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첫 돌이 되기 전에 엄마는 우릴 떠났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엄마'라는 말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다.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이혼율도 높고 다양한 가족 형태가 존재하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아니었다. 놀랍도록 부모가 이혼한 가정은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우리뿐이었다(사별 가정은 있었다).
어딜 가나 내 앞에서 뒤에서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쟤야 엄마 없는 애"
사람들이 뱉은 그 말들은 벽돌처럼 단단했고, 차곡차곡 쌓여 나는 늘 괴롭게 했다.
어릴 적 얘기를 해 준 어른이 없었기에 내가 어렸을 때 어떤 성격이었는지 모른다. 다만 스스로떠올릴 수 있는 기억들을 기점으로, 별생각없이 활발한 편이었던 내가 점점 수동적이고 내성적으로 변한 것은 아마 그 영향도 한몫했을 것이다.
엄마는 전날부터 준비했다던 반찬을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았다. 사무치게 그리웠던 엄마 밥.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온 터라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젓가락을 들었다. 식사하는 동안 엄마의 눈길은 내 젓가락질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자꾸만 내 앞으로 앞으로 반찬 접시를 밀어주었다. 당신은 드시지도 않으면서.
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엄마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그날 이전 살았던 지옥 같은 시간들, 그날 이후 살아왔던 시간들. 마치 200부작 장편 드라마 요약본을 듣는 것 같았다. 목울대가 죄어오고 눈물이 자꾸만 차올라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식사시간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 보나 마나 힘들었겠지...... 엄마 많이 밉더냐?"
'아뇨, 사진 한 장 남지 않아 엄마 얼굴도 모르면서 늘 엄마를 기다렸었어. 혼자 남은 집에서, 길 잃은 거리에서, 학교 화장실에서(그날 첫 생리를 시작했거든)... 정말 이상하죠? 아빠나 오빠가 아닌 엄마를 기다렸어요.'
사람들은 어른들에게 예의 바르고 학업에도 충실하고 집 안일도 일찍 할 수 있는 우리들을 보고 일찍 철이 들었다고 칭찬을 했다. 하지만 그건 결손가정이라는 약점을 가진 우리의 피나는 노력이었고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누구의 입에도 오르내리지 않기 위해. 그때의 나는 오빠는 아버진, 숨을 곳 하나 없는 사방이 탁 트인 벌판에 놓인 어린양 한 마리 같았다. 그 벌판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숨어 나는 늘, 항상, 엄마를 기다렸다.
그랬기에 엄마를 만나서 나는 좋았다. 미움은 없었다.
"어째 엄마라도 안 부른다냐. 아직은 어색하냐? 앞으로 시간 많다, 천천히 하고 싶을 때 해라."
그럼에도 나는 '엄마'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끝내. 다시 엄마를 놓칠 때까지.
엄마는 아빠와 이혼한 그다음 해겨울에 재혼했다. 그다음 해엔아이(남동생)를 낳았다. 삼 년 전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 집에서 아들과 단 둘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다음 달에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나의 엄마는 이제 다른 사람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라 부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입 밖으로 '엄마'라고 내뱉는 순간 그 아이에게서 엄마를 빼앗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런 복잡하고 알 수없는 감정이... 나는난감했다. 낯설고 막막했다.
곧 아들이 집에 돌아올 시간이라는 말에 나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배웅하는 엄마에게 '나오지 마세요. 또 전화드릴게요.'라는 말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엄마의 얼굴이 사라지자 나는 휴대폰에 엄마의 번호를 지역명과 아파트 호수를 조합해 저장했다. <00동 60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