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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Sep 07.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53

From Hanoi to Sleeping Bus to Phang Nha

눈을 뜨니 7시다. 너무 이르다. 어제 피곤을 풀고자 오늘은 최대한 늦잠을 자려 했는데 이러면 안된다.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본다. 하지만 무용지물이다. 나는 한번 깨면 웬만하면 다시 잠을 못 잔다. 예민한 영혼이다.

이리 된 거 그냥 일어난다. 하지만 방을 나설 생각은 없다. 오늘은 저녁에 버스에 탈 때까지 기나긴 하루가 예정되어 있다. 어제 그 더위를 경험했으니 에어컨이 빵빵한 이 훌륭한 방에서 최대한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야간 버스 이동을 위한 체력 비축도 필요하다.

앉아서 어제 밀린 글을 쓴다. 사람들과 같이 다니면 사진을 찍기도, 글을 쓰기도 쉽지 않다. 그리고 사실 어제는 너무 더워서 아무 의욕이 안 났었다. 베트남의 더위에는 다른 나라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독이 들어있다.

밀린 글을 쓰고 나니 어느새 11시 반이다. 12시에 체크아웃을 해야 해서 서둘러 짐을 싼다. 내려가서 빨래를 찾아온다. 빨래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그래 빨래는 이렇게 돌려줘야지. 속옷을 맨 위에 올려줬던 그곳이 생각난다. 근데 그곳이 어디였지?

오늘 영국으로 떠나는 그 한국 분하고 12시 반에 호수 쪽에서 만나 점심을 먹기로 했다. 어차피 땀을 흘릴 거기에 어제 입었던 데이브가 선물로 준 티셔츠를 다시 입는다. 이 옷을 입으니 문득 다시 데이브 생각이 난다. 사파에는 잘 도착했을까. 짐을 싸들고 체크아웃을 한 후 가방을 일단 호텔에 맡겨놓은채 호수 쪽으로 향한다. 이따 6시까지 꼭 돌아오라고 스태프가 일러준다.

딱히 어디서 보기로 약속은 안 했던지라 그냥 호수 쪽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돌아다니다 보면 만나거나 연락이 오겠지 뭐. 헌데 근처에 갔는데 예상치 못한 다른 사람과 마주친다.

어제 약속을 펑크 냈던 호헤이가 역시나 맥주 한 캔을 손에 들고 걸어오고 있다 나와 딱 마주친다. 호헤이, 어제 왜 안 온 거야. 사실  어제저녁에 메일이 오긴 했었다. 뒤늦게 어느 레스토랑에서 보는 거냐며 생뚱맞은 질문과 함께 내 사진을 몇 개 보냈었다. 오늘 답장을 해야지 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만나버렸다. 역시 여행에서는 이런 말도 안되는 우연이 생각보다 쉽게 일어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오늘 점심에 초대를 한다. 호수에서 한국 여성분을 만나기로 했다고 하니 좋다 하면서 그냥 기다리지 말고 맥주 한잔을 마시자고 한다.  나는 가난한 배낭여행객이니 여유 있는 자기가 사겠단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댓가 없는 공짜는 언제나 환영이다.

한국분에게 이곳의 위치를 전달하고 호헤이와 앉아서 맥주를 같이 마신다. 이 친구는 여행자라기보다는 진정한 관광객이다. 하지만 여행기간은 생각보다 길다. 근데 여행객과 관광객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이것도 헛된 구분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맥주 한잔 하고 있으니 한국 분도 합류한다. 호헤이를 보고는 역시나 반가워하면서 놀란다. 반가워하는 거 맞겠지? 맞는 거 같다.

어디로 갈까? 졸지에 여행 초보 두 명을 데리고 가게 되었다. 둘 다 베트남 쌀국수인 퍼보가 뭔지도 모른다. 그래, 그래도 퍼는 한번 먹어봐야 하지 않겠니. 좀 유명한 데를 데려갈까 하다가 진정한 퍼를 먹이기 위해 목욕탕 의자에 앉아먹는 진짜 현지 식당 중 적당한 곳을 찾아 헤맨다.

좀 둘러보는데 적당한 곳이 안 보인다. 역시 혼자 다닐 때는 아무 곳에서나 털썩 털썩 앉아서 잘 먹지만 누군가를 데려가려면 다 뭔가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 어떤 곳은 너무 깔끔해 보이고, 어떤 곳은 너무 더러워 보인다.

내가 결정을 못하고 있으니 호헤이가 자기가 들은 게 있다며 한 도로명을 알려주며 거기로 가보자고 한다. 지도에서 찾아보니 의외로 가깝다. 내 핸드폰으로 보면 한참 걸려 지도가 나오는데 여성분의 노트4로 보면 순식간이다. 다시 한번 내 노트4가 그리워진다. 한국 가면 다시 노트4를 사야 하려나.

호헤이가 추천하여 찾아간 도로에 있는 식당들이 의외로 딱 마음에 든다. 사람들도 많고 적당히 지저분하고 적당히 깔끔한 것이 다 내 스타일의 맛집 같아 보인다. 이 중 어디를 갈까? 호헤이가 안쪽에 앉을 자리가 있는 그나마 깔끔한 식당을 가자고 하지만 뭔가 처음에 보인 길거리에 있는 간이 식당이 계속 눈에 들어온다. 근데 그곳에는 사람이 가득해서 자리가 없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자리가 난다. 잽싸게 셋이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근데 이거 메뉴가 뭔지도 모르겠다. 닭고기를 썰고 있는 거 보니 퍼가가 아닌가 싶어서 '퍼가 4개'를 얘기하는데 사장님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 옆에 사람이 이거 닭이 아니라 오리라고 한다. 뭐 오리도 좋다. 뭔지 모르지만 그거 4개를 달라고 한다.

여기 정신없다. 여기서만 앉아서 먹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배달도 가신다. 정말 맛집인 거 같다. 기다리는데 우리 왼쪽으로도 베트남 처자 한 명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런데 이분 영어를 잘하신다. 게다가 호헤이와는 스페인어까지 하신다.

호헤이 신났다. 한국 여성분과의 작업이 뜻대로 풀리지 않다가 이 베트남 처자분이 관심을 가지니 우리는 뒷전이 됐다. 같이 사진을 계속 찍고 관심을 보이며 그분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다. 그러더니 저녁 약속까지 잡는다. 오, 나름 능력자였다. 너무 열정적으로 들이대서 아시아 여자들은 싫어할 줄 알았는데 베트남은 다른가보다.

그분한테 이 음식의 정체를 듣는다. 일단 '퍼'가 아닌 '분'이다. 면을 보고 알아챘어야 했는데 이것도 모르다니 나한테 실망이다. 고기는 닭고기도 아니고 오리고기도 아닌 다른 새란다. 영어로 이름을 모른다. 뭘까. 거위 일려나. 헌데 베트남 처자가 이 집 매우 유명한 맛집이라며 어떻게 찾아왔냐고 신기해 한다. 하루에 딱 3시간만 팔고 고기도 딱 30마리만 팔고 접는 진정한 맛집이라고 일러준다.

주문을 하면 고기를 즉석에서 썰어서 면과 함께 준다. 사장님이 맨손으로 척척 이것저것 준비를 해주신다. 위생이야 원래 나와 거리가 먼 존재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요리하는 손으로 지폐는 안 만지셨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다. 손맛과 돈맛이 들어간 분 뭐시기를 한번 먹어보자.

조금 기다리니 주문한 세 그릇이 나온다. 딱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이지만 실제 맛은 더 먹음직하다. 국물도 좋고 면도 좋고 고기도 좋다. 우연히 들어온 식당에서 제대로 된 요리를 먹으니 기분이 좋다. 역시 진정한 맛집은 이렇게 좀 지저분하고 정신도 사나워야 하는 법이다.

밥을 다 먹고 보니 호헤이는 아예 그 베트남분에게 올인하였다. 인당 4만 동이라 계산을 하고 있는데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어쩔까 하다가 그냥 그 분하고 있으라고 얘기를 해주고 자리를 떠나 준다. 정말 열정 남이다. 근데 그런 모습이 처음에는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좀 귀엽다. 뭔가 애매하게 헤어져서 제대로 인사도 못한다. 호이안에 간다는 거 같던데 혹시 만날 수도 있으려나.

원래는 식사를 하고 저번에 못 본 호찌민의 박제화된 시신이 얼마나 기괴망측한지 관광을 가보려 했는데 아까 그 베트남 처자의 말을 들으니 월요일 금요일에는 그런 시설들이 모두 문을 닫는단다. 평일 저녁에도 4시 반이면 문을 닫으면서 이틀을 더 닫는다. 의외의 곳에서 공산주의를 느낀다.

일단 커피를 한잔 마시러 간다. 한국 여성분은 이따 마사지를 받으러 가신다기에 커피를 마시고 헤어지면 될 듯하다. 어디로 갈까 하다 그래도 좀 앉아 있어야 할지도 모르기에 에어컨 나오는 좀 괜찮은 곳으로 간다. 예산이 하루에 70만 동이면 생각보다 여유가 있다. 나도 이제는 비싼 거 좀 먹어도 되는 여행가가 되었다.

커피를 한잔 시키고 앉아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눈다. 이분은 오늘 저녁 비행기를 타고 영국 런던으로 가서 3개월 연수를 시작한다. 영국에 대해 잘 아는 라셸과 데이브가 어제 열성적으로 그곳에서 볼 것에 대해 설명을 해줬었다. 나는 영국에 대해서는 모르니 그저 인생에 대한 고민에 대해 듣고 내 생각을 들려준다.

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헤어질 시간이다. 여행에서 만나는 한국인들은 사실 마음만 먹으면 한국에서 다시 보기가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그게 또 쉽지가 않은게 현실이다. 이분은 다시 볼 수 있을까? 라셸, 데이브, 이분과 같이 넷이서 함께 만나는 일이 내 생애에 다시 있을까 싶다. 여행에서의 순간은 언제나 지나쳐버리기에 항상 그 순간을 느끼고 충실해야 한다. 이 단순한 논리를 사람들과의 이별에서 많이 느낀다.

눈에 묘한 슬픔을 품고 있던 여인, 경쟁이 심한 연기라는 영역에서 고민이 많던 여인, 그 슬픔과 고독함이라는 무기를 예술로 옮길 수 있다면 충분히 그대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거예요. 언젠가 유명한 영화에서 딱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해주시기를. 그렇다면 지금의 이 만남이 나에게 엄청난 자랑거리가 될거다.

이분을 떠나보내고 잠시 카페에 혼자 앉아있는다. 사람들과 같이 있다가 다시 홀로 되는 이 순간이 가장 외로움을 느낄 때이다. 나는 사실 독립적인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매우 의존을 많이 하고, 사람의 정을 그리워하며, 외로움에 가슴이 아려하는 사람이다. 여행 중에는 그 마음속 허함을 외로움이 아닌 고독함으로, 그리고 그 고독을 연료로 내 자신의 성찰과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이런 순간, 그 허함은 그냥 단순한 사무치는 외로움이 된다. 혼자이길 바라면서 혼자임을 무서워한다. 이율배반적이다.

조금 앉아 있다 일어선다. 딱히 갈대는 없고 호안끼엠 호수를 좀 거닐어봐야겠다. 나와서 호수를 찾아간다. 시간이 생각보다 여유롭지 않기에 어디 한 곳에서 머물기보다는 호수 한바퀴를 천천히 둘러본다.

호수 한바퀴를 돌면서 베트남을 느낀다. 한쪽에서는 개를 데리고 남자 하나가 조깅을 하고 있고, 한 곳에서는 갓 결혼한듯한 신혼부부가 웨딩 사진을 찍고 있다. 물병을 세워놓고 링을 던져서 넣는 놀이를 하는 젊은 여인들도 보인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으로는, 베트남의 젊은이들이 외국인이 있는 곳에서는 모두 삼삼오오 모여서 영어를 연습하는 모습이다. 외국인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그런 젊은이들이 모여있다. 하노이에 영어 잘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를 알겠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는 않는다. 나한테 영어를 배우고 싶지는 않겠지. 그것보다 외국인이라고 생각이나 하려나?

호수 가운데 있는 예쁜 다리도 건너보고 구석구석 천천히 거닐다 보니 어느새 땀이 흥건해졌다. 베트남 더위의 독을 다시 품었다. 이제 다시 호텔로 방향을 잡는다. 식사를 하고 땀도 간단히라도 좀 씻어내고 버스에 올라타야겠다.

5시 반이지만 벌써 비아호이의 시간은 시작되었다. 베트남의 다른 곳에서도 비아호이가 있을까? 하지만 이곳, 하노이에서의 비아호이와는 같지 않을 거다. 그래도 두 번이나 그 열기에 참여했으니 나는 행복하다.

숙소로 돌아오니 5시 40분이다. 일단 빨리 밥을 먹어야겠다. 얘기를 하고 급하게 옆에 그 분차집으로 간다. 저녁에는 분자를 안 파니 퍼를 먹어야겠다.

자리에 앉아서 닭 쌀국수 '퍼가'와 차가운 차인 '차다'를 주문한다. 퍼가 3만 동, 차가 3천 동이다. 여기 분차도 꽤나 괜찮더니 퍼가도 상당히 맛있다. 삶은 닭을 앞에 두고 있다가 주문하니 살을 발라서 바로 넣어준다.

하지만 여유로운 식사를 할만큼 시간이 많지는 않다. 퍼를 급하게 한그릇 뚝딱하고, 얼음이 미쳐 녹지 않은 차를 원샷한 후 서둘러 계산하고 나온다. 호텔로 돌아오니 다행히 아직 내 차는 안 왔다. 그렇다면 좀 씻어야겠다.

스태프들 샤워실이 있다기에 양해를 구한후 그곳으로 가서 간단히 땀을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는다. 그래도 슬리핑 버스이니 좀 깔끔한 옷을 입어야겠다. 빨래를 방금 마친 뽀송뽀송하고 깨끗한 티셔츠를 입으니 몸도 마음도 깨끗해지는 기분이다.

다시 나와서 로비에서 기다리는데 버스가 안 온다. 이곳 스태프인 Linh가 확인을 좀 해주더니 조금 더 기다리라고 일러준다. 여기 호텔에서 있는 모든 스태프가 정말 친절하다. 만달레이 에이스 스타 호텔 이후로 직원들이 가장 친절한 곳이다.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 이름도 같다.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Linh이 먼저 기념사진을 찍자고 부탁한다. 나한테도 이런 영광이. 21살 처자답게 찍은 사진을 꼼꼼히 확인하고 포즈까지 잡아가며 다시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내 사진기다.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이메일 주소를 받아온다. 이따 버스를 타고 사진을 보내줘야겠다 싶다.

이 친구, 그리고 이곳에서 우리를 잘 챙겨줬던 록도 모두 학생이다. 학생이면서 영어학습을 위해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단다. 하노이 학생들의 영어에 대한 열정이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모두 굉장히 적극적이다. 언어를 배우는데 있어 적극성 만큼 중요한 게 없다. 그래서 이곳에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은가보다.

조금 기다리니 버스까지 나를 데려다 줄 오토바이가 온다. 스태프들과 인사를 하고 오토바이에 오른다. 이제 하노이도 떠나는구나.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던 하노이다. 이곳은 내 여행에서 잊지 못할 곳으로 기억될 거다.

슬리핑 버스는 저번에 타고 온 버스보다 훨씬 고급이다. 들어가서 자리에 누워보니 다리도 쭉 펴지고, 화장실도 안에 있다. 심지어 와이파이도 있다. 물을 한병 사들고 와서 자리를 잡고 키보드를 핀다. 오늘 처음 글을 쓰는 거다. 이제 혼자가 되었으니 다시 글과 함께 여행을 시작해보자.

버스가 출발한다. 버스에서는 왠 현지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놨다. 조금 지나니 전체 버스의 불은 소등한다. 그러면서 텔레비젼은 여전히 씨끄럽게 틀어져있다. 자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분위기와 상관 없이 나는 이번 여행지와 이별을 한다. 안녕 하노이, 너한테는 내가 언젠가 꼭 다시 돌아오마. 그때도 이번에 나에게 줬던 그런 선물들을 주기를 바래.

새벽 4시에 도착한다니 이제 슬슬 잘 준비를 해야겠다. 다음 여행지인 Phang Nha에 대해서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뭐 언제는 알고 갔나. 가면 또 다른 추억과 모험이 기다리고 있겠지. 여행이란 그런 거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에서 버스에서 잠드는 첫번째 경험이다. 잘 잘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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