있는 글이 나온다. 순간 진짜 식겁했다. 보아하니 동기화가 안된 글들은 맨 밑으로 내려가나 보다. 여기는 인터넷이 안 터져서 동기화를 못하다 있다. 그래, 에버노트 네가 그럴 리는 없지. 아침부터 깜짝 놀랬네. 


종소리가 울린다. 6시 정각에 울리는 것을 보니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인가 보다. 그나저나 배에 신호가 아까부터 살짝 오고 있는데 어쩔까? 여기 화장실 생각보다 깨끗하긴 하던데 이곳에 내 채취를 한번 남겨볼까? 일단 조금 더 두고 봐야겠다.

집으로 돌아오니 말들이 멀뚱 멀뚱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말이 3마리이다. 어디서 본건 있어가지고 손바닥을 내밀고 가만히 다가서 본다. 이놈들, 고개를 휙 재끼며 나를 피한다. 다시 천천히 다가선다. 가만히 있는다. 머리를 살짝 어루만져준다. 말을 만진 건 처음이다. 말도 꽤나 귀엽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까 그 동자승이 도시락을 들고 이곳까지 와 있다. 아직 탁선이 안 끝났나 보다. 오늘 몇 번째 마주치다 보니 "밍글라바"라고 다시 인사하기도 애매해서 그냥 살짝 눈인사만 주고 받는다.



숙소로 돌아와서 차를 한잔 따라서 자리를 잡는다. 미얀마의 여인들은 한국인의 눈에는, 아니 최소한 내 눈에는 미인들이 상당히 많다. 도시에서도 그렇고 산골 지방에서도 그렇고, 그다지 꾸미지 않았음에도 참 아름답는 생각이 든다. 미소가 아름답기 때문일까. 아마도 몇 년만 지나면 미얀마의 여인들이 세상에 미녀들로 알려지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근데 내가 너무 일찍 일어나서 여기 거주민들이 불편한 건 아니겠지? 사실 어제도 우리를 그다지 신경 안 쓰는 듯하더니 오늘도 역시나 차 주전자만 하나 주고 자기들끼리 할 일을 한다. 괜한 챙김 보다 이런 자연스러운 게 더 좋다. 여기에 유일하게 있는 초등학교에서 영어, 한글, 수학, 과학 등을 가르치며 한 일 년간 평화롭게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나쁘지는 않지만 과욕이겠지.


말 목에서 나는 종소리와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도마 소리를 들으며 거실에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다. 정말 아무도 날 신경 안 쓰는 것이 좋다. 여기 사람들은 다 행복해보인다. 얼핏 보면 근심과 고민이 없어 보이지만 이들도 분명 많은 고민이 있을거다. 이번 차밭 농사가 잘 안됐다던가, 물이 부족하게 받아졌다던가, 아니면 애들 교육 문제라든가. 겉으로 보이는 삶에 너무 과하게 포장해서 생각하지는 말자.  안타까워할 필요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그냥 각자가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시간이 아직 좀 이르다. 좀 더 누워있을까 싶어 방으로 올라가 본다. 근데 배에 신호가 살살 온다. 그래, 반항하지 말자. 자연에는 순응해야 하는 법이야. 난 할 수 있다.

일어나서 내려온다. 조조와 해태가 있길래, 배를 살살 만지면서 제스처를 하고 화장실로 간다. 그래, 군대에서 훨씬 더 안 좋은 곳에서도 해결했는데 뭐. 사실 여기는 꽤나 깨끗한 편이다. 이 정도쯤이야.


생각보다 깔끔하게 해결하고 나온다. 뭐 별거 아니네. 손을 씻고 해맑은 표정으로 돌아온다. 역시 근심이 해결돼야 하루가 편해진다. 아, 아름다운 세상이구먼.

앉아있는데 해태가 한글에 관심을 갖는다. "한글  가르쳐줄까"라고 물으니 좋단다. 오케이, 팬과 종이를 가져오렴. 일단 한글의 알파벳을 다 적어주고 조합하는 방법을 하나씩 알려준다.


가르치다 보니 우리나라 말은 발음 한음절마다 한 글자로 구성된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거꾸로 발음 단위로 생각하는 개념만 파악하면 한글은 배우기 쉽다. 세종대왕님 만세. 근데 해태, 머리가 좋지는 않은 거 같다... 가장 큰 문제는 분명히 이해 못했으면서 자꾸 알겠다고 한다. 공부하는데 매우 안 좋은 버릇이다.

그나저나 한국인은 이곳에 잘 오지도 않는데 배워서 뭐하려나. 그냥 차라리 중국어나 불어를 배우는 게 도움이 될 듯 한데. 여기에 한류가 전파되면서 사람들이 한국에 갖는 관심이 지대해졌다. 관심은 많은데 한국인은 희소하니 자꾸 나를 붙들고 얘기를 하려고 한다.

해태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와중에 드디어 아침이  준비됐다고 먹으라며 부른다. 오늘은 얼마나 걸으려나. 어제보다는 쉽다고 했으니 그래도 할만하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밥을 또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모르기에 최대한 많이 먹어야 한다.


프랑스 놈들 어제부터 조금 이상해졌다. 내가 있어도 이제는 그냥 대놓고 불어로만 얘기한다. 뭔가 내가 마음에 안 들었나? 내가 어젯밤에 술을 덜 먹어서 그런걸까? 아니면 가이드들이 나하고만 어울리려 해서 그런 걸 지도 모르겠다. 트래킹 할 때 현지인들과 어울리는 게 여행자들의 큰 목적 중에 하나이기에 실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대놓고 왕따잖아. 아무도 영어를 단 한마디도 안 한다.

너희가 그렇단 말이지. "그래서 그거 맛있어?"라고 나도 대놓고 한국말로 걔네한테 물어본다. "hmm, sorry?" 그래, 못 알아듣는 게 당연하지. 영어로 얄밉게 얘기해준다. "아 한국말 못 알아들어? 내가 불어를 할줄 안다 너희가 생각하듯이 나도 너희가 한국말을 할줄 아는 줄 알았었지."


라고 머리 속에서만 실컷 상상을 한다... 이런 말할 정도의 배짱은 없지만 상상할 배짱은 충분하다. 됐어, 내가 너희를 왕따 시키면 되지. 조조와 해태랑 오히려 더 같이 어울려서 논다. 그러면 4:3, 아직 숫자는 너희가 앞서지만 이 정도면 할만하지. 치사한 놈들.

이래서 오래 같이 여행 다닌 사람들 사이에는 끼면 안된다. 거기에 커플이 있으니 설상가상이다. 굳이 다른 사람이 들어와도 그와 친하게 지낼 이유가 그들에게는 없다. 어제는 이들도 그럭저럭 매너를 지키며 잘 어울리려고 노력하더니 자기들 스타일이 아닌 듯 싶었는지 오늘은 그냥 무시다. 다수의 횡포다. 흠, 그러고 보니 인도 여행 다닐 때 우리 한국인들 사이에 홀로 꼈던 중국 여자애는 우리를 이렇게 여겼을까? 거기다가 나는 커플...? 아냐, 그래도 난 그 친구를 은근히 잘 챙겨줬던 것 같다. 진짜다.

밥을 먹고 현지 대장에게 녹차를 사도 되냐고 묻는다. 1000키얏짜리는 너무 커서 500키얏짜리를 4개 달라고 한다. 알겠다며 조금 기다리면 가져올거란다.


2000원치인데, 무슨 쌀 한 자루를 가지고 왔다. 하, 이걸 어떻게 가져가라고. 많이 줬다고 생색을 내니 고맙다고 하긴 하는데, 이건 들고 가는 게 더 걱정이다. 가방에는 절대 안들어갈듯 하여, 일단 비닐 봉지를 하나 얻어서 거기다가 모두 담아본다. 물도 하나 사서 담고, 카메라도 넣는다. 가는 길은 그래도 쉽다고 했으니 비닐 봉지 하나 정도는 추가로 들고 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어제 먹은 맥주와 음료 등의 계산을 안했기에 떠나기 전에 정산한다. 물어보니 녹차 잎을 사서인지 전부 해서 5000키얏 정도 나왔다. 그런데 환전을 못해서 키얏이 부족하다. 달러도 될까? 물어보니 역시나 난색을 표한다. 하긴 여기서 달러를 어디다 쓰겠나. 조조한테 내려가서 준다고 대신 내주면 안되냐니까 그냥 환전을 해주겠다고 한다. 10달러에 5000키얏 두장을 받는다. 어제 사설 환전소에서 소액권은 970을 환율로 정산해줬으니 어찌 보면 나한테도 이득이다. 굳이 다른 얘기 안하고 그냥 조용히 주는걸 받는다.


자, 이제 진짜 출발이다. 떠나기 전에 뭔가 조용히 정리를 하고 싶은데 프랑스 놈들 때문에 뭔가 정신없이 출발하게 된다. 급하게 현지 분들하고 인사를 나눈다. 어제 하룻밤 재워준 거에 대해 제대로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이리 정신 없이 떠나니 영 마음에 안 든다. 이래서 혼자 다니는 게 좋다. 내가 하고 싶은데로 못하는 게 싫다.

다들 이미 출발을 한지라 인사를 후딱 끝내고 나도 길을 따라나선다. 오늘은 운동화를 벗고 그냥 쪼리를 신고 가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어제 운동화를 신어서 더 힘들었었던 것 같다. 운동화가 작아서 그런건지, 진짜 이대로 계속 운동화를 신고 걸으면 새끼 발톱이 빠질듯한 느낌을 받았다. 쪼리를 신은 만큼 어제 상처난 발가락에 반창고를 단단히 붙이고 신발을 발가락으로 움켜쥔 체 길을 나선다.



조금 걸어가다 뒤돌아보니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오면서 방금 도착한 듯한 다른 여행자들과도 마주쳤다. 이곳은 나한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솔직히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을 거라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서 어찌 보면 실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이 사람들이 문제였다기 보다 내 행동의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관광지라면 이들이 나에게 먼저 다가오겠지만 이런 단순한 마을이라면 내가 먼저 다가갔어야 했다. 기억에도 그다지 남지 않을 프랑스 놈들과 어울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일행을 벗어나더라도 홀로 밖에서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용기가 부족했던 거지 뭐. 그래도 이곳에서 나를 계속 따라다니며 "헬로", "바이 바이"를 외치던 꼬마들은 꽤나 기억에 오래 남을 거다.



돌아가는 길의 시작은 어제와 다르게 나름 편안하다. 약간의 내리막이며 숲길이라서 그늘도 중간중간 많이 있다. 봉투를 손에 들고 가는 게 아무래도 신경이 좀 쓰이긴 한다. 중간에 쉴때 얘를 어떻게든 가방에 묶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조금 가다가 맨 앞에서 길을 리드하는 조조가 갑자기 멈추고 돌멩이를 주어서 앞으로 던진다. 뭐지?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앞 그룹에 있었기에 바로 가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보니 작은 뱀이 하나 있다. 근데 이 뱀, 쥐를 한마리 몸으로 감싸서 죽인 듯 싶다. 오, 목격하기 힘든 자연의 모습이다. 근데 이 동네에는 특별히 쥐가 많나? 어제는 고양이가 한 마리 물고 오더니 여기서는 뱀이 먹이로 삼고 있다. 동네북이 아닌 동네 쥐구먼.

좀 더 다가가니 뱀이 쥐를 포기하고 줄행랑을 친다. 이런 깡다구 없는 놈, 그래서  먹고살겠냐. 그래도 뭔가 뱀에게 미안하다. 개도 먹을 때는 안 건드린다는데, 얘는 지가 사냥한 식량도 못 먹게 했으니 어찌 안 미안할 수가 있나. 우리 지나가면 다시 와서 먹으려나?

좀 걷다 다리가 아플때 즈음이 되니 쉬는 타임이다. 녹차를 해결해야 한다. 가방 위에 녹차 덩어리를 얹고 그 위에 물통을 끼워서 한번 묶어본다. 어디선가 이러고 다니는 사람들 꽤 본 것 같은데, 버티겠지?



조금 쉬다 다시 출발한다. 아직까지는 상황이 좋다. 쫄이도 은근 괜찮고, 발바닥도 아직까지는 상처없이 괜찮다. 왠지 이번 귀가 트래킹은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살짝 해본다.


하지만 평탄하면 내 여행이 아니지.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갑자기 물통이 가방에서 빠져서 땅에 떨어진다. 조금 약하게 묶었나? 어서 주워서 다시 위에 얹고 끈을 꽉 조인다. 일행이 있다 보니 이런 짧은 행동으로 조금만 주춤거려도 뒤로 쳐진다. 정비를 후딱 다시 하고 어서 뒤따라간다. 어쩌다 보니 또 다시 맨 뒤에서 가게 되었다.

얼마 안 걸어 가는데 물병이 이번에도 또 떨어진다. 아까와 같이 주워서 끈 사이에 넣어보지만 얼가 안가 또 다시 떨어진다. 아 이거 안될 듯 싶다. 자꾸 정비하다보니 앞팀하고의 거리도 좀 멀어져서 일단 그냥 손에 들고 걸어간다. 왼손에 물, 오른손에 카메라를 들고 갈려니 체력적인 부담감이 두배이다. 영 힘들다.



설상가상으로 어제 상처난 왼쪽 발가락에 붙여놓은 반창고도 떨어진다. 아 리성 떨어지면 안되는데. 항상 상처가 가장 먼저 났던 곳이라 불안하다. 하지만 그때, 다행히 첫 번째 목적지인 작은 폭포에 도착한다.



조조야, 이게 무슨 폭포냐, 그냥 개울이지. 그래도 쉴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할게 많다. 쉴세도 없이 자리를 잡고 정비를 시작한다. 가방 안 어딘가에 있는 반창고를 찾을 자신은 없어서 오른쪽 새끼발가락에 붙여놓은 반창고를 떼서 왼쪽 발가락에 붙여본다. 바보야, 이게 붙을 리가 있느냐. 어쩌지. 고민하고 있는데 또 금방 출발할 듯해서 그냥 내버려둔다. 찢어지라고 그래. 어차피 오늘 트래킹은 그리 안 힘들다고 했으니 괜찮을거다. 게다가 지금은 이상하게 그다지 아프지 않다.

이번에는 자꾸 떨어지는 물을 처리해야 한다. 다들 물을 첨벙 거리며 신나게 놀고 있는데 나만 가방 정리를 한다. 아 무식하게 이거 뭐 이리 가져온 걸까. 패딩 잠바야 이해라도 되는데, 우비, 여벌 옷, 수영복, 방수팩까지 그냥 쓰잘데기 없이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거기에 사온 녹차까지 가방에 얹으니 무슨 가방이 산더미만 하다. 대략 4키로는 될 듯하다. 항상 인생의 무게 드립을 치더니만 결국 이리 바보 같은 행동을 하게 됐다. 저 짐 중에서 어젯밤에 꺼낸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아까 물이 떨어진 것이 묶은 끈의 밑에 넣어서 인듯 하여 이번에는 위쪽으로 옮겨 넣는다. 가방 입구가 조금 더 넓게 펼쳐져 있으니 좀 더 버티겠지. 그러고 있으니 또 다시 출발이다. 그래, 일어나서 다시 한번 걸어보자.


쉼터였던, 폭포로 부르기도 애매한 첫번째 개울을 지나서 2분도 채 안걸어서 물병이 또 떨어진다. 에혀, 그냥 손에 들자. 포기하고 손에 들고 걸어 간다. 피로가 두배, 짜증이 두배다. 그 와중에 가파른 언덕이 갑자기 나타난다. 조조, 길이 쉽다더니 이건 말과 다르잖아. 언덕이 장난 아니다. 엊그제 보트 투어에서 이미 지친데다 이곳까지 오는 트레킹에도 힘을 쏟았기에 지금은 더 이상 올라갈 힘이 나에게는 남아있지 않다. 이번에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그냥 일행에서 뒤로 낙오한다. 그래도 해태가 자기 한글 스승이라고 나를 챙겨주며 뒤에서 같이 걸어 올라와준다. 아 근데 이 언덕의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못  올라가!"라며 소리를 지를려고 하는 순간에 조조가 드디어 휴식을 선언한다. 아 다행이다. 진짜 더 이상은 한 발짝도 더 못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쉬어갈 그늘도 있다. 온몸이 지쳤기에, 가방이고 뭐고 그냥 전부 집어 던지고 바닥에 쓰러지듯이 흙바닥에 주저앉는다.


이제 언덕은 3분만 더  올라가면 된단다. 진짜지? 아 나는 이 와중에도 가방정리를 다시 하고 있다. 이 징글징글한 녹차, 내가 아무한테 주나 봐라.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리스트를 쭉 뽑아서 탑텐한테만 이쁜 작은 병에 담아서 줄 거다. 이건 이제 그냥 녹차 아니다. 미얀마 오지에서 내가 말 그대로 피와 땀을 흘리며 가져온 거다. 물을 손에 들고 가니 두배로 더 힘들기에 물통도 가방 안에 쑤셔 넣어 본다. 꾸역꾸역 넣으니 그래도 들어간다. 그 위에 녹차를 얹고 끈으로 졸라맨다. 가방 안에 내용물이 떨어질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확실히 안정적이다. 이대로 조금만 더 버텨다오. 나도 좀 살자. 가장 체력이 약한데 가방까지 이러면 어쩌라는 거야.

역시 가방을 정리하고 있으니 쉬지도 못했는데 다시 출발이다. 이래서 마을에서 처음부터 짐 정리를 잘해야 했다. 휴식시간마다 정리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 군대 헛갔다왔다. 행군할 때 항상 처음에 짐을 잘 싸는 게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던 것 같은데 10년 이상 지난 지금 그 깨달음을 다시 한번 얻어간다.

마지막 남은 숨을 언덕에 털어 넣고 나니 그래도 다행히 오르막길은 끝이 난다. 이제 좀 쉬워지려나? 쉬워지기는 개뿔. 아니 도대체 왜 오늘 일정은 쉽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한 걸까.


이번에는 네버 앤딩 땡볕행군이 시작된다. 이건 뭐 그늘이 없으니 쉴 곳도 없다. 미얀마에 지금 추수기가 지나서인지 모든 밭이 다 태워져 있다. 그런 나무 하나 없는 밭을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의 짐을 멘체 한발 한발 힘겹게 내딛으며 지나간다. 태양은 하늘 위에서 내리 쬐고 있고, 땅에는 덜 꺼진 불들이 여기저기 타고 있다. 아래 위로 뜨거움이 그냥 쌍으로 나를 괴롭힌다.



이번에는 얼마나 더 가는 갈까? 여기서는 무슨 철학적인 사고, 이 딴 거 절대 못하겠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발 한발 앞으로 갈 뿐이다. 그래도 계속 걷다보니 걷는 방식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내가 걸을 때 발의 바깥쪽을 먼저 땅에 대다 보니 바깥쪽 발가락들에 체중에 실려서 짓무르게 되었나 보다. 갑자기 생뚱맞은 깨달음이 와서 의식하며 발바닥 안쪽으로 발을 디뎌보니, 지금까지 나를 괴롭혔던 왼쪽 3번째 발가락과 오른쪽 새끼 발가락의 통증이 훨씬 완화된다. 이거, 신발이 문제가 아니라 내 팔자걸음이 문제였나?


한발 한발 집중하며 걸어가니 그래도 시간은 빨리 간다. 이 트레킹은 주변을 즐기는 게 아니라 무슨 고통을 견디는 체험 같다. 극기훈련이냐. 도대체 내가 이걸 왜 내 피 같은 돈을 주고 하고 있는 걸까. 도대체 왜! 


처음에는 어차피 처질 것을 염두에 두고 일행의 중간쯤 자리를 잡았으나 지금은 결국 낙오하여 맨 뒤에서 걸어가고 있다. 모두 나를 버리고 앞으로 간체, 오로지 충실한 제자인 해태만이 나와 함께하고 있다. 충실한 제자에게 물어본다. 

"제자야, 지금 우리가 이 땡볕에서만 1시간도 넘게 걸은 거 같다.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우리에게 휴식이 있는 거냐."
"스승님, 1시간 반은 더 가야 하옵니다."

후... 해태 말로는 앞으로 1시간 반은 최소한 더 가야 그늘이 나온단다. 여기는 정말 쉴 곳도 없다. 그늘이 있어야 쉬지. 햇볕아, 나 이런 고통 속을 돈을 내고 걷는 호구란다. 그냥 내리 걷는 거다. 역시 비수기는 비수기인 이유가 있는 거다.


제자야, 그래도 정신을 좀 돌려보자꾸나. 해태가 뒤에서 묵묵하게 따라오길래 나를 따라해 보라고 지시한다. "가나다라마바사". 좀 생뚱맞지만 나름 잘 따라한다. 아까 가르쳐서 그런지 한번에 따라한다. 역시 앞 부분은 쉽다. 10번 정도 반복한다.

자, 다음 구절로 넘어가자. "아자차카타파하." 역시 이 부분은 한번에 못 따라한다. 괜찮아, 어려운 거야. 나도 늘상 하던거라 몰랐는데 아침에 한번 해보고 꽤나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어. 참을성을 가지고 다시 한번 읊어준다. "아자차카타파하."


5번이 넘어가서도 못 따라하니 슬슬 짜증이 난다. 어려운 건 알겠는데, 그래도 내가 이렇게 천천히 읊어주고 있지 않니. 내 짜증을 느낀 걸까? 드디어 해태가 성공한다.

둘이 내가 즉석에서 작곡한 "가나다라마바사, 아자차카타하" 노래를 부르며 간다. 즉흥적으로 만든 거라 이건 분명히 나중에 기억 못할 거다. 혹시라도 물어보지 마라.



해태 말대로 진짜 1시간 반 이상을 정처 없이 걸어간다. 결국 그늘 하나 없는 땡볕에서 3시간 이상을 간 거 같다. 멍하니 한참을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쉬고 있는 일행들이 보인다. 나와 해태가 너무 뒤쳐졌기에 이들은 이곳에서 거의 20분 이상을 쉬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걷는 방식에서 획기적인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해도 결국 일시적이다. 안쪽을 집중적으로 짚으니 이제는 안쪽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는 듯하다. 군대 이후 잡혀 본 적 없는 물집을 여기서 접한다.

일행이 쉬는 곳에 힘겹게 도착하니, 유은이 "자 이제 가자"라며 일어선다. 그래 그래, 농담인건 아는데, 지금은 재미없거든. 5분만 쉬자고 그래도 대꾸를 해주고 옆에 그냥 쓰러진다. 그래도 코코와 니코 이 두 친구는 나름 챙겨주려는 노력이 보인다. 유은과 그 모델 여친이 문제다. 이놈들은 나를 무슨 투명인간 취급한다.


잠시 쉬었다가 또 다시 출발한다. 그래도 여기서는 이제 얼마 안 남았단다. 30분 정도? 그래 힘을 내자. 이게 행군할 때와 마찬가지로 한번 쉬고 일어나면 더 힘들어진다. 발가락에 통증이 있을때는 오히려 꾹 참고 아픈 곳을 지긋이 계속 밟아줘야 덜 아프다.

걸어서 얼마 안가 일단 마을 하나에 도착한다. 이 마을이 마지막 마을이란다. 비워진 물을 채우라며 조조가 우리를 마을로 이끈다. 이 여정에서 물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 땡볕에서 물 마저 수급이 안되었으면 정말 힘들었을거다. 그래도 다행히 트래킹 중간중간에 물을 채울 수 있는 곳은 있었다.


근데 항상 궁금했던 건데, 연료를 짐으로 싣고 걸어가는 게 과연 효율적인 건가? 연료를 넣은 만큼 연료를 더 먹을 텐데, 더 소비되는 연료가 실은 연료보다는 적을까? 물을 마시면서 쌩뚱맞게 그 생각이 든다. 이 물을 손에 들고 힘들게 온 것을 생각하면 그냥 안 들고 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 뭐 자세히 생각은 안 해봤지만 상식적으로 아닐 거라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물 없이 이 길을 온다니, 제 정신이냐.


물을 채우기 위하여 마을의 슈퍼에 다 같이 들린다. 미얀마에서는 어느 곳에서 가든 뜨거운 차를 내어 준다. 그냥 뭔가 대접을 하고 싶어하는 이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차를 마시며 일행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보더니 슈퍼 아주머니가 물 담배를 어디선가 꺼내서 건네준다.

그걸 보던 유은이 혹시 마리화나는 있는지 조조에게 슬그머니 물어본다. 아 그놈의 마약, 그만 좀 하지. 그래, 장기 여행자니 이해는 하는데, 그냥 뭔가 꼴보기 싫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걸까.

물을 채우고 잠시 쉬다 다시 출발한다. 이번에는 조조의 30분 공약이 거짓이 아니었다. 최종 목적지인 폭포에 드디어 도착한다. 이번에는 처음과 같은 그런 개울이 아닌 나름 제대로 된 폭포다. 지금 시각이 2시 반이고 8시에 출발했으니 6시간 반을 걸은 셈이다. 어제도 그 정도의 시간을 걸었다. 무슨 오늘이 쉽긴 뭐가 더 쉬워. 이마를 손으로 만져보니 따깝다. 목 뒤도 따끔따끔하다. 그늘 하나 없는 곳에서 그 뜨거운 햇볕을 서너 시간 몸으로 직접 받아들였으니 당연하다. 이건 탄걸 넘어선 화상의 경지이다.


폭포를 보더니 다들 신나게 뛰어 올라간다. 나도 올라가 본다. 확실히 물이 있어서 그런지 근처에 그냥 앉아만 있어도 바람이 시원하다. 니코가 먼저 폭포에 옷을 다 입은 채로 뛰어든다. 유은과 코코는 상의를 벗어재끼고 따라 들어간다. 이놈들은 그냥 언제나 훌러덩이구나. 걸어오면서 얘네와 나의 벽이 더 커져서인지 여기서는 그다지 어울리고 싶지가 않다. 모델 언니는 밑에서 그냥 발만 씻고 있다. 나도 그 근처에서 얼굴을 씻은 후 물에 머리를 담궈서 간단하게 감아준다. 짧은 머리의 장점이지.

나 혼자 있는 것을 보더니, 그래도 가장 착한 니코가 같이 들어오라고 권유한다. 미안하지만 그래도 그냥 싫다. 바람이 시원해서 안들어가도 충분히 시원하기도 하고, 옷이 젖으면 마지막 걸을 때 몸이 무거워서 불편하다고 둘러댄다. 하지만 만약 지난번 보트 투어 일행이었던 요한과 알봉과 함께였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갔을 거다. 그냥 지금은 어서 이 힘든 트래킹을 끝내고 싶다.


폭포에서 쉬면서 약 30분을 보낸다. 이제 시간도 3시라 배도 고프다. 다른 곳은 관광객을 배려해서 이런 스케줄이면 중간에 점심도 주고 할법한데 미얀마에서는 그런 거 없다. 확실히 관광지로서의 발전은 아직 더디다. 그게 매력이지만.



다들 폭포에서 내려온 후 이제 진짜 트레킹의 마지막 길을 나선다. 조조가 여기서는 15분 정도 걸어가고 그곳부터는 뚝뚝을 타고 간단다. 오 그정도면 좋은데? 마지막 힘을 짜내서 걸어가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마지막 한 걸음이 가장 힘들다. 15분 정도 걷는 것이 맞긴 한거 같은데, 발바닥도 불이 나고, 얼굴도 화끈화끈 거리니 영 힘들다. 진짜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겨우 목적지에 도착한다.

최종 목적지에서는 또 슈퍼가 하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트래킹 곳곳에 있는 슈퍼들, 은근히 수익이 괜찮을것 같다. 어찌 보면 미얀마에서 가장 소비가 많은 것이 물 아닌가 싶다. 이곳 슈퍼에는 참치냉장고 같이 생긴 것도 있다. 미얀마에서 단 한번도 진짜 차가운 음료를 먹어본 적이 없기에 혹한다. 원래는 지금 쌓인 이 갈증을 식사를 하면서 단번에 해소하려 했는데 결국 유혹을 몇 견디고 400키얏짜리 오렌즈 탄산음료를 구매한다.



야, 살얼음이 있다. 이런 게 미얀마에도 있긴 있구나. 차가움에 목이 아파서 한번에 못 먹을 정도다. 두세 번에 나눠서 먹고 있으니 우리를 시포로 데려가줄 뚝뚝이 도착한다. 앞에는 그 여사장님의 남편이 타고 있다. 나를 보더니 반갑게 웃는다. 무뚝뚝한 사람도 여러 번 마주치면 풀어지는 것이 사람의 인연인가 보다.



오면서 해태한테 들었는데 그 여사장님 가게의 이름은 '보보네'이며, 여사장님 성함은 '마보사'이고 그분이 해태의 큰 이모라고 한다. 조조는 가족은 아니고 그냥 직원이다. 어찌 보면 내 시포에서 경험의 중심이었던 곳인데 이제라도 이름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뚝뚝을 타고 15분 가량 가니 보보네 식당에 도착한다. 다들 내려서 식당으로 들어간다. 아 너무 배고프다. 오후 3시니 당연하다. 나는 일단 밥부터 먹어야겠다. 근데 프랑스 일행들과 굳이 같이 먹고 싶지는 않다.

나야 보보네 식당을 좋아하니 여기서 먹으려 하지만 얘네도 여기서 식사를 할까?  다른 곳에서 먹어라, 다른 곳에서 먹어라, 계속 해서 주문을 건다. 눈치 없는 종업원, 우리를 보더니 5명 테이블을 만든다. 눈치 없는 게 아니라 영업이려나? 그 짧은 순간에 유은과 여자친구는 이미 내가 합석할 수 없는 2인 테이블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도 다 같이 왔는데 저렇게 앉는 것은 뭔 경우인지. 아 뭔가 짜증이 올라온다. 나도 너 싫거든. 그래도 니코와 코코는 당연하게 큰 테이블로 와서 내 옆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유은을 보면서 불어로 뭐라 하는데, 내 짧은 불어로도 이쪽으로 와서 같이 앉으라는 독촉으로 들린다. 아 이 시추에이션은 뭐지?

유은과 여친이 결국 합석해서 다 같이 한 테이블에 앉는다. 그러면 뭐하냐. 또 자기들끼리 불어로 계속 얘기한다. 다 같은 일행이 있는 곳에서 나만 제외하고 4명이 불어로 얘기하고 있으면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싶어진다. 나도 이제는 그냥 신경을 끄고 내 할일을 한다. 여기 여사장님 하고 반갑게 인사하고 해태, 조조와도 인사를 나눈다. 둘은 이제 퇴근한다기에 페이스북 아이디도 받아서 추가 한다. 둘 다 프랑스 일행들 아무에게도 안 묻고 나한테만 물어본다.

나는 마보사한테 저번에 먹었던 샨누들을 한 그릇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니코와 코코는 배가 그다지 안고프다고 안 시키고(어떻게 안 고플 수가 있지?) 유은과 여친은 둘이서 치킨는 하나만 시키고 밥을 두개 시킨다. 그래 장기 여행자면 돈이 없지. 이건 이해한다.

코코와 니코는 밥을 안 시켰으니 음료만 마시고 피곤하다며 자리를 떠난다. 어차피 같은 숙소니 봐서 내일 아침 먹으면서 다시 보자고 인사하며 보내준다. 얘네한테도 사실 그다지 좋은 감정은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싫은 것도 아니다.

둘이 떠나니, 진짜 이 커플은 나를 또 다시 투명인간 취급한다. 나도 뭐, 음식이 나왔길래 혼자 맛있게 먹는다. 아 진짜 같이 어울리기도 싫은 종자들하고 이렇게 있는 거 자체가 짜증 난다.


그 와중에도 국수는 너무 맛있다. 국물까지 후루룩 흡입한다. 어떻게 맛이 없을 수가 있겠나, 그렇게 운동을 하고, 점심을 오후 3시 반에 먹는데. 오늘은 반드시 환전을 해야만 한다. 저번에 5시 반에 갔을때 이미 문을 닫았었기에 시간을 조금 의식하며 빨리 먹는다.


밥을 싹 다 비우고, 마보사한테 은행을 갔다오는 동안 내 가방을 여기에 좀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가방이 워낙 무거워서 어깨가 아려온다. 마보사야 당연히 그러라고 봐주겠다고 하며 자기 옆에 잘 놔둔다. 아무리 마음에 안들어도 예의를 지켜야겠기에 유은과 그 여친한테도 일단은 대충 인사하고 식당을 나온다.

3시 50분이다. 혹시나 싶어서 서둘러서 걸어간다. 아 원래 이리 멀었나. 그 짧은 거리도 몸이 망가지니 굉장히 힘겹다. 발바닥이 불타오르고 얼굴이 따가워서 그늘로 피해다니며 힘겹게 도착한다. 트래킹으로 인하여 온몸에 먼지가 자욱한데도 은행 사람들은 정말로 친절하게 맞이해준다.


근데, 문을 닫았단다. 하, 도대체 언제 닫는 거야. 물어보니 2시 반에 닫는단다. 어쩌지? 이제 미얀마 돈은 거의 없다. 오늘 아침에 조조가 환전해준 덕에 6000키얏 정도 남아있는 것이 전부다. 뭐 어쩔 수 없지.


가방을 찾으러 보보네로 돌아가니 유은 커플이 나오는 게 보인다. 아직 있었으면 숙소로 같이 돌아가야 했는데 안 마주쳐도 되서 다행이다. 보보네에서 가방을 찾고 나도 이제 레드 드래곤으로 향한다.

마주치기 싫어서 천천히 걸어갔는데도 둘이서 아직 수속 중이다. 잠시 무시하고 리셉션에 앉아서 에어컨으로 땀을 식힌다. 이 둘도 저번에는 팬방에 있더니 오늘은 에어컨 방으로 가는 것이 꽤나 피곤했나보다. 하긴 오늘은 어쩔 수 없겠지. 팬, 에어컨이 문제가 아니라 빨래를 하려면 방에 화장실이 있어야만 할 거다.

둘이 올라가고 프런트의 매니저한테 간다. 오늘은 3일째니 더  할인받아야겠다. 원래 비시즌 가격이 10달러에 에어컨 3달러인데, 지난번에 1달러 할인을 받았다. 나는 오늘 3일째임을 강조하며 '할인을 좀 더 해줘야 하지 않겠어?'의 의미를 담아 부드럽게 눈을 마주 본다. 거기에 추가로 "모레"라고 울상을 지으며 말을 하니 다들 빵 터진다. '모레'는 이번에 배운 미얀마어로 '피곤하다'는 뜻이다. 네고 과정에서 웃음이 나오면 분위기는 일단 넘어온 거다. 결국 1달러를 더 깎아주면서 절대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난 얘기한 게 아니라 쓰는 거니까 괜찮겠지. 갑자기 유은 커플이 얼마에 묵었을지 궁금해진다.

트레킹 떠나기 전에 이곳에 맡겼던 가방을 찾으러 간다. 만나는 여자들마다 "라데"라고 웃으며 얘기해준다. 역시 이번에 배운 '예쁘다'는 단어다. 이런 간단한 단어만으로도 사람들은 쉽게 경계가 풀린다. 작업도 아니고 그냥 친근함을 표시하는 나의 방법이다.

숙소에 올라가니 아까 스태프가 배려를 해준건지 에어컨이 이미 켜져 있다. 잠시 의자에 앉는다. 온몸으로 전달되는 편안함에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온다. 아 이번 트래킹 꽤나, 아니 무척 많이 힘들었다. 내가 몸이 안 좋은 건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다시는 이런 짓 못하겠다. 원래 Kalaw에서 인레호수로의 트래킹도 고려하긴 했었는데 무조건 걔는 아웃이다.

너무 몸이 더러워서 침대에 누울 수도 없다. 바로 옷을 다 화장실로 던져 놓는다. 티셔츠는 이틀을 씻지도 않고 입었더니 땀으로 인하여 자연스러운 프린팅이 되어 있다. 가방 안에 넣고 빼지도 않은 것들도 모두 화장실로 던진다. 마지막으로 가방까지 씻기 위하여 화장실로 넣어놓는다. 가방이 아마 가장 더러울 거다. 일단 샤워기를 틀고 대충 몸에 먼지를 벗어내며 빨래를 할만한 통을 찾는다.

눈에 보이는 유일한 통이 변기 옆에 휴지를 버리는 통이다. 딱 1분 고민한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법이다. 그 안에 있는 검을 봉지를 빼고, 그래도 양심상 통을 물로 한번 헹군다. 바간에서 사온 새제를 통 안에 풀고 물을 채운다. 그리고 아까의 빨래를 모두 처박는다. 넣자마자 물이 갈색으로 변한다. 


더러워진 물을 버리고 다시 세제를 푼다. 그리고 빨래의 때가 빠질 동안 목욕을 시작한다. 오늘은 날림으로 목욕하면 안 되는 날이다. 샴푸로 머리를 감고 때수건을 가지고 와서 비누를 묻혀 온몸을 닦는다. 몸이 하도 더러워서 거품 조차 안 난다. 이틀을 안 씻고 이리 돌아다녔으니 당연하다.

몸을 한번 닦고 보니 때수건이 까매져 있다. 내 생전 처음 보는 현상이다. 이거 때수건도 빨래에 같이 넣고 세제로 빨아야 하려나? 몸을 단 한번 닦았을 뿐인데 이게 무슨 일이다냐. 처음으로 때수건을 비누로 빠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다시 비누를 묻혀서 몸을 한번 더 닦는다. 또 까매진다. 도대체 몸이 얼마나 더러운 거야.

그래도 대충 인간다워졌다고 생각이 들을 즈음, 변기 쓰레기통에 쑤셔놓은 빨랫감들을 무자비하게 발로 밟는다. 사실 발이 엄청 더럽긴 한데, 얘네도 만만치 않아서 큰 상관은 없을 듯하다. 무슨 시커먼 구정물이 나온다. 물을 바꿔 담고 다시 밟는다. 또 구정물이다. 이 구정물은 내 발에서 나오는 걸까 빨래에서 나오는 걸까?

그래도 지도 양심은 있는지 10번 정도 반복하니 그나마 조금 맑아진다. 위에는 샤워를 틀어놓고, 밑에 수도로는 물을 통에 받으며 발로 빨래를 밟고 있자니 내가 목욕을 하는 건지 빨래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몸도 아직 깨끗해지려면 멀었기에 샤워기 물을 계속 몸에 흘려보내며 빨래는 꾸준히 발로 퍽퍽 밟아준다.

이제 이 정도면 된 듯하다. 그래도 빨래할 힘은 남아 있어서 천망다행이다. 물이 그나마 회색을 띠길래 발로 그만 밟고 손으로 쳐댄다. 그리고 하나씩 꺼내서 헹군다.

동남아에는  화장실마다 변기 옆에 수압이 엄청 센 수도가 하나 있다. 이게 아마 큰 일을 본 다음에 뒤처리를 하라고 있는 거 같은데, 도통 이해가 안된다. 수압이 정말 어마어마해서 이걸 한번 틀면 엉덩이를 씻는 게 아니라 화장실 사방에 뿌려지게 될거 같다.  뒤처리하다가 앞처리를 하게 생겼다.

하지만 이게 빨래 헹굴 때는 딱이다. 어떻게 보면 더럽다 느낄지 모르지만 물은 물이다. 하수도 물을 쓰는 것도 아니니 그게 그거다. 이걸 빨래에 대고 뿌리면 빨래 방망이로 치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떤 의도로 만들었건 그 물건의 가치는 소비자가 정하는 것이다. 나에게 변기 옆의 이것은 성능 좋은 빨래 방망이다.

하나하나 헹구고 온힘을 다 해서 짠다. 물론 아직도 샤워기는 몸을 헹구고 있다. 물이 안 묻게 최대한 짠 후에 변기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올리려고 했더니... 아까 씻으면서 잠깐 앉아서 그런지 그곳에도 구정물이 고여있다. 정말 답이 없구나. 수압 센 빨래 방망이로 변기 뚜겅 위를 한번 스윽 청소하고 짠 빨래를 얹는다. 이제 스펙타클한 빨래 및 목욕에 끝이 슬슬 보인다.

몸은 한번 더 비누칠을 한다. 이 정도로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어쩔 수 없다. 3번 씻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나. 때수건도 따로 벅벅 씻어준다.

드디어 화장실에서 나와서 옷을 입고 빨래를 방에 널어놓는다. 내일 오전에 이곳을 떠날지도 모르는데 가방 때문에 못 떠나는 상황도 생길 수 있겠다. 그래도 에어컨을 틀어놨으니 좀 빨리 마르지 않을까? 반대인가?

이마가 계속 따끔따끔하다. 잠깐 거울을 보고 육성으로 헉 소리를 낸다. 저 시꺼머스는 누구지. 대충 예상은 했지만 심하다. 특히 옷에 가려졌던 부분하고의 경계를 보니 오늘 얼마나 탄 건지 느낌이 온다.

외모적인걸 떠나서 탄곳이 아파서 안되겠다. 내가 이마가 톡 튀어나온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이마에 모든 햇빛이 집중됐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히 서울에서 가져온 화상약이 있기에 이마 주변에 듬뿍 발라준다. 이 짧은 머리라도 두피 쪽은 보호해줬는지 그쪽은 그래도 괜찮다. 목 뒤쪽도 통증이 있어서 그쪽도 화상약을 골고루 발라준다.

그러고 나니 5시가 넘었다. 한 시간 이상을 빨래, 목욕과 전쟁을 한 셈이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오늘은 방에서 좀 쉬면서 8시쯤 나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침대에 누워서 드디어 핸드폰을 손에 쥐어본다.

어제 글은 다 써놨기에 후딱 올리고 노여사와 잠시 대화를 나눈다. 라오스로 가는 에어아시아표를 부탁했었는데, 아직 예약 못했단다. 뭐, 괜찮다. 노여사도 보고 싶고, 우리 냐옹이들도 보고 싶기에 그냥 서울로 가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예매를 한단다. 뭐 이것도 괜찮다.

이리저리 알아보더니 라오스는 안되고 베트남으로 밖에 예약이 안된다고 한다. 뭐 역시나 그것도 괜찮다. 라오스를 가고 싶으면 베트남에서 버스 타고 넘어가면 된다. 근데 결제하는데 회사라 그런지 안된단다. 흠 어쩔 수 없지. 그냥 내일 해주고 안되면 말라고 한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주는 게 어디냐. 노트4에 카드 정보를 다 넣어놨기에 잃어버린 후 혹시나 싶어서 모두 정지를 시켜놨다. 그래서 이런 결제가 필요한 부분은 노여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혹시 몰라서 하노이, 라오스 정보를 검색해서 조금 보다 보니 8시다. 내일 어딜 갈지도 안정했는데 지금 15일 후가 문제가 아니다. 일단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기에 키보드, 핸드폰, 카메라, 지갑을 들고 방을 나선다. 가방을 빨아서 넣을 곳이 없으므로 이렇게 따로 들고 갈 수밖에 없다.

오늘 저녁은 역시나 저번에 갔던 그 생맥주 집으로 가려고 한다. 그래도 이틀 고생했으니 이 정도는 나에게 보상해줘야겠다. 오늘의 글은 트래킹 중간중간에 쓰긴 했지만 그래도 쓸게 많이 남았다. 생맥주 한잔 시키고 한 모금씩 마셔가며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 나에게 이번 여행에서의 은근한 즐거움이다. 가는 길에 보보네를 슬쩍 보니 조조가 나와서 일을 하고 있다. 아는 척을 할까, 싶다가 그냥 내일 한번 들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지나간다.


생맥주 집까지 꽤 먼 길을 산책한다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간다. 아직 발가락과 발바닥이 멀쩡하지 않기에 무리해서는 안된다. 멀리서 간판이 보이기 시작하자 반가운 마음으로 속도를 좀 낸다.

내 단골집, 시포에서의 하루를 정리하는 나의 그 생맥주집 테라스에 이번에 같이 트래킹을 했던 네 명의 프랑스인이 앉아서 생맥주를 마시고 있다. 그 많고 많은 곳 중에 하필 이곳을 와야만 했었니. 아 진짜 꼴보고 싫은데. 일단 그래도 그냥 무시할 수는 없기에 슬쩍 인사를 한다. 코코가 날 보더니 잠시 합류하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내가 못 본척 그냥 안으로 스윽 들어가니 넘어간다. 코코, 니코한테는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오늘 저녁을 쟤네 때문에 망칠 생각은 추호만큼도 없다. 지금부터 두세 시간은 나만의 시간이다.

들어가자마자 웨이터가 날 보더니 매우 반가워한다. 하긴 이곳에서 그리 마셔됐으니 반가울 수밖에 없다. 날 보더니 "일단 생맥주 한잔부터 주문할 거지"라고 묻기에 "내 마음을 어떻게 그리 잘 읽어요"라고 대답한다.

지난번에 총 52잔을 먹었단다. 4명이니, 인당 13잔씩이다. 한잔이 350미리니까, 인당 4.5리터를 먹은 거다. 아 미쳤지. 다음날 숙취가 그 정도였던 게 오히려 다행이다. 근데 내가 마지막까지 똑같이 마셨던가? 뭐 기억이 나야지.

저번에 생선이 꽤나 맛있었어서 그걸 또 주문한다. 4500키얏, 꽤나 비싼 가격이긴 하지만 오늘은 맛있는 걸 먹고 싶다. 혼자서 맥주를 마시면서 키보드를 핀다.



음식이 나온다. 음식을 두고, 맥주를 두고, 키보드를 두고, 그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의 시간을 가진다. 혼자 여행을 다녀도 사람 사는 세상이다 보니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거기서 또 즐거움과 피곤함이 있다. 이번 이틀은 피곤함이 강했기에 지금 혼자 있는 이 순간이 너무 좋다. 맥주 한 모금 마시고, 안주 하나 먹고, 글을 한 문장씩 쓴다. 밖에 프랑스인들이 있지만 이제는 신경도 안 쓰인다. 같이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따로 앉은 지금은 내 소중한 여행을 남들로 인해 방해받지는 않을 테다.

여기에는 슬픈 눈을 한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밥을 먹고 있으면 바로 옆으로 와서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야옹 야옹"하며 울어댄 다. 밥 달라 이 거지. 오늘도 어김없이 내 옆에 와있다. 나한테 고양이 냄새가 나나? 유독 고양이들이 가까이 온다. 오늘은 나도 배고픈데... 그래도 눈감고 살점 하나 뚝 떼서 던져 준다. 저 눈을 보면 누구도 안 줄 수가 없을 거다.


맥주를 다 먹어서 두 잔째를 시킨다. 오늘은 딱 3잔까지만 먹을 생각이다. 그 웨이터가 맥주를 가져다주면서 나보고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거냐고 꽤 오래 있는다고 말을 건넨다. 그래서 아마 내일 하루 더 있지 싶다고 대단한다. 사실 아직 모르겠다. 웨이터가 갑자기 미얀마에서 여자친구는 없냐고 묻는다. 아 난 한국에 예쁜 여친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한국 말고 미얀마에는 여친이 없냐고 물어본다. 이게 무슨 소리야.

말을 못 알아들었나 싶어서 항상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하는 노여사 사진을 보여준다. 예쁘다고 그러더니 갑자기 나보고 "네 여자친구 맛은 봤어?"라고 물어본다. 순간 내 귀를 의심한다. 뭐지?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으니 아예 대놓고 성적으로 직접적인 농을 던진다.

하, 네가 뭔데 내 소중한 여자친구한테 성적인 농담을 하는 건데. 순간 이건 뭐야 싶어서 할말을 잃고 빤히 쳐다보니 내가 못 알아들은 걸로 착각했는지 굳이 또 다시 얘기하려고 한다. 얘기하기도 짜증 나서 손으로 저리 가라고 손짓한다. 오늘 내 여행 방해하는 사람 엄청 많다. 그냥 좀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것뿐인데 뭔 이리 짜증 나는 놈들이 많다냐.

내가 대놓고 정색하니까 "아, 이런 얘기 싫어해?"하고 겸연쩍어 하면서 알겠다고 하고 떠난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자기 여자친구를 대상으로 그런 얘기를 좋아할까. 쟤도 이런 농담이 먹힌 적이 있으니 얘기를 하는 거겠지. 세상에는 참 미친놈들이 많다. 어쨌든 오늘로서 이곳은 끝이다. 여기에 대해 좋았던 기억이 순식간에 와장창 무너진다.

그럼에도 내 저녁을 방해받고 싶지는 않다. 맥주를 하나 더 시켜서 난 그냥 내 여행을 한다. 웨이터 하고는 눈도 안 마주친다. 눈치가 있다면 자기도 알겠지.

고양이는 계속 옆에 있는다. 야 너 많이 먹었잖아. 그래도 너 때문에 그나마 기분이 풀리니 고맙다. 생선을 다 먹고 남은 머리를 통째로 던져준다. 이놈, 머리 찔끔찔끔 먹더니 머리는 싫은지 날 다시 빤히 바라본다. 그러다 어차피 내가 다 먹은걸 깨달았는지 다른 호구를 찾아 떠나간다. 이놈 똑똑하네. 다 먹은 줄 어찌 알았지.

핸드폰 배터리도 간당 간당하기에 계산하고 나온다. 6100키얏이 나왔는데 다행히 남은 미얀마 돈이 6200키얏이다. 다 주고 그냥 잔돈도 안받고 나와버린다. 나오니 프랑스인들은 다 떠났다. 아 그 좋았던 기억이 이리 한순간에 안 좋아질 수가 있을까.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보보네 보니 여사장님이 분주히 일하고 계신다. 여행이든 기억이든, 그 좋고 나쁨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사물이 아닌 인간이다. 아무리 훌륭한 관광지를 가도 사람들이 자기와 안 맞으면 그냥 스쳐지나 가는 곳이 되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도, 사람들이 좋으면 그곳이 나에게는 최고의 여행지가 된다. 시포에서는 참 양쪽의 기억들이 공존한다. 보보네 식구들과 보트트립 멤버들이 줬던 좋은 기억을 트래킹과 오늘의 술자리에서 상쇄시켜 없애버린다. 하지만, 난 좋은 기억만 가져갈련다. 그게 나의 이기적인 선택이다.

방에 와서 와이파이를 연결하니, 노여사한테 카톡이 와있다. 이 시간에 또 베트남 비행기표 예매를 해보았는데 성공 못했단다. 아니 지금 시간이면 한국시간 12시일텐데, 아까 10시까지 야근을 하고 와서 그냥 자지 뭘 또 이런데. 보트트립의 멤버들에게서도 메일이 와있다. 유안은 방콕에 조만간 가니 시간 되면 보자고 하고 요한은 지금 인레에 와있는데 너무 좋다며, 혹시 프랑스인 만나면 대작하지 말라고 짧은 영어로 농담이 쓰여있다. 뭔가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차피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자기와 안 맞는 사람들한테 연연하면서 우울하게 살 필요가 전혀 없다. 이 짧은 인생, 자기와 맞는 사람을 찾고 같이 시간을 보내기에도 빠듯하다. 짧은 인연이든 오랫동안 함께하는 인연이든, 이러한 좋은 인연들이 행복을 전달해주는 묘약의 재료가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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