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무지 한 조각에 담은 남편의 마음
이번 단무지는 좀 싱거울지도 몰라요
"저 조기 폐경인 것 같아요."
젓가락질을 하는 손이 이유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책을 읽는데 심장은 백 미터 달리기를 한 듯 요동을 쳤고,
버스 계단을 오를 때면 마치 뒤에서 누가 내 몸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올라서는 게 힘이 들었다.
운동화를 신고 평평한 길을 걷는데 돌부리에 걸린 것처럼 넘어져 얼굴이 까지고,
누군가 작정하고 내 눈알을 뽑 듯 눈꺼풀이 붓고 통증까지 느껴졌었다.
한 겨울에도 땀을 흥건하게 흘렸고 매달 해야 하는 생리를 건너뛰자 병원을 찾았다.
'갑상샘 기능 항진증'
조기 폐경을 걱정했던 내가 진단받은 질환은 '갑상샘 기능항진증'이었다.
혈액검사 결과지에서 수치를 확인한 의사 선생님은 A4용지에 세로줄을 두 개 긋고
그 가운데에 나비모양을 그리더니(늘 친절하신 우리 동네 내과 원장님 ^ ^)
"이건 갑상샘이라는 기관이에요. 우리 몸의 대사를 관장하죠. 음~ 쉽게 표현하면
집 안에 있는 보일러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때까지 난 우리 몸에 나비 모양의~ 그것도 중요한~ 기관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호르몬이 참고치보다 21배가 높은 상태로 항진된 있던 상태였다.
(문진 때 내 맥을 짚던 의사 선생님의 '헉'하는 외마디 비명이 지금도 생각난다)
하루에 메티마졸 14알과 심박수를 안정시키는 약도 함께 처방받았다.
그렇게 8년 동안 3번의 휴지기와 재발을 반복하는 지난한 과정이 이어졌다.
"차라리 새끼손가락 하나가 부러진 게 더 낫다 "
놀랍게도 갑상샘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그 심정을 나는 안다.
갑상샘 질환이 쉽게 피곤하고 체력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금방 떨어진다.
그런데도 겉으론 멀쩡해(?) 보이니까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눈에 보이게 손가락이라도 하나 부러져 깁스를 하고 다녀야 한다며...
갑상샘 질환은 재발도 잘 되고 관리도 어려워 정말 심술 맞은 준불치병처럼 느껴진다.
최악대신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관리가 어려운 갑상샘 항진증질환을 비교적 관리가 편한 갑상샘 기능저하증으로 만들기 위한
방사성동위원소 치료를 결정했다.
병원을 8년 넘게 다니면서 1층에 있는 '핵의학과'가 뭐 하는 곳일지 궁금했는데 ^ ^
방사성동위원소로 병을 진단하거나 치료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결정된 다음 치료인 방사성동위원소를 앞두고 2주간의 무요오드식이를 해야 했다.
원내에서 영양교육을 해주고 있으니 꼭 교육받고 귀가하라고 했다.
영양사님이 준 팸플릿에는 허용 음식과 제한 음식들의 종류와 그림으로 빼곡했다.
그리고 이어진 추가 설명까지 듣고 난 뒤 든 생각은 난감 그 자체였다.
바다에서 나는 것(?)은 모두 제한! (다행이다 해산물 좋아하지 않으니까)
껍질째 익힌 감자 또는 고구마 심지어 버섯(느타리, 표고)도 제한! (뭐라고 용?)
유제품과 두부(소포제) 제한! (잠깐만요! 이렇게까지 한다고 용?)
무엇보다 난감했던 건 천일염이 함유된 식품과 음식 모두 제한이었다.
소금, 간장, 고추장, 라면, 빵, 과자 등등등...
천일염에 요오드가 가장 많이 함유되어 있고
바로 그 천일염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찾기가 힘들었다.
"생각보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이 없죠?"
"그것보다 놀랐어요, 우리가 먹는 것 중 거의 대부분에 요오드가 들어 있어서"
"원내에 무요오드 소금 판매하니까 그거 구매해서 요리할 때 그걸 사용하세요"
무요오드 소금을 사서 집에 돌아와 영양교육 때 받은 레시피로 깍두기를 담그고,
고난의 무요오드식이에 들어갔다.
이 재료는 안 되고, 저 재료는 안 좋아하고
그런 걸 따져가며 끼니를 이어간 2주가 2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쁘기만 한건 아녔다. 그렇게 힘들기만 했던 다이어트가 저절로 됐으니.
그렇게 고독하게(?) 지난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단무지가 먹고 싶었다.
평소 김밥 만들 때 단무지를 넣지도 않으면서
갑자기 왜 단무지가 먹고 싶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단무지 딱 하나만 먹고 싶다, 아작아작 씹어서 ㅠ ㅠ"
아픈 것도 서러운데... 눈물은 왜 나는 건지.
누가 보면 말기 암환자인 줄 알겠다~ 신파가 따로 없었다. ^ ^
(생애 처음으로) 홀~~ 쭉 해진 볼을 하고 단무지가 먹고 싶다던 아내의 말에
남편은 퇴근길 마트에서 단무지를 한 팩 사들고 왔다.
그러더니 한여름 오이냉국이나 담아내던
유리 믹싱 볼에 물을 채우고 단무지를 넣었다.
레몬 같기도 하고 파인애플 같기도 한 단무지를 보고 이유를 물었다.
"소금기 빠지라고, 이렇게 하면 한 조각 정도는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내 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단무지는 바로 그때 먹은 단무지 한 조각이다.
물에 너무 오래 담가 맛(자체가) 사라졌지만, 남편의 마음으로 간이 딱 맞는 단무지.
그렇게 살~짝 제한 식이를 어겼지만, 무사히 동위원소 치료를 받았고 치료 목표대로 갑상샘 조직은 현저하게 줄어 들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부족한 갑상샘 호르몬을 보충할 약을 복용 중이지만,
이전보다 훨씬 편한 상태가 되었다.
지금은 단무지를 보면 그날의 남편의 옆모습과 마음이 겹친다.
아마도 그 기억은 우리가 함께 하는 세월과 함께 늙어 갈 것이다. 세월과 함께 바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