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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Aug 14.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42

@ Muang Ngoi Neua, Laos

역시 모기는 쉽게 물리칠 수가 없다. 모기장을 미리 쳤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들어왔는지 신경이 거슬리게 밤새 괴롭혔다. 그래도 엊그제 정도는 아니었던지라 잠을 완전히 설치지는 않았다.

일어나서 베란다로 나오니 이곳도 농키아우 처럼 운무가 산 중턱에 멋지게 깔려 있다. 이 근처가 다 고지대라 그런 걸까. 강의 물이 좀 적어서 뷰가 약간 아쉽지만 역시나 멋지다.

어제 형님들한테 듣기로는 이 동네에 조식 경쟁이 있다고 한다. 선착장에서 메인 거리로 이어지는 사거리 양편으로 두 식당이 모두 조식 뷔페를 아침에 똑같이 운영한다. 25,000킵에 빵과 과일, 커피 등을 제공해주는데 한쪽은 네덜란드인이, 다른 한쪽은 현지인이 운영 중이다. 형님들이 맛은 네덜란드인 가게가 더 좋지만 현지인 식당도 좀 팔아달라고 당부하셨기에 오늘은 그쪽을 한번 가볼까 한다.

옆 방을 보니 이 커플들은 오늘 떠난 거 같다. 어디로 간 거지? 트래킹이라도 갔나 싶다. 나무가 뷰를 막고 있어서 좀 아쉬웠는데 옮겨도 되냐고 오늘 사장님한테 한번 슬쩍 물어봐야겠다.

마당에 가니 정체 모를 남자가 여기 강아지 두 마리와 놀아주고 있다. 이 게스트하우스에는 아주 촐싹 맞은 강아지 두 마리가 있다. 나도 합류해서 같이 놀아주니 얘네 물고 빨고 아주 난리도 아니다. 덕분에 바지가 다 더러워졌지만 이미 더러운데 더 더러워진다고 큰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아저씨한테 방 옮기는 얘기를 해 보지면 역시 의사소통이 안된다. 영어가 안되니 순식간에 바보가 되어버렸다. 손짓 발짓 동원해가며 겨우 의사를 전달하니 흔쾌히 아무 곳으로나 옮기라고 하신다. 여기는 방이 5개 밖에 없는데 지금은 왠지 나 빼고 다 방을 뺀 거 같다. 왼쪽으로 옮길까, 오른쪽으로 옮길까. 일단 아침을 먹고 와서 생각해봐야겠다.

7시가 되기 전에 거리 산책을 한바퀴 한다. 조식 뷔페는 7시부터이기에 남는 시간 동안 여기 저기 기웃 기웃 거리며 분위기 파악을 해보려 한다. 다른 식당들도 아침 식사를 운영하긴 하는데 아마 그 두군데 식당이 메인인 거 같다. 비수기라 그런지 수요보다 공급이 월등히 많다.

한바퀴 돌고 돌아오니 문을 열듯 해서 현지 레스토랑 쪽으로 가서 앉는다. 25,000킵짜리를 주문하고 앉아있으니 바로 과일과 커피를 가져다준다. 한쪽 통을 가리키면서 나에게 "숟가락"이라고 하길래 빵 터진다. 한국인이 여기도 생각보다 많이 오는 걸까? 헌데 통을 열어보니 숟가락이 아닌 설탕이다. "슈가"를 잘못 들었나 보다. 어쩐지 아까 아줌마 표정이 얘는 개그코드가 왜 이리 변태 같다냐 하는 눈빛이었다.

과일이 무척 맛있다. 바나나가 이리 달고 맛있다니, 몰랐던 사실이다. 파파야, 바나나, 망고 이렇게 단출한 과일들이지만 모두 맛있으니 기분이 좋다.

식당 앞에서는 닭 한 마리가 병아리들을 몰고 다니고 있다. 갑자기 병아리의 "삐약삐약" 소리가 엄청 커져서 보니 병아리 한 마리가 동떨어져 엄마와 형제자매 일행을 못 찾고 있다. 자기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죽을 힘을 다해서 소리를 울어댄다. 도랑 안에서 뭔가를 열심히 쪼아 먹던 어미가 그 소리에 목을 쭉 빼서 올려다보니 그걸 본 병아리가 불이 나게 어미 옆으로 달려간다. 이제 좀 조용하군. 엄마 잘 좀 쫓아다녀라.

바게트와 오믈렛이 나와서 먹어본다. 역시 이 깊숙한 곳까지도 라오스의 바게트는 빠질 수가 없다. 딱히 완전 맛있는 건 아니지만 먹을 만하다. 먹고 있는데 밑에서 뭔가 움직이길래 보니 개다. 빵도 먹으려나? 던져주니 좋다고 받아먹는다. 고양이와 달리 개는 잡식이라 편하군.

한놈한테 줬더니 다른 놈들이 어디선가 우루루 몰려온다. 왜 다들 이리 말랐다냐. 안 주려했는데 마른걸 보니 마음이 아파서 빵 하나를 잘라서 나눠준다.

여기 개 사이에도 어떤 질서가 존재한다. 멀리서 개 한 마리가 다가서니 내가 준 빵을 먹던 놈들이 우루루 가서 그 개를 둘러싸고 쫓아낸다. 지네 말고 다른 개들은 이곳에 침투 못하게 한다. 헌데 돌아오는걸 보니 개들의 구성이 특이하다. 누렁이 한 마리, 검둥이 한마리에, 누렁 강아지가 둘, 검둥 강아지가 한 마리이다. 얘네 가족이었나? 이놈들이 이 구역의 짱인가 보다. 한쪽에서 싸움이 나면 가서 말리고 돌아오고는 한다.

라오스를 돌아다니다 보면 가축들이 별다른 재지 없이 자기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하염없이 돌아 다니는 것이 신기하다. 소 같은 똑똑한 애들이야 저녁이 되면 돌아온다지만, 닭도 그러한다니 이건 놀랍지 아니한가. 이제 더 이상 닭대가리라는 표현을 쓰면 안되겠다.

배부르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름 만족스러운 식사였지만 반대편의 네더란드 사장님의 가게를 보니 뷔페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꽤나 훌륭해 보인다. 길가에서 좌판을 펼치고 현지인들이 먹는 식사도 괜찮아 보인다. 작은 동네이지만 은근히 식사에 옵션이 많다.

숙소로 돌아와서 방을 옮길 준비를 한다. 왼쪽, 오른쪽을 다 가본 후 오른쪽으로 이동하기로 마음 먹는다. 더블이 아닌 트윈 침대라서 침대 하나가 놀게 되지만 뭐 상관없다. 어차피 침대 커봤자 좋을게 뭐 있나.

짐을 싸가지고 바로 옆의 방으로 옮긴다. 짐을 내려놓고 베란다에 해먹에 누워보니 확실히 나무로 막혀 있지 않아서 뷰가 시원하다. 그래, 옮기기 잘했다. 라오스는 강도 그렇지만 산을 보며 얻는 마음의 평화가 강렬하다.

오전에 트래킹을 다녀올까 계획하고 있었는데 베란다 해먹에 누워있으니 게을러진다. 그냥 있을까. 나가기 귀찮아져서 그냥 누워서 뒹굴거린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서 사진 없이 올렸던 미얀마 여행기에 사진을 추가한다. 3G 무제한을 최대한 이용해먹어야 한다.

졸리면 살짝 자기도 하고 일어나면 책도 보면서 오전을 보낸다. 헌데, 나 여행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해먹에 멍하니 누워 있다 보니 왠지 초심을 잃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에 내 마음에 쏙 드는 마을에 왔음에도 시포에서와 같은 감흥이 안 생긴다. 뭐랄까... 감정이 좀 죽어있는 듯하다.

이거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 권태기. 당연히 여행에도 권태기가 있을 수 있다. 자극이 계속되면 익숙해지고 그러면 감정이 죽어버리면서 모든 게 루즈해지고 지루해진다. 보통 연애에서 많이 느끼지만 40일이 넘어가니 여행에서도 같은 느낌이 든다.

굳이 이런 감정으로 여행을 이어갈 필요가 있을까? 아직 베트남에서 인천으로 떠나는 표를 예매하지 않은 상황이니 일정을 당기려면 얼마든지 당길 수 있다.

연애에서 권태기를 극복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더 강한 자극을 주는 방법이 있고, 그냥 그런 익숙한 생활을 인정하는 방법도 있고,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방법도 있다. 마지막 방법이 제일 안 좋다. 그러한 해결이 익숙해지면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아 새로운 만남을 갈구하게 되고 오랜 연애에서 비롯되는 깊은 신뢰와 사랑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내 상황은 어떨까. 여기서 이별이라 함은 귀국일 거다. 이걸 극복하면, 또 다른 여행의 의미가 찾아올까? 하지만 이게 사람과의 관계도 아니고 굳이 극복하면서 다닐 필요가 있는 걸까. 나는 내 자의로 온 거지 누가 보내서 의무적으로 온 것은 아닌데 말이다.

잘 모르겠다. 일단 베트남까지는 넘어가야 하고 시간도 좀 남아있으니 천천히 생각 좀 해봐야겠다. 점심을 먹고는 근처에 트래킹이라도 혼자 다녀와봐야겠다. 너무 평온한 이곳의 분위기가 사람을 더 나른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좀 쉬다가 12시쯤 돼서 나온다. 트래킹을 가기 전에 점심이라도 먹어야겠다. 마당에 나오니 내 옆집 이웃 총각이 할머니와 대화를 하고 있다. 말이 대화지 각종 몸짓의 향연이다. 이 총각, 어제 트래킹 갔다 왔다고 들은 거 같아서 슬쩍 관련 정보를 물어보니 은근히 표지판이 곳곳에 있어서 찾기 쉽단다. 헌데 하늘을 가리키며 지금 가기에는 좀 위험하지 않냐고 한다. 올려다보니 먹구름이 좀 껴있다. 하지만 우기에 먹구름이 언제 안 껴있었던 적이 있더냐. 겁은 많아서.

점심은 어디서 먹을까. 일단 한바퀴 돌아봐야겠다. 숙소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슬쩍 빗방울이 한두 개 떨어지더니 10초 만에 엄청난 소나기가 떨어지기 시작한데. 오메, 이게 뭐시다냐. 놀래서 일단 뛰어서 급하게 바로 앞에 있는 식당으로 들이닥친다. 칠레 총각 예지력도 있구먼.

비가 엄청나게 온다. 우기의 동남아는 진짜 예측이 안된다. 어쩔 때는 절대 안 오더니 또 안 올 거 같을 때는 한번에 엄청나게 온다. 하지만 길게 오는 경우는 잘 없다. 그래서 오히려 우산을 쓰는 사람이 없다. 비 오면 그냥 어딘가로 들어가서 피하고 본다. 아마 이 비도 오래가지는 않을 듯하다.

비가 오니 뭔가 오랜만에 신이 난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생겨야 기분이 들뜨나 보다. 비를 조금 맞았지만 아까까지 우울했던 감정이 조금은 살아난다. 하지만 트레킹은 두어 시간 있다 가거나 내일 가야겠다. 비는 괜찮은데 흙바닥이 젖어서 움직이기가 쉽지 않을 거 같다.

점심으로는 닭국수와 망고 쉐이크를 주문한다. 현지 음식을 먹어야 가장 싸다. 주문하니 사장님이 스티키라이스도 같이 주냐고 계속 물어본다. 국수 먹는데 밥이 왜 필요하지. 말이 안 통하니 어렵다. 그냥 달라고 한다. 이 사람들은 그리 먹나 보다. 배부르게 먹으면 좋지 뭐.

대홍수라도 일으킬 거 같던 비는 정확히 10분 후에 멈춘다. 그리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쬔다. 두 시간이 있어야 땅이 마를 거라던 나를 비웃는듯하다. 한시간만 있어도 메마른 땅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거리에는 한 젊은 어머니가 아이를 옆구리에 업고 지나간다. 한쪽에서는 엄마를 봐서 반가운 아이가 뛰어와서 엄마 품에 안긴다. 닭들이 쪼르르 지나다니고 개들이 뛰어다니며 놀고 있다. 라오스의 시골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약 여행 초기에 이곳에 둥지를 텄다면 내 최고의 여행지가 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국수와 밥을 배부르게 먹고 노여사와 잠시 얘기를 나눈다. 여행의 권태기가 온 듯하다고 얘기하니 안 내키면 돌아오란다. 정말 그럴까. 일정을 좀 줄여볼까. 다낭을 포기하고 베트남 북부 도시만 돈다면 7일에서 10일이면 충분할 거 같다. 사실 그래 봤자 15일 비자 제한기간에서 큰 차이는 아니긴 하지만 이동은 확실히 줄어든다.

내가 이번 여행을 온 이유를 되새겨본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지난 5년을 정리하며, 향후 10년을 어찌 살아갈지를 정하고자 어려운 환경에서도 훌쩍 떠나왔다. 사실 지금의 한 달, 두 달이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낼 시기는 절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여행 다니면서 하루하루마다 억지로 의미를 담으려는 건 더욱더 안 좋지만, 만성적으로 그냥 하루를 보내기에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그런데 나는 그래서 찾던 정답을 찾았나? 아직 시간이 남긴 했지만 정답이 없다는 정답은 찾은 것도 같다. 정답을 찾으려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는 정답도 찾은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자신을 되새기려는 노력을 멈추는 건 어리석다. 인생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과 고민의 연속이다.

책을 좀 바꿔볼까 싶다. 지금 읽는 펄벅의 책이 문학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철학'을 하기에 적합한 책은 아니다. 내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을 때라면 이런 책도 괜찮지만 지금은 생각에 시동을 걸만한 책이 필요하다. 꼬리뻬에서 만났던 말레이시아 여자애가 여행 다니면서 읽기 좋다던 'Tuesday with Morrie'를 한번 다시 볼까 싶다. 물론 예전에 이미 본 책이지만 지금 이곳에서 보는 건 또 다르겠지. 근데 그러면 킨들을 와이파이에 연결해야 하고, 그러면 카드를 다 정지시켜서 Kindle Unlimited로 받은 론리플래닛도 모두 사라질 텐데... 뭐 상관없겠지.

점심값으로 3만킵을 내고 길을 나서 본다. 아까 비가 한바탕 왔는데도 먹구름이 아직 끼여있다. 설마 또 비가 올까? 한번 뿌렸으면 됐지 뭘 또 뿌리려고 하니. 안 오겠지. 믿어보자.

제일 가깝다는 3키로 떨어진 동굴을 향해본다. 이 길은 저번에 형님들하고 잠깐 왔던 길이기도 하다. 자그마한 길을 지나가면 평야가 열리며 소들이 무리를 지어 풀을 뜯어먹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소들이 열심히 허기를 채우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니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소들은 왜 이리 겁이 많을까? 가까이 가면 모두 한결같이 도망간다. 덩치는 커가지고 뭐 이리 순박한지. 이들의 눈빛을 보면 순수함이 보인다. 개고기 먹는다고 뭐라 하는 사람들은 소고기도 절대 먹으면 안된다. 얘네 왜 이리 귀엽지... 죄책감 느껴지게...

트래킹을 가겠다는 당찬 각오를 하고 길을 나서보지만 구름이 좀 무섭다. 평원에서 소들하고 놀고 있는데 어머어마한 크기의 먹구름이 산 뒤에서 어슬렁 어슬렁 나타난다. 무슨 UFO가 하나 나타나는 광경 같다. 제국의 역습인가. 이거 아무래도 위험해 보인다. 날을 잡아도 정말 잘못 잡았다. 바람에서 느껴지는 습기도 장난이 아니다.

오늘은 아닌 거 같다. 돌아서자. 숙소로 바로 돌아가기는 싫고 킨들 책도 받으려면 와이파이 연결이 필요해서 부두에 있는 카페로 향해본다. 먹구름이 더 짙어지며, 얼굴에 빗방울이 한 방울 떨어진다.

큰일이다. 동남아 우기에 먹구름에서 스콜까지 연결되는 속도는 선형이 아닌 기하급수적이다. 한 방울이 떨어졌다면 5분 안에 폭풍우가 올 수도 있다. 서둘러 카페를 찾아간다. 그 와중에도 전망이 좋다고 형님들이 추천했던 카페를 향한다.

들어가서 자리에 앉고 커피 한잔을 주문하니 바로 천둥이 치기 시작한다. 비가 오기 바로 직전에 한 커플이 더 뛰쳐 들어온다. 보니 내 옆방의 이웃 커플이다. 커플 중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내가 비 온다고 했지'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 너 잘났다. 그래도 나도 무리해서 동굴로 안 떠난 거 보면 이제 동남아 우기의 날씨를 조금은 읽게 되었다.

이 비는 지금까지 비와는 좀 다르다. 하긴 아까 구름의 크기가 심상치 않았다. 진짜 우주선이 내려오는 느낌이었다. 천둥이 치고 바람이 심하게 불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테이블에 비가 들이닥쳐서 어쩌나 하는데 사장님이 대나무 장막을 내려서 비로부터 막아준다. 아 저게 저런 용도였구나.

비가 좀 진정되면서 사장님이 대나무 장막을 조금 걷어올린다. 아직도 성이 안 풀린 듯 하늘은 계속해서 천둥소리로 울부짖지만 비가 좀 잦아들은 강에는 평화로움이 찾아왔다. 쌓여있던 울분을 토해놓은 후에 찾아오는 마음의 안정을 보는듯하다.

내 이웃 커플은 그새 다른 커플들과 합석을 해서 스페인어로 얘기를 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독일 사람들이 앉아 있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어떤 생각들을 가슴에 담고 있을까.

3시쯤 비가 멈춰서 이제 동굴을 가볼까 했더니만 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그냥 포기다. 헌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앉아서 비를 보는 거 자체가 기분이 편안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항상 비를 좋아했다. 전생에 비였을까. 모든 것을 정화해주는 비, 전생이 아닌 현생에 되고 싶다.

옆에 서양인들이 얘기하는걸 우연히 듣다가 끼어들어서 내 정보를 좀 알려준다. 루앙프라방으로 간다기에 비밀 폭포에 대해서도 좀 알려주고, 루앙프라방에서 올라오는 배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원래 예전에는 루앙프라방에서 농키아우로 배로 이동이 가능했다는데 지금은 댐이 생겨서 그 물길이 막혔다. 형님들한테 듣기로는 라오스는 전기 생산에서 수력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지라 지속적으로 댐을 늘리고 있단다. 여기서 위쪽에도 댐을 하나 짓고 있어서 몇 년 후면 배를 타고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하다.

강가에 추적 추적 내리는 비를 보며 생각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온다. 전화? 전화?! 뭐지? 보니 카톡으로 온 전화다. 여기까지 나한테 전화를 할 사람이 있나? 받아보니 항상 나한테 연애상담을 하는 친구 놈이다. 이놈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거겠지? 근데 카톡이 언제부터 전화가 되었나?

받아보니 생각보다 통화가 잘 된다. 여기 3G 꽤나 괜찮다. 어차피 무제한이니 한번 얘기를 들어본다. 역시 연애상담이다. 여기서까지 얘기를 들어줄 정도로 정말 긴급상황인 것이냐. 철학을 하다가 갑자기 연애상담을 하게 되었다.

20분이나 통화를 한다. 라오스 산골의 시골에서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연애상담이라니, 진귀한 경험이다. 음질도 꽤나 괜찮다. 이따 저녁에 노여사와도 통화를 오랜만에 한번 해야겠다 싶다. 무제한이 좋긴 좋다. 그나저나 내 '단절'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비가 적당히 멈춘 것 같아서 숙소로 돌아온다. 오는 길에 보니 바닥이 너무 질퍽해서 어차피 오늘 트레킹은 물 건너갔다. 트래킹 코스에 있는 다른 마을에도 식당이 있다고 하니 내일은 아침을 일찍 먹고 바로 출발해서 한 마을에서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돌아오는 코스를 계획해본다. 가는 길, 혹은 오는 길에 이곳에 있다는 동굴도 보면 되겠다.

숙소 베란다에 앉아서 책을 본다. 'Tuesday with Morrie'는 카드가 막혀서 구매를 못하고, 오기 전에 혹시 몰라서 받아온 '왕좌의 게임'을 펼쳐본다. 딱히 볼게 없어서 펼쳤는데 이거 흡입력이 장난 아니다. 이미 드라마를 열성적으로 다 봤고 꽤나 팬이라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상태라는 걸 감안하면 대단한 필력이다. 더불어 드라마가 정말 대단히 잘 만들었다는 것을 책을 보면서 다시 한번 느낀다. 책에 묘사되는 인물과 배경이 그대로 드라마와 일치된다. 주인공들의 나이만 뺀다면 말이다. 'Tuesday with Morrie'와 이 책을 번갈아가며 보면 좋겠다.

여행에서 책이 중요한 것이 책을 바꾸고 베란다 해먹에 누워서 보고 있으니 낮에 그 권태기가 사라진다. 책이 재미없어서 권태기가 온 거였나 보다. 책으로 인하여 생각을 하게 하거나, 아니면 순수하게 재미가 있는 책이 여행에는 필요하다. 왕좌의 게임이 뭐 엄청나게 자기 성찰을 하게 하는 그런 책은 아니지만 운무를 바라보며 책에 빠져 있으니 뭔가  힐링되는 기분이다. 그래, 어떻게 두 달 동안 내리 철학만 하며 여행을 다닐 수 있을쏘냐. 즐기기도 하고, 액티비티도 하고, 또 아무런 생각 없이 멍 때리는 것도 다 여행의 일부다.

여기는 일몰은 안보이지만 그 보다 더 멋진 운무가 저녁이 되면 석양과 함께 멋지게 나타난다. 조금씩 생기던 구름이 6시가 지나면서 앞에 산 전부를 가로지른다. 이거 진짜 장관이다.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봐야만 아는 경치 중 하나이다. 해먹에 누워 책을 보면서 가끔 고개를 들어 운무를 보며 감탄사를 짓는다. 좋은 곳 좀 봤다고 뭔 욕심이 이리 많이 생겼다냐. 이보다 좋은 여행지가 어디 있으며 이보다 좋은 휴식이 또 어디 있을까.

정신없이 책을 보다 보니 어느새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이곳에서의 일상은 참 단순하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고, 심심해지면 산책을 간다. 가방을 가지러 방으로 들어오니 방비엥에서 같이 카야킹을 한 태국 여인 팸이 페이스북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나도 잊지 않고 한국 가면 모두에게 보내줘야겠다. 근데 페이스북 메신저로 받은 사진은 한 달까지 보관되려나? 비루한 핸드폰 덕분에 한국 가서 받아야 하는데 좀 불안해진다.

식사를 하러 어디로 갈까 하다가 그냥 낮에 비를 피하며 점심을 먹었던 숙소 앞에 식당으로 간다. 길을 향해 있는 좌석들이 아까 마음에 들었었다. 이 식당에서는 비어라오 큰 병 하나가 12,000킵이니 15,000킵을 받던 어제 저녁 식당 보다 저렴하기도 하다.

편안한 쿠션이 있는 길 바로 옆 자리에 앉는다. 뭐 먹을까 고민하다가 치킨 마살라와 난, 그리고 맥주를 시킨다. 이거 6만킵은 나오겠다. 라오스 와서 식비가 상당히 나가는 듯하다.

이 동네에 와서는 왠지 모르게 현지인 식당을 안 가게 된다. 여기는 현지인과 여행자의 경계가 너무 뚜렷하게 잡혀있다. 라오스말을 할 줄 아는 형님들이 있을 때는 그렇지 않더니 나 혼자 있으니 그 경계가 너무 강력해 보인다. 식당들도 뚜렷하게 구분되고 사람들도 며칠만 머물다 떠날 여행자들에게 그다지 다가서지 않는다. 주민들의 삶과 여행자의 삶, 한 장소에 묘하게 두 가지 삶이 공존한다. 여행 초기였다면 주민들의 삶에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려고 시도를 했을 텐데, 이제는 여행자는 또 여행자의 길을 가는 게 맞다는 생각도 든다. 시포 이후로 억지로 들어가서 변화를 주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도 이기적이며 배려가 없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난 그냥 내 여행을 하고 조용히 떠나자.

쿠션에 누워서 책을 보다 보니 음식이 나온다. '왕좌의 게임' 진짜 한번 피면 집중하게 된다. 다 아는 내용인데 다시 한번 감탄한다.

난을 뜯어서 오른손으로 카레를 찍어 먹는다. 모든 음식에는 먹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이 괜히 나온 게 아닌지라 그대로 먹어야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난은 손으로 뜯어서 찍어 먹어야 맛있고, 라오스의 스티키라이스는 손으로 조금씩 뜯어 먹어야 제못이다.

음식에 먹는 방법이 있듯이, 여행지에도 나름의 즐기는 방법이 있다. 게임을 공략하듯이 여행지를 이해하고 자기 방식으로 즐길 방법이 알아야 더 뜻깊게 즐길 수가 있다. 므앙응오이는 뭔가를 하려고 오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아무것도 안 하는 곳이다. 생각도 안 하고 행동도 안 하고 그냥 세월을 보내는 곳이다. 그래야 이곳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오늘 하루를 아무것도 안 하고 즐겨보니 알 거 같다. 이곳은 '여백'이다. 여백은 다른 공간에 의미를 부여해준다.

식사를 하고 잠시 쿠션에 누워서 책을 보다 방으로 귀가한다. 씻은 후에 모기장 안에 들어와서 노여사와 카톡으로 오랜만에 전화를 한다. 안부를 물으면서 부탁도 하나 한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노여사가 예약해줘야 베트남으로 넘어갈 수가 있다. 여기 있으면서 이래저래 많은 사람들한테 부탁을 꽤나 하게 되는 거 같다. 한국에 돌아가면 삼겹살에 소주 한번 쏴야겠다.

오늘은 이 동네를 파악하는 하루였다. 여행 좀 했다고 파악 없이 그냥 정착하려 하니 적응 못하고 헤맸던 게 당연하다. 내일은 오늘 못 가본 동굴도 가보고 혼자 트레킹도 해봐야겠다. 여행지의 매력은 원래 천천히 드러나는 법임을 잠시 잊고 있었다. 이제는 므앙응오이누아의 매력을 몸으로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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