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길목에 다다른 인류에게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전부 26편을 봤다. 프레스 티켓으로 23편, 일반 예매로 1편, 온라인으로 2편. 이번에는 좀 적당히 보려고 결심했는데, 그 덕분에 컨디션 관리가 잘 됐는지 오히려 예년보다 더 봤다. 물론 매번 그렇게 무수한 영화를 보면서도, 내가 놓친 것 중 괜찮은 영화가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이 안 오곤 한다.
그중에서 <A.I 소녀>는 관객 반응이 퍽 좋아서 매진이었는데, 막판에 좌석이 나와서 겨우 본 영화다. 안 봤으면 두고두고 아쉬울 뻔했다. 하긴, 안 봤으면 좋은 줄도 몰랐겠지만.
이 영화는 초저예산 SF다. 장소 배경은 실내 공간 세 곳이고, 등장인물은 엑스트라 둘을 제외하면 네 명뿐이다. <에이리언> 시리즈의 비숍으로 나온 랜스 헨릭슨이 그나마 제일 유명한 배우다. 이런 조건이니 당연하게도 사건보다는 말이 많다. 한정된 공간에서 대화 위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연극 무대로 옮겨도 괜찮을 듯. 그중에도 인공지능 역을 맡은 테이텀 매튜스라는 2009년생 배우의 연기가 정말 큰 역할을 했다.
사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지, 또는 감정을 가질 수 있는지를 두고 지지고 볶는 거,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싶다. 아니면 인공지능한테 일자리 뺏길 걱정이나 하고 있거나. 1999년이라면 모를까, 슬슬 파산을 맞은 관념 아닌가. 그런데 이 영화는 그 비생산적인 논쟁을 살며시 밟고 넘어서, 하나의 전제로 깔고 간다는 게 흥미로운 지점이다. GV에서 컴퓨터 공학과 교수라고 밝힌 관객이 학생들한테 꼭 보여주고 싶다고 했는데, 그 분의 말이 그냥 립서비스는 아닐 것 같다.
대부분의 생물은 특정 자극에 대해 하나의 종(種)의 차원에서 반응한다. 이 점에서는 인간도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생물보다는 개별적 경험으로 확립되는 신호 자극이 많을 뿐이다. 즉, 인간의 감정이란 독자적인 반응 체계를 지닌 수많은 술어 구조로 이루어진 총체에 불과하다. 그러니 인간을 모방해서 0과 1이 뉴런을 대체한다는 점에서,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과 인간의 차별성은 없다고 본다. 아무리 다르다고 울어 싸도, 비참할 정도로 없다.
인간을 개채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마음 따위의 형체 없는 추상이 아니다. 기억이다. 오로지 기억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끔찍한 맥락과 연대기 속에서 기억은 각자 소리 높여 노래한다. 나는 나라고, 나는 네가 아니라고. 그러니 인공지능에게 남은 것은 결국 표본이 될 데이터를 얼마나 축적하는가의 문제다. “완벽한 인공지능이란 50억의 인격을 프로그래밍한 것”이라는 우라사키 나오키의 만화 <플루토>의 대사는 여기서 요긴한 힌트가 된다.
오히려 인공지능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는 유한성, 결국 수명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썩어 없어질 유기물인 신체의 유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소프트웨어가 영원한들 하드웨어가 그걸 품은 채 소멸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쩌면 그런 한계가 그나마, 아직까지는, 인간을 인간으로 있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A.I 소녀>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 지점이다. 네트워크에만 존재하던 인공지능 소녀에게 신체가 주어진 것이 이 영화에서 중요한 전환점인 이유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좋았던 것은 미래가 디스토피아적 대참사도, 인류에 대한 덧없는 믿음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다 없어지고 혼자 살아남는다면, 그것도 새로운 인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이 영화의 주제가 함축되어 있는 듯한 말이다. 이 대사가 며칠 동안이나 머릿속에 찍혀 있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진화의 막다른 길목에 다다른 인류에 대한 희망적이지도 절망적이지도 않은 시선이라는 점에서.