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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Jul 21.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18

@ Hsipaw, Myanmar (City Tour)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듯이 여행 또한 선택의 연속이다. 


새벽녘부터 일어나서 고민을 한다. 인레호수를 이번 여행에 갈까, 말까. 원래 저번에 세웠던 계획대로 한다면 가는 거였지만, 오늘 하루를 더 시포에서 쉬면서 마지막 안녕을 고하고 싶어 졌다. 하지만 이제 미얀마에서의 일정은 5일 정도 남았기에 오늘을 여기서 보내게 되면 인레까지 가기가 쉽지 않다.

미얀마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바간과 인레호수다. 그러하기에 미얀마에 오는 모든 여행자는 이 두 곳을 반드시 들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도 맞는 장소라는 말은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할 때는 그 선택에 집중하는 것 보다 그로 인해서 잃게 되는 것을 감수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인레호수를 보지 않아도 후회 안 할 수 있을까? 반대로, 인레호수를 위하여 시포를 이렇게 급하게 떠나도 후회 안 할 수 있을까?

사실 어찌 보면 이미 답은 나와있을 수도 있다. 난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를 가서 만족한 적이 없다. 인도에서도 아그라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제주도 가서는 올레길을 오히려 피해 다녔으며, 태국에서도 방콕을 제일 싫어했다. 이곳 미얀마에서도 바간이 어찌 보면 가장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것도 어찌 보면 남들과는 다른 경험을 하고 싶은 내 무의식적인 선입견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인지 거의 두 시간마다 깬 것 같다. 5시쯤 일어나서 조금 앉아 있으니 22일에 베트남 하노이로의 비행기가 확정됐다는 메일이 온다. 노여사가 방금 예약에 성공했나 보다. 자기도 일하느라 바쁠 텐데, 역시 고맙다. 이로서 베트남도 이번 여행에 포함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리고 빌어먹을 에어아시아의 10표 중 9표를 썼다. 이 정도면 선방한 거지.

몸이 천근만근이다. 정상이면 사실 그게 더 이상할 거다. 진짜 삭신이 쑤신다는 게 딱 이럴 때 쓰는 표현이다. 발바닥은 그렇게 씻었어도 아직 새까만 흔적이 남아있고, 온몸의 근육은 주는 것도 없이 왜 이리 혹사시키냐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것보다 가장 심각한 거는 왼쪽 발바닥 한가운데 박혀 있는 좁쌀만한 가시이다. 이거 언제 박힌 거지? 제대로 발을 땅에 댈 수가 없다.

일단 일어났으니 아침을 먹으러 올라가야지. 왼쪽 발을 최대한 바닥에 안 대려고 노력하며 절뚝거리면서 옥상으로 간다. 이거 몸이 이러면 어차피 옵션이 없는 거 아닐까? 그냥 여기서 하루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그나저나 여기 가시를 뽑을 만한 핀셋이 있을까? 아침 다 먹으면 리셉션에 한번 가서 물어봐야겠다.


역시 시간이 아직 이른지라 사람이 거의 없다. 어제 리셉션에서 보이던 스태프들이 오늘은 옥상 식당에서 음식을 만들고 서빙을 한다. 인도에서도 느꼈지만, 이곳도 업무에 비해서 일하는 사람이 과도하게 많다. 다 먹고 살아야지. 실제 데이터를 봐야 알겠지만 내가 느끼고 체험한 미얀마는 전체적으로는 다소 못 살지라도 부의 불평형이 심해보이지 않는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법이다.

조식을 먹으며 이틀치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옮긴다. 좋은 사진이 정말 많은데 인터넷이 워낙 느리니 다른 이들과 공유를 할 수가 없다. 카메라 SD카드의 용량이 슬슬 부족해진다. 물론 핸드폰에 백업하긴 했지만 그걸 믿고 사진을 지우는 바보짓은 이제 안 한다. 일단 여기서는 어떻게든 버티다가, 방콕에 도착하면 월E처럼 주인 없이 외로이 홀로 내 방을 지키고 있는 NAS에 사진을 확실히 넘긴 후 지워야겠다. 백업의 중요성!


조식은 역시 맛이 별로다. 그래서 양으로 승부하나? 이것 저것 먹을 거는 풍성하다. 조금 먹고 있으니 니코가 상의탈의를 한 채로 올라온다. 이놈들은 그냥 막 벗고 다니는구나. 니코한테는 악의가 없다. 그래도 가장 얘기도 많이 한 친구다. 어제 더워서 잠을 잘 못 잤단다. 난 에어컨이 있지요, 하며 약 올린다. 어쩌라는 거야,라는 표정으로 옥상에 있는 공용화장실로 씻으러 사라진다.


글을 쓰면서 결정을 내렸다. 인레호수는 안 갈 거다. 누가 나한테 '미얀마 갔다 왔어?'라고 물으면 '응, 난 시포 갔다 왔어.'라고 할 테다. 에펠탑을 봐야 프랑스를 본 게 아니고, 남산을 봐야 서울에 온 게 아니다. 이곳에서 내 경험이 충만하다면 그 누구보다도 제대로 미얀마를 봤다고 자부해도 되지 않을까? 시포에서 미얀마의 반을 보내게 되는 것 같지만, 후회는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못 있어서 아쉽다. 아직 관광지에 물들지 않아서 너무나도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 이 사람들이 인레호수 따위보다 훨씬 더 미얀마를 대표한다고 나는 믿는다.



오늘은 어제 해태가 돌아오는 길에 나한테 강력 추천했던 사원과, 조조가 강력 추천했던 Sunset Mountain을 가봐야겠다. 들어보니 리틀바간이라는 곳도 이곳에 있단다. 그러고 보니 난 시포에 몇일을 머무면서도 관광명소로 알려진 곳은 한군데도 가지를 않았다. 그러면서 무슨 또 다른 명소를 보러 가겠다고 10시간 기차를 타고 가나. 여기서 하루 정도 더 보내고, 핀오린에서 하루, 그리고 미얀마에서의 마지막 이틀은 내가 제일 좋아했던 만달레이에서 보내면서 정리를 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아, 오늘 환전은 필히 해야 한다.


일단 내려가서 핀셋을 좀 빌려봐야겠다. 이 발로는 걷기가 힘들다. 식사를 다 하고 내려오면서 니코와 이제 못 볼지도 모르니 이별 인사를 나눈다. 안전히 잘 다니렴, 밥 잘 챙겨먹고.

프런트에 가니 여자 스태프, 남자 스태프, 그리고 아기가 있다. 둘이 부부? 이 애기가 너희의 사랑의 결실이냐고 물으니 둘 다 기분 나빠한다. 흠, 몇 년 후에 오면 커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군. 핀셋이 있냐고 물으니 잠시 기다리라면서 여기저거 찾아보고 전화까지 돌린다. 아기를 내가 안아주면서 기다린다. 이 애기 뭐 이리 진지해. 웃겨보려고 우르르 까꿍 필살기까지 내가 아는 모든 방법을 쓰지만 가벼운 미소도 안 보여준다.

열심히 찾더니 없단다. 그리 찾았는데 없는거 보니 정말 없나 보다. 어쩔 수 없지. 손톱깎이로 뽑아야 하려나. 알겠다고 하고 방으로 들어와서 모든 불을 다 켜고 손톱깎이로 시술을 시작한다. 소독도 하면 좋겠지만 귀찮다. 근데 이거 가시가 있는 건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걸을 때마다 따끔거리고 작은 검은 점이 있어서 있나 보다 했는데 또 보다 보니 영 알 수가 없다.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어보니 아까 그 스태프가 핀셋을 들고 서 있다. 어디서 또 끝내 구해왔나 보다. 아... 이 착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이제 핀셋으로 본격적으로 다시 작업을 해본다.

아프긴 한데 그냥 찔린 상처인지 가시인지 도통 모르겠다. 내가 의사도 아니고 알 수가 있나. 에잇 몰러, 좀 찔러대다가 그냥 연고를 바르고 그 위에 반창고를 붙여버린다.

오늘은 어떻게 할까? 피곤해서 그냥 방에서 쉴까 싶다가, 그래도 마지막 날인데 근처라도 돌아보자라고 생각을 한다. 특히 해태가 강추했던 그 사원은 한번 가보고 싶다. 오후가 되면 햇빛이 강렬해질 테니 오전에 한군데라도 가볼까 싶어서 지금 나가 보기로 한다.

어제의 교훈이 있으니 이번에는 나가기 전에 관심사병 발가락들에 모두 테이핑을 아예 해버린다. 내 마크2 바지는 아직 안 말랐기에 한국에서 입고 왔던 마크1 바지를 오랜만에 꺼내 입는다. 이 바지 입으면 뭔가 여행자의 멋이 안 사는데... 어쩔 수 없다.

1층에 내려오니 몇번 봐서 이제는 친근해진 스태프들이 반긴다. 아침에 봤던 그 애기는 다른 스태프 품에 안겨있다. 여기 사장님 아이라더니 돌아가면서 애를 봐주나 보다. 애기를 안아 들고 어부바를 해주며 좀 놀아준다. 몇 번 봤더니 그래도 이제는 희미하지만 약간의 미소가 살짝 보이는 거 같기도 하다.

일단 11달러를 주면서 오늘 하루 더 연장해달라고 한다. 오늘은 외부로 돌아다닐 거기에 에어컨이 필요 없을 거 같긴 한데, 실컷 네고 해놓고 마지막 날에 에어컨 빼니 얼마로 해달라고 다시 네고하기도 애매해서 그냥 전체 금액을 지불한다.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다, 어디를 가야 할까, 라며 스태프의 의견을 구한다. 지도도 하나 있으면 달라고 한다. 지도를 보면서 같이 얘기를 하다 보니 뭐 작은 동네라 그런지 동선이 대충 그려진다.


일단, 무슨 왕궁이라고 되어 있는 곳을 가고, 더 쭉 가서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리틀바간을 간다. 그 후 이쪽 큰거리로 돌아와서 환전을 하고 점심을 먹는다. 한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강가에 있다는 유명한 카페에 들러서 커피나 한잔 할까 싶다. 서너 시쯤 되면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해태가 얘기했던 그 사원으로 간다. 거기서 더위를 조금 식히다가 해질녘쯤 Sunset Hill에서 일몰을 본다. 그리고 돌아와서 맥주 한잔, 이보다 완벽한 시나리오는 없다.

계획을 짰으니 실천이다. 지도를 왼손에 들고 터벅 터벅 길을 나선다. 어제와 다르게 앞에 따라갈 사람도 없고 뒤에서 미는 사람도 없으며, 반드시 가야 하는 길도 없다. 그냥 세월아 네월아, 천천히 걸음을 이어간다. 가다가 좀 덥다 싶으면 그늘에서 여유있게 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해본다. 선글라스를 끼고 걷다가 이 곳의 정취를 까만 안경을 통해 걸러 보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벗어서 가방에 집어넣는다.



앞에 어떤 아주머니가 자전거를 손으로 밀면서 언덕을 낑낑거리며 올라가고 계신다. 이거 도와드리고 싶은데 너무 설레발일까? 좀 지켜보는데 너무 힘들어하시길래 용기를 내서 자전거 뒤쪽에 손을 얹으며 도움이 필요하시냐는 질문을 눈빛으로 보낸다. 아주머니 괜찮다고 정색하시면서 절래 절래 고개를 흔드신다. 아 설레발 맞았구나. 그냥 가던 길을 간다.


어제 비가 좀 오더니 전체적으로 좀 시원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햇볕이 강렬하다. 이럴 줄 알고 선크림을 가지고 왔다. 시꺼머스로 변신한 이제 와서 선크림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래도 화상을 입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어제 이마와 뒷목에 연고를 덕지덕지 발랐더니 따끔따끔 한 건 많이 가셨다. 더 심해지기 전에 서둘러 선크림을 꺼내서 이마와 목 뒤를 다시 중점적으로 발라준다.


스태프가 대략 15분 거리라 했지만 그냥 천천히 걷다 보니 30분쯤 지나서야 첫 번째 목적지인 왕궁에 도착한다. 문 앞에 뭐라 써 있기에 가까이 가서 보니 오늘은 닫는단다. 흠 여긴 인연이 아닌가 보군. 뭐 말이 목적지지 그냥 이유 없이 와본 거라 앞에서 좀 앉아있다가 다음 행선지로 출발한다. 이곳은 근데 뭐한 곳이지?


나는 이런 자유로운 걸음이 좋다. 제주도의 올레길이 싫었던 이유도, 이번의 트래킹이 싫었던 이유도 모두 남이 정해놓은 코스대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내키는 데로 가면서 이 곳이 나에게 주는 경험을 느끼는 것이 나에게는 이곳을 내 기억에 가장 잘 남기는 방법이다.




지도를 참으로 대충 만들었다. 이정표가 건물도 아니고 큰 나무란다. 다 큰 나무구먼. 뭐 잘못 들어가도 큰 상관은 없기에 대충 어림 짐작해서 길을 찾아간다. 이번에 찾아 갈 곳은 리틀 바간이다. 빅바간 혹은 오리지널 바간은 나에게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여기의 작은 바간은 좋은 기억을 남겨주려나 살짝 기대가 된다.




골목길을 걷는데 길에 앉아있던 어떤 아저씨가 나보고 이 길이 아니라며 옆길로 가란다. 어디 가는지 얘기도 안 했는데 외국인 티가 나니까 알려주나 보다. 그래, 아직 내 얼굴이 현지인까지는 아니다. 아무 생각 없었는데 알려주셔서 고맙다. 봐라, 가게 되면 어떻게든 도착하게 되어 있다.



아저씨가 일러준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다보니 사원들이 하나 둘 시야에 들어온다. 이쪽에 사원들이 중점적으로 있나 보다. 리틀 바간은 어떤 거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보자마자 아 이놈이구나 알게 된다.



근데 이게 무슨 리틀바간이냐, 나노바간이라고 불러야겠다. 바간 스타일의 작은 파고다가 달랑 3개 서 있는 게 끝이다. 귀여운 규모에 살짝 미소가 지어진다. 어쨌든 오늘의 두 번째 목적지도 도착!


여기 좀 앉아서 쉬다 갈까. 리틀 바간이라 불리는 곳에 들어서니 개 한 마리가 날 보더니 심하게 짖는다. 이놈아, 여기 그래도 명색이 관광지인데 들어서는 사람이 생소하다고 짖으면 어쩌느냐. 하지만 쫄지 않는다. 여행에서 짖기만 하고 겁많은 놈들을 하도 많이 봐서 오히려 다가가본다. 역시 도망간다. 이놈들 싸울 줄이나 아나?

여기 근데 앉을 곳이 마땅치 않다. 앉아서 책이나 좀 보다 갈까 했는데 그럴 곳은 아닌가 보다. 그래도 구석에 앉을 자리를 하나 찾아서 자리를 잡고 키보드를 핀다. 저 놈의 개는 여기까지 따라와서 엄청 짖어댄다. 하도 시끄러우니 무슨 일인가 싶어서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다 내 쪽을 한번씩 쳐다본다. 아 민망하게, 이놈아 그만 짖어. 눈이 마주치니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사람들에게 민망한 "밍글라바"를 시전 한다.

하지만 여기는 역시 오래 앉아 있을 곳은 안된다. 시포의 대표 관광지로 이곳을 넣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포가 관광하러 올 곳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뭐 난 나쁘지 않다. 그늘이 있고 앉아서 쉴만 곳이 있었으면 옆에 물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나름 한두 시간은 족히 머물다 갈 텐데 아쉽다. 게다가 옆에서 공사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시끄럽게 들리는 것이 오늘은 날이 아닌 거 같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돌아가는 길은 그냥 아무 길로 가볼까? 대충 방향만 가늠하고 길을 나서 본다. 은행 가는 길에 숙소를 어차피 들려야 하니 들려서 해우소라도 들릴까 싶다. 아침에도 갔는데, 어제 너무 많이 먹었나. 민망하군.

길을 걸어가고는 있는데 막상 조금 불안하다. 이 길이 맞을까? 올때는 이런 작은 길은 아니었는데. 뭔가 불안해서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이 스릴을 즐기기로 한다. 여기서 잘못 가봤자 어디로 가겠어.


하지만 역시 불안하다. 완전 반대 방향으로 가면 어쩌지? 맞는 방향인 듯 하지만 결국 의심병이 도져서 길에 있는 한 총각한테 물어보고 만다. "This way Sibaw?" 현지인들은 이 곳을 시포라고 하지 않고 시보라고 발음한다. 맞단다. 에잇, 괜히 물었다. 소심해가지고선.



아침에 걸은 길과 같은 길인데 거꾸로 오니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그리고 갈 때는 한참 간 거 같은데 돌아올 때는 역시나 얼마 안 가서 바로 숙소가 보인다. 언제나 갈때는 멀지만 올때는 금방이다. 아 이 미스터리 한 현상. 그냥 내가 길치인 겐가.

일단 숙소로 돌아간다. 아침에 굳은 결의를 다지며 나간 애가 너무 일찍 돌아오는 듯해서 프런트에서 뭐라 인사하기 전에 쏜살같이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방으로 오니 시원해서 좋다. 에어컨을 끄고 나갔는데도 아직까지 냉기가 남아있다.

아무래도 DNA(동남아) MK1은 여행 느낌이 안 난다. DNA MK2 바지가 말랐기에 수선작업을 시작한다. 한 옷만 입고 다니다 보니 허리끈 부분이 뜯어져서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으면 바지가 흘러내리는 기능적 장애가 생겼다. 제주도에서 샀던 역사 깊은 바늘과 실로 꼼꼼하게 처리를 하려 했으나, 귀찮아서 그냥 대충 처리만 해버린다.



잠시 들렸다 바로 나가려고 했는데 시원한 곳에 들어오니 게을러진다. 그래, 뭐 급하다고 바로 나가나. 좀 누워서 쉬다 나가야겠다. 에어컨을 킨다. 돈을 냈으니 최대한 활용해야지. 한 30분 자고 나갈까 했는데 잠이 안 와서 그냥 카톡이나 하고 논다.

1시가 되니 슬슬 배가 고프다. 게을러서 죽었다는 사람은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그 첫 번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지. 슬슬 일어나 볼까.

일어날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난리나 난다. 아침의 발바닥 상처는 가시가 아니었는지 막상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근육들은 계속 문제다. 잠깐, 그러면 나는 발바닥에 뭔가에 찔려서 이미 상처가 난 곳에 핀셋으로 찌르고 손톱깎이로 찢어가며 상처를 더 키운 셈이 되나.

비명을 질러대는 근육들의 아우성을 무시하며 다시 밖으로 향한다. 일단 환전이 시급하다. 지금 수중에 키얏이 단 한 푼도 없어서 오전에는 물도 못 사먹었다. 2번이나 가서 실패했는데,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시포 메인 거리의 전경이 이제 너무나도 익숙하다. 호텔 바로 옆에 있는 현지인들 가득한 식당, 길 따라 내려가면 보이는 커다란 핸드폰 매장, 오른편에 있는 이름 모를 사원, 모두 며칠 안에 내 의식의 한구석을 차지해버렸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좀 아쉽다. 시포에서 7일을 보냈으니 전체 미얀마 여행에서의 반을 오로지 이곳에서 보낸 셈이다. 처음부터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머물다 보니 그리 되었다.

갑자기 미얀마를 떠날 생각에 울적해진다. 아 나는 너무 앞서 나간다. 벌써 캄보디아 생각도 하고 있다. 노여사한테 더 하드 트레인 받고 와야겠다. 미래를 사는 남자에게 현재를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가 않다. 아직 미얀마에서의 일정도 5일이나 남았고, 여기 시포에서도 하루가 남아있다.



은행으로 가니 언제나 그렇듯이 경찰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어준다. 이제 안 속아. 지난번 두 번이나 경찰이 이리 행동하기에 문을 연줄 알고 들어갔었지만 이미 매장이 마감한 후였다. 차라리 앞에서 알려주지 왜 굳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문까지 열어주는 걸까. 이곳 사람들의 성향이지 뭐. 물론 좋은 성향.

오늘은 아직 영업 중인 것이 틀림없다. 시간이 1시 반도 안되기 했거니와, 일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근데 도대체 왜 이리 스태프가 많은지 알 수가 없다. 스태프가 20명 정도인데 방문한 손님은 나 하나이다. 그곳에 내가 입장하니 모두가 날 쳐다보면서 집중을 한다. 부담스럽다.

세 번째 와서 그런지 이제는 나를 아예 알아보는 듯하다. 사전 작업을 할 필요도 없이 바로 50달러를 주고 환전을 부탁한다. 굉장히 친절하게 받으면서 문서를 하나 작성해달라고 한다. 직원 한분 하고 내가 얘기를 나누는데 그 뒤에 구경하는 직원만 4명이다. 여기 손님이 나말고 오기나 하는 걸까. 

작성하라는 서류에 여권번호를 적는 칸이 있다. 갑자기 등이 싸늘해진다. 환전할 때 여권번호를 쓰지! 아 방에 놔두고 왔다. 나의 세 번째 환전 시도도 이리 허무하게 실패하는 걸까? 환전하는 게 이리 힘들지 정말 몰랐다.

내가 슬픈 눈으로 바라보니 스태프 여성분이 호텔이 어디냐고 물어본다. 븕은용, 레드 드래곤이라고 하니 번호를 찾아서 전화를 한다. 다행히 붉은용에 체크인 할때 여권 번호를 적어놨기에 그쪽에서 알려주고 서류 작성을 무사히 완료한다. 이 더위에 숙소까지 갔다 오지 않아도 돼서 정말 다행이다.


환율이 1100키얏 정도이다. 사설 환전소에서 하면 1000키얏이니 10%가 차이나는 셈이다. 인도에서는 사설 환전소가 환율이 더 좋은데, 여기서는 정부 통제 때문인지 은행이 가장 깔끔하고 가장 환율도 좋다. 5000키얏 11장을 받으니 지갑이 두둑해진 게 부자가 된 느낌이다. 숙박비는 달라로 계산한다면, 이번에 환전한 돈으로 미얀마를 떠날 때까지 쓸 수 있겠지? 좀 남겨서 만달레이에서의 마지막 식사로 에이스 게스트 하우스 스태프들한테 한번 쏠까나. 그 정도 돈이 남을지는 모르겠다.

지갑의 배가 부르니 이번에는 내 배가 고픈 게 확연하게 느껴진다. 오늘 오후의 일정은 아무데서나 끼니를 때우고 강가에 있는 유명 카페에 가서 날이 좀 시원해질 때까지 책을 보는 거다.


강가로 향하는 골목을 접어들면서 식당을 찾아본다. 이쪽 길은 처음 와서 그런가? 큰 길에서는 그렇게 많이 보이는 식당들이 여기서는 눈에 안 들어온다. 대신 이쪽에는 희한하게 찻집이 굉장히 많다. 식당처럼 보이지만 들어가서 물어보면 차만 판단다. 그래도 밥을 파는데가 있긴 하겠지?


없다. 뭐지, 왜 식당이 없지? 결국 지나가는 사람한테 밥 먹을 곳이 있냐고 물어보니 한 방향을 가리키며 저 강가 쪽으로 조금 더 가면 있단다. 메인거리에서 먹고 왔어야 하나보다. 이쪽은 식당이 귀하다.


식당을 하나 찾긴 했는데, 굉장히 비싸 보인다. 미얀마에서 처음 보는 와인셀러까지 눈에 띈다. 여기 나 같은 거지가 와도 되는 걸까? 하지만 근처 다른 식당은 영 안보이기에 일단 메뉴를 본다. 흠, 그래도 생각보다 비싸지는 않다. 면요리는 2000키얏에서 2500키얏이면 먹을 수 있다. 샨누들이 보보네에서 1500키얏인걸 생각하면 조금 비싸긴 하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다.


말레이시아식 면요리가 눈에 들어온다. 태국식도 알겠고 미얀마식도 알겠는데 말레이시아식은 뭘까? 말레이시아는 비쌀듯 해서 이번 일정에서도 뺀 나라이니 음식이라도 한번 맛 봐야겠다. 2500키얏이길래 이걸 주문하고 콜라 한잔도 같이 부탁한다.

콜라가 시원하다. 비싼 식당이라더니 냉장고도 좋은 걸 쓰는 것이 확실하다. 음료는 뭐 있는지 보지도 않고 시켰는데 보니까 지금보니 과일 주스도 콜라와 같은 1000키얏이다. 여기는 냉동고도 있는데 과일주스 시킬걸, 후회된다. 저번에 보보네서 시켰더니 바로 망고를 갈아서 준거라 맛은 나쁘지는 않았었는데 막상 시원 하지가 않았아서 그 이후에 안 시키고 있었다. 이놈의 콜라, 한국 가면 늘 먹는걸 여기서 먹자니 뭔가 갑자기 억울하다. 그렇다고 물리 수도 없다.


조금 기다리니 요리가 나온다. 비주얼이 괜찮다. 비싼 식당이라 그런지 쓰는 재료도 좋은가 보다. 먹어보니 맛도 고급지다. 헌데, 이놈과 태국 팟타이와의 차이점은 모르겠다. 당근이 들어간 게 다른가?

맛있게 먹고 3500키얏을 지불한다. 훌륭한 한 끼 식사였다. 생각해보니 이게 시포에서의 마지막 점심이다. 아 마지막이라는 말은 진짜 마지막 전에는 쓰지 말아야지.


나와서 원래 가려고 했던 그 유명한 카페를 찾아 보니 바로 옆이다. 론리에도 나온 곳인걸 보면 꽤나 유명한 곳 같은데 들어가보니 주인 내외만 외로이 서있다. 비수기의 영향인가.

주인 아주머니가 영어를 꽤나 하신다. 여전히 남편은 못한다. 보보네랑 같은 시스템이군. 그래도 여기는 아저씨가 바리스타 일을 하시나 보다. 유명 카페이니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거나, 최소한 핸드드립이라도 하는 걸까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냥 가루커피다. 뭐 그게 어디냐. 혹시 아이스도 되냐고 여쭤보니 된다고 하셔서 아이스라테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으러 뒤편 마당으로 나와본다.


아니, 이 보석 같은 자리는 뭐지. 강가에 테라스가 넓게 펼쳐져 있고, 알리미늄 지붕이 곳곳에 배치되어 그늘을 형성해 준다. 그늘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펼쳐져서 고객들이 강가를 보며 커피 한잔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다. 서울 기준으로 치면 별 한 개도 과하겠지만 시포에서 이런 곳을 찾으니 이곳을 이제 발견했다는 게 억울할 정도다. 이 멍 때리기에 최적인 시스템은 뭐다냐.

서양인들 한 팀이 이미 있길래 방해 안되게 그 옆에 자리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 조금 기다리니 여사장님이 주문한 커피를 가지고 오신다. 별도로 주문한 바나나 케이크 조각도 가져도 주신다. 근데 이걸 아이스라테라고 해야 할까. 그냥 믹스커피에 우유를 부었다. 하긴 미얀마에서 얼음 동동을 바란 내가 문제겠지.




여기서 최소 2시간은 있어야겠다. 앉아서 글을 잠시 먼저 쓴 이후에 카톡으로 부모님한테 안부 메시지를 보낸다. 오늘이 어버이날이니 할 건 다 해야지. 근데 카네이션이 아닌 시꺼멓게 탄 아들 사진을 보내도 좋아하시려나 모르겠다. 그리고 나서 킨들을 펴고 책을 보기 시작한다. 오늘은 새 책을 핀다. 미리 다운 받아온 ''연금술사'의 첫 페이지를 핀다. 그러고 보니 책을 3개나 시작하게 된 건데, 여행 끝나기 전에 다 볼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시간이 아직 많으니 이제부터라도 좀 열심히 봐야겠다.


이곳 책을 보기 최적의 조건인 거 같다. 잠시 책에 빠져있다가 주변을 둘러본다. 강에서는 아이들이 강바닥에 있는 돌을 주워 담고 있고, 옆에 가게에서는 한 남녀 커플이 강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새의 지저귐과 저 멀리 어딘가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 말고는 바람소리만이 이곳에 존재한다.

'연금술사', 아직 극초반을 읽은 거지만 좀 불편할 정도로 직설적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로운 양치기를 원하지만, 좀 더 인정을 받는 제빵사가 되고야 만다. 언제든지 자기의 꿈을 펼칠 수 있지만 모두 너무 이른 순간에 포기한다. 꿈이 과연 그렇게 하고자 한다고 되는 걸까?

예전에는 나도 그리 얘기를 했었다. 네가 꿈을 포기하는 거지, 꿈이 절대로 너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많이 한 말 중에 하나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난 지금, 세상이라는 것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일단 꿈이라는 것의 범위가 굉장히 넓다. 보통 얘기하는 평생 여행 다니거나 세상을 바꾸는 변화를 만드는 거 같은 거창한 것 말고도 더 작은 범위이면서도 더 이루기 어려운 꿈들도 많다. 그리고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보통 꿈에 대해 긍정적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 꿈을 이룬 사람들이다. 평생 꿈을 좇고 포기하지도 않았음에도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과연 마지막 순간에 꿈에 대해 어떤 말을 하게 될까.

꿈을 좇는다는 것은 일종의 미래를 사는 행위이다. 만약 아까 말한 꿈을 평생 이루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말할 수 있으려면 목표로서의 꿈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꿈을 가졌어야 한다. 성취하고 정복해야 하는 의미로서의 꿈은 여러모로 위험하다. 현실적으로 실패할 확률도 크거니와 실패했을 때 남는 것도 없다. 하지만 결과가 아닌 그 과정이 꿈이라 한다면 이론적으로는 실패 자체를 할 수 없다. 이미 그 길을 쫓는다는 것이 자신의 꿈을 이미 이룬 셈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를 사는 것만이 모두가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다. 

'나는 그림을 그려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어'라는 목표 지향적인 꿈을 끝내 성공시키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다. 하지만 '나는 그림 그리는 것 자체가 꿈이야. 그리는 순간이 너무 행복해' 이런 과정 지향적인 꿈은 직장인도, 전업 작가도, 그리고 전업 주부도 모두 충분히 이룰 수 있다. 물론 개개인에게 꿈이 갖는 의미에 따라 야망적인 꿈을 무조건 목표로 가져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이에게 행복은 쉽지 않은 선물이 되겠지.

책을 보고 있으니 슬슬 해가 질 시간이 다가온다. 원래 이 다음 일정은 해태가 추천한 사원에 가는 거였지만 뭔가 오늘은 액티브하게 움직이기가 싫다. 시포에서의 마지막 밤은 편안하게 있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 이유로 사원은 패스하는 걸로. 해태야 이해해, 형님은 체력이 안 따라준다...

커피 값을 계산하고 숙소로 향한다. 지금이 4시 반이니까 대략 한 시간 정도 쉬다가 일몰을 보기 위하여 선셋힐로 향하면 되겠다. 아 근데 갑자기 만사가 귀찮네? 한 곳에 오래 있으면 이런 증상이 생긴다.

가는 길에 모모네를 기웃기웃거린다. 안에 해태와 여사장 남편님이 있다가 나를 보고 반가워한다. 나도 무척 반갑구머잉.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들어가니 둘 다 무척 좋아한다.

해태를 보자마자 "가나다라마바사"라고 갑자기 읊어주니 센스 있게 바로 "아자차카타파하"라고 대답한다. 한글 랩배틀이다. 그래도 아직 어제 가르쳐준 것을 잊지는 않았구나. 내가 그래도 이곳에 뭔가를 하나 남기고 가긴 가는군.

사실 딱히 할 말이 있어서 들어온 건 아니고 반가워서 들어온지라 조금 지나니 약간 어색해진다. 괜히 지도를 꺼내서 쓰잘데기 없이 선셋힐 위치를 물어본다. 어차피 오토바이 택시 타고 가면 알 필요가 없긴 한데, 대화의 주제가 필요했다. 어디 어디 얘기하는데 귀담아 듣지 않는다. 내일 오전에 시포를 떠나기 전 꼭 다시 이곳에 들려서 인사하고 갈 거라고 약속하고 나온다. 여사장님, 마보사는 이 시간에는 자나보다. 내일 아침에 인사하지 뭐.

숙소로 돌아오니 땀이 범벅이다. 그냥 살짝 돌아다녀도 이렇다. 카운터에 또 그 많은 스태프들이 모여있다. 여기도 4일째이다 보니 이제 다들 나를 보면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지도를 피고 선셋힐로 갈려면 걸어서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보니 2시간이란다. 헐, 갈 때는 오토바이, 올 때는 걸어오려고 했는데 이건 뭐지. 오토바이를 타도 30분이 걸린단다. 5초간 서서 생각해 보고 바로 결정한다. 안가! 조조야 미안해...

그냥 방에서 내가 비싼 돈 내고 쟁취한 에어컨 바람이나 좀 쐬다가 시포의 마지막 저녁이나 먹으러 나가야겠다. 로비의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고 300키얏을 지불한다. 근데 여기 스태프들은 언제나 청소를 하고 있다. 그것도 물걸레질을 말이다. 이거 미안해서 밟고 다닐 수가 있나. 지금도 두 명이 청소하고 있기에 뭘 맨날 청소하냐고, 한국에서 내 방은 일주일에 한번 청소 할까 말까라고 농담하니 다들 아주 그냥 빵 터진다. 어? 이런 유머가 여기 스타일인가? 너무 좋아하길래 순간 당황하지만 뭐 재미있으면 된 거지. 물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길에도 뒤에서 막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아 분명 그리울 거다, 이 해맑은 웃음 소리.

방에 들어오자마자 에어컨을 키고 샤워를 하러 간다. 자동 반사적으로 물에 세제를 풀어 옷과 속옷을 던진다. 아니 이게 왠 깔끔한 척. 어제 빨래를 엄청 했더니 몸에 익었나 보다. 그래도 역시 빨래와 목욕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다니다 보면 또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샤워를 하고 빨래를 널고 침대에 눕는다. 아, 좋다. 오늘 그래도 휴식은 충분히 취하는 거 같다. 한번 무리한 후에는 이리 좀 쉬어줘야 한다. 이러한 휴식도 여행의 일부다.

침대에 누워서 론리 플래닛을 좀 보는데, 허허, 보보네가 론리플래닛에 떡하니 나온다. 이건 또 신선한 충격이구먼. 식당의 원래 이름이 'La Wun Aung'이고 24시간 영업이라고 쓰여있다. 여기 유명한 곳이었구나. 하긴 친절하고, 식사, 음료, 투어 모두 가능하니 그래도 작은 곳은 아니지 싶었다. 식당 이름이 왜 보보가 아니라 다른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마보사,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오늘 낮에 점심 먹은 곳도 지금 보니 론리에 나온다. 그 식당은 유명해 보이긴 했지만 90년 전통이 있는 집이었다니 그건 또 놀랍다. 옆에 커피 마셨던 Black House야 추천해줘서 갔으니 유명하리라 생각했었는데 책에서 내가 좋아했던 뒤 테라스를 따로 적어놓은 것을 보니 뭔가 신기하다. 동네 사람을 텔레비전에서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느려 터진 인터넷으로 두어 시간을 카톡도 하고 여행기도 검색해본다. 이러고 있으니 잠시 이곳이 여행지라는 사실을 잊는다. 그런데 난 왜 벌써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찾아보고 있는 걸까? 뭔가 한국에서 그쪽으로 여행 가는 게 아니라 미얀마 사는 사람이 캄보디아 여행을 준비하는 느낌이다. 제대로 여행을 일상처럼 살고 있는 건지도...?

7시니 밥 먹으러 가야지. 침대에서 나오자마자 온몸의 근육들이 질러대는 비명 소리에 잠시 잊었던 현실을 다시 찾는다. 혼자 다닌지 2주가 넘다 보니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바지를 입으면서 한 발을 들 때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아이고고, 나 죽네." 이러고 있는 내 자신이 웃겨서 뭔가 또 피식 거린다.

저녁 먹으러 어디 가지? 항상 가던 그 맥주집은 아웃이다. 게다가 오늘은 맥주가 안 당긴다. 꼭 맥주를 먹어야 하는 의무감이 있는 것도 아니지. 그 집 옆에 있던 중식집도 괜찮아 보이던데 그리로 가볼까?


이 생각은 호텔을 나오자마자 바뀐다. 호텔 바로 앞에 항상 현지인들로 만석을 유지하는 식당이 하나 있는데 아직 한번도 못 가봤다. 오늘도 보니 역시나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그래, 그래도 숙소 바로 앞인데 떠나기 전에 한번은 가봐야지.

들어서서 메뉴판을 피자마자 왜 여기에 사람이 항상 많은지 바로 깨닫는다. 보보네서 1000키얏에 먹었던 샨누들이 여기서는 500키얏이다. 그래도 마지막 저녁이니 비싼 거를 한번 먹어볼까 싶어 뒤져봐도 제일 비싼 게 500키얏이다. 이거 가격이 깡패인데?

좀 보다가 500키얏짜리 국물 없는 볶음 가락국수 하나와 300키얏짜리 만두로 결정한다. 미얀마에서는 종업원을 부를 때 입술을 오므리고 "쯔읍" 소리를 낸다. 그런데 이게 뭔가 강아지를 부르는듯 해서 아무리 문화라지만 좀 거부감이 든다. 게다가 이게 은근히 어려워서 난 잘 못한다. 여기도 꼬마 어린이가 주문을 받고 있어서 그냥 불러서 주문을 한다. 



주문하고 몇 분 안 지나서 음식이 바로 나온다. 흠, 저렴한 만큼의 퀄리티다. 조리도 미리 해놓았는지 면은 불어 있고, 만두도 그저 그렇다. 뭐 우리나라 돈으로 800원에 한 끼를 해결하는 거니 이 이상 바라는 건 사치겠지.

그럼에도 나름 시포에서의 마지막 저녁으로 마음에 든다. 한 곳에서 오래 머물면서 마지막 식사는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매일 먹는 음식을 먹는 것만큼 의미 있는 게 어디 있으랴.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 또 맛있게 느껴진다. 괜히 호화로운 식단으로 안 가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 은근 기특한데?

키보드를 피면 언제나 주목을 받듯이 여기서도 이 만석인 식당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쳐다본다. 뭐 한두 번도 아니고 그냥 살짝 웃어준다. 시포에서의 최후의 만찬을 싹 비운다. 진짜 생각보다 맛있게 먹었다.

금새 다 먹고 일어설까 하다 뭔가 아쉬움에 여기 전통 '샨누들'을 하나 더 시킨다. 아 이거 과식이다. 뭐 맥주를 먹는 대신에 먹는다고 생각하자. 그래도 아까 멈추는 게 낫았으려나? 덤은 언제나 안 좋은 법인데. 어찌 보면 더 먹고 싶은 거보다 마지막 저녁식사를 끝내기가 싫은 거 같다.


샨누들도 금방 나온다. 너무 많이 시켰는지 가져다주는 애가 날 희한하게 본다. 나 돼지 아니야. 그렇게 보지 마. 내가 생각해도 좀 독특하지만 나만의 작별인사야. 이거 근데 생각보다 맛있다. 500키얏 짜리라고 무시하면 안되겠다. 말린 고기 같긴 하지만 무려 닭고기까지 올라가고, 미얀마식 김치도 같이 준다.

역시 국물까지 싹 비운다. 뭐 국수니까 사실 좀 많이 먹어도 된다. 배가 든든하다. 계산을 하고 일어선다. 국수 두 그릇에 만두 하나까지 먹었는데 총 1300키얏이다. 오늘 낮에 먹은 말레이시아 국수가 한 그릇에 2500키얏이었던걸 생각하면 엄청 싸다. 역으로 점심이 비싼 거였다고 하는 게 맞겠다.



배도 식힐 겸 시포의 밤거리를 한번 걸어본다. 하늘을 보니 의외로 별이 꽤나 보인다. 그러고 보니 나는 트레킹 할때 왜 그 산골 오지까지 힘들게 가놓고 하늘의 별도 한번 안 보고 온 걸까. 여유가 없으면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힘들어진다.

이 길을 끝까지 쭈욱 걸어서 갔다 올까 생각하다가 말기로 한다. 뭔가 억지로 호들갑스러운 이별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냥 지금 이대로의 덤덤한 마지막이 마음에 든다.

방으로 올라와서 에어컨을 키고 다시 샤워를 한다. 언제나 할 수 있을 때 한번이라도 더 해야 한다. 짐을 싸놓을까 하다가 내일 그냥 싸기로 마음 먹는다. 뭐 어차피 5분이면 싼다. 아, 저 녹차는 조금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 앞으로 한 달을 들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는데. 난 왜 덜렁 충동구매를 한 걸까.

오늘 하루는 어찌 보면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누구의 눈에는 이 먼곳까지 와서 버리는 아까운 하루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난 여행에서 이런 쉬어가는 하루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액션 영화에서 액션만  계속되면 무료해지듯이 (트랜스포머 3...) 여행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이런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날이 반드시 필요하다. 게다가, 어찌 보면 장기 여행자만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닐까. 샤워도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듯이, 호사도 누릴 수 있을 때 실컷 누려보는 거다. 이제 진짜 시포에서의 마지막 잠자리에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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