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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Jul 22.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19

Hsipaw, Myanmar to Pyin Oo Lwin, Myanmar

굉음에 잠이 깬다. 이번 여행에서 빠이 이후로 맞이하는 두 번째 폭우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다. 10시쯤 잠들었으니 한 4시간 자고 깬 건가?

밤새 천둥 소리가 끊임없이 나서 잠을 방해하더니 결국에 전기가 나가며 정전이 된다. 에어컨이 꺼진걸 깨닫고 다시 한번 잠에서 깬다. 어차피 지금은 시원해서 괜찮은데, 좀 지난 후 정기가 돌아오면서 이번에는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에 다시 또 한번 잠에서 깬다. 이별 신고식 참 거하게 한다.

5시쯤에는 완전히 잠이 깬다. 밤에 정전이 돼서 핸드폰 충전이 제대로 안되어 있다. 오늘 기차 여행을 장기간 해야 해서 완전히 충전시키고 가고 싶었는데 걱정이다. 폰을 충전시키면서 오늘 이동할때 유념해야 할 것을 몇가지 확인해둔다. 

여행 내내 멀쩡하다가 갑자기 이제 와서 물갈이가 시작된 것 같다. 그것도 장기 기차 여행을 목전에 둔 오늘 말이다. 이건 무슨 조화냐. 5시에 일어나서부터 화장실을 두세 번 들락날락 거린다. 혹시 어제 저녁에 먹었던 저렴한 식사가 문제가 된 걸까.

한 것도 없는데 어느덧 시간은 7시다. 기차가 9시 50분이라고 한 거 같으니 여유 있게 9시쯤 숙소에서 출발하면 될듯하다. 더 이상 누워있어 봤자 잠도 안 오고 해서 그냥 옥상으로 올라간다.


밤새 한바탕 비가 와서 그런지 날씨가 꽤나 쌀쌀하다. 그래서 그런지 시간이 7시인데도 조식을 먹으러 아무도 안 올라와있다. 스태프들도 손님이 없으니 안쪽에서 수다를 떨며 놀고 있다. 왜 휴일 같은 분위기이지?

헛기침을 해서 스태프들에게 내가 왔음을 알린다. 한참 수다를 떨던 스태프들이 깜짝 놀라며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풍성하지만 그다지 맛 없는 이곳의 조식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커피를 한잔 타서 마신다. 이곳에 오래 있었지만 옥상에서 제대로 시내를 본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난간 근처로 가서 고개를 내밀고 밑에를 바라보니, 일주일이나 있었던 이곳의 모습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어제 저녁을 먹었던 현지 식당도 보인다. 그곳은 역시나 아침부터 만석이다.


식사를 가지고 왔길래 먹으면서 스태프에게 확인차 오늘 기차 시간을 한번 다시 물어본다. 자기도 잘 모르는듯 하지만 내선 전화로 한참 전화를 하면서 알아봐준다. 그러더니 기차 출발 시간이 9시란다. 어, 내가 알아본 거에서 50분이나 차이 난다. 이러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데. 여유 있게 타려면 8시 반에는 출발해야 한다고 해서 서둘러 식사를 마무리한다.

아무리 급해도 인사는 제대로 해야지. 조식을 마칠때까지도 옥상 식당에는 다른 여행자 없이 나 혼자다. 스태프들에게 그동안 감사했다고 인사를 한다. 지금부터 하는 인사는 진짜 마지막 인사다. 더 이상 앞으로 못 보기에 하는 이별인사다. 하나 하나에 진심을 담는다.

방으로 돌아오니 벌써 8시다. 마지막을 급하게 떠나고 싶지 않았는데 이리 돼서 안타깝다. 그래도 여기저기 인사할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 일단 짐 부터 빨리 싼다. 트래킹에서 지니고 온 녹차가 역시 부담이 된다. 이걸 다 가져가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나의 고생이 너무 아깝다. 반을 뚝 떼서 두개는 이곳 스태프들한테 선물로 주기로 결정한다.

짐을 싸고 잠시 침대에 잠시 앉아있으니 이제 진짜 이곳을 떠난다는 실감이 갑자기 든다. 어제는 실감이 안돼서 아무렇지도 않았나 보다. 뭔가 울컥 울컥하는 게 가슴 속에서 아까부터 계속 올라오려 하지만 무시한다. 아직 아니야.  

8시 15분, 보보네 가서 작별인사도 하려면 이제 진짜 떠날 시간이다. 조금은 무거워진 인생의 무게를 다시 한번 어깨에 짊어지고, 지난 6년간 나와 함께 산전수전을 겪어온 쪼리를 신고 방을 나선다.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침대를 돌아본다. 잘 있어.


내려오니 어제 하루종일 걸레질하던 꼬마 여자애가 지금은 바닥을 쓸고 있다. 정말 너는 하루 종일 청소만 하는구나. '또 청소해?'라는 표정을 담아 웃어주니 얘도 따라 웃는다. 내가 없어도 이곳의 하루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스태프들한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며칠간 정들었던 이곳을 떠난다.

거리를 천천히 걸어서 보보네로 향한다. 어제 저녁을 먹었던 에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고, 개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바닥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다. 햇볕은 여전히 따사롭고 거리의 가게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분주하다.



갑자기 이곳 시포에게 굉장히 섭섭해진다. 나에게는 오늘이 이렇게도 아쉬운데 너는 그냥 어제와 같은 오늘일 뿐이구나. 이곳에서의 추억은 나만의 것이었던 거였니. 정을 준거는 나 혼자 뿐이었던 거였을까. 내가 이곳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음을, 내가 없는 이곳이 이전과 조금도 변화가 없는 일상이라는 현실을 깨달으니 깊은 곳에서 서러움이 솟구친다.

보보네로 걸어간다. 그래도 이곳에서 내가 가장 마음을 많이 줬던 곳이다. 들어서니 남편만 나와 있고, 마보사, 해태, 조조 모두 자리에 없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마보사는 자고 있단다. 깨워서라도 인사를 하고 싶은데 이기적인 생각이겠지. 남편한테 나 이제 가기에 작별 인사하러 왔다니까, 시크하게 "그래 잘 가" 라고 얘기해준다.

이게 결정적이다. 가방을 메고 기차를 타러 가는 길에 눈 앞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억지 부리는 거 알고, 이게 무슨 감정인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사랑을 원없이 줬는데도 그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서글프다. 여행은 짝사랑이다.

이번에는 굳이 참지 않고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내버려둔다. 나도 모르게 여기에 정말 사랑을 많이 줬나 보다. 미얀마에서의 반을 이곳에서 보내야겠다고 생각해서 이곳에 오래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결국 일주일이 되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기찻역으로 향해 가면서 여행에서의 첫 번째 눈물을 진하게 흘린다. 유치한 거 안다. 쿨하지 못해 미안하다.

많이 생각날 거다. 트래킹도 아닌, 보트 투어도 아닌, 그렇다고 해태나 조조도 아닌, 그냥 시포가 생각날 거다. 오르차가 나에게 항상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듯이 시포 또한 항상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할 거다. 하지만 다시는 안와. 이 바람둥이 같으니라고.

이대로 기차역으로 가기는 좀 그래서 잠시 길에 앉아서 감정을 추스른다. 하지만 내 감정이 어떻든 시간은 흐르고, 기차는 올 것이며, 세상은 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무자비하게 앞으로 갈 것이다. 나도 이제는 기차역을 찾아 가야 한다.


엊그제 조조가 트래킹 끝나고 오면서 알려줬던 길을 되새기며 더듬어 걸어간다. 헌데, 기찻길은 찾았는데 기차역이 안 보인다. 시간이 그렇게 여유 있지 않아서 사람들한테 물어보지만 영어 울렁증으로 모두 당황하고 도망간다. 다행히 한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왼쪽으로 가라고 알려준다.


왼쪽으로 가면서 반대쪽을 힐끔 보니 사람들이 모여있는 게 보인다. 저기가 기차역 아닌가? 아저씨가 방향을 반대로 알려줬나? 왠지 그냥 가면 안될 거 같아서 일단 사람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향해본다. 대형 배낭을 밴 서양 여행자들이 많이 보이는 것이 이쪽이 맞는 듯하다. 아까 아저씨 말 들었으면 큰일 날뻔했다.



역무서에 들어가서 물어보니 역시 여기가 기차역이 맞다. 아까 아저씨 말을 듣고 반대쪽으로 갔으면 헤맬 뻔했다. 표는 9시부터 판매한다고 한다. 아직 8시 40분 정도라 앉아있는 여행자들 사이에 꼽사리 껴서 자리를 잡는다.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했나? 언제나 그렇듯이 키보드를 펴고 글을 좀 쓸려고 하고 있는데 뭔가 나와 관련있는듯한 얘기가 들려온다. 괜히 이상한 말들을 하기 전에 알아들을 수 있는걸 미리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그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일부러 질문을 한다.

"혹시 기차에서 식사를 살 수 있는지 아시나요?"

실제로 궁금했던 거기도 하다. 어, 근데 여자애 중에 하나가 무척 낯이 익다.

"어? 낯이 익은데. 우리 어디서 보지 않았나요?"


"어 그러게요. 어디지? 다른 나라인가?"

낯은 익은데 어디서 만났는지 둘 다 기억을 못한다. 그러다가 그 여자애가 먼저 기억을 한다.

"아! 바간 게스트하우스에서 아침!"

나도 바로 떠올린다. Ostello Bello에서 두 번째 게스트하우스로 옮기고 첫 번째 날인가, 아침을 먹고 있는데 한 미국인 소녀와 조인해서 잠시 얘기를 나누었었다. 그 소녀는 그날 떠난다 하여 길게 얘기를 못했는데 여기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랑 같이 있는 다른 여자도 뭔가 낯이 익다. 얘는 또 어디서 만난 거지? 이번에도 그 여자애가 먼저 나를 기억한다. 확실히 내 인상이 강렬하긴 한가보다. 얘는 Ostello Bello에서 내 위층 침대에서 자던 여자애다. 애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좀 많긴 하지만 뭐 나보다는 어릴 거다. 이 둘이 같이 다니는 거 보니 여행지에서의 인연은 정말 알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이곳에서 일주일이나 있었고 이들은 진작에 바간을 떠났었는데 어떻게 지금 여기서 만난 거지? 물어보니 인레호수를 들려서 와서 시간이 좀 걸렸단다. 아, 나는 인레호수 스킵하기로  했어,라고 얘기하니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뭐 안 가면 안 되는 곳이야? 난 안가!

돌이켜보니 안 가기를 잘한 거 같다. 어제만 해도 갔어야 했나 살짝 고민을 했었지만 그랬으면 어제의 하루가 없었을거고 결국 시포와의 제대로 된 마무리도 못했을 거다. 그깟 호수, 서울 가면 석촌호수나 한번 들려주지 뭐.


9시가 돼서 표를 끊기 위해 줄을 선다. 아까의 그 소녀 두명은 아무것도 모르기에 내가 오늘 오전에 조사한 데로 뷰를 즐기려면 오른쪽 자리가 더 좋다고 조언를 해준다. 한국인과 연애도 해봤고 한국인 친구도 많다는 한 남자애가 듣더니 "역시 한국인은 모든 것을 알아!"라고 얘기한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런 거 조사는 잘하는 편이다. IT강국이 아니라 인터넷 강국이라 그렇겠지 뭐.

이 친구들 모두 핀요린으로 간다. 하지만 거기 머무는 사람은 나 하나다. 나머지는 내려서 인레호수로 직행하거나 만달레이로 직행한다. 나는 핀요린에 석양이 멋진 식물원이 있다고 하길래 거기에 들러볼까 한다.

어찌 보면 시포를 떠나는 순간, 미얀마에서의 내 여행은 끝난 기분이 든다. 지금부터는 덤이라는 생각이다. 그래도 다른 곳에서도 또 다른 좋은 추억들이 생기겠지...? 하지만 나는 시포, 그놈 같은 바람둥이가 아니라서 그렇게 쉽게 다른 곳과 사랑에 빠지지 못한다.


내 말을 들은 여행자들이 모두 오른쪽 자리를 끊고 함께 기차를 기다린다. 기차표는 2750키얏이니 그리 비싸지는 않다. 시포에서의 마지막 순간인데 이제는 별 감정이 안든다. 이곳과의 이별은 기차역까지 걸어오는 그 순간이었나 보다. 지금은 이미 떠났다는 생각에 기차가 오는 쪽을 멍 때리며 쳐다본다.



9시 반쯤 돼서 드디어 기차가 들어온다. 기차는 생각보다 자그마하다. 사람들이 짐을 들고 우르르 일어서길래 나도 따라서 짐을 메고 기차에 올라탈 준비를 한다.


우리나라 우등 버스 같이 왼쪽에 두 자리가 붙어있고, 오른쪽에는 한자리가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을 끊은 여행자들이 모두 오른쪽 자리에 주욱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바깥에서는 아이들과 아주머니들이 다니면서 물과 간식을 판다.


그러고 보니 물을 하나 사야 해서 밖을 보니 아이들이 이미 지나갔다. 앉아서 조금 기다리니 물을 든 아이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400키얏이란다. 미얀마에서는 관광지라고 더 비싸게 팔지 않는 것이 좋다. 돈을 지갑에서 꺼내고 있는데 기차 소리가 들린다.

"푸우푸우~"

진짜 이런 전통적인 기차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정감 가는 소리다. 빅뱅이론의 쉘든한테 내가 이 기차를 탔다고 자랑을 하고 싶어 지게 만드는 소리다. 기차가 떠날듯 해서 급히 돈을 꺼내서 소녀에게 주고 물을 받자마자 기차가 출발한다. 소녀와는 거래를 다행히 끝냈다는 안도의 미소를 멀리서 주고받는다.


기차는 선로 위를 그냥 달리는 거 아닌가? 헌데 왜 이리 흔들리는 걸까? 조금 흔들리는 게 아니라, 좌우로 기차가 전복되지는 않을까 우려될 정도로 심하게 흔들린다. 5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살짝 멀미가 올 정도이다. 뭐 아직까지는 이런 낯선 경험이 즐겁다.



다른 여행자들은 사진을 찍고 난리가 났을때 나는 키보드를 열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써야 이곳과의 이별도 완전히 끝나는 거기에 감정이 남아있을 때 써야 한다.

쓰다 보니 아까의 감정이 살아나서 또 나도 모르게 울컥한다. 이번에는 다른 이들도 있기에 참아보려 하지만 잘 안된다. 아씨, 이놈 때문에 두 번이나 눈물을 보인다. 맨 뒷자리라 괜찮을 듯 하지만 다른 애들이 볼까 봐 어색하게 눈을 가린다. 아 진짜 뭐 이리 찌질하다냐. 그래도 이제 진짜 정리 끝이다!





기차가 얼마 안 가서 왜 기차를 꼭 한번은 타라고 했는지, 그리고 왜 오른쪽이어야 하는지 바로 깨닫는다. 일단 왼쪽은 절벽으로 가려져있는 경우가 많고 오른쪽으로 시야가 열려있다. 만달레이에서 올 때는 왼쪽, 만달레이로 향할 때는 오른쪽, 이건 필수다. 거기에 기차 선로가 자연이나 사람들이 사는 주거지와 멀리 떨어져있지 않기 때문에 기차 안에서 정말 말 그대로 미얀마를 느낄 수가 있다. 괜스레 우쭐해져서 앞에 앉은 애들에게 "오른쪽!" 하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니 애들도 엄지를 척 들어 올려준다.


왜 힘들게 트래킹을 한 걸까. 트래킹에서 내가 경험한 미얀마는 불타오른 황무지라면, 기차에서 보는 미얀마는 초록색이 펼쳐진 무한한 자연이다. 게다가  트래킹 할때처럼 힘들 것도 없이 그냥 바라보면 된다. "덜컥 덜컥" 베이스 소리와 가끔씩 울리는 "뿌우뿌우"의 솔로를 배경음악 삼아 창을 향해 멍 때리며 앉아있는다. 오늘 기차를 안 타고 인레로 버스로 직항할까 고민도 잠깐 했었는데 이 경험을 놓쳤으면 큰일 날 뻔했다.


차가 하도 흔들리니 가방이 큰 애들은 고정을 하거나 가끔 손으로 잡아줘야 한다. 헌데 이 친구 중에 하나는 어깨에는 배낭을 메고 오른쪽에는 관광객들이 끌고 다니는 캐리어를 끌고 왔다. 아까 한국인과 친하다는 그 아이인데, 인도 한 달을 포함해서 두 달째 여행한다더니 이 무거운 짐을 들고도 그게 가능하구나. 어쩐지 모양새가 너무 말끔하더라.


갑자기 기차가 덜컥하며 멈추더니 스태프들이 내린다. 사람들이 나가서 무슨 일인가 보니 앞에 나무가 하나 선로를 막고 있단다. 뭐 큰 일은 아니라서 금세 채우고 다시 "뿌우뿌우" 소리를 내면서 출발한다. 워낙 선로가 나무나 집들에 붙어 있다 보니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단다. 그러니 목적지까지 그리 오래 걸리는 거겠지.


보트 탔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차를 보고서도 아이들과 현지인들이 밝게 웃으며 손을 마구 흔든다. 아예 손을 흔들려고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듣고 뛰어 오는 아이들도 있다. 그래도 여행자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외국인이 매번 그리도 신기할까?


첫 번째 메인 기차역에 도착한다. 현지 소녀 둘이 차에 올라타더니 영어 연습을 하려는지 사람들한테 돌아다니며 말을 건다. 그런데 나는 스윽 보더니 그냥 지나친다. 야, 여기 여행자들 중에서는 미국 여자애 말고는 내가 영어를 제일 잘하는 거 같은데 뭐니. 나도 너네 싫다 뭐.

기차가 선 김에 기차 내에 있는 화장실을 가본다. 아주 내추럴한 화장실이다. 그냥 선로로 구멍이 뚫려있다. 갑자기 불안해진다. 물갈이는 끝난 거겠지? 배야 배야, 5시간만 더 참아다오. 도착하면 원하는 데로 화장실에서 살아줄게. 여기는 아니야.


뭐라도 좀 사 먹을까 하다가 괜히 장에 안 좋을까 봐 오늘 기차에서는 굶기로 마음 먹는다. 앞에서는 여행자들 끼리의 교류가 활발하다. 여행자들은 이런 상황에서는 일단 서로 얘기를 나누고 교류를 시작한다. 다들 석 달 이상 한 애들인데 어디를 갔다 왔냐, 어디가 좋으냐 서로 얘기를 하며 정보를 모으로 있다.


여행이 보름이 넘어가면서 그냥 다른 이들과의 교류 자체가 싫어진 거 같다.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좋은 사람인지 한눈에 알 수도 없거니와 그런다 할지라도 같이 일행이 되지 않는 이상은 어차피 이삼일 만나고 헤어지는 거, 가벼운 만남이 좀 귀찮다. 일행은 웬만하여서는 만들 생각도 없는지라, 그냥 혼자가 편하다. 여행 초기와 달라진 점은,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을 의식하다가 이제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내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가? 아까 기차역에서는 말을 걸던 사람들도 기차 타고 조금 지나니 모두 나를 그냥 내버려둔다. 홀로 여행자의 느낌이 나나보다. 이게 나도 더 편하다. 얘기하는 중간에 베트남의 '사파'가 제일 좋았다는 얘기가 들리기에 그것만 살짝 메모해놓는다.


졸음이 와서 선글라스를 끼고 잠깐 잠이 든다. 열차가 좌우로 많이 흔들리지만 이게 의외로 자는 데는 그리 방해가 안된다. 그러다 갑자기 가슴 쪽에 뭔가 따끔한 느낌이 와서 놀래서 잠에서 깬다.

화들짝 놀래서 가슴 쪽을 탁 치니 어떤 벌레가 앉아있다가 휘리릭 날아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무슨 벌레인지는 못 봤다. 가슴 쪽에 보니 뭐에 쏘인듯한 흔적이 있고 따끔하다. 부어오르지는 않는 거 보니 벌은 아닌 듯 한데 여기가 워낙 산간동네인데다가 어떤 벌레가 물고 간 것인지 모르기에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조금 지켜보지만 부어오르거나 색이 바뀌지는 않는다. 뭔가 마비 증상이 있는 듯해서 손발을 휘둘러 보는데 이게 그냥 내가 신경 써서 그런 느낌이 나는 건지 실제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여행에서는 안전이 제일 중요한데 조금 걱정이 된다. 상처를 조금 유심히 지켜봐야겠다. 스파이더맨 보면 이렇게 슈퍼파워가 생기던데, 나도 혹시...? 근데 진짜 뭐였을까.


이런 기차여행에서는 책이 제일 좋은 친구다. '연금술사'를 보는데 매우 마음에 드는 일화가 나온다.

한 소년이 현자에게 행복에 대한 비밀을 물으러 간다. 현자는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2시간만 자기의 성을 둘러보라고 소년에게 지시한다. 대신, 숟가락에 두 방울의 기름을 주며 이를 흘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소년은 두 시간 동안 숟가락을 신경 쓰며 돌아다니다가 현자에게 다시 돌아온다. 현자가 자기 성의 멋진 장식들과 행복한 사람들을 잘 구경했냐고 하니, 소녀는 부끄러워하며 숟가락에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못 봤다고 고백한다. 현자는 한번 더 보고 오라고 시킨다.
이번에는 소년이 숟가락 보다 주변을 보면서 돌아다닌다. 멋진 성 구조물도 보고 화려한 묘기를 자랑하는 사람들도 본다. 두 시간 후에 돌아오니 현자가 역시나 잘 보고 왔냐고 물어본다. 소년은 이번에는 모두 잘 봤다고 대답한다. 현자가, 그런데 숟가락에 기름 두방을 어디 갔냐고 하니 소년이 구경하느라 어느새 없어졌다고 대답한다.
현자는 행복이란, 숟가락의 기름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성도 잘 둘러보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여행은 분명 현실에서 삭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큰 활력소가 된다. 하지만 여행에 빠져서 현실을 잃어버리면 안된다. 현실은 한 달을 비우든, 일 년을 비우든, 끈질기게 그 자리에 그대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가끔 여행자들이 여행에 중독되어서 현실을 외면하고 돌아다니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런 삶도 하나의 살아가는 방식이겠지만, 어쨌든 외면했던 현실은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맞닿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성안을 둘러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름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그나저나 이 책, 여행 다니면서 보기 딱 좋은 책 같다.

책을 읽다 보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여행지가 변하지 않기를 원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나한테서는 영향을 받기 원하는구나. 난 특별하니까 내가 주는 영향은 상관없다고 여기고 있구나. 만약 이곳이 나와 같이 자기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계속해서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는다면, 결국 자기 본연의 모습을 지킬 수 있을까?

여행자로서 나는 이들의 삶을 멀리서 관찰하기 보다는 깊숙이 들어가서 보고 느끼고 궁긍적으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싶어 한다. 항상 이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게 여행자로서 올바른 자세인가 싶은 고민이 든다. 어차피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너무 깊숙이 들어가서 영향을 주기보다는 그냥 멀리서 관찰하는 게 맞는 건가. 혼란스럽지만 아직은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

1시가 돼서 또 정차한다. 조금 가다가 이삼십 분 정차하고 또 움직이고, 이런 식이다. 그러니 같은 거리를 가도 버스에 비해서 기차가 한참 더 걸린다. 조금 배고픈데 뭐라도 먹을까. 일단 이번에도 패스하기로 한다. 이동할때는 난감한 상황을 마주치지 않으려면 물도 안 마시는 게 좋다.

아까 물린 곳은 상처도 붓기도 빠지고 마비 증상 같은 기타 증상이 없는 거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나 보다. 벌에 쏘였을 때와 같은 물리적인 통증만 조금 남아있다. 뭐였을까? 나도 초능력이 생길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쉽군.

점심을 스킵하려고 했는데 큰 대야에 볶음국수를 수두룩하게 담고 머리에 이고 다니는 이동 판매 아주머니가 나타난다. 연금술사를 보다 보니 뭔가 이걸 '징조'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무슨 중국 영화 보고 나와서 쿵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 먹지 뭐. 먹고 속 안 좋으면 정말 아무나 쉽게 체험할 수 없는 '선로에 직접적으로 흔적 남기기'를 하면 되지 뭐. 까짓 거.

국수를 사려고 하는데 기차가 출발한다. 어, 아주머니 안내리시나? 아마 다음 정거장까지 가시나보다. 근데 이 흔들거리는 기차 내에서도 균형을 딱 잡고 국수를 잘 담아주신다. 500키얏인데 5,000키얏짜리 밖에 없어서 당황하니 걱정 말라며 잔돈을 잔뜩 꺼내 거슬러주신다.



이거 기대 안했는데 은근히 맛이 괜찮다. 게다가 500키얏이다. 진짜 이곳은 바가지가 없다. 정말 훌륭히 한 끼 식사를 마무리하고 다시 기차여행으로 돌아온다. 이제 속이 괜찮기만을 기도해본다.


한 시간 정도를 더 가니 기차가 또 다시 기적 소리를 내더니 잠시 멈춘다. 그리고 드디어 멀리 세상에서 2번째로 높다는 그 유명한 다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야, 이거 무슨 롤러코스터 돌입하기 직전에 잠시 멈춘 느낌의 스릴감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도 읽던 책을 덮고 준비를 한다.


멈춰 있던 기차가 커다란 기적 소리와 함께 다시 덜컹거리며 천천히 움직인다. 역시 오른쪽 자리가 명당이다. 안전한 거겠지? 안전이 가장 중요하기에 어린이대공원에서는 심지어 놀이기구도 절대 타지 않는 나로서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물론 그와 함께 스릴감도 증폭된다.


조금 더 지나니 다리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아직은 조금 거리가 남아있다. 하지만 기차가 앞으로 가면서 조금씩 다가온다. 중간에 갑자기 동굴을 하나 지나간다. 그 동굴에서 나오고 또 다른 동굴을 한번 더 지나간다. 두번째 동굴에서 나오니 이제 진짜 다리 앞이다.


다리 앞에는 여행자인듯한 사람들이 앉아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구경하고, 우리는 그들을 구경한다. 같이 손을 흔들어준다.


기차가 드디어 다리 위로 올라간다. 다리가 생각보다도 훨씬 높다. 오금이 저려오지만 앞쪽, 뒤쪽을 보면서 사진을 찍는다. 모두가 사진을 찍는다고 난리다. 아래를 바라보니 까마득하다. 안전 때문인지 열차가 속도를 줄이고 거북이처럼 천천히 가고 있어서 즐길 시간을 충분하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본다. 전방의 확 뚫린 시야가 눈 앞에 펼쳐져있다. 미얀마의 자연을 한눈에 담아 본다. 이 아름다운 전경과 소중한 시간을 의미 없는 사진을 찍느라 놓치고 싶지 않다. 이미 사진은 충분히 찍었기에 잠시 내려놓고 물끄러미 쳐다본다.


하늘을 날아가는 기차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 들까. 앞에 전경에 집중을 하니 주변에 사진기 소리와 사람들 소리가 희미해지며, 산속에서 들리는 바람소리와 새의 지저귐만이 들려온다. 눈을 감으니 바람이 얼굴을 시원하게 흝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인간과 자연의 합작품이 선사하는 놀라운 경험이 감동으로 전해진다.




어느 순간 무서움도 잊는다. 좀 더 지속되었으면 좋겠지만 기차는 이동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다리를 전부 지나가고 다음 정거장으로 들어간다. 그쪽에서도 여행객과 현지인들이 우리를 보고 반겨준다.



아쉽지만 충분히 눈에 담은듯하다. 미얀마의 최고 관광 명소는 바간이나 인레가 아닌 이곳이 거 아닌가 싶다. 이 기차에 지금 내가 앉아있음을 감사해한다. 3000원 정도의 저렴한 가격을 지불하고 이렇게 여유를 가지면서 미얀마의 모습을 관찰하고 하늘을 날아가는 경험을 하였다. 그리고 역시 오른쪽 자리에 탄 것을 감사해한다.

어? 그런데 다리를 지나고 조금 더 가니 왼쪽에 아까 그 다리가 보인난다. 아니 이거 무슨 조화지? 왜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 보이는걸까? 5분 밖에 안 지난 거 같은데 한바퀴를 돌았을 리는 없는데. 기차는 다리를 무시하고 자기 방향을 찾아서 달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지만 이 미스터리는 깊숙한 곳에 묻어두기로 한다. 뭐지?


'Alchemist' 책에 빠져 읽다 보니 어느새 5시가 되었다. 책의 반 이상을 한자리에서 읽어버렸다. 왠지 오늘 전부 읽기 아까워서 잠시 덮어둔다.

이 책이 이 순간 나에게 전달된 이유가 있을까. 무척 유명한 책이어서 이미 읽었을법한데, 계속 미루다가, 꿈에 대한 생각과 행복에 대한 가치관이 흔들리는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펼치게 된 것이 우연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를 살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꿈은 목표라기 보다는 과정이다, 같은 내가 이번 여행에서 느끼는 많은 내용들이 그대로 이 책에 나오고 있다. 그런 내용이 더 눈에 잘 들어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뭔가 하나의 메시지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번 여행 내내 했던 생각들과 꿈에 대한 생각들을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되새겨보게 된다.

책은 내용 못지 않게 어떤 분위기에서 그리고 어디에서 읽는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곳, 덜컹거리는 미얀마의 기차만큼 이 책을 읽기 적합한 곳은 없다.



계속 그래 왔듯이 한 아이가 또 바깥에서 우리를 보더니 손을 크게 흔든다. 눈이 마주쳐서 나도 손을 마주 흔드니 내가 반응을 했다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방방 뛴다. 항상 봐왔던 광경이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5시간이 걸린다던 기차는 결국 7시간 반이 걸려서 핀요린에 도착한다. 이 칸에 외국인들 전용 칸이었는지 한 기차 역무원이 같이 있다가 목적지가 다가오니 알려준다. 참 이래저래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많은 나라다.

꽤 긴 기차 여행이었지만 전혀 피곤하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나의 즐거운 경험을 한 거 같아서 기분이 상쾌하다. 나에게는 트래킹 보다 이 기차여행이 훨씬 더 미얀마를 느끼게 해 준 경험이었다. 이대로 4시간 더 가서 만달레이로 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듯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핀요린에서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서 내린다.


아까 기차를 탈 때 같이 인사를 나눴던 아이들은 기차여행 내내 서로 외면했었다. 하지만 이제 얘네는 만달레이로 버스를 타고 가야해서 헤어지게 되니 내가 먼저 가서 작별인사를 나눈다. 미국 소녀는 4달 여행을 내일모레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간단다. 만감이 교차할 듯하다. 집에 도착하는 마지막까지 안전하게 여행을 하라고 인사를 한다.





핀요린 기차역은 느낌이 뭔가 다르다. 시포 같은 시골의 느낌이 아니다. 밖으로 나오니 택시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고, 특이하게 마차가 몇몇 보인다. 론리에서 이곳의 마차 투어가 유명하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보다.

역시 게스트하우스 예약을 안 하고 왔다. 아니, 카드를 모두 정지시킨 상태라 못하고 왔다는 게 정확하겠다. 어차피 아고다로 검색해보니 모든 방이 나에게는 그림의 떡인 30달러 이상으로 나와서 현장에서 저렴한 곳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제부터 배낭을 어깨에 메고 숙소헌팅을 나서야 한다.


처음 오는 길이지만 이제 미얀마 자체가 익숙해졌는지 그냥 대충 눈짐작으로 가도 번화가를 찾을 수 있을 거 같다. 가다가 길가에 한 명한테 질문을 한 후에 확신을 얻고 큰 길을 걸어가면서 계속 주위를 돌아보며 게스트하우스를 스캔해본다.


기차역 근처에서 게스트하우스가 하나 있길래 바로 들어가본다. 상태가 좋아 보인다. 물어보니 방이 없단다. 아 오늘 토요일이라 사람들이 많나? 방이 없는 건 알지만 그래도 혹시 있으면 얼마냐고 물어보니 11달러란다. 대충 동네의 가격이 나온다. 그리 나쁘진 않은 듯하다.


다시 길을 나선다. 15분 정도 걸어가니 메인 거리가 나온다. 여기는 시포 같은 시골 동네가 확실히 아니다. 론리에서 읽어보니 식민지 시대에 프랑스 지도층들의 여름 휴양지로 개발되었다고 하더니 중간중간에 화려한 카페도 보이고 건물들도 고급스러운 것이 꽤나 번화한 도시다. 만달레이 느낌도 난다. 게다가 마차는 생각보다 많이 보인다.


특이한 점은 인종이 굉장히 다양해 보인다는 거다. 피부 색이 꽤 검은 사람도 많고, 나랑 구분이 안될 정도의 아시아계, 그 중에서도 중국계로 보이는 사람도 보인다. 물론 일반적인 버마인도 많다. 다양한 인종이 모이는 교통의 요충지라는 첫인상을 받는다.


호텔이 또 보여서 들어가서 물어본다. 여기는 외국인한테 방을 대여하는 라이선스가 없다고 한다. 나가서 다른 곳을 물어보니 이곳도 마찬가지로 라이선스가 없다. 미얀마에서는 외국인을 받으려면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다. 그냥 무작정 걷기에는 어려워보여서 여행자를 받는 게스트하우스를 물어서 찾아가 보지만 오늘은 방이 없단다.


한 시간 가량 거리를 정처없이 헤맨 끝에 이곳에서 오늘 방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미얀마에서, 아니 이번 여행에서 처음 겪는 위기이다. 뭐 내 한몸 누울 곳이 없겠어, 하며 마음 편하게 있지만 6시가 넘어가고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급해진다. 그래도 어딘가는 이 한몸 받아줄 곳이 있겠지.


보이는 곳마다 들어간다. 하지만 방을 구하기 어렵다. 일단 게스트하우스와 호텔이 그리 많지가 않거니와, 좀 괜찮아 보인다 싶으면 무조건 방이 없다. 이곳은 현지인들도 많이 오는 느낌이다. 이제는 좋아 보이는 곳은 어차피 방이 없을 것이 확실하니 물어보지도 않고 정말 쓰러지기 직전인 곳만 찾아서 들어간다.

정말 이상한 곳이 하나 보여서 한번 들어가본다. 방이 있냐고 물어보니 드디어 있다면서 나를 리드한다. 정말 허름한 곳이지만 지금 가릴 때가 아니다. 따라가는데 여기 방이 모두 비어 있다. 다른 곳은 방이 없어서 난리인데 여기는 왜 이러지? 이거 무슨 자고 나면 콩팥 하나 없어지고 그런 거 아니야? 약간의 서늘한 느낌이 들지만 따라가 본다.


이상한 구석에서 계단을 올라가고 통로를 지나서 또 계단을 올라가더니 가장 구석에 있는 방을 준다. 구조가 매우 복잡하고 신기하다. 왠지 조금 위험한 느낌이 들지만 괜찮겠지? 그래도 미얀마 사람을 믿어보자. 가격을 물어보니 7달러다. 화장실도 딸려있는 방이 7달러면 너무 싼 거 아닌가 의심이 들지만 다른 방도가 없기에 일단 계약을 한다.



침대는 한두세 달 전에 청소하고 안 한 듯이 보이긴 하지만 하룻밤은 견딜만하다. 창문도 부실해서 벌레도 많아 보인다. 일단 짐을 놔두고 나온다. 이곳은 쉬는 숙소가 아니라 밤이슬을 피하는 곳이다. 게다가 내 홈메트만 있으면 어디든 모기프리 지역으로 바꿀 수 있으니 너무 걱정말자.

내려와서 프런트에 내일 만달레이 가는 버스를 예약할 수 있을까 물어보니 옆에 버스 회사가 있으니 직접 가서 물어보란다. 기차역에서 숙소 찾아 하도 헤매서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지만 바로 옆에 있다니 나가서 일러준 방향으로 걸어가 본다.

5분이 아니라 2분 걸어가니 바로 있다. 할아버지 5분이 안에 있다. 손님도 없는데 뭘 이리 많이 있는지. 미얀마에서는 정말 어디가나 항상 사람이 많다. 만달레이 가는 시간표를 물어보니 이건 미니버스라서 시간 이런 건 상관없고 사람이 있어야 간단다. 일단 내 호텔을 알려드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와서 확인하기로 한다. 생각해보니 버스를 못 타면 기차를 타도 되긴 한다. 기차 타고 가는 건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오늘 타고 오면서 보니 하도 연착이 심해서 도대체 언제 이곳에 도착하는지를 모른다는 게 문제가 되긴 한다.

이제 배를 채워야지. 저녁을 먹으러 주변 식당을 찾아본다. 꽤나 큰 도시라서 그런지 아까 여기까지 오면서 정말 화려하고 사람 많은 식당들을 많이 봤다. 하지만 멀리 가기도 귀찮아서 일단 그냥 주변을 둘러본다.



그냥 골목길을 돌아다니다 보니 미얀마 생맥주를 파는 곳이 눈에 띈다. 이름도 모르겠지만 안에 현지인들이 꽤 많이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다. 뭐 동네에 있는 흔한 술집인듯하다. 갑자기 맥주 한잔이 땡겨서 들어선다.

메뉴판을 달라고 영어로 말씀드리니 사장 아저씨 뭔가 당황하신다. 서랍 속을 막 뒤지시더니 그래도 영어메뉴판을 꺼내 주신다. 근데 메뉴판에 가격이 없다. 의심병이 도져서 가격을 물어보니 음식들이 대략 4000키얏 정도란다. 좀 비싼데... 술집이고 도시라 그런가. 현지인들이 많이 있는 거 보니 바가지는 아닐 듯하다. 맥주를 물어보니 역시 600키얏이다. 콜!

메뉴가 너무 복잡해서 그냥 하나 추천해달라고 하니 이번에는 진심 당황하신다. 질문하는 내 영어가 너무 길었나 보다. 잠시 앉아있으라고 하고 한참 후에 주방에서 한 분이 나오셔서 얘기를 들어준다. '그냥 조금 매콤하고 고기 들어가는 맛있는 거 아무거나 추천해주세요'라고 부탁한다. 노여사와 데이트할 때도 그렇지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사실 '아무거나'다. 노여사, 맨날 아무거나 먹자고 하면서, "그럼 피자 먹을까?" 하면 "피자는 빼고..." 이런 식이다. 하지만 난 그런 남자 아니니 걱정 마세요. 아저씨, 뭔가 삘 받으셨는지 알겠다고 하면서 메뉴 이름도 안 가르쳐주시고는 주방으로 사라지신다. 


일단 맥주 한잔을 들이켜본다. 아, 여기 맥주, 다른 곳에 비해 더 맛있다. 미얀마 생맥주라더니 지금까지 먹은 거와 다른가보다. 아 오늘은 콩팥 떼일지도 모르니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데. 아닌가? 오히려 만취하면 콩팥은 더러워서 안 떼 가려나?

키보드를 펴고 글을 쓰니 역시 언제나 그렇듯이 모두가 집중한다. 뭐 이제는 익숙하지 못해, 사람들이 집중을 안 하면 뭔가 섭섭할 정도다. 글을 좀 쓰고 있으니 음식이 도착한다.


다진 돼지고기, 밥, 국, 그리고 반찬 하나다. 고기를 조금 먹어보니 매콤한 것이 마음에 든다. 아저씨 내 취향을 정말 딱 맞췄다. 아주 맛있다. 엄지 번쩍! 국물도 시원하니 좋다. 따로 주신 반찬도 고수향이 깊이 어려있는 것이 완전 마음에 든다. 아 이곳 대충 왔지만 잘 고른 듯하다.

밥 나오기 전에 이미 맥주 첫잔을 다 비워버린지라 두 번째 잔을 주문한다. 돌아보니 이곳 사람들은 맥주에 양주를 섞어서 마시고 있다. 우리나라 소맥 같은 건가 보다. 맥주 한잔과 밥을 먹고 글을 쓰다 보니 기분 좋게 취해간다.


이때, 왠 서양 아가씨들이 들어온다. 아저씨 갑작스러운 외국인데 또 당황하신다. 그런데, 나야 그냥 아무 데나 왔다 치고 이 아가씨들은 왜 여기 허름한 곳으로 온 거지? 론리에서 추천하는 곳만 해도 엄청나게 많던데. 뭐 나처럼 모험을 즐기는 여성분들인가 보다.

역시 영어 울렁증이 있는 사장님은 급하게 안으로 사라지시더니 아까 그 영어 잘하시는 주방장님을 모시고 다시 나타난다. 주방장님, 또 한참을 여행자들과 얘기를 나누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으로 가신다. 살짝 엿들으니 여기는 중국음식점이라는 거 같다. 어쩐지 주방장님이 중국 사람 같더라. 사장님, 외국인이 두 팀이나 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뭔가 자세에서 뿌듯함이 느껴진다.


맥주 두 잔과 주어진 음식을 탈탈 털어먹고 나는 자리를 일어선다. 5500키얏, 예상했던 만큼 나왔다.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왠지 8시쯤 되면 자동으로 귀가를 하게 된다.


숙소 근처에서 먹었던지라 큰 어려움 없이 방으로로 돌아온다. 여기 숙소도 보아하니 의외로 조식도 제공하고 와이파이도 되는 것이 나쁘지 않다. 물론 와이파이는 방에서는 안 잡힐 듯 싶고, 잡힌다 해도 정말 슈퍼 느림보로 예상되며, 조식도 과연 퀄리티가 어떨지 의심되긴 하지만 그래도 7달러에 하룻밤과 한 끼를 해결하는 거면 훌륭하다. 원래 계획 했던 일정에서 여행을 더 연장하는 바람에 돈을 아낄 필요가 생겼다.


방으로 돌아오니 역시 어마어마한 후질근함이 나를 기다린다. 다른 건 괜찮은데 창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와 이불이 문제다. 여기 대도시라 밤새 차가 지나다닐 듯 한데 이 시끄러움 속에서 잘 잘 수 있을까? 이불이야 언제나 그렇듯 패딩을 꺼내 덮으면 된다. 고무적인 것은 이 동네가 약간 날씨가 선선해서 그런지 홈매트를 키지 않아도 모기가 없어 보이는 것과 대도시라 그런지 의외로 3G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오늘 이후로는 대도시에 진입하니 굳이 3G가 필요 없지 싶다.

여행지에 내가 마음을 안 주면 그네들도 나한테 마음을 안 주나 보다. 치앙마이도, 이곳 핀요린도 '나를 그저 원나잇 정도로 생각하는 거야?'라는 섭섭함을 이리 표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나 저러나 마음을 줬던 빠이와 시포가 살짝 그리워진다. 하지만 내 여행은 아직 반이 지나지 않았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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