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엄마를 찾고 싶어요."
구렁이 담 넘듯~ 스리슬쩍~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말이었지만,
이 말을 꺼내기까지 쉽진 않았다.
두 시간에 걸친 브리지 촬영이 끝난 뒤, 정리정돈을 위해 패널인 경위님에게 다가가는 순간까지도
'말해도 될까?' '안된다고 하면?' '팀장님에게 혼나는 건 아니겠지?' '날 이상하다 생각하면 어쩌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망설이고 있었으니까.
당시 난 실종자를 찾는 가족들의 제보를 받아
실종자 찾기 전문가(프로파일러, 경찰관, 실종자 찾기 시민 단체 협회장 등)로구성된 패널들과 함께 사라진 실종자를 찾아 나서는 르포 프로그램을 하고 있을 때였다.
브리지 촬영은 첫 방송을 앞두고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의 현장 촬영이 거의 마무리되어 갈 즈음 전문가들의 조력을 받기 위함이었다.
내가 말을 꺼낸 이는 '이건수 경위(당시)'님이다(현 백석대 경찰행정학부 교수).
이건수 경위님은 이미 실종가족 찾기 기네스북에 등재된 실종 사건 해결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분이셨다.
프로그램에 투입되고,
패널 명단에서 그분의 이름을 확인하고 가슴이 뛰었다.
방향타를 잃어버린 망망대해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것처럼.
'어쩌면 이번엔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사실 몇 년 전, 오빠와 나는 엄마를 찾으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라고 이름 석자만 가지고는 찾을 방도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빠도 나도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랐다. 할 수 있는 거라곤,
해마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해 엄마의 이름에 [사망]이라는 단어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계시겠지... 라며 안도할 뿐이었다.
"그럼요, 당연히 찾아 드려야죠, 그런데 한 가지 알고 계셔야 할 게 있어요."
"뭔데요?"
"어머님께서 만남을 거부하시면... 이 만남을 도와 드릴 수 없어요."
아... 그렇겠구나.
어쩌면 엄마에게는 우리가 '가족'이었을 때 기억이 고통이었을 테고, 또 어쩌면, 죽어서까지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쁜 기억일 것이라는 것을.
경위님에게 엄마의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걱정과 염려의 시간인 일주일이 지났다.
"작가님~ 어머님 찾았어요. 서울에 계시더라고요.
어머님이 따님과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하세요, 통화해 보세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심장은 이런 순간에도 쿵! 하고 내려앉을 수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엄마와 통화를 하기 위해
번호를 누르는데 자꾸만 손가락이 액정 화면에서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통화 연결 버튼을 누르기 전, 길게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었다. 내뱉을 수 있을 때까지.
날숨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 연결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 두 번이 채 끝나기 전에.
"소연이냐? 아이고~ 아이고~ "
"네... 엄마..."
"엄마도 너희들을 찾고 싶었다,
근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방법을 몰랐어.
네가 먼저 엄마를 찾았구나. 고맙다. 이렇게 먼저 찾아 줘서 고맙다."
수화기 저편 엄마는 마치 새끼를 잃은 어미 짐승처럼 꺼이꺼이 울부짖었다.
그렇게 엄마를 찾았다.
엄마와 헤어진 지 32년, 그리고 내 나이는 34살이었다.
엄마와 통화를 끝내고, 이번엔 오빠에게 전화해 엄마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고 알렸다.
"근데, 너 엄마 얼굴 알아?"
"... 몰라..."
그랬다. 나는 한 번도 엄마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사진으로도.
그건 나보다 한 살 많은 오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엄마 얼굴 모르는데 어떻게 알아보지?'라는 걱정이 밀려왔다.
나는, 아니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